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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구약에서부터 예수님의 탄생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긴 역사를 2시간에 걸쳐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1부에서는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와 그들의 관용적인 식민지 정책으로 유배에서 돌아오는 과정.
특히 성전 건립으로 인한 이스라엘 왕조의 분열과 성전 파괴로 인한 충격과 유일신관의 탄생을 자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는 요셉, - M. 샤갈 作 : 요셉이 파라오의 꿈을 해몽하는 장면
7년간의 풍년과 7년동안의 가뭄에 관한 내용으로 요셉의 지혜로 백성을 돕고(굶주리는 고통), 파라오의 재산도 늘어나게 된다. 요셉이후의 이집트에 경제적인 안정을 갖게되는 꿈.
M. 샤갈(1887~ 1985) 러시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화가
야곱과 에프라임과 므나쎄에 관한 꿈( 므나쎄와 에프라임을 축복하다 M. 샤갈 作 ) 야곱의 엇갈린 팔에 므나쎄가 아닌 에프라임이 축복을 받게된다. 야곱과 에사우의 갈등 긴장이 역사안에서 다음세대에로 이어지는 것으로..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이시다. 라는 고백,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체험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장자나 왕을 선택해서 하느님 자신의 역사를 쓰실 수 있었을 터인데, 하필이면 집도 절도 없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형인 이스마엘이 아닌 이사악을 선택하시고, 형인 에사우가 아니라 야곱을 선택하시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막내고 볼품없는 요셉을....그리고 신약에서 이어져 가임연령의 여성에게는 임신이 되지 않고, 엘리사벳과 결혼도 하지 않은 마리아에게....
알 수 없는 하느님이시다.
알고 싶어하는 우리와 역사 안에서,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선택을 하시는 하느님, 하지만 이를 통해 더 놀라운 것을 드러내시는 하느님!"
예수님의 역사도 또한 당시에 이스라엘을 구해줄 왕(메시아)을 바랬는데, 세상을 구해 줄 구세주를 보내셔서 세상의 가치를 알수 없게 하셨다.(너무 작아도,너무 커도 보이지 않는, 너무 어두워도 너무 밝아도 보이지 않는, 너무 멀리 있어도, 너무 가까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 예측하기 어려운 하느님임을 야곱의 엇갈린 손과 신학을 공부하시는 분들의 당혹스런 체험들, 내가 깨닫게 되는 순간 '나는 그렇지 않아' 라고 하시는 하느님)
이스라엘의 역사
-주전 15-13 세기 : 유목시대(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시대)
- 주전 12-11세기 : 부족시대 ( 탈출 사건은 14세기 정도로 유추? 하지만, 역사적인 기록이 남아 있진 않는다)
- 주전 1000년 ~587년 : 왕정시대 (국가라는 시스템이,자리잡게 된다. 다윗이 왕국을 세운 시기가 약 1000년정도이고,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성전건립과 과도한 세금 등으로 갈등하다가 그가 죽은 후(BC 922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한다, 따라서 통일 왕국은 다윗과 솔로몬으로 끝나버린다.
후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16세기 정도에 나뉘게 되는데 그 주된 원인이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전의 재건축이 하나의 촉발점이 되었다.
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 조금 더 관심갖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
- 주전 926년 -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왕국분열
- 주전 722년 - 북이스라엘 멸망 (아시리아 제국시대)
- 주전 587년 - 남유다 멸망 (신 바빌로니아 제국시대)
아시리아, 북이스라엘 수도 함락(BC 722년)
바빌론, 남유다 수도 함락( BC 587년)
모세 오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마지막 탈출기, 레위기, 신명기까지는 약속의 땅으로 어떻게 가는가? 40년간의 여정을 거쳐서, 다음에 여호수아기와 판관기를 거쳐서 약속의 땅에 자리잡게 되는 모습, 그리고 왕국까지 잘 세웠다가 서로 분열하여 망하였다.
- 주전 587년~ 539년 : 유배( 바빌론 유배 시대, 50년정도는 희년의 수가 떠오른다. 7년 동안 안식년에 7년을 일곱 번 지나고 기쁨을 맞이하는 시간과 겹친다. 희년에 관한 생각은 유배이전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나 우연의 일치처럼 유배 50년의 시간과 맞아 떨어진다)
- 주전 539년 이후 : 유배에서 돌아옴 (페르시아제국 시대)
- 주전 515년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 재건
예루살렘 성전 재건(BC 520~ BC 515년); 유배에서 돌아 온 후 2번째 성전 건립, 에즈라와 느헤미야(민간 지도자 즈루빠벨, 대사제 예수아)
성전 재건후 페르시아 지배하에 있었지만 유배시대에 꿈꿨던 '신정국가(테오크라시, theocracy: 국가의 통치 권력은 신에게서 나온다는 생각에 따르는 국가 형태)로서 대사제가 다스리는 정치적 역할을 했었는데, 모든 것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신정국가이후에 하느님께서 펑? 하고 나타나신것이 아니어서, 오히려 불편하고 힘을 모으지 못하고 하느님을 섬기기에 어려운 정치적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자....
유다 마타티아스에 의한 혁명이 일어나고,
마카베오 혁명과 하스모네아 왕조
* 셀레우코스 왕조의 유다교 말살 식민정책에 대한 저항
* 승리 후 성전을 재봉헌(BC 164)하고 하스모네아 왕조(BC 142~ BC 63) 설립되지만 그들도 역시 앞선 왕들이 행한 실정을 되풀이한다. 성경이 전하는 그들의 신학적인 평가는 자신들의 끊임없는 정치적인 선택을 했지, 야훼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의 역사도 또한 몰락하게 된다
결국
'로마의 예루살렘 정복 (BC 63년)에 의해 로마제국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되고, 로마제국에 굉장히 협조적이었던 '헤로데 가문'이 팔레스타인 전체에 정치적인 주도권을 갖게되는 시기,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하게 되는 역사의 흐름이 있게된다.
- 주전 333년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과 마케도니아 제국의 지배
- 주전 301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
- 주전 164년 셀레우코스 안티오코스 4세에 대항한 마카베오 항쟁 승리, 마카베오 성전 재봉헌
- 주전 142년 고대 이스라엘의 마지막 독립 왕조인 '하스모네아 왕조' 시작
- 주전 64년 로마의 팔레스타인 정복
- 주전 63년 로마의 지배
BC 650년 경의 아시리아 제국
아시리아 제국은 '아수르'라는 지역에서 출발하여 나라의 수도를 약간 북쪽에 있는 '니네베(요나서의 유명한 도시)'로 옮긴다. 전체적인 통치 중에 아수르의 세력이 커지자, 가장 불안을 느끼게 되는 이집트는 아시리아에 대항해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이 '시로 - 에프라임 동맹'을 맺게 되었는데, 그들과 동맹을 맺어 아시리아를 견제하려고 한다.
한데 '시로 - 에프라임 동맹' 때 아래쪽에 위치한 '유다'에게도 함께 동맹할 것을 제안하고 응하지 않을시에는 유다를 먼저 공격하겠다고 말한다.
당시의 곤란한 정치적 상황에 빠진 유다의 왕인 '아하즈'에게 '이사야' 예언자가 찾아와서 지금의 이런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닌, 우리가 야훼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라고 말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돌려 야훼 하느님을 섬기게 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일이 있어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일이 없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아하즈 임금은 듣지 않고, 이사야 예언자가 아하즈임금에게 " 하느님께 어떤 징표를 청하십시오." 라고 말하며 그 표징을 하느님께서 보여줄 것이라고 알려 주지만 아하즈가 " 나는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겠소." 하고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말한 이야기와 똑같은 말을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는 정반대의 의미였다. 예수님의 시험하지 말아라의 의미는 하느님께 대한 극단적인 신뢰이지만, 아하즈 임금의 의미는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고 내 맘대로 하겠소.'라는 자신의 정치적인 판단을 믿겠다는 의미였다.
이에 이사야 예언자는 '당신이 청하던 청하지 않든,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표징을 주실 것인데..이사야(7장14절)' 이제 젊은 여인(파르테노스)이 잉태하여 아들을 하나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여인은 아하즈 임금의 부인이 임신한 상태였을 테고 그 아이인 '히즈키야'를 말했을 것이고, 히즈키야가 태어나서 채 걷기도 전에 유다를 위협하는 북이스라엘과 시리아는 모두 다 망할 것이다라는 것이 예언의 중심이었다.
실제로 그 예언은 적중하여 아시리아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BC 722년), 수도 사마리아인 완전히 파괴되고 이방민족들이 이 지역에 들어와 살게 된다.
그리고 그 공격은 계속되어 이집트까지 아시리아의 영토가 된다. 남유다도 아시리아의 세력안에 들어가게 된다.
히즈키야의 시기에 아시리아가 예루살렘도 공격하는데, 역사서 부분에 아시리아군이 예루살렘 부근을 포위하고 있는 밤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아시리아 군대를 쳐버리고, 아시리아 군대는 퇴각을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즉 막강한 아시리아 군대에 예루살렘이 멸망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야훼 하느님이 지켜주셨다는 이사야의 예언이 실현.
그리고 세월이 흘러 BC 550년경 아시리아가 니네베와 아수르 지역에 거점을 두고 있을 때, 더 남쪽 지역인 바빌론에 거점을 둔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커지며, 아시리아 제국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결국 니네베를 멸망시키고,
당시에 아시리아에 의해 정복당하고 지배당했던 이집트가 바빌로니아를 돕지 않고 아시리아를 돕는다. 어제의 적인 오늘의 동지가 되는.....
또 당시의 남유다를 지배했던 총명한 요시야 (남유다의 왕, BC 640~609년 재위)왕은 바빌로니아가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고, 아시리아를 돕기 위해 올라오는 이집트를, 바빌로니아와 동맹에 입장에 서서 이집트군을 막는다. 그러다가 므기또 전투에서 허무하게 죽게되는데...
이 부분이 구약성경에서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구약성경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신명기학파(구약의 역사서를 쓰는)의 중심 신학은 '상선 벌악'이고, 요시야 왕은 하느님이 보기에 가장 착한 왕이었는데( 백성들의 마음을 돌려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야훼 하느님을 섬기게 하고,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안된다는 가장 종교적인 정책을 폈던) 그것을 해명하기가 어려웠던 거다. 따라서 신명기 역사서에서는 요시야의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짧게 나온다.
요시야의 죽음 이후, 유다는 혼란스러워지고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하지만 왕궁에서 세력을 잡고 있던 궁정 예언자들은 앞선 이사야의 예언을 '무슨 일이 있어도 예루살렘은 멸망하지 않을 거다.'라며 반박한다. 이들을 예레미야는 거짓 예언자라 부르고, ' 이제 우리는 망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의 벌이다.'라고 말한다.
요시야로 부터 시작된 신명기 역사학파와 예레미야 예언자가 함께 만들어 내는 신학적인 전환이었다.
이제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유다는 망하지만 너희들의 생각처럼 '유다의 하느님인 야훼가, 바빌론의 하느님인 마르둑에게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 이세상에 우리 하느님 야훼 한분이외에는 다른 신은 없다, 즉 국가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로 인한 종교적 의문은 유일 신관을 형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일신관으로 전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북이스라엘의 멸망, 유배이후로 유일신관으로 보는 경향인데, 신부님은 유배를 중심으로 그와 같은 유일신관으로 고정되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심.( 점진적으로 생겨났을 거라고 하심)
유배를 통해 설명해야 할 가장 당혹스런 사건은, 예루살렘 성전(야훼의 집) 파괴였다.
남유다의 멸망(BC 587년), 바빌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고 지배계층과 지도층은 바빌론으로 유배를 떠난다.
이스라엘에서는 하느님이 계신 하느님의 성소인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과 동격이었기에 하느님의 부재의 상황으로 이해되는 것으로 신학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위기가 오게 되는 것이었다.
하느님이 없으면, 이스라엘도 없다.라는....
상황에서 유일신 사상( 우리 하느님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을 따르게 되고, 그들이 유배를 간것은 야훼가 마르둑에게 패한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벌주신 것이다! 라는 하나의 새로운 신학을,
제2이사야서나, 에제키엘, 소예언서를 통해서 하느님의 벌이 아닌 '하느님의 정화', 더렵혀 진것을 깨끗히 씻어내어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정화의 시기로서 이야기 한다.
고프리트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 1646~ 1716, 독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
* "전지(全知), 전능(全能), 전선(全善)이신 하느님이 미리 정해놓으셨다."
의 신정론도 왜? 어떤 신학적인 어려움 때문에 생겼을 것인가?
전지, 전능한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악과 불행이 생기겠는가에 대한 대답을 위해 무리한 구도를 그림을 표현한것 이었다.
다시 말해 유일신 사상이 생기면서 다신적 사상에서 해결할 수 없었던 일들이 해결되지만,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해결해왔던 문제들이 그 틀안에서 해결되지 않는, 페러다임의 전환처럼....그전의 다신적 사상에서 쉬웠던 선과악의 문제가( 착한일은 선한신이, 나쁜일이 악한신이라는 해석, 전쟁신, 농사의 신) 오늘날까지 어렵게 느껴지게 되었다.( 고통은 왜? 불행은 왜? 우리에게?)
구약에서 예전의 남성신은 돌기둥, 그 옆의 나무기둥은 아세라등으로 불리우는 여성신이었다(아세라와 비슷한 이슈타르)...
우리의 하느님은 성을 초월하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지만, 개념화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아버지라 부른다.(양성을 다 지니고 계신다)
일반적인 나이든 남자의 그림으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여성성을 채우기위해 성모님으로 표현되고 성모님을 신격화하는 혼란이 오지만, 뿌리를 들추어 보면 유일신적인 전환이 문제로 만드는 것이다.
다른 종교와의 대화중에도 '우리 하느님외에 다른신은 없다'라는 우리의 유일신 사상이 걸림돌이되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신학자들은 '신은 하나인데 신에 대한 다양한 체험과 이름이 여러가지다.'라는 제안을 한다(종교다원주의,에서 종교 혼합주의로 교회안에서는 위험한 부분)
구약에 역사에서는 쉬웠었다. 롯을 구한 아브라함에게 멜키체덱이 제사를 지내를 수 있었던 다신적 신관에서는,
오랜 신학의 역사후에야 유일신 사상의 문제에 대한 다양한 부분이 해결될 수 있을거라고 설명하심.
바빌로니아에서 50년의 유배생활 중 , 바빌론의 내분으로 멸망하자, 유배에서 돌아오고,
BC 500년경의 페르시아 제국이 생겨나고, 페르시아 제국과 바빌로니아 제국의 크기를 비교해 보면,
아시리아나 바빌론때는 제국이 영토를 점령한 후에는 그곳을 어떻게 지배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따라서 제국을 반대하는 세력을 억제하는 정책이 필요했고,
아시리아는 정복정책으로 원 주민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다른 민족을 살게 하는 민족 혼합 정책을 펼쳤다.( 20세기까지 커다란 영토를 다스려야 하는 나라에서 주로 사용한 정책, 러시아, 중국등 ..'지붕위의 바이올린'이라는 유명한 영화)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서 혼합적인 민족으로 자리잡게 되고, 예수님 시대에 와서 유다의 사람들이 북 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사람에게 반감을 갖게되는 근거가 되었다.
바빌론(신바빌로니아의 정복 정책)은 지배 계층과 지도층을 포로로 잡아가는 유배 정책을 펼쳤다.( 데려가 노예생활을 시키는)
반면에 페르시아는 이들 나라에 비해 너무나 거대해서 다스리기에 버거웠다. (19세기 즈음 영국이 중국을 지배하고 위해 아편 전쟁을 일으켰지만, 역사가들의 조심스런 추측중에 하나가 영국이 전쟁으로 중국을 제압할 힘을 있었으나, 인도도 관리하기엔 힘들었고, 중국까지 관리하기엔 너무 많은 수적 부담?? 역사학의 입장은 아니다~)
페르시아도 이와 비슷하여 영토가 너무 거대해서 키로스가 각 민족의 문화와 종교를 허용하는 관용 정책( 페르시아의 정복 정책)을 펴는 듯이,
"너희는 각자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서 너희법에 따라 다스리고 너희가 섬기던 신을 섬겨라. 단! 페르시아에는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종속이 된다." 아마도 각 지역을 감시하기 위해 감독등을 파견했을 터,
이와 같은 통치 방식은 21세기까지 유용하게 쓰였다. 예수님 시대때 예루살렘의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본티오 빌라도, 본시오빌라도), 전체적으로는 로마군대가 소수만 있었고, 대부분의 군대는 북쪽 시리아 지역에 있었고, 총독과 함께 군대들이 이동하면서 로마 제국에 반대해서는 안된다!라는 공포적 관리를 했다.
그 이후에 제국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과 병력이 필요했고, 돈과 병력을 가장 경제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 지배 지역에 두려움의 허상을 만들어내는 지배 방식을 사용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서는 그 허상과 대결하는 예수님,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따라서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말은 "두려워 하지 말라."라는 말씀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우상이 그 허상이었고, 신약성경에서는 그 허상이 율법주의, 제국주의 같은 허상이 존재하였고,
오늘날 물질주의가 주는 우리의 허상에,
예수님,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두려워 말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고 그 믿음과 함께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임마누엘!."
정말 중요한 말씀이다. 함께 있음으로 두렵지 않기에...
구약의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안에서 충실성(loyalty)와 이스라엘 안에서의 연대성(solidarity)과 하느님과 인간의 연대성 사건인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연대하신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두려움을 넘어 설 수 있다는 말씀이다.
저를 사로잡는 두려움은 제안에서 자리잡은 판단과 생각들임을....깨닫고
그 두려움이 몰려올때, 저는 또 한번 의탁드리겠습니다. 주님께....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께서 이스라엘 역사편을 아주 쉽고 재밌게 강의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