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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동의 기억-대성목탄 조봉구(남, 1936년생)씨
2020.10.08, 2020.11.24.
황해서 벽성군에서 월남한 전쟁피난민이다. 전라도 함평으로 피난하여 계란장사 등을 하다가 유구를 거쳐 1967년 원평동에 정착했다. 처음에는 담배가게를 3년쯤 하다가 1970년경부터 대성목탄을 운영 중이다.
소개를 부탁합니다?
나는 월남 피난민이요. 황해도 벽성군에서 내려왔어. 전라도 함평군으로 피난 왔다가 1967년에 여기로 왔지.
그럼 피난민이시네요?
우리는 1.4후퇴 때 월남했어요. 아버지하고 누님 한 분하고만 내려왔지. 잠깐 피했다 돌아가 생각으로 어머니하고 형님 딸 2명하고는 남겨뒀지. 우리 형수는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별 걸려서 조카하고 죽었어. 그 때는 약이나 있었나.
피난 와서 처음 사셨던 곳은 어디세요?
우리 황해도 사람들은 강화도로 많이 왔어요. 우리는 황해도 앞에 용호도라고 거기로 갔지. 잠시 몸만 피한다고 왔으니께 멀리 가기도 그렇고. 당시에 치안대가 돌아댕기매 주민후퇴 명령을 내렸어요. 우리가 벽성군이잖아요. 거기 옆이 옹진군이니께 거기로 1달만 피하면 수복된다니께 그런 줄 알았지.
용호도는 어떤 섬이예요?
거기가 왜정 때 수산대학교도 있었고 유지하고 거리가 1km밖에 안 돼요. 육지에서 M1소총으로 쏘면 집안까지 총알이 날아올 정도였다니까. 그런데 중공군이 밀려오니까 거기가 위험하잖아. 그래서 미군들이 LST선으로 황해도 주민들을 어화도로 집결시켜 남쪽으로 이송했어. 어화도는 용호도보다 좀 바깥쪽이야. 우리는 1차 운송 때 타고 나왔죠. 그 세월이 벌써 75년이오.
그럼 이산가족찾기는 안 해봤어요?
우리는 출신성분이 나쁘잖아. 저 사람들이 우리같은 사람들 가족 만나게 해주겠어. 지금은 오래 돼서 어머니 생사를 알아볼 수도 없고.....
아까 미군들이 LST선으로 이송했다고 했잖아요. 어디로 내려왔어요?
옹진 어화도에서 목포로 왔지요.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앉아서 48시간이나 걸리더라고. 우리가 탄 곳은 7층 화물칸인데 600명 정원에 4,000명이 탔어요. 내부 열기가 보통이 아냐. 화장실에 가기도 힘들어. 갔다 오면 자리도 없어지고. 그러니 어지간하면 참는데 그게 여간 힘들어. 그렇게 이틀 밤을 새우고 내려왔어요.
그럼 그동안 뭘 먹고 살았어요?
피난 내려올 때 소달구지에 한 달 먹을 쌀과 겨울이불을 가져왔어요. 처음에는 벽성군에서 옹진군 사곶이라는 곳으로 갔는데 거기서 이틀 밤을 새웠지. 거기서 용호도로 가야 하는디 땟마(전마선) 세 대로 4천 명을 실어 날랐어요. 그러니 오래 기다릴 수밖에. 그 작은 배로 이틀 동안 날랐어도 다 실어 나르지 못하더라고. 나르다가 배가 뒤집혀서 사람도 죽고.
소달구지 타고 사곶으로 갔다고 했잖아요. 소는 어떻게 했어요?
소를 태울 수는 없어서 잡았지요. 소를 잡으니께 고기가 가마니로 10가마나 되더라고. 그렇게 있는디 소를 잡았다는 소문을 듣고 청방대장(청년방위군 대장)이 소 다리를 하나만 달라고 그래. 독선 한 척 내준다며. 그래서 소다리 하나 주고 독선을 빌렸어요. 그렇게 용화도로 건너왔어요.
용화도에서는 어떻게 지냈어요. 피난민이 많았는데?
말도 말아요. 그런 난리가 없지. 4,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조그만 섬으로 한꺼번에 몰려드니까 어떻게 주체를 못해. 잘 곳도 없고 밥 먹을 데도 없고. 우리는 소 외양간을 치우고 하룻밤을 잤지. 그 다음 날은 작은 방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앉아서 졸며 밤을 새웠고. 그렇게 몇 달을 살았어요. 몇 달 있으니께 상황이 좋지 않아. 돌아갈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니께 각자 아는 사람 찾아서들 나가기 시작하더라고. 우리도 1951년 7월 18일에 LST선을 타고 목포로 내려왔지.
목포에 도착해서는 어디에 정착했어요?
그 이야기부터 해야겠네. 목포에 도착하니께 쭉 서라고 하더니 우리 몸에 DDT를 마구 뿌려. 소독하는 거지. 몇 달을 수 천 명이 뒹굴며 살았으니께 소독해야지. 우리 몸에 벼룩이 많았거든. 그러고는 목포에 항도여중이라고 있어요. 거기에 있으라는 거야. 몇 천 명이 거기서 살았지. 먹는 건 종교단체에서 한 사람에 감자 2개하고 주먹밥을 이틀 치 주더라고. 열 닷 세를 지났더니 이번에는 시골동네로 분산시켜주더라고. 구호품으로 밀가루하고 수수를 줘서 맷돌로 갈아서 죽 쒀 먹으매 살라고.
그럼 어르신 가족은 어디로 가셨어요?
우리는 1차 피난민인디 무안군 현령면 평산리라는 곳으로 가라고 합디다. 땅도 없고 그러니께 구호품 배급 나오는 거 먹고 살았지. 머슴도 살고 품팔이도 하고 할 수 있는 건 다 하는 거지. 토복기술이라도 있으면 측량사로 일할 수 있었는디 그런 것도 없으니께.
동네사람들이 괄시하지 않았어요?
동네사람들이 많이 도와줬죠. 된장이랑 반찬 같은 거 나눠 주고. 참 고맙더라고. 가을에는 고구마 캘 때 이삭이 많이 나오는데 우리보고 주워다 먹으라고 하기도 하고, 서리 내리기 전에 마지막 남은 고추 있잖아 그것도 따 가라고 하고. 덜 익은 풋고추를 술안도에서 잡젓을 사다가 절여서 겨우 내내 먹었지. 그 다음 해 부터는 김장해서 먹고.
생활은 어떻게 했어요?
우리는 행랑채 빌려서 살았어요. 그것만도 감사했지. 행랑채에 살면서 계란장사를 시작했지. 걸어다니매 계란을 팔았는데 몇 년 하니께 돈 좀 벌었어. 그래서 벌은 돈으로 자전거를 사가지고 짐자전거에다 싣고 다니매 장사했지.
계란은 어디에서 가져왔어요?
거기 학다리라는 곳이 있어. 학다리 사거리에 계란을 도매로 사는 사람이 있었어. 시골 사람들이 생산한 계란을 내가 사다가 도매상에게 넘겼지. 장사가 조금 되면서 학다리로 이사했어. 거기서 계란 도매를 했지. 학다리가 참깨도매상이 많아요. 장사가 되니께 생활이 안정되더라고.
피난민들은 호적정리가 어렵잖아요. 어떻게 만들었어요?
1963년에 박정희정권이 가호적을 만들어줬어요. 그 때 우리도 만들었지. 당시 이장하고 반장이 며칠이고 작업해서 만들었는디 만들 사람이 무척 많았어요. 정확히 하지도 않아서 순옥이가 동네에 5명인디 성(姓)이 바뀌기도 했어요. 나는 1936년생인디 1928년생으로 되버렸고, 우리 집사람이 송금옥인디 장모님 성을 따서 강순옥으로 바귀고 그랬지. 바뀐 것을 나중에야 알았어요. 그래서 법원에다가 장모가 소송을 제기하게 했는데 바쁘다보니 계속 하지도 못하고 살다가 죽을 때까지 강순옥으로 살았어요. 허허허. 우리 처남이 이 근처에 살았는디 우리 집사람하고 성(姓)이 달러. 그러니께 동네 사람들이 그러잖어. 너희는 이복동생이냐, 어떻게 형제가 성이 달러. 허허허.
전라도에 살다가 유구로 올라왔다고 했잖아요. 그 과정은 어떻게 되요?
유구가 살기가 좀 낮다고 해서 왔죠. 올라와 보니께 길바닥이 온통 주먹만한 자갈이여. 생산되는 것도 별로 없고 장사하기도 힘들고. 그 때가 1966년인디 8개월을 있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평택으로 왔지.
평택에는 연고가 있었나요?
역 앞에 대성여관이라고 그것을 운영했던 분이 집안 먼 할아버지여. 그 양반 때문에 오게 됐지. 집안 할아버지가 담배가게 하면 좋다고 소개해주더라고 여기 원평동에. 그래서 원평동 시장골목에서 담배가게를 했어요.
평택 올라오실 때 아이들도 있었죠?
그럼 있었죠. 내가 그 때 37살인데. 우리 큰 아들이 공부를 잘했어요. 중학교 입학하는데 당시 시내에 있는 동중학교(현 신한중학교) 전학시켜 준다고 해서 집안 할아버지에게 돈을 줬어. 평택동중, 동고에서 1등을 했어요. 2등 짜리가 여자 담인인디 구두 한 켤레 사다주고 1등이 되더라고. 어찌나 화가 나던지.
담뱃가게는 잘 됐어요?
오래 안 했어요. 3년이나 했나. 구멍가게도 같이 했는디 전매청 허가를 받아야 했어요. 가게에서는 식료품이나 잡화를 팔았고, 담배는 아리랑, 은하수, 청자가 좋은 담배였지. 새마을은 쌌고. 내가 전라도에서도 담배장사를 할 때는 허가권이 필요 없었는디 그래서 노점에서도 팔고 그랬는디 그 때는 샛별이라는 담배를 팔았지.
담배가게는 왜 그만뒀어요?
애들 땜에 그만뒀어요. 동네 장사다보니께 애들이 다른 집 아이들하고 싸우면 무조건 우리가 사과를 해야 돼. 그 사람들이 우리 집 손님들이잖어. 눈치를 봐야지. 아니꼽고 억울하더라고. 내가 똑같은 동네사람인디 이렇게는 살지 못하겠다 싶어서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집도 팔아버렸지.
집을 팔면 어디에서 살아요?
따로 집을 사서 살았어요. 주택 구입해서 몇 년 동안. 그러다가 숯장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어떻게 숯장사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집안 형님이 영등포에서 숯장사를 했는디 잘 됐어요. 그래서 살던 집에다가 숯가게를 냈지. 그런디 우리집이 주택가에 있어서 숯이 들어오려면 인부를 두 사람씩이나 써서 안으로 들여야 돼. 인건비도 많이 나가고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디로 이사왔지. 여기가 길이 넓잖아요. 여기가 내가 들어오기 전에는 고물상집이었거든. 터가 넓었지.
숯은 어디에서 가져왔어요?
처음 할 때 말요? 그 때(1970년대 초)는 진천 숯가마에서 검탄을 가져다 팔았어요. 숯은 가스가 덜 빠진 검탄하고 가스가 빠진 백탄(또는 비장탄)이 있어요. 검탄은 가스가 덜 빠져서 실내에서 쓰면 탄산가스가 많이 나와서 정부에서 못 쓰게 했어요. 옛날 없을 때나 사용했지. 백탄은 탄산가스가 안 나오지.
그런데 왜 검탄을 팔았어요?
검탄이 싸요. 만들 때도 검탄은 두 시간이면 만드는디 백탄은 5, 6시간 걸리거든. 지금은 비장탄을 써요. 가스도 안 나오고 화력도 좋고 오래가고.
저희가 고기집에 가면 코크탄을 쓰던데요?
코크탄(활성탄)은 톱밥을 압축해서 숯을 만든 거예요. 육각형인디 연기가 잘 빠져서 식당에서들 많이 쓰지.
숯의 유통구조는 어떻게 되요?
옛날에는 백탄이 없었어요. 고기집도 경보극장(옛 명동골목) 옆에 있던 엉터리공원갈비가 가장 유명했고. 엉터리공원갈비 알아요? 옛날에는 그거 뿐이었다고. 거기에 우리가 납품했어요. 검탄은 점화시간이 50분밖에 안 돼요. 금방 꺼지지. 백탄은 2시간 이상 지속돼요. 불을 붙였다가 꺼서 식힌 뒤 다시 쓸 수도 있고. 백탄이 발전해서 비장탄이 됐죠.
숯은 잘 팔리나요?
이명박 정권 때까지는 잘 팔렸어요. 박근혜 정권 말기에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잘 안 되지.
언제 돈을 많이 벌었어요?
우리는 아무래도 1980, 90년대지. 그 때가 식당들도 많이 생기고 경기도 좋았고.
자녀들은 어떻게 돼요?
3남 2년요. 큰아들은 안성농전을 나오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편입해서 4년제를 졸업했고 대학원까지 나왔는디 지금은 토목기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감리사로 활동해요. 둘째는 개인택시 하고, 셋째가 내가 하는 목탄사업이어 받았고. 둘째도 셋째하고 이것을 했는디 독립해서 나갔지.
이산가족이잖아요. 북에 있는 가족들은 어떻게 됐어요?
우리 형님이 계셨는디 북한에서 인민군에 징집되가지고 아마 돌아가셨을 거 같어. 북한에 계시는 어머니한테는 한 달만 피했다 온다고 했는디.... 한달만 다녀온다는 생각에 왔는디. 어머니 생각 많이 나요.
다른 형제는 없어요?
누님이 세 분인디 두 분은 북한에 계셨고 한 분만 함께 나왔어요. 누님들도 어떻게 됐나 모르지 뭐.
분위기 바꿔서 어르신 올라왔을 때 원평동 풍경을 말씀해주세요?
이 동네에는 연탄공장 다니는 사람이 많았어요. 건축일 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미군부대 다녔던 사람들은 어깨다 힘주고 다녔지. 그 사람들은 돈을 잘 벌었으니께. 다들 가난하고 우범지역이 많았어요.
또 기억나는 풍경은요?
여기가 소주공장들이 많더라고. 3개가 있었어요. 주정 가져다가 물을 희석해서 만들었는디 은실(세교동)에는 여러 개가 있었어. 여기도 방학소주가 있었고. 연탄만드는 사람들도 많았고. 여기 시장통 주변에는 손으로 벽돌 찍는 거 있잖아 한 장씩 벽돌처럼 찍어서 연탄을 만들어 가지고 파는 사람들이 많았어.
그 분들은 지금도 살고 계시나요?
지금은 다 떠나고 없어요.
주택들은 어땠어요?
일반 주택들은 나 나무 때는 집들이 많았지. 연탄은 비싸서 쉬 때지를 못했어요. 내가 올라오던 해만 해도 평택장에 나가면 솔가리나 장작을 마차에 실고 와서 팔려는 사람들이 줄서 있었슈. 그러다가 연탄 나오고 몇 년 뒤에 없어지더라고. 말마차도 많았네. 저기 통복동 쪽에 마방이 있잖어. 마방이 뭐냐면 마차 가진 사람들 조합 같은 건데 거기서 자고 아침에 물건 실으로 가기도 했어요. 그 때만 해도 트럭이 없으니께 어지간한 것은 말마차로 실어 날랐지. 그게 삼륜차 나오면서 싹 없어지더라고. 삼륜차지만 4륜구동이여. 우리도 삼륜차 나오고 나서 한 대 사서 목탄을 실어날았어. 복사차도 많이 썼고.
복사차라면?
4톤~4.5톤이나 될까. 그런 규모의 트럭이요.
원평동이 살기 힘들었으면 이사 가지 그랬어요?
사람 사는 게 똑같지 뭐. 이사 갈 생각은 안 하고 살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