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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1-7
복음과 개혁 / 한서노회
복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복음(福音)'을 믿는다고 흔히 말하지만, 막상 복음이 무엇인지를 물으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복음은 하늘에서 온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복음이란 말이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느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 즉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된다"라는 말씀은 그대로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은 곧 그들에게 복음이었습니다. 율법은 이집트의 노예로 있던 히브리인들에게는 해방의 복음이었으며, 거룩한 백성이 되는 은총의 복음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복음이란 말이 자주 사용되는데,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전파하신 하느님 나라가 곧 복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통치 밑에서 모든 세계가 하나의 생명공동체로 통일된 세계가 곧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은 곧 죄악으로 깨어졌던 세계가 치료되고 하느님의 통치 아래서 통일되어 완전한 생명공동체로 태어남을 뜻하기에 죄악으로 신음하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소식은 곧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인간의 죄가 모두 용서되고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의 실현을 의미하지만, 또 다르게 말하면 그 소식을 가져오시고 친히 구속의 역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종합해서 정리를 하면, 복음이란 하느님의 역사 개입(介入)에 의해서 이 세계가 하느님 나라가 된다는 소식을 뜻합니다. 이렇게 복음의 정의를 넓게 잡으면, 그 안에 하느님의 말씀인 율법, 그 율법에 충실하라고 한 예언자들의 말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에 대한 증언들 즉 복음서와 서신들이 모두 포함됩니다.
이와 같이 복음은 하느님 편에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해 들어오시는 말씀이나 사건이기 때문에 거기에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이 함께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사야서 55장에 보면,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사55:11)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냥 허공을 떠돌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뜻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항상 변화의 능력을 동반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반드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또한 복음은 세상의 변화를 요청합니다. 복음은 개혁의 동기를 부여하여 복음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개혁의 역군이 되게 만듭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면 사람이 변하고, 사회가 개혁되며, 세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저항
그러나 복음이 세상에 들어올 때 세상이 순순히 그 복음을 받아드려 자신을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복음을 거부하고, 복음과 맞서며, 복음을 배척하려 합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의 세력은, 복음이 들어올 때 지금까지 쌓아올린 질서가 무너지고,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며, 그 존재 기반 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결코 순순히 물러서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저항이 일어나고 격렬한 영적 전쟁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복음이 악의 세력을 누르고 개혁의 역사를 완성하게 됩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출애급사건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의 출현은 고난 당하던 히브리인들에게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노예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이룩한 이집트 문명은 그 노예들이 빠져버릴 때 그대로 무너질 수밖에 없기에, 그들을 순순히 내보낼 수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열 가지 재앙은 이집트의 왕 바로가 얼마나 강력하게 저항했는가를 말해줍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힘에 밀려 내 보냈다가 그들을 다시 추격해서 잡아오려 했던 것만 보아도 바로가 얼마나 강력하게 하느님의 역사와 맞섰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결국 그들이 모두 홍해 바다에 빠져 죽음으로 출애급 해방의 역사는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강력한 저항이 일어나지만, 동시에 복음이 간직한 은총과 능력이 이 저항을 잠재우고 개혁의 역사를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요청하는지 몇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복음은 퇴폐한 물질문명을 몰아낼 것을 요청한다
첫째로, 복음은 잘못된 물질문명을 거부하고 개혁할 것을 요청합니다.
오늘 읽어 드린 열왕기하서 말씀은 요시야 왕이 유다를 개혁한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이 그렇게 화려하게 지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퇴락(頹落)하여 형편이 없게 된 것은 유다 백성이 하느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요시야는 이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수리하고 본래적인 모습을 되찾고자 해서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두루마리를 하나 발견하였는데, 아마도 지금의 신명기에 해당하는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책을 읽는 순간 임금은 애통해하며 옷을 찢었다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적힌 말씀들은 요시야에게는 전혀 새롭게 듣는 하느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시야는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유다 백성들의 신앙을 개혁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갖고, 바로 개혁에 착수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위하여 만든 모든 그릇과 신상을 끄집어내어 성밖 기드론 골짜기에서 불살랐고, 성전 가운데 있던 성창(聖娼)의 집을 헐었고, 므낫세 왕이 성전 두 마당에 세운 단들을 헐고 그 가루를 기드론 시내에 쏟아버렸습니다. 그는 또, 유다의 역대 왕들이 여러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위에 있는 산당에서 분향하려고 임명한,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장들을 내쫓았고, 바알과 태양과 달과 성좌들과 하늘의 별에게 제사지내는 사람들을 모두 몰아냈습니다. 이런 개혁은 솔로몬 시대부터 내려오던 모든 이교적인 산당들까지 헐어버리는 과감한 개혁으로 실행되었습니다.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모든 이교적인 신앙의 요소들을 말끔히 청소해 냈습니다.
예루살렘만 개혁한 것이 아니라 유다 전역과 심지어는 예전 북왕국 땅에 있던 산당들도 모조리 헐어버렸습니다. 거기에 제사를 지내던 제사장들의 무덤까지도 파헤쳐 그 뼈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요시야 왕의 이런 철저한 개혁은 잃어버린 야훼 신앙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물이 너무 오래 고여서 썩어버린 것과 같이 유다 왕국은 오랫동안 야훼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이교적인 신앙을 그대로 받아드려 거기에 안주하고 있었습니다. 요시야는 이렇게 그릇된 신앙을 개혁을 통해 바로 잡았던 것입니다. 복음은 이와 같이 퇴폐한 우상숭배와 그에 따른 도덕적 타락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복음이 추구하는 높은 영적 이상을 실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이 역사를 개혁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강력한 하느님의 메시지입니다. 특별히 복음은 현대 문명의 황금만능주의와 그에 기초한 인간의 헛된 욕망을 거부하고, 그것이 가져오는 인간성과 생태계의 파괴를 보게 하므로, 돌이켜 하느님의 나라로 나가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고도 우리 자신의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나아가 물질문명에 기초한 사회 개혁을 이루지 못함은 우리 스스로 복음의 요청을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고 복음의 요청을 받아드려 우리 자신의 삶의 변화를 이룩하고 사회개혁의 앞장서가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복음은 율법주의를 개혁할 것을 요청합니다.
, 복음은 율법주의와 같이 하느님께서 열어놓으신 미래를 향해 닫힌 믿음, 고정된 사상,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적 자세를 개혁할 것을 요청합니다.
오늘 읽어 드린 요한복음 2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쫓으심으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
성전 중심의 유대교, 율법주의에 고착(固着)된 유대교는 너무 굳은 틀에 갇혀서 역동성을 잃어버렸고, 율법은 오히려 사람들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습니다. 야훼 신앙이 저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약동하는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자유를 억누르는 속박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율법주의에 대하여 개혁의 기치를 드셨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중심인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자신이 사흘만에 다시 세우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개혁을 요청하신 말씀입니다. 기존의 신앙의 틀을 헐어버리고 새로운 역사 속에서 열리는 새 틀을 마련하실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철저한 개혁자였습니다.
이제까지 유대인들이 지켜왔던 율법적인 전통에 대해 완전히 새롭게 해석하심으로 저들이 안주하던 율법적 틀을 깨트리셨습니다. 성전 제사를 중심으로 한 저들의 신앙을 완전히 바꿀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내어쫓으신 것은 상업주의를 반대하신 것뿐 아니라, 제사의 필요성 자체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몸을 단번에 십자가의 제단에 드림으로 이제는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 없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심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나가는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복음은 이와 같이 끊임없이 우리가 새로워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기까지는 모든 역사는 발전하며 변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열린 마음으로 옛것에 매이지 않고 날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미래를 향해 전진해 가야할 것입니다. 특별히 이 시대가 과거 농경시대와는 달리 급격하게 변하고 있기에 정신을 차리고 이 역사의 변화를 주시하며 복음의 요청을 따라 사회개혁에 앞장서 가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과거의 어떤 틀로 규정할 수 없는 새로운 사건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치관의 혼돈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우리로 끊임없이 과거의 틀에 매이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보면서 새로운 가치관을 세울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복음은 우리로 모든 욕망을 포기할 것을 요청합니다.
요시야가 죽은 자의 무덤까지 파헤쳐 그 뼈를 불사른 것처럼, 복음은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 땅에 대한 욕망을 철저하게 포기할 것을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교 신앙의 중심인 성전 자체를 헐어버리라고 하신 것은 바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헐어버릴 것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생을 묻기 위하여 찾아온 젊은 부자 관원과 대화를 하시다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막 10:21)
예수님은 그가 이 땅에서 이룬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단순하게 그가 가진 재물만을 포기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을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영생을 바란다면 이 땅에서 이룩했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그가 가진 재물이나 지위나 젊음과 같은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가치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릴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고난 당할 것을 만류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막 8:34-35)
복음은 우리의 재물뿐 아니라 목숨까지 내놓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그보다 더 큰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목숨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목숨보다 더 귀하고 큰 은총의 선물임을 인정하고 받아드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목숨을 위하여 바쳤던 정열과 시간과 관심을 이제는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우리에게는 참으로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소중하게 생각하였던 모든 것 특히 목숨까지도 내놓을 것을 요청하기에 복음을 받았으면서도 주저하고 있으며, 얼른 결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앞에 나왔던 부자청년처럼, 자기가 가진 재물과 목숨을 내놓지 않고서도 영생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정쩡한 신앙 때문에 오늘의 교회가 개혁되지 못하며, 그 빛을 잃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 자체가 확실한 결단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회를 향하여 거듭나라고 말해보아야 별 효력이 없고 오히려 지탄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화두(話頭)인 정치개혁이 지지부진(遲遲不進) 한 것도 친일청산(親日淸算)을 비롯하여 과거의 잘못들을 깨끗하게 털어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목숨을 버려야 영생을 얻듯이, 오늘 우리 사회의 개혁도 과거의 잘못들을 깨끗이 털어 내는 아픔을 겪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순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그 뜻을 새기는 기간입니다. 다시 한번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의 의미를 깊이 새기면서 복음의 요청을 받아드려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며, 우리의 목숨까지 아끼지 아니하고 내놓을 수 있도록 결단하는 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귀기울여 듣고 목숨보다 더 귀한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복음은 끊임없이 우리가 굳게 잡고 있는 사상의 틀을 깨고 새로워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틀에 매이지 않고 미래의 열린 역사를 위해 탐험해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복음을 통한 개혁의 역사를 위해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을 겸손히 따르며, 그의 능력을 구할 때 우리는 우리의 교회를 개혁하며, 우리 사회와 민족을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강력한 복음의 요청을 귀기울여 듣고 출애급을 이끈 모세처럼, 종교개혁을 철저하게 단행한 요시야 왕처럼, 성전을 허물라고 하시면서 율법주의에 도전하신 예수님처럼, 이 시대의 개혁의 사명을 완수해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서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