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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여러 가지를 생각합니다. 특별히 인생이란 무엇인가?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 온 문제입니다.
철학자 쇼펜하워가 공원벤치에 앉아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서부터 온 존재인가? 그리고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생각하고 있는데 공원관리가 와서 "당신 누구요?" 물었습니다. 그때에 쇼펜하워는 대답하기를 "내가 누구인지 몰라서 지금까지 생각하는 중입니다." 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인생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 일반인들의 인생에 대한 정의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Heidegger. Martin 1889-1976)는 인생을 정의하기를 "피투성이로 던져진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SOCRATES B. C. 470- B. C. 399)는 "무지한 것이 인간이다."고 정의하였습니다.
⊙ 세익스피어( Shakespeare. William 1554-1616)는 "인생은 그림자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 성경 인물들의 인생에 대한 정의
⊙이사야 선지자는 " 갈대와 같은 존재" 또는 풀처럼 쉽게 시들어버리고 꽃처럼 쇠하는 인생을 말하였다. "이사야 40:6-7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 다윗은 자신에 대해서 정의 하기를 벌레와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
시편 22: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다윗은 벌레와 같은 존재를 존귀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시편 144:3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감사했던 것을 봅니다.
⊙야고보는 인생을 정의하기를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베드로는 인생을 정의하기를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2: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 되어 있나니...”
⊙예수님은 인생을 정의하기를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피곤한 인생과 같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전도서는 솔로몬이 인생에 대한 연구를 보고하는 인생 보고서입니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인생에 대한 정의를 "헛된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허무한 인생"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정의한 것은 책상에 앉아서 발표한 보고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권력(權力)과, 부귀영화(富貴榮華), 명예(名譽), 쾌락(快樂)을 다 누려보고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정의한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정의를 볼때에 인생은 한없이 가련하고, 불쌍하고, 더럽고, 추하고, 무지한 인생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쌍한 인생들이 더 이상 보상받을 길은 없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헛되다는 것은 하나님 없이 모든 것을 누리고 취하려고 할 때에 헛되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안에서 주님 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것이 헛되지 않는 삶 존귀한 삶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느 누구도 참된 행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1. 인생의 본분을 다하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 전도서 12: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신앙의 출발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서부터입니다. 그분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신앙행
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만드실 실 때에 아주 세밀하게 정확하게 만드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면 인생의 본분인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습니다.
예) 개로라는 사람이 호박넝쿨에 큰 호박이 달린 것을 보고 하나님을 비웃기를 "하나님은 생각도 모자라지 이렇게 큰 열매를 가는 호박넝쿨에 달리게 하였을까, 큰 참나무에 달리게 할 것이지 하나님은 참 미련해...."
그렇게 빈정대며 가다가 너무 더워서 참나무 아래 누워 잠을 청했다. 그때에 참나무에서 도토리 하나가 개로의 얼굴에 떨어졌다. 작은 도토리에 맞고도 아파하는 개로가 그때야 비로써 큰 호박을 참나무에 열리게 하지 않은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미련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예) 우리 사람 몸 속에 맹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사람들은 큰 수술을 하려고 복부를 열었을 때에 잘 있는 맹장을 겸하여 떼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유는 맹장은 아무 역할을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러나 저는 분명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드셨을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세밀하게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은 신묘막측(神妙幕測)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시 139: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이처럼 창조주 하나님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되 세밀하게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며 보존하십니다. 인생의 본분을 다하는 것은 그분을 우리의 주로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2. 인생의 본분을 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사는 것 입니다.
양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선하고 착한 양심이 있는가 하면, 화인(火印) 맞은 양심이 있습니다.
화인 맞았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옛날 노예시대에 주인은 노예들에게 불로 달군 인두를 가지고 노예표시를 하였습니다. 화인 맞은 양심은 바로 사단의 불로 짖음을 당하여 양심이 마비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는 일들을 하지 않고 사단의 노예가 되어 마귀가 좋아하는 일들을 일삼는 것입니다.
딤전-4:2 "자기 양심이 화인(火印)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명하였습니다.
바울이 목회를 하는 동안 선한 양심을 갖지 못하고 화인맞은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방해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후메내오, 알렉산더란 사람입니다.
딤전 1:19~20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함이니라"
양심을 버리고 화인 맞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인생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3. 인생의 본분을 다하는 것은 최후에 심판이 있음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사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인생 보고서인 전도서를 종결지으며 말하기를 전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하나님은 선악간에 심판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심판에 대해서 말하기를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요한-요한복음 12: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바울-로마서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디모데후서 4: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이세 상에서도 심판을 단행하시지만 최후에도 심판이 있습니다.
결론
인생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시고 말씀의 도리를 따라 살 때에 비천한 인간이 존귀해 지며,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며,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며, 절망이 소망으로 변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출처:은혜목회정보
홍정길 목사 / 인생의 본분! (전 12:13-14)
지난 주일 제가 설교하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었다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옷 로비 사건
청문회가 진 행되는 과정을 보면서 너무 어처구 니가 없어서 그냥 힘을 잃어버리는 내 자신
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다음, 한 일념으로
살았습니 다. '이 나라가 이처럼 바로 서지 못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숫 자가 부족
해서 그렇다' 그리고는 민 족 복음화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 자고, 피 묻은 그리스도만이 이 민 족의 살 길이라고, 5만 9
천 마을 마 을마다 교회가 서게 해달라고, 골목 골목마다 십자가로 채워달라고, 그 리고 빌
딩 빌딩마다 관공서마다 회 사마다 성경 공부하는 사람들로 가 득 채워달라고 간절히 기도
했습니 다. 어떤 때는
"하나님, 이 민족을 복음화 해주신다면 목숨을 데려가셔 도 좋습니다"라고 정말 혼신의 힘
을 다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 절실한 기도를 하면서 20여년 살았더니 100 만의 기독교가
1000만으로 늘어났습 니다. 한국 교회 숫자가 많이 늘었 습니다. 그랬는데도 문제가 있습니
다. 사람들의 삶이 달라지지 않습니 다. 불교에서 기독교로 왔고 유교의 형태가 기독교적인
형태로 바뀌었 지, 도무지 사람들의 삶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개척하면 서 성경
공부하는 교회를 만들어야겠 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제가 다른 교회에서 인턴쉽을 밟아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제가 알고 배웠던, 학생들과 함께 성경공부했던 경험으 로 교회가 성
경공부하는 일을 개척 때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때까지는 대한민국의 어느 교회도 평신도가
평신도를 가르쳐주는 일이 없었습니 다. 단지 우리 보다 2-3년 앞서 교 회를 개척한 여의도
침례교회 한기 만 목사님께서 당시의 평신도 운동 을 하고 있던 네비게이토의 간사들 을 데
려다가 그 사람들 중심으로 오 늘날 구역 성경공부 하듯이 그룹으 로 성경을 공부했을 때입
니다.
남서울교회를 개척해서 월요일에 세 그룹, 오전에 한 그룹, 오후에 한 그룹, 저녁 때 한 그
룹, 화요일은 심 방을 해야되니까 오전에 한 그룹, 저녁에 한 그룹, 목요일에도 오전에 한
그룹, 저녁에 한 그룹, 금요일은 세 그룹, 이렇게 성경공부 그룹을 저 혼자서 운영했습니다.
그 때 교 재가 없었는데 10 Step이라는 C.C.C에서 나오는 교재를 사용하다 가 끝나서 새로
교재를 쓰기 시작했 습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성경공부 를 했습니다. 2년이 되던 어느 날 몇
분을 따로 세워서
"이제 당신들 이 성경공부를 가르쳐야 됩니다"
그 랬더니 이 분들이 펄쩍 뛰며 하는 말이
"목사님이 가르쳐도 올까말까 한데 우리가 성경공부 인도하면 사 람들이 오겠어요?"
그래서 제가
"당 신들이 하다 안되면 내가 도울테니 까 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한국에서 최초로 평신도들이 양육된 다음, 그 들이 다시 평신도를 가르치는 첫
번 째 교회가 되었습니다. 노회에서 그 것 때문에 말이 많았습니다.
당시에 성경공부 시키면서 교인 들에게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과 몇 권 번역이 안되었지만
윌리엄 핸드 릭스의 주석들을 사서 성경공부하는 데 좀 쓰라고 했습니다. 당시는 책 이 없
었기 때문에, 그 때 번역되기 시작된 마틴 로이드 존스의 산상설 교를 교인들에게 사다 전
부 읽혔습 니다. 존 스토트의 갈라디아 강해서 로 알려진
"Only One Way"를 읽혀 서 발표시키고 그러면서 갈라디아서 를 번역했습니다. 그랬더니
노회 어 른들이 저를 불렀습니다.
"홍 목사, 왜 그렇게 복잡하게 목회를 하는가? 평신도들이 성경 알면 골치는 목사 가 아픈
법이야.
평신도가 다른 사람 가르치는 것 을 우리 노회는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서 위임투표를 해서 위임목사가 되어야 하는데 노 회에서 이유도 없이 위임투표 처리 를 안
해줘서 1년 동안 위임식을 못 했습니다. 하여튼 그런 어려움이 있 었습니다. 그렇게 평신도
들이 성경 공부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교회들이 따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 뒤따라온
사랑의 교회나 온누리 교 회가 뒷받침 되어서 한국 평신도 지 도자들을 세웠고 평신도가 평
신도를 가르치는 교회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까 이번에 청 문회에서 선
서하고 성경에 손을 얹 고 거짓말한 그 마나님들이 모두 그 렇게 성경공부했던 엘리트 교회
권 사님들이었습니다. 모두 유명한 목 사들 쫓아다니며 성경공부한 여자들 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성경공부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입으로 성경에 손을 얹고 맹
세하고 거짓말을 합니다. 아마 이 사건은 예수 믿지 않은 사람에게는 요즘 사회적인 문제로
등장한 이단 정명석, 이재록, 부정 사건에 연루되 어 붙집힌 예수 믿는 엘리트 관료들 과 더
불어 똑같은 지탄의 대상일 것 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성 경을 공부했는데도 왜
저들이 저렇 습니까? 그냥그냥 지나갈 일은 아니 라고 생각합니다.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됩
니다. 정말 교회가 어떤 모습 으로 하나님 앞에 서고 민족 역사 앞에 서야될 것인가를 옷깃
을 여미 며 주변을 돌아봐야 될 때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결국 성경 으로 돌아
가서 이 본문을 통해서 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을 어 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를 생
각해보 고자 합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인생의 여러 모 습들을 전도서를 통해서 다 보여주 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헛 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해 아래 헛되지 않은 것이 없다, 인생이 얼 마나
헛된가? 높이 되는 것도, 고운 것도, 영광스러운 것도, 부자 되는 것도 얼마나 헛된가를 계
속 조목조 목 가르칩니다. 지식도 헛되고 소유 도 헛되고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명 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 분
이니라"
사람의 본분이 무엇입니 까? 아니, 본분이란 무엇을 뜻합니 까?
비행기는 하늘을 나는 것이 본분 입니다. 배는 물 위를 떠 다니는 것 이 본분입니다. 자동차
는 도로를 달 리는 것이 본분입니다. 기차는 레일 위를 다니는 것이 본분입니다. 이 본분은
기차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 다. 이 본분은 비행기가 스스로 정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분은
만드신 분이 결정합니다. 그래서 설계합니 다. 그 본분대로 살아야 됩니다. 사 람의 본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 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사람의 본분은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경 외한다는 말은 하나님
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 을 수 있습니다. 친구간의 사랑을 우정이
라고 말합니다. 남녀간의 사 랑을 애정이라고 말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을 효도
라고 말 합니다.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는 것 을 충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피 조물인 인
생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 단어를 경외함으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에는 두려
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존경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정
말로 존경하면 그 앞에 몸을 바로 가눠 서지 못합니다. 사 람이 큰 사람만 만나도 아니, 그
조 그마한 나폴레옹 앞에서 유럽의 제 왕들이 바로 서지 못했답니다. 그의 카리스마에 눌려
사람들이 몸을 떨 었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의 동지사 들이 중국에 가서 중국 황제를 만날
때 어떤 사람은 몸을 못가눠서 쓰러 진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하물며 그 크신 하나님, 완전
하고 전능하신 결점도 없으시고 거룩하신 그 분을 만날 때 두려움이 없을 수가 없습니 다.
깊은 사랑이 있는 두려움, 깊은 존경심이 있는 두려움, 이것을 경외 심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이 경외심 앞에는 사랑이 들어있기 때 문에 거기에는 열정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
기 때문에 헌신이 있습니 다. 사랑이 들어있기 때문에 희생이 있습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명
령을 성경은 이렇게 규정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본분 입니다. 보통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경외하며, 사랑의 다
른 표현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합니다. 그 하나님은 사랑 받기에 합당
하신 분, 사랑을 요구하신 하나 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사 랑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
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신다고 약속 해서 오랜 세월 후에 아들을 주셨습 니다.그런데 그
이삭을 낳은 다음, 아브라함이 제사를 안드립니다. 아 브라함의 애정이 이삭에게 쏟아집니
다. 아침에 일어나니 이삭, 눈을 감 아도 이삭, 이삭으로 꽉 차버렸습니 다. 하나님께서 아브
라함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네 아 들, 사랑하는 독자, 그 이름 이삭을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데려가 내게
번제로 드려라"
그는 하나님의 사랑 의 요구 앞에서 무너집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하시되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사랑엔 질투가 없으면 사랑 아닙니 다. 자기 남편이 바람
피우니까
"우 리 남편은 호걸이라 여러 여자를 사 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사랑 아 니지요. 반대로
남편이 자기 아내가 다른 곳으로 자꾸 시선을 보내는데
"내 아내는 박애주의자라서 무지무 지하게 많은 사람을 사랑한다"고 웃 고 자빠졌다면 사람
입니까? 그것이 사랑입니까? 사랑은 너 아니면 안됩 니다. 다른 것으로 대신이 안됩니다. 여
러분, 성경에서 질투라는 단어는 나쁜 단어입니다. 좋지 않은 단어입 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서 나를 사랑 하실 때 보통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 니라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여호와 니라"
우리 생애에 하나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분 없이는 내 인생 이 만족되지 않습니다. 그
러나 또 놀라운 사실은 질투하는 하나님이, 나 없이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여러 분, 하나님
이 질투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뭔데요? 그 크 고 놀라운 사랑이 나를 찾아오
셨습 니다. 아브라함은 그 사실을 알았습 니다. 그래서 그는 모리아 산정에 가서 사랑하는
아들을 하나님께 드 리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가 자기 아들을 향해 칼을 뽑아들고 마음으
로는 완전히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 팔을 잡으신 다음 하신 말씀이
"
네가 이제야 나를 진실로 경외한 줄 알았도다. 네 사랑이 이렇게 아름답 게 드러났도다. 너
는 정말로 나를 사랑할 줄 안다"
하나님께서 흡족하 게 생각하시는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을 사 랑할 때까지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비밀입니
다. 그런 일 이 있을 수 있느냐구요? 우리 주변 에도 있습니다. 내 아이들, 나는 아 무 부족
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식들 이 부족하면 내 부족보다 10배, 100 배나 부족하게 여길 수 있
고 그리고 그 아이들이 온전하게 성숙해서 온 전한 사랑으로 내게 나올 때까지는 내 마음에
만족이 없지 않습니까? 이 사랑의 법칙을 하나님께서는 인 간의 가족관계에도 허락해주셨습
니 다.
두 번째로 그의 명령입니다 성경 은 계명이라고도 말했고 율례라고도 말했고 법이라고도 말
했는데 이것을 모두 하나로 묶으면 말씀입니다. 계 명, 명령은 우리가 공부해서 습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되 하나님을 향한 깊은 애정, 경외심을 가진 동시에
그 분을 지식 안에서 사랑해야 됩니다. 사랑 안에 지식이 있어야 됩니다. 또 지식 위 에 사
랑이 있어야 됩니다. 사도 바 울은 빌립보에 편지를 보내면서 빌 립보 성도를 향한 깊은 탄
원을 했습 니다. 1장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 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사랑이 그냥 사랑으로만 있으 면 안돕니다. 지식과 함께 있어야 됩니다. 지식이 뒤따라주지
않는 경 외심, 사랑은 미신이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단이 뭐가 이단입니 까? 이단의
열정은 못말리겠더라구 요. 이단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은 외견적인 모습은 흉내낼
수 없 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뭐가 결핍합니까? 지식이 결핍이었어요. 그래서 이재록
이 말하면 홀딱 홀딱 넘어갑니다. 저번 개각 때입니다. 환 경부장관에 대학총장 지낸 어떤
여 자 분이 천거가 되었었습니다. 그런 데 마지막 단계 발표 몇 시간을 앞 두고 그 분이 이
재록씨 교회를 다닌 다는 소문이 청와대에 들어갔나봐 요. 그래서 저희 집으로 연락이 왔
어요. 그 분 아냐고요? 잘 알지요. 개인적으로도 친합니다 그랬더니
"
그러면 그 분 만민중앙교회를 다닌 다던데, 과거에 다녔다는 말인지, 현 재인지 확인 좀 해
주세요"
하는 것 입니다. 저는 그 분을 알지만 그 분 이 어느 교회 다니는지 잘 몰랐습니 다. 그래서
여러 곳으로 알아보니까 지금도 다니고 있고 MBC방송 사태 가 났을 때 같이 데모까지 했
다고 합니다. 그래서 발표 1시간 전에 사 람이 바뀌었습니다. 그 여자분 열심 입니다. 대단
한 분이예요. 기도도 많 이 한다고 소문이 난 분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지식이 따라주지 않
기 때문에, 하나님의 살아있는 명령을 그 분이 몰랐단 말이예요.
그런가하면 또 반대 사람이 있습 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
씀은 잘 압니 다. 박사입니다. 연설도 잘 할 수 있 고, 성경 강해도 잘 할 수 있고 설 교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 의 대표적인 사람이 있다면 바리새 인들이예요. 그런고로 살
아계신 하 나님을 섬기며 이 세상을 사는 교회 안에 네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하나 님을 경외함과 그 계명이 있는 사 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
함은 있는데 하나님을 향한 지식이 없는 사람, 하나님을 향한 지식은 있는데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없는 사람, 이 사람들 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없으니 까 말이나 지식으로는
성경 박사인 데, 제 마음대로 인생을 삽니다. 그 리고 이것도 저것도 없는 사람, 네 종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 속합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 의 계명은 잘 아는데 하나
님을 경외 함이 없습니다. 계명이 강한 사람은 일하지 않습니다. 입만 가지고 놉니 다. 헌신
이 없습니다. 열정이 없습니 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있지만 지식이 없는 사람은
희생도 있고 열정도 있고 헌신도 있습니다. 그런데 방향을 모른 채 하나님을 섬 깁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입니까? 경외 함은 참 특심한데 계명이 약한 사 람, 하나님의 계명에 대
해서는 박사 인데 그 만인 앞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하나님 살아계신 존전 앞에서 맹세한다
고 거짓말하는 사람이 있습 니다. 균형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의 감성으로는 하나님을 경
외합니 다. 우리의 지성은 하나님의 계명을 바로 배웁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지 식을 쫓아
섬겨야 됩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 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세 번째로 또 발동되 는 것 있습니다. 의지가 발동합니다. 그래서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입 니다. 우리가 그것을 감성적으로 받 아들일 수 있고 지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끝일 수 있 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는 하나님 을 향한 경외
함과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함과 동시에 그 이해한 명령을 순종하는, 의지적으로 쳐서 복종
시 킴이 있을 때 그 신앙은 온전한 신 앙이 됩니다. 감성, 지성, 의지, 이것 이 뭡니까? 이것
이 인격입니다. 그 중에 하나만 붙잡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인격적인 신앙을 못가진 겁 니
다. 인격은 늘 세 가지가 함께 따 라주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손해가 있습
니다. 그렇지 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 할 수 있고 그 희생을 기뻐할 수 있 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 키는 이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자 동차가 본분 잘 했다
고 상주고 축복 해주는 것 봤습니까? 기차가 잘 달 렸다고 상주고 칭찬하는 것 봤습니 까?
본분은 마땅한 것입니다. 요구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사람이 사람의 본분
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본분을 우리에게 펼치십니다. 축복해주십니 다. 시편 112
편 1절에서 4절까지 읽 어보겠습니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 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
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
가 영원히 있으 리로다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어질고 자비 하고
의로운 자로다"
계속 다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고 즐거워하는 자를 향해
서 어떻게 축복해주시는가가 계 속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의 본분으로 우리를 축
복하십니다. 자, 시편 128편을 한번 읽어볼까요? 128편에는 1절과 4절에 같은 말이 반복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 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128:1) 4절입니다.
"여호 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 으리로다"(시128:4) 라고 했지요? 그 내용을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
이라 네가 복되 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
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 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네 자식
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 게 평강이 있을지로다"(시 128:1-6)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약속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고 했습니 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사회
는 수고한 사람이 그 수고의 대가를 갖 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복 이 없는 사회는
수고한 사람과 그 수고의 열매를 갖는 사람이 다릅니 다. 가만히 있어서 복이 떨어져야지,
수고해서 얻는 것이 무슨 축복이냐 구요? 아닙니다 우리는 이마에 땀 흘리며 살도록 명령받
았는데, 우리 의 수고가 헛되이 돌아가는 것은 하 나님의 저주입니다. 수고한대로 그 열매가
돌아오는 남편, 복 있는 남 편이지요.
그런가하면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다고 했습니다. 포도는 세 가
지 용도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재목 안됩니다. 관상수로 안됩니다. 땔감으로도 안 됩니다.
불이 잘 안타요. 그런데 이 포도가 여기도 저기도 쓸데가 없는 데 한 몫 볼 때가 있습니다.
언제입 니까? 결실할 때입니다. 올해는 포 도가 참 소담스럽게 열렸습니다. 포 도 풍년입니
다. 그 별로 볼 것 없는 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는 큰 소리 친단 말이예요. 또 포도 열매는
밖 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밑에 가봐야 주렁주렁 열리는 장관을 봅 니다. 지나가는 사
람은 모릅니다. 그 밑에 가까이 가봐야 늘어뜨려진 포 도를 본단 말이예요. 어떻게 보면 빨
래비누처럼 닳아지는 여인의 생 애, 그렇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마 치 포도나무에 포도가
주렁주렁 열 린 것처럼 밖에서 보면 시시한 것 같은데 안에서 보면 그처럼 아름다 운 아내
를 여호와를 경외하며 명령 을 행한 가정에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 자식에게 또 약속 하고 있습니다. 네 상에 둘린 자식 은 어린 감람나무 같다
고 했습니다. 감람나무가 무슨 나무인줄 아세요? 이스라엘에서는 축복을 상징하는 나 무라
고 합니다. 성경을 몇 번 읽었 던 박태선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감 람나무라고 합니다. 축복
을 상징한 다고요. 이 감람 잎으로는 향신료로 씁니다. 그래서 불란서 고급 요리에 는 반드
시 이 감람 잎사귀를 가지고 향을 냅니다. 그 나무의 육질은 세 상에서 가장 좋은 목각 재
료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늘 그 목재에서 향이 납니다. 또 이 나무가 휘거나 갈라지지 않
습니다. 그래서 가장 좋 은 조각 재료로 사용됩니다. 그런가 하면 그 열매는 감람유를 만들
어내 기도 하고 서양 요리의 맛있는 밑반 찬이 되기도 합니다. 그 뿌리는 약 재로 씁니다.
그런데다 그처럼 비가 오지 않는 사막 같은 곳에서 천년, 이 천년을 삽니다. 지금도 겟세마
네 에 가면 예수님이 당시에 심었다는 감람나무가 있는데 이것이 사실인 지, 아닌지는 모르
겠습니다. 큰 아름 드리 고목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 나무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제
가 1970년대에 가봤을 때는 그 나 무가 새파랗게 열매를 맺었더라구 요. 얼마나 오랫동안
열매 맺었단 말입니까? 사과는 30년 간 열매 따 면 버립니다. 포도나무도 한 20년 지나면
없애버리고 새 것을 심어야 됩니다. 감람나무는 2천년을 간단 말입니다. 열매를 맺으면서요.
그래 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감람나무라고 하면 축복입니다. 여러분, 나무 수종 은 안바뀝니
다. 아무리 열심히 비료 를 준다고 해도 머루가 포도 안됩니 다. 아무리 열심히 좋은 조건을
마 련해준다고 할지라도 뽕나무가 솔나 무 안됩니다. 어렸을 때 솔나무이면 커도 솔나무이
고 어렸을 때 사과나 무는 만년을 두고 사과를 엽니다. 그러니까 네 상에 둘린 어린 자식이
감람나무 같다고 한 그 말은 자녀에 게 축복의 생애를 보장하겠다는 하 나님의 약속입니다.
"감람나무로 내 가 너희 자녀들을 키워줄께"하는 이 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누구
에게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는 자에게 입니다.
사람의 본분을 다할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본분으로 우리를 축복하십 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다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사람의 본분, 본분으로 돌아가야 되겠습니 다 우리 한국 교회가 본분으로 돌아 갑니다. 우리
본분은 여호와를 경외 하며 그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둘이 다 필요합니다. 하나님 경외함
이 없는 하나님의 계명으로는 안됩 니다. 하나님을 향한 지식이 없는 경외함은 미신으로 흐
릅니다. 본분 으로 내 심령이 돌아서는 축복의 밤, 주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깊은 은혜로 함
께 해주시는 복된 밤이 되 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는 자의 복이
심령 심령에 임하는 복스러운 은총의 시 간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