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1-10
무책임한 사람이야 말로 비굴한 존재다 / 은혜목회정보
어느 목사님의 교회성도들을 대상으로 리서치를 했습니다.
성도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1)어떤 설교를 해주기를 원하느냐?
질문에는 축복에 관한 설교 (1위/46%)
육신의 질병치료와 마음의 치유(2위/28)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3위 18%)로 나타났고
2) 어떤 설교를 들을 때 가장 짜증나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1위/회개하는 설교
2위 헌금설교,
3위 전도하라는 설교라고 나왔습니다.
3)가장 부담되는 설교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는
전도하라는 설교가 첫째요
헌금하라는 설교가 두 번째요
봉사하라는 설교가 세 번째로 부담된다고 하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설문조사를 보면 성도들의 성향이 어떠하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성도들은 받는 것은 좋아하지만 하는 것은 싫어하고 누리는 것은 좋아하지만 책임지기는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책임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외에 책임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자유의지가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에는 반드시 책임을 동반합니다. 짐승에게는 책임이라는 것이 없습닏. 설령 개가 사람을 물어 죽여도 그 개를 사살할지라도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바로 책임을 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안간과 짐승을 구별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을 만나 보셨습니까? 얼마나 신뢰가 가는 사람입니까? 자기가 한 말에 대하여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책임을 지는 사람이야 말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닌가 합니다. 수없이 많은 말을 하고 약속을 하지만 자기 말에 책임을 지지 못하고 공수표로 만드는 사람들은 신뢰를 잃어 버려서 오늘 같은 신용사회에서는 살아남기 어려습니다.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사람이 2천만명이 가까운데 그 중에 신용불량자로 등재된 사람이 수백만이 된다고 합니다. 자기가 카드로 물건을 사고는 책임을 못지는 경우입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야 말로 믿을만한 사람이며 자신의 약속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야 말로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도 책임있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시편 15편에 보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아니하며'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에 유할자이며 하나님의 성산에 거할자라고 말씀합니다.
책임이라는 말은 영어로 responsibility라고 하는데 이 말은 응답하다(reponse)는 말과 능력(ability)라는 말의 합성어인데 하나님이 지워주신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책임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한 왕 아합의 무책임과 그 결과를 함께 생각하면서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첫째 생각할 것은 왕이라는 신분을 가진 자로서 그가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냐?하는 문제입니다.
왕으로서 아합이 가지고 있는 관심을 보면 그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포도원을 욕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뱃속채우는데만 관심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중이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가 있다는 옛말처럼 오직 그의 관심은 자신의 본분이나 사명에서는 멀리 떠나 있는 것을 봅니다.
그가 가져야 될 관심은 무엇입니까?
그는 어떻게 백성들을 잘 다스릴까?
어떻게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까?
어떻게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할까?
어떻게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도록 할까?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평등하게 살도록 할까? 에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여기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욕심채우는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니 나라는 뭐가 되고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백성들이 가장 많은 어려움을 당한 이유가 바로 지배자들의 부도덕하고 탐관오리적인 사고 때문이었습니다.
이 나라를 보시고 지도자들과 정치가들을 보십시오. 어디에 관심이 있고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들 싸우고 애를 쓰는지!
솔로몬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자 왕의 신분으로서 백성들을 바로 다스리고 재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오직 하나님께 그 일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을뿐 아니라 더불어 부(富)와 수(壽)도 덤으로 축복하셨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신분과 본분을 갖게 됩니다. 그 신분이 언제나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물론 달라지지 아니한 것도 있다. 자신의 신분과 본분에 따라서 사람은 책임을 가지게 됩니다.
당신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자녀입니까? 아버지요 어머니입니까? 학생입니까?? 남편입니까? 아내입니까?
오늘 이 시대 사람들가운데 자신의 신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자신의 책임이 무엇인지 잃어버린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무책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자신에게 고통이요 다른 사람에게 너무도 많은 고통과 아픔을 안겨 줍니다.
우리는 이번 수해를 통하여 무책임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오는가를 배웠습니다. 자신의 무책임은 무책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줍니다. 책임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어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좋은 남편이 되려는데 관심이 있습니까?
좋은 아내가 되는데 관심이 있습니까?
좋은 자녀가 되는데 관심이 있습니까?
좋은 학생이나 청년이 되는데 관심이 있습니까?
당신의 무책임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까? 남편의 무책임이 아내의 고통이요 아내의 무책임이 남편의 아픔이 된다는 것, 부모의 무책임이 자녀에게 무거운 짐이요 자녀의 무책임이 부모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신자의 관심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좋은 아내 좋은 남편 좋은 성도 좋은 자녀 좋은 목회자 좋은 지도자가 되는데 관심을 가져야 되지 않을까요?
둘째로 생각할 것은 왕의로서 아합의 고민과 갈등하는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민하고 괴로워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본문에 보면 아합왕이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못하고 고민하고 근심합니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렇게 잠을 못자는 는 것일까요?
나라에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어서입니까?
아닙니다.
자기 맘대로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지 못하니까, 즉 자기 뱃속을 채우지 못하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까?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자신의 본분을 잃어버린 아합왕의 모든 에너지는 오직 자기 욕심을 채우는 헛된 일에 쏟아 붓고 있습니다.
왕이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어디에 써야 하는 것입니까?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돌보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백성을 위해서는 한번도 그런 고민이나 걱정을 한 적이 없으면서 오직 자기 뱃속 채우는데 고민 갈등을 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걱정하며 근심하며 고민하십니까?
그것이 그렇게 고민하고 걱정할 일입니까?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한 고민이며 갈등이며 애쓰심입니까?
신자는 적어도 자신의 신분과 본분을 위한 것을 위해 고귀한 근심과 바람직한 고민, 아름다운 갈등, 하나님이 소중히 보시는 아픔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셋째 생각해 볼 것은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세벨과 어떤 방법이든지 간에 내 목적을 달성하기면 하면 된다고 여기는 아합의 모습입니다.
부인 이세벨은 간교한 여자인데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데는 정말 지혜로운 여자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가 자신의 성공과 목적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현대인들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합은 나봇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줄 수 없다'고 했을 때 왕의 권세로 빼앗지 않고 고민한 던 것은 일말의 양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자기 부인 이세벨이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차지하라고 하자 좋아서 취는 것을 보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죽은 것은 상관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된다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입니다. 세상은 온통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제는 그 일이 그러한 방법이 얼마나 옳고 그르냐에 대한 것은 점점 사라지고 일단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한 세대입니다.
신자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이 세상이지만 결코 하나님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차라리 목적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당당하고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이 훨씬더 멋있는 모습이요 하
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닐까요?
아합과 이세벨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의 결과를 얻게되고 무책임의 결과는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욕심을 채울 줄은 알았으나 그들의 인생을 주관하셔서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잊고 있었습니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회계할 때를 바라보며 사는 삶입니다.
나의 인생가운데 나외에 나에 대한 책임을 져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의 인생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본분과 신분에 대하여 책임있는 존재로서 살아가기를 결단하십시다
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