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스위스의 로잔에서 세계 곳곳의 개신교인들이 모였다. 로잔대회로 알려진 이 대회의 이름은 <제1차 세계복음화국제대회>다. 한국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으로 알려진 로잔언약이라는 대회 선언문이 나온 대회다. 영국 성공회 존 스토트가 이 선언문을 작성한 것으로 아는 사람도 더러 있는데, 사실 그는 로잔언약의 초안을 작성한 국제위원회의 의장이었다. 복음전도와 사회 정의 모두가 선교 사역에 필요하다고 역설한 로잔대회에서 이에 관해 가장 분명한 목소리를 낸 사람은 라틴아메리카의 사무엘 에스코바와 르네 빠디야였다. 로잔대회에 대한 이러한 착시적 이해는 로잔운동 누리집에만 가보아도 쉽사리 바로 잡을 수 있다.
로잔언약에는 세계복음화국제대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것에 걸맞게 '복음화', 즉 전도와 선교, 그리고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한국 복음주의자들이 늘 언급하는 사회 참여 이야기는 단 한꼭지다.
로잔언약 머리말에는 이러한 문장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시대에 행하시는 일에 깊은 감동을 받으며, 우리의 실패를 통회하고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복음화 사역에 도전을 받는다.”-<로잔언약, 머릿말> 중에서-
ㅣ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마주한 실패를 돌아보자는 이야기를 한다. 그 실패란 무엇일까? 로잔언약 1장에서부터 그 실패에 대하여 언급한다. “우리는 종종 세상에 동화되거나 세상으로부터 도피함으로 우리의 소명을 부인하고 우리의 사명에 실패하였음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이를 고백한다.” -<로잔언약, 1.하나님의 목적> 중에서-
① 세상과 동화됨과 ②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소명을 부인하고 실패하였다고 짚는다. 예수의 도를 전했는데,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하거나 게토화된 그리스도인이 양산된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따른다. 예수의 제자로 분명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삶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새로운 공동체로 속하는 분명한 사건이다. “복음에 초대할 때 우리는 제자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여전히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가 새로운 공동체에 속하였음을 분명히 하도록 부르신다.” -<로잔언약, 4.전도의 본질> 중에서-
이 새로운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이며, 어떤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체제와 이데올로기와 동일시 되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의 기관이라기보다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문화적․사회적 또는 정치적 체제나 인간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로잔언약, 6.교회와 전도> 중에서-
이 교회가 구별되지 못하고 세속적인 생각과 행위와 문화가 가득한 채, 예수를 믿고 전했다. 마치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우리를 구원한 하나님이라고 경배하였던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말이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어야 하는 데, 세상이 교회 속으로 들어와버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세속적인 생각과 행위, 즉 세속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면역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 교회는 세상 속에 있어야 하지만, 세상이 교회 속에 있어서는 안 된다.”-<로잔언약, 12.영적 싸움> 중에서-
전도와 선교은 예수의 삶을 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의 삶에서 가능하다.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질서로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공동체에서 구원을 얻는 것은 그 안에 다른 질서와 문화, 힘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재테크와 고급 부동산 정보, 유력 학벌 체제 편입을 위한 노하우를 공유하고 있다면, 그것을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수의 구원 사건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해방을 경험하게 한다. 선교의 역사에 신분제 철폐가 일어났던 것이 그 예다. 이러한 뚜렷한 공동체의 삶 자체가 절망적 소식과 전망 가득한 사회 속에서 기쁜 소식, 즉 복음이다. 그래서 등불은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산다면, 예수의 삶을 철저하게 사는 제자로 함께 그 길을 가야한다. 공동체를 느슨함이라는 말과 짝을 이루어 신앙을 논하는 경우를 보았다. 로잔언약에는 '사악한 개인주의'라는 아주 직설적 표현이 등장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새로운 공동체로 한몸 이루어 살아가는 삶에 배치되는 개인주의를 사악하다 한다. 세속적인 것이 예수를 따르는 삶에 틈타지 않도록, 늘 깨어 살아야 한다. 늘 깨어 예수 따라 살기 위하여 나를 비춰주는 등불과 같은 지체들이 있다. 그리고 이를 힘 입어 나 또한 누군가의 등불이 되어 살아간다. 그렇게 예수 제자로 한몸되어 살아가니, 가서 전하는 것 못지 않게 와서 보는 일도 많다. 그래서 세상 속에 제자공동체로 살아가는 삶이 전도요 선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