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탄생 100주년 기념 | 이광수 연구자 하타노 세쓰코 1/4 - 민족신문 똥아 2017년 2월
년도별/예술문학비평
2017-06-06 05:13:39
왠일인지 민족신문 똥아에 춘원 이광수에 관한 기사가 떴다.
기사일이 2017년 2월이니 '천만촛불'로 친일정권의 종말을 이미 인지했음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친일군사독재와 재벌족벌 사이비들에 의해 언론과 지식인들의 양심은 다 죽고...
우민들은 힘있는 친일개구덜은 건들지 못하면서 애꿎은 친일?문학가들은 다 죽여서...
우리가 알던 전설적인? 민족적? 정신의 지주들이엇고 문학의 꽃이였던 힘없는 문호들과 학자들은 친일이라는 이름하에 모두 말살?하였다.
또 이데오르기라는 이유로해서 친일군사독재 재벌족벌 사이비들은 어떤 팩트도 밝히지 않고 묻었다.
우리의 영원한 문호 춘원 이광수도 월북 또는 납북이라는 이름으로 그 마지막 삶을 우리는 오랜동안 알지 못했다.
오래전 국문학자 정인보 선생의 조카 였던 사돈어른이 북에 그 정보를 캔적이 있었는데 부인께서 생존해 계셨던 것을 알수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살벌한 군사독재시절이었으니 그 개구들은 알것은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민들은 그런 독재자, 사이비교주들을 숭배하면서 그들의 삶을 통채로 조롱당하고 있는 줄 최근까지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순시리스럽게도...
년전 돌아가시 만주 연길의 진정한 공산주의 인권운동가 였던 김학철선생이 이미 오래전에 춘원선생이 1952년도에 중국병원으로 이송되어 돌아 가셨다는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김학철 작가에게서 받은 편지에 따르면 이광수는 1952년에 병으로 베이징에 이송돼 베이징병원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 298쪽
친일군사독재 재벌족벌 사이비들은 빨갱이들이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춘원선생을 치료를 위해 중국으로 보냈다는 것을 죽어도 밝히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궁민들을 조롱하기위해서... 순시리스럽게....
친일박정희 시절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백지 석간을 배부하던 민족신문 똥아가 변절하여 친일군사독재 재벌족벌 사이비들의 씹상시가 되어 오늘날 민족분렬과 국가분렬을 조장해왔는데...각종 종편, 이비에스, 곡정원, 통신위원, 뽀훈처 및 팔도궁민회 등등 소권력기관의 시다역활을 하여...
ㅠㅠ 하여간, 심지어는 친일독재자도 밀정인 것처럼 위장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 쯤...
촛불이 일어나고... 과연 우민들은 진실을 보게될까???
권력의 씹상시들은 양심을 지키고 진실을 보도 하며 순수한 사실들을 역사에 적을 까????
민족신문 똥아의 또 다른 변신??? 하여간, 좋은 변신을 기대해 보자....팩트만을 적는...
“춘원(이광수, 1892~1950?)에대한책을쓰고싶어서대학에서 (2014년 3월) 조기퇴직하고이책을썼다. 나는춘원을연구하는오타쿠(御宅, 한분야에열중하는사람)다.”
지난해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푸른역사, 최주한 옮김)’를 펴낸 하타노 세쓰코(66) 니가타현립대학 명예교수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이광수 평전을 쓴 최초의 일본인으로, 이 책은 2015년 일본에서 발간된 ‘이광수-한국 근대문학의 아버지와 ‘친일’의 낙인’의 한국어 번역판이다. 그는 ‘무정’(2005)을 일본어로 번역한 데 이어 ‘무정을 읽는다’(2008), ‘일본유학생작가연구’(2011), ‘이광수 초기 문장집 1, 2’(2015) 등을 펴낸 ‘춘원 전문가’다.
춘원이 쓴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은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무정은 매일신보에 1917년 1월 1일~6월 14일 연재됐다. 문학적인 의의가 있어서인지 춘원에 관한 논문만 200여 편에 달한다. 하지만 춘원 문학상은 물론 문학관도 없다. 문학계 인사들이 문학상, 문학관 만들기를 수차례 추진했으나 무산됐다. 동서문화사가 2016년 연내에 제정하기로 한 춘원문학상도 감감무소식이다.
춘원, 뜨거운 쟁점
친일작가로 기억되는 춘원. 그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춘원 연구자를 만나면 그 의문을 풀 수 있을까. 궁금증을 안고 지난 11월 4일 서울 강남에서 하타노 씨를 만났다. 그는 홍명희 문학제(2016년 11월 5일)에 본인이 일본 잡지에서 발굴한 벽초 홍명희의 단편소설 ‘유서’를 소개하려고 방한했다. “춘원을 연구하다 춘원의 친구(홍명희)도 살피게 됐다”는 하타노 씨의 한국말에는 일본인 특유의 상냥한 말투와 음색이 묻어났다.
▼ ‘무정’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그간 춘원을 연구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춘원을 연구한다는 이유로 비판받은 적도 있다. 한동안 한국에 오는 것이 무서웠고, 춘원 연구를 중단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춘원에 대한 시각은 다양해졌다. 2009년 역사학자 김원모 씨는 ‘이광수의 친일은 위장이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무정 탄생 100주년이 되면 한국사회가 춘원을 재평가할까’ 기대했는데…. 여전히 춘원은 한국사회의 쟁점이다.”
중일전쟁 이후로 들면서 이광수는 사이비 민족주의라는 한 꺼풀 탈마저 벗어 던졌다. 조선문인협회장으로 황도문학의 기수가 된 이광수는 극렬한 황민논리로 광수(狂洙)라는 빈축까지 받았다. 그는 ‘금후의 조선의 민족운동은 황민화운동’이라고 단언하면서 ‘조선인은 그 민족감정과 전통의 발전적 해소를 단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인은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 버려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 친일이 변절이 되자면 그 이전의 일관된 독립운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광수의 경우는 시(始)와 종(終)이 친일이요 타협이었다.
-‘친일, 그과거와현재’(반민족문제연구소, 아세아문화사, 1994) 255쪽
춘원이 남긴 문학적 유산들을 친일이라는 미명하에 폄하하는 것은 온당해 보이지 않습니다. 중일전쟁과 대동아전쟁을 통해 일제가 제국주의의 위상을 세계에 노정시키던 시기였습니다. (…) 문학 연구는 문학작품에 대한 연구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정치적인 논리나 진영 논리가 개입하면 감정적이 되고, 객관적인 연구가 진척될 수 없습니다. (…) 한국근대문학의 개척자이면서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던 춘원의 공적이 더 이상 외면되는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12회 춘원연구학회 학술대회’(송현호, 춘원연구학회 자료집, 2016) 개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