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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 1 (삿 13:1)
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오늘부터 사사 삼손에 대한 말씀입니다. 잠시 서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사사기에 긴 기록을 가진 두 사사가 바로 기드온과 삼손입니다. 기드온도 그렇고 삼손 역시 한 개인이나 한 나라 이스라엘 만의 전기가 아니라 신령한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잉태와 사역과 죽으심과 승리를 다룬 구약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예로 삿15:16에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했는데 시110:6-7의 다윗의 메시아 시에 그대로 인용됩니다. 삼손의 마지막 죽음으로 수많은 원수들을 단번에 갚음과 같이 예수님 역시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즉 삼손의 사건도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복음 실은 삼손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주제는 "하나님의 마음을 격동키시는 것들"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에 삼손의 탄생과 사사로 등장하게 된 배경이 나타납니다. 삼손이 필요했던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또 다시 하나님 목전에서 악을 행하여 블레셋에 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속상하시면 자기 백성을 할례 받지 않은 원수의 손에 40년이나 넘겨 주셨을까요?
하나님 두려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포인트는 하나님 두려운 줄 아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심정을 획득하지 못하면 전하는 저나 듣는 여러분이나 성공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도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시7:11-13에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 하셨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짓은 하나님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것들이 하나님을 격동시키는 것일까요?
1. 경고하신 선을 넘을 때입니다.
1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기 “다시”라고 했는데 원문에서 보면 ‘야사프’로 ‘더욱’이라는 의미에 가까운 말로 원점 혹은 그보다 더 심해진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암몬 자손이 쳐들어 왔을 때 입다를 통해 구원하시고 그 뒤를 이어 입산 엘론 압돈 등의 사사를 일으켜 모두 31년 동안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평안을 주었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욱 하나님을 멀리하고 이방의 우상을 섬기며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곳도 큰 죄지만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이방신과 우상을 숭배한다면 하나님께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셨듯 경계를 넘으면 살 수 없습니다. 물고기가 경계를 넘어 육지로 나와도 죽고, 육지생물이 바다로 뛰어들어도 살 수 없습니다.
선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선 안에서는 의롭지만 선을 넘으면 불의가 됩니다. 가령 잘못을 보고 충성된 마음으로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선을 넘어 비난하고 대항하고 당을 지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선을 넘는 것입니다. 혹은 전도하기 위해 타 종교를 연구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선을 넘어 그 사상을 받아들이거나 숭배하는 것은 선을 넘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시지 않으신 것은 선을 넘어 크게 패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6:2-3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롬1:21-23에도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했습니다.
롬3:10-12에도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선을 넘지 마시기 바랍니다. 경계 가까이 가지 말고 멀찍이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잠7:24-27에 “이제 아들들아 내 말을 듣고 내 입의 말에 주의하라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되지 말지어다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그의 집은 스올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 했습니다.
술의 약점에 있는 사람은 술광고 보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잠23:29-31에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했습니다.
2. 악행을 보편화할 때입니다.
1절에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기 여호와의 “목전”은 히브리어로 “아인”인데 “흐르다, 흘러나오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눈”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마음까지도 살피시는 전지하신 눈의 관점이라기보다 죄인들의 감출 수 없는 나타난 행위를 보신 그 눈을 의미합니다.
창13:13에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한 대로 부끄러운 줄 모르고 드러내는 악행들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1:10에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줄 알고 죄인 줄 알면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 줄 모르면 회개할 수도 없습니다.
죄를 죄로 보지 않던 소돔의 관원들처럼 오늘날 국회의원들이 죄를 죄로 보지 않도록 하는 법제정에 열중입니다. 나아가 낙태와 동성애를 장려하고 차별금지법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신앙인들에게 역차별을 가합니다. 이처럼 죄가 보편화되고 장려되면 하나님께서 채찍을 드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회와 나라를 어떤 방법으로 치실지 심히 두렵습니다.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반대하고 기도해야 하는데 이를 찬성하는 자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교인이라면서 공산주의자도 있습니다. 어찌 하나님 계시는 유신론과 하나님이 없다는 유물론이 공존할 수 있습니까? 공산치하에서는 신앙이 철저히 배제됩니다. 심지어 가두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교회가 세속에 미혹되면 하나님께서 교회와 아울러 사회까지 치십니다.
3. 회개할 줄 모르고 반복할 때입니다.
그리고 “악을 행하였으므로”는 히브리어로 “라”인데 “학대하다, 징벌하다, 악행하다.”를 뜻하는 “라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나쁜, 사악한, 해로운, 유해한, 불의한, 잘못된” 것을 반복하여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반복하면 징계하십니다. 그래서 사1:5에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도 같은 죄를 거듭하면 상습죄라 해서 벌이 더 큽니다.
그래서 벧후2:2-3에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했습니다.
10-11절에는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계속하지 말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4. 신앙생활을 게을리 할 때입니다.
다시 1절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시니라" 여기 “사십 년 동안”의 40은 보통 한 세대를 가리킬 때 많이 썼는데 혹은 연단의 수, 시험의 수, 고난의 수, 징계의 수, 통치의 수 등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한 세대에 이르도록 블레셋의 지배를 받았으니 후세교육은 망쳤습니다. “블레셋 사람”은 히브리어로 “펠리슈티”인데 “진창에서 뒹굴다, 버둥거리다, 탐닉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할례 받지 못한 죄인들의 지배를 받았으니 소망이 있겠습니까? 교회를 바꾸고 나라를 바꾸는 것 어렵지 않습니다. 한 세대만 바꾸면 다 바뀝니다. 그래서 광야 40년을 통해서 구시대의 이스라엘은 완전히 소멸되고 새로운 시대로 바뀝니다. 애굽에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난이 온 것도 애굽 나라에 요셉을 알지 못한 새 왕이 집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세대를 준비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에 고난이 온 것도 새 시대를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삿2:10에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지식적으로는 알았지만 체험적으로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성령 체험이 중요합니다. 체험이 있는 시대는 다 죽고 체험이 없는 세대가 나타나면 선진들이 이룩해 놓은 업적을 무너뜨리거나 밥벌이장으로 전락시키고 교회에 노조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합니다. 노조소리가 나올 만큼 다른 사역자들을 함부로 하거나, 반대로 그것을 바꾸겠다고 노조를 만들겠다는 그 자체가 슬픕니다. 이것은 이미 끝났다는 멸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정신 차려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멀리 한 결과는 고통입니다. 그러나 징계도 은혜입니다. 약1:2-3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했습니다. 약1:12에도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C.S. 루이스는 ‘고난은 주님 주시는 변장된 축복’이라 했습니다. 변장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복 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깨달아야 은혜입니다. 그래서 시119:67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징계만 당하고 살 이유는 없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블레셋"은 오늘로 말하면 팔레스타인입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 땅이었지만 로마의 네로가 이스라엘을 온 천하로 흩은 후에 이스라엘은 2000년간 나라를 잃고 방황할 때 팔레스타인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유엔 결의로 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 지구 56%의 땅을 받아 이스라엘 독립국가를 건설했습니다. 이걸 팔레스타인과 온 아랍국가들이 반대한 가운데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금도 전쟁 중입니다. 블레셋이 태동한지 3.30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이스라엘과 전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약시대입니다. 팔레스타인들도 예수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두 나라가 전쟁할 것이 아니라 서로가 어쩔 수 없는 역사였음을 인정하고 예수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되어 서로 도우며 한 나라를 이루고 평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형제도 원수가 되어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죄악과 절망적인 비참한 처지에서 방황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멀리하고 귀히 여기지 않은 결과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진실로 하나님 앞에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격동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을 격동시킨 것들을 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 징계가 사라지고 영육 간의 사랑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