내 땅 100평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명언이 있지만 이와 비슷하게 “내가 땅 사면 투자, 남이 땅 사면 투기”라는 말이 있다. 이제는 그 땅을 처분했으므로 법률적인 책임을 피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나는 100평의 땅을 인천 앞바다의 섬인 대부도에 투기 목적으로 산 적이 있으며 (나의 아내는 아직도 투자였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그 전말을 고백하고자 한다.
내가 국토개발연구원에 근무하던 어느 날, 친구에게서 한번 만나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그 친구는 중학교 동창생인데 고등학교는 다른 학교를 나왔다. 그 친구는 머리가 좋아 충분히 명문대에 갈 수 있는 실력이었다. 그런데 고3때 입시 직전 한 달이나 병이 나서 그만 입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실망한 그 친구는 공무원시험을 쳐서 세무공무원으로 출발하였다. 소문에 의하면 그 친구는 곳곳에 땅을 많이 가지고 있는 굉장한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사무실로 들어서는 친구를 보자 옛날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차를 마시며 반갑게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왜 찾아왔는가를 생각해보니 내가 국토개발원에 근무한다니까, 무슨 개발정보라도 얻어 볼 목적인 것 같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국토개발연구원이라고 해서 개발지역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최종결정은 건설부(지금은 건설교통부)가 내리므로 연구원은 정책 결정에 참고가 될 몇 개의 안을 마련할 뿐이다. 나는 부서도 다르고, 그에게 제공할 마땅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야기 끝에, 나는 서울살이에 지쳤고 지금은 관사에 살고 있지만 노후에라도 전원주택을 지어서 그야말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땅을 지금 사두면 좋겠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 친구가 무심결에 자랑을 했다. 자기가 며칠 전에 대부도에 땅을 13,000평을 샀다는 것이다. 역시 소문대로 땅부자구나라고 속으로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 땅은 지금은 경사도가 낮은 임야이지만 나중에는 틀림없이 주택지로 개발될 가능성이 있는 땅이라는 것이다.
“그런 곳에 땅을 한 100평만 살 수 없을까?”
“그래, 그러면 내 땅 100평을 사라.”
“1평에 얼마니?”
“내가 9,000원에 샀으니까 100평이면 90만원이다.”
“너 정말이니?”
“그래, 친한 친구에게 땅 100평 정도야 옛날 같으면 그냥도 줄 수 있는 것 아니냐?”
“땅 100평을 그렇게 네 맘대로 할 수 있어? 오늘 밤에 마누라에게 물어봐라. 괜히 큰소리 쳐놓고 부부싸움하는 거 아냐?”
“나는 괜찮아. 그런데 너는 90만원을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니?”
“아니야, 오늘 밤에 아내와 상의해 보고 내일 전화해 줄게.”
이렇게 하여 일단 구두로 가계약이 끝났다. 집에 와서 아내와 상의해 보니 아내는 매우 좋아한다. 벌써부터 아름다운 섬 대부도에 있는 그림같은 전원주택들 상상하기만 해도 즐겁다는 표정이다. 그런데 예금 통장에는 30만원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은행돈을 빌려 땅을 사면 그것은 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돈이 모자라니 나머지 60만 원은 보너스 달에 30만 원씩 2회에 나누어 주면 어떻겠느냐고. 좋을대로 하라는 너그러운 대답이다. 통장에서 돈을 찾아 다음날 오후 친구를 만나 전해주었더니 친구는 하얀 종이에 계약서를 한 장 써 준다. 내용은 대부도에 있는 누구 소유의 땅 13,000평 중 100평을 아무개에게 넘긴다는 간단한 문구가 있고 그 밑에 날짜와 두 사람의 이름을 썼다. 나는 이름 옆에 사인을 하고 땅 100평을 가진 지주가 되었다.
그날 저녁 뿌듯한 기분으로 집에 가서 계약서를 아내에게 보여주니 아내는 걱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땅을 100평이나 샀는데 계약서 한 장으로 충분한가 의심이 난다는 것이다. 우선 말로만 많이 듣던 등기부등본이란 것은 어디에 있으며, 도장을 찍지 않고 싸인만 해도 되는지, 만일 친구가 마음이 변하여 나는 그런 적 없다고 오리발 내민다면 어떻게 되는지, 대부도 어디에 있는 땅인지, 최소한 현장을 한번 가보고 땅을 샀어야 했는데, 등등 걱정이 끝이 없다. 아무것도 모르기는 나도 마찬가지. 아내의 여러 가지 질문에 나는 속수무책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기껏 하는 말은, “여보 걱정 마.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그 친구같은 땅부자가 내 땅 100평 떼먹겠어?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도 방법이 있다고. 동창회에 가서 사실을 폭로하면 그 친구는 영원히 매장이 되는거야. 걱정 마.” 그러나 아내의 근심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아이고 두야, 괜히 보지도 못한 땅 100평 사고서 흰 머리 생기겠네.
어쨌든 나는 땅 100평을 소유한 셈이 되고, 마음이 흐뭇했다. 시간이 지나자 아내의 걱정도 사그러졌다. 그 후 우리는 전원주택에 관한 책도 두어 권 사서 읽어 보았다. 땅 100평이면 꽤 넓다고 한다. 조그만 텃밭을 만들어 배추도 심고, 담 안쪽에는 키 큰 해바라기를 심자. 뒤뜰에는 감나무를 심자. 감나무는 벌레도 안타고 손보지 않아도 잘 자란다니까. 전원주택 이야기를 할 때마다 우리 부부는 행복했다. 1년 쯤 지나서, 동창회에서 친구를 만나 슬쩍 물어 보았다.
“야, 만일 내가 1년 후에 돈이 생겨 그 땅에 집을 짓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니?”
“응, 그 대부도 땅 말이지. 최근 대부도에 다리가 생겨 육지와 연결되었다더라. 지금 싯가로 한 평에 15,000원은 할 걸. 100평을 떼어내어 집을 지으려면, 그게 간단하지 않다. 우선 측량기사를 고용하여 13,000평에서 100평을 측량하여 지적도를 고쳐야 하고, 그 땅에 소유권 설정을 해야 하고, 등기 이전하고, 세금 내고, 교통비 들고, 그러면 한 200~300만 원은 들거야.”
“아니, 땅값이 올라 150만 원이 되었는데 그까짓 100평 떼어 내는데 최소 200만 원이 든다고?”
“그러니까 그냥 없는 셈치고 가만히 놓아두라고.”
그날 들은 이야기는 아내에게 전하지 않았다. 필요할 때 쓰지도 못할 땅을 왜 샀느냐고 아내가 물어오면 틀림없이 부부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또 1년쯤 지난 후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 차로 주말에 대부도 땅이 잘 계시는지 한번 보러 가자는 것이다. 수십억 재산가인 친구는 그때까지 차가 없었다. 차 살 돈이야 있겠지만 당시만 해도 말단 세무공무원이 차를 산다면 눈총을 받는다는 것이다.
토요일 오후 친구를 태우고 대부도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에 친구 이야기를 들어보니 부동산 투자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인이 땅투자하려면 주말을 희생하고 남다른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단다. 시골 땅을 싸게 사려면 동네 이장에게 술도 사주어야 하고, 동네사람들하고 미리 친해 두어야 하고. 친구가 대부도 땅을 살 때는 인천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었다. 땅이라는 것이 단번에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도에 무려 다섯 번이나 드나들었단다. 한번은 돌풍을 만나 죽을 고비도 넘겼고, 또 한번은 풍랑 때문에 대부도에서 나오지 못해 직장에는 무단결근까지 했다고 한다. 듣고 보니 공부하는 것보다 부동산 투자가 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 주장은 부동산 투자가 결코 불로소득이 아니라는 것이다. 열심히 땀 흘린 대가라는 것이다.
차가 막혀 여섯 시 쯤 대부도 건너가는 다리까지 도착했는데, 다리 지키는 군인이 나와서 하는 말이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오늘은 들어갈 수 없단다. 내 땅 100평이 있는 대부도를 건너다보니 작은 섬이 아니었다. 웬지 아름다운 섬처럼 보였다. 내 땅에 전원주택을 지으면 바다가 보일까? 친구에게 물어보니 바닷가는 아닌 모양이다. 땅을 산 지 2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내 땅을 밟아 보지도 못했으니, 내 땅이 알면 주인을 욕할 것이다. 무심한 사람이라고.
다시 1년이 지나 직장을 대학으로 옮기었다. 한 학기가 끝나고, 어느 날 우리 과의 교수들끼리 종강파티를 하는데 가까운 대부도에 가서 생선회를 먹자는 말이 나왔다. 가는 길에 자연스럽게 대부도의 내 땅 100평 이야기가 나오고, 그 날은 내 땅이 어디에 있는지 꼭 보고 오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막상 다리를 건너 대부도로 들어가 보니, 육지와 똑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섬이 너무 넓어서 도저히 내 땅 100평이 어느 구석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내 땅은 밟아 보지도 못하고, 땅 100평을 가진 지주라고 추켜 주는 바람에 저녁값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 다시 2년이 지나 오랫동안 기다리던 아파트가 당첨되었는데 당장 계약금을 낼 돈이 모자랐다. 아깝지만 대부도의 내 땅 100평을 팔기로 작정하고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보지도 못한 내 땅 100평을 너에게 다시 팔겠노라고. 친구는 현재 시세가 한 평에 25,000원이라고 하면서 250만 원을 지로로 보내 주었다. 계산해보니 5년 전에 90만원을 땅 100평에 투자하여 250만 원을 받은 셈이다. 은행 다니는 친구에게 자랑을 하였더니, 그 친구의 말인즉 5년 동안의 물가상승율과 기회비용을 (90만원을, 예를 들어 장기적금에 들었더라면 얼마나 되었을까를 계산한 비용) 고려하면 별 재미는 못 보았단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나는 놈 밑에 붙어가는 놈 있다는 말이 있다. 어쨌든 나는 수십 억대의 땅 투자꾼인 내 친구가 온갖 고생하여 산 땅 중 100평에 5년 동안 투자하여 160만 원이라는 불로소득을 남긴 것이다. 나는 가난한 우리 부부에게 그토록 뿌듯한 희망을 주던 내 땅 100평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직도 알지 못한다. 언제 한번 기회를 내어 대부도로 가서 과거의 내 땅 100평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
(1996.8.)
첫댓글 그 친구가 한 열흘 전에 저의 연구실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궁금하여 대부도의 그 땅을 얼마에 팔았느냐고 슬쩍 물어 보았습니다. IMF 직전에 평당 12만원에 팔았다고 하더군요. 계산해 보니 땅 13000평을 9000원에 사서 12만원을 받았으니, 14억원의 이익을 남겼더군요. 흐음... 돈 벌려면 그렇게 벌어야 하는데. 평생 봉급만 바라보고 살다 보니 정년을 2년 앞둔 현재 재산은 지금 살고 있는 우면동 30평 아파트가 전부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 학생들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살아왔습니다. 주말에는 땅보러 다니지 않고, 등산도 하고 여행도 하고 즐겁게 살아 왔습니다. 대학교수로서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저는 대학교수로서 만족하면서 살아왔고, 저의 아내는 한번도 교수봉급 적다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근검절약하면서 살아온 저의 아내는 봉급 전날인 24일까지 생활비 통장에는 조금이라도 돈이 남아있는 그런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1989년 가을에 신문광고를 보고 지원한 저를 선택하셔서 1990년 3월에 조교수로 임명해 주신 이종욱 총장님에게 감사하며, 당시 중간에서 저를 좋게 말씀해 주신 당시 기획실장이신 이인수 현 총장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인수 총장은 "그런데 왜 자네는 은혜를 배반하고 나에게 반기를 들었는가?"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2012년 가을에 공대 교수 몇이서 교수협의회를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막연히 알고만 있던 계약직 교수들의 비참한 실상을 자세히 듣고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런 조건으로 15시간 강의를 시킬 수가 있을까? 매년 계약하는 불안감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계약직 교수는 노예계약서에 사인하고 비정규직으로 혹사당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선배로서, 같은 교수로서, 같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내일이 아니라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계약직 교수들의 비참한 처우에 차마 눈감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수협의회에 가입하고 공동대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자신의 행동을 서스름없이 투자가 아니라 투기였다고 고백하는 '이뭐꼬'님 참 솔직하십니다.
이러한 분과는 대화를 해도 어렵지 않게 건설적인 합의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총장님도 이런 자세를 보여 주신다면 나도 존경하는 마음으로 따르겠습니다.
대부도 땅 13,000 평을 사는데, 행정적인 문제해결을 포함하여 시간투자와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니 아무나 할 수 있는 투자는 아닌것 같습니다. 총장은 골프장 부지 50만평을 매입하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지 조금이나마 상상이 갑니다. 그러니 학교발전을 위한 총장업무는 뒷전이고, 오로지 골프장 재벌 등극을 꿈꾸면서 산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