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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1:17-2:4) 내가 쫓겨났어도 다시 주를 바라보리라. : 박신목사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욘1:17-2:4)
기도가 아니라 신앙고백
요나서 1장은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가려 했으나 결국은 고래에 삼켜지기까지의 긴박했던 과정을 사실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이제 2장은 요나가 고래 배속에서 기도드린 내용을 상징과 비유의 수사법을 동원해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1-4절)은 기도하게 된 경위를, 후반(5-9절)은 기도했던 내용입니다.
요나는 “내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라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이미 어떤 기도를 했었고 나아가 그 응답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럼 앞부분의 “내가 기도하여 이르되”라는 말과 상충됩니다. 성경이 왜 이렇게 앞뒤로 논리가 안 맞게 기록하고 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데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진술은 사건이 다 끝난 다음에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사건 당시에 녹음기는커녕 메모장을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이 기도문도 당연히 요나가 고래 배 속에서 삼일 간 있다가 육지에 토해져 나온 한참 후에 저작된 것입니다.
보통 기도는 하나님더러 장차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는 요청이 대부분입니다. 다시 2-9절을 잘 살펴보면 마지막 9절에 요나가 서원한 내용을 빼고는 전부 과거시제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사후에 기록한 것이라 고래 배속에서 겪었던 체험과 기도드렸던 내용이 혼합되어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본문은 기도라기보다는 요나의 신앙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래 배속에서의 체험이 은혜가 넘쳤고 무엇보다 그 감정이 강렬했으니까 시가 형식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흔히 신자들이 어려움에 처하면 성경 66권중에 시편을 보면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다고 권면합니다. 누구나 겪기 마련인 인생살이의 온갖 고난들을 하나님과 교제 동행하여 이겨내면서 실제로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바로 나 자신의 신앙체험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후에는 자신만의 시편을 작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 에세이를 능숙하게 쓸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나와 하나님만의 은밀하고 진지하며 심각했던 씨름의 과정과 결말을 자신만의 언어로 정확한 문장으로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감격이 넘치면 자연히 시적 표현으로 승화될 것입니다.
남들과 나누거나 교회에서 간증하려면 아무래도 자랑과 과장이 첨가될 수 있습니다. 남에게 보일 필요가 없는 자신만의 스토리를 일기로 아니면 간단한 메모 형태라도 적어놓는 습관을 들여 보십시오. 자신만 보는 기록에 거짓말로 적을 사람은 없습니다. 신앙 체험을 구체적으로 글로 다시 정리하려면 하나님에 대한 자기 생각부터 정리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날로 깊어져서 고난이 다시 닥쳐도 그분께 받았던 은혜를 되새김질 하며 담대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스올에 던져진 요나
사실은 시편뿐 아니라 모든 성경구절을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본문도 요나가 겪었을 당시 상황을 마치 내가 겪은 것처럼 세밀하게 묵상해봐야 합니다. 먼저 사공들에게 들려서 격랑 속으로 던져질 때는 요나는 꼼짝없이 죽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배를 삼킬 듯이 덤비는 집채만 한 파도에 맨몸으로 던져지니까 공포에 질려 정신이 완전히 혼미해졌을 것입니다. 자기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이 벌로 엄청난 풍랑을 일으켰는데 다시 살아날 것은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막상 죽음이 닥치면 어느 누구도 순순히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요나도 본문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했다고 말하지만(1절) 이때에 살려달라는 외마디 비명은 질렀을 것입니다. 최소한 속으로 여호와라는 이름만이라도 부르짖었을 것이므로 사실상 이미 한 번 기도한 셈입니다.
기도가 꼭 분명한 문장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입술의 말은 물론이고 마음의 묵상까지 당연히 다 알고 계십니다. 마음속으로 어떤 소원을 생각만 해도, 나아가 자신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과 여건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묵상만 해도 아주 훌륭한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권면한 대로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살전5:17)
그리고 어쩌면 요나는 파도에 던져지자마자 실신했을 것입니다. 실신하지 않았다 쳐도 고래가 다가와 자기를 삼키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되는데 까무러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극심한 고통이 따르는 절대 절명의 순간에 이르면 자연스레 정신을 잃게 됩니다. 그 큰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해주려는 하나님의 놀랍고도 은혜로운 섭리입니다.
고래에 삼켜진지 얼마 후 정신이 돌아왔으나 사방을 살펴보니 상황은 훨씬 더 비관적입니다. 완전히 컴컴한 암흑 속인데다 비릿하고 역겨운 냄새까지 진동했을 것입니다. 요나는 2절에서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다고 고백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지지 않고 마지막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 전부 한 곳에 모여서 기다린다고 믿었는데 그 장소를 스올(음부)이라고 불렀습니다. 음부는 아무런 활동을 하지 못하고 어떤 의식도 없이 무한정 잠만 자며 기다리는 곳입니다.
기도는 의식이 뚜렷해야만 할 수 있는데 요나는 스올에서 부르짖었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처음에는 얼떨결에 자기가 죽어 음부에 떨어졌나 보다 여겼는데 곰곰 따져보니 고래에게 삼켜졌다는 사실이 기억났을 것입니다. “뱃속에서”라는 원어도 자궁, 태, 배 등을 뜻하듯이 고래 배를 스올의 배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아마도 해초도 있었을 것이니까 바다풀이 내 머리를 감쌌다고 표현했던 것입니다.(5절) 지금 어쨌든 살아있으니까 바다에 던져질 때에 살려달라고 외쳤던 첫 번째 기도는 응답된 것입니다.
실오라기 같은 생명의 소망
문제는 살아날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으니 요나가 느끼기는 여전히 스올의 배 속입니다. 음부로 넘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요나로선 이제야말로 죽기 살기로 여호와의 기적적인 간섭만 물고 늘어져야 합니다. 다시스로 도망가면서 배 밑창에 깊숙이 숨었는데도 찾아오실 정도로 여호와는 자신의 모든 생각을 아셨고 또 그래서 큰 벌로 풍랑을 일으키신 여호와입니다. 그런데 고래가 삼켰는데도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 어쩌면 여호와가 살려줄 수도 있겠다는 실오라기 같은 기대가 생겼을 것입니다.
“기도하여”(1절)라는 원어 동사는 강한 의지를 갖고서 지속적으로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고래 뱃속이지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열망하고 끈질기게 살려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사방이 컴컴하니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도무지 시간을 측정할 수도 없으니 삼일이 일 년처럼 길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고래 배속보다 차라리 풍랑이 일어도 바다가 좋으니까 어서 빨리 토해내게 해달라고 매달렸을 것입니다.
고래가 아무리 커도 요나도 성인남자이므로 몸이 움직일 수 있는 여유는 전혀 없습니다. 지금 요나는 꼼짝달싹 못하고 똑바로 누운 채 계속 꿈틀꿈틀 움직이는 고래 위벽으로 밀폐되어 있습니다. 잠시 기도하다가도 공포가 엄습해서 다시 기절하고는 또 깨어나면 살려달라는 기도를 반복했을 것입니다. 공포를 이겨보려고 억지로 잠을 청해 봐도 제대로 잠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족과 친지들의 얼굴은 물론 지난 삶에 대해 온갖 상념이 떠오르며 하나님을 거역했던 잘못을 크게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본문 같이 정제된 아름다운 문장으로 기도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예수님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했습니다.(마27:46) 그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라고 땀이 핏방울이 될 때까지 간절히 부르짖었지 않습니까? 가장 좋은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의 현재 처한 어려운 상황과 장차 소원을 있는 그대로 하나의 숨김 과장 거짓 없이 진솔하게 쏟아내는 것입니다.
요나로선 가뜩이나 사방이 컴컴해 시간 개념도 없어진데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도 구원에 대한 자신은 안 생겼을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버렸는데 또 그 벌로 이런 풍랑이 일고 고래에게 삼켜지기까지 했는데 그런 소망을 갖는 것은 사실상 그분께 불경한 죄가 되지 않습니까? 삼일 내내 정신은 자꾸 오락가락하고 무슨 생각으로 무슨 기도를 하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렇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황당한 가운데 너무나 신기하게도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과 어디선가 계속해서 공기가 주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불현 듯 깨달았을 것입니다. 다시 곰곰 생각해보니 하나님이 자기를 심판할 것 같으면 풍랑 속에 그대로 두면 되지 구태여 고래 배속에 이런 모습으로 살려둘 리는 없다는 점에 생각이 미쳤을 것입니다.
비로소 하나님이 살려줄 수도 있겠다는 소망 내지 믿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 순간 사방은 여전히 캄캄해도 그의 영혼에 한줄기 생명의 빛이 비춰지고 처음으로 평안이 채워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5절) 쉽게 풀면 무슨 뜻입니까? “제가 너무나 큰 죄를 저질렀지만 이번 한 번만 살려주시면 앞으로는 시키는 대로 순종하겠습니다.”라고 삼일 내내 울부짖었던 것입니다.
요나의 믿음
비록 요나가 본문대로 시가형식으로 기도한 것은 아니지만 고래 배속에서 그가 실제로 느꼈고 깨달았고 회개했고 간구했던 내용입니다. 바다에 제물로 바쳐질 때부터 고래가 땅으로 안전하게 토해낼 때까지 품었던 모든 생각입니다. 죽음의 문턱인 스올의 문지방을 들어왔다 나갔다 하면서 처절한 믿음으로 오직 여호와만 붙들었다는 진솔한 간증입니다.
요나는 정확히 삼일 간 죽었다 살아났기에 정확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예표합니다. 그러나 그 외적인 초자연적인 모습에만 주목해선 안 되며 그렇게 하신 뜻에 주목해야 합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7,8)
아담이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자마자 기쁨과 평강은 깡그리 사라지고 두려움과 수치만 엄습했습니다. 너무나 불안해서 동산 깊숙한 곳으로 자꾸 숨어들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시면서 먼저 찾아와 구원을 베풀어주었습니다. 요나도 자기 생각대로 하려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땅 끝까지 도망가면서 배 밑바닥으로 깊이 숨어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곳 원수의 자리에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대로 버려두지 않고 고래 배속까지 오셔서 그를 살려내었습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신자를 박해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늘의 찬란한 빛 가운데 만납니다. 그 후 삼일 간 봉사가 되었는데 빛이 차단된 흑암 속에서 갇혔습니다. 본문의 요나와 똑같은 심정으로 죽기 살기로 기도했더니 다시 빛을 보게 해주었습니다. 고래 배속의 컴컴한 암흑 속에도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요나와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최근에 사람들이 관에 들어가 땅에 묻히는 죽음 체험을 하는데 빛은 완전히 차단되지만 공기는 계속 주입시킵니다. 하나님이 바울처럼 요나에게도 그런 죽음 체험을 시킨 것입니다. 영적인 롤러코스터를 타고서 완전히 죽음의 자리에까지 끌어내려선 그의 자아를 완전히 깨트리고 겸손해지도록 낮춘 것입니다. 모든 도덕적 종교적 영적인 의로움이나 우월감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서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 과 의미가 없고 한갓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목적은 오직 당신만 순전히 믿고서 전적으로 의탁 순종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기 생명이 한갓 고래 배속에 삼켜진 다른 작은 물고기들과 똑같이 초라하고 연약함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들에 핀 백합화도 공중 나는 새도 여호와가 먹이고 입힌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인생의 살고 죽음 자체가 전적으로 그분의 손에 달렸는데도 인간들이 그분을 거역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 만물을 만드시고 계속해서 통치하시는 분에게서 피조물에 불과한 주제에 땅 끝으로 도망가려 시도한 것부터 너무나 어리석다 못해 참으로 부끄러운 짓임을 요나더러 알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5절에서 자기는 하나님을 거역하였고 주님도 비록 큰 벌을 주었으나 결코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주의 성전을 다시 바라보겠다고 간절히 서원했더니 하나님이 다시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 전에 시체와 방불하게 사방이 막힌 가운데 있는 그에게 하나님이 산소를 주입시켜주었기에 그런 소망과 회개할 마음도 주님이 심어준 것입니다.
이미의 신학과 마침의 신학
본문의 요나의 신앙 고백 가운데 정말로 놓쳐선 안 되는 사항이 하나 남았습니다. 요나서 전체는 요나가 기록한 것이므로 본문의 기도문만이 아니라 다른 진술에도 그의 믿음이 배여 나옵니다. 바로 1:17인데 “여호와께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라고 말합니다.
‘이미 고래를 예비하사’라고 말했지 ‘마침 고래를 시켜서“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미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다 알고 미리 준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껏 모든 일을 미리 계획하고 그대로 실행한 것입니다. 요나는 비록 지옥 같이 끔찍한 일을 겪었지만 다 끝나고 나니까 하나에서 열까지 하나님이 이미 계획했었고 또 그래서 고래를 예비하신 것이라고 밖에 해석되지 않더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반면에 마침은 어떤 일이 일어나기 직전 혹은 직후에 그 일에 대한 대응책이 마련된 것입니다. 고난이 생긴 후에 구해주는 것입니다. 요나서의 우연의 일치를 일부 목회자들이 셀리의 법칙으로만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신자에게 아무리 큰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은 곧바로 즉, 마침 좋은 길로만 인도한다는 식입니다.
신자들이 대체로 위급한 일이 생겨야만 새벽예배에 기도하러 나옵니다. 그러고 어서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떼만 씁니다. 요나서의 우연의 일치를 마침으로만 이해하니까 자기 고난과 문제도 마침 적합한 구원의 손을 뻗어달라고 부르짖고, 또 그렇게 안 되면 하나님께 의심 불평하기 바쁩니다. 또 그런 믿음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 그렇게 오래 기도해도 하나님이 나에게 지금 침묵을 넘어서 외면하는가보다 그저 불안해합니다.
어떤 큰 고난도 그분의 계획에 이미 들어있었다면 그 선한 결말도 당연히 그 계획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자는 어떤 고난도 그분을 더 깊이 알아가고 나의 연단과 성숙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내가 약한 가운데 그분의 능력이 더 커진다고 절감한 바울처럼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나는 자기 죄로 인한 형벌마저 여호와의 계획이었음을 뒤늦게 스올의 배속에서라도 확신하게 되었기에 주께 쫓겨났어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담대하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자의 인생은 일백 번 넘어져도, 비록 자기 잘못과 죄 때문일지라도 다시 일백 한 번 일어서는 끈기의 씨름이어야 합니다.
저도 약 이십오 년 전에 요나와 아주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맞아서 한국에서 온 가족들과 함께 콜로라도 주의 로키마운틴 국립공원에 차로 여행 갔습니다. 한여름인데도 해발 수천 미터나 되는 정상에 쌓인 눈을 구경하고 구불구불 험준한 산길을 내려오는 도중에 갑자기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들었습니다. 실제로 낭떠러지로 추락할 판으로 죽음과는 단 몇 초의 거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다른 가족은 다 자고 있었고 깨어있던 아내가 “주여, 주여!”라는 외마디 고함만 질러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커브 옆의 작은 공터에 큰 SUV가 빈차로 정차하고 있었는데 그 차를 들이박고서 겨우 멈춰 서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 순간 집사람의 “주여, 주여”라는 울부짖음이 할렐루야로 바뀌었습니다. 운전하고 있는 저로선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정확히 아니까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고 죄송하지만 가족이 몰살하겠다는 생각도 스쳐지나갔습니다. 차가 안전히 정차한 후에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한 동안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 차 주인은 처음에는 자기 차를 갑자기 누가 와서 들이박았기에 크게 놀래며 따졌습니다. 우리 사정을 들어보니 자기 차는 망가졌어도 그 덕분에 우리 일가족이 살아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이 저희더러 예수 믿는지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한인 교회 목사라고 답하니까 그들의 눈에 눈물이 글썽해지면서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해주는 천사의 역할을 하라고 자기들을 미리 그곳으로 보낸 것이라고 하면서 그들이 더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반대로 저희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너무 놀랐고 두려움에 떨릴 정도로 은혜가 넘쳤습니다. 그 동네에 사는 주민이었는데 오랜 만에 자기들만 아는 숨겨진 폭포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그곳에 정차해두고 계곡 아래에 내려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침 그날, 마침 그 동네 사람이, 마침 그 폭포가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마침 그 시간, 마침 그 장소에, 마침 그렇게 큰 차로 주차하게 된 것 등등은 확률 상 도저히 계산이 안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런 마음을 심어주고 미리 모든 것을 이끄신 것입니다. 그 차가가 마침 그 시간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장소에 하나님이 대기시켜 놓으신 것입니다. 요나에게 마침이 아니라 이미 고래를 준비해서 살려둔 것처럼 말입니다.
주의 성전을 바라보라.
하나님의 이미는 인간이 눈으로 보고 알 수 있는 수많은 마침의 집합체입니다. 요나서의 열 번 가량의 우연의 일치들은 모두 합쳐져 그분의 완벽한 계획을 이뤄나갑니다. 하나라도 빠지면 계획은 이뤄지지 않기에 빠질 리도 절대 없습니다.
믿음은 그래서 삶의 현실에 수시로 나타나는 수많은 마침을 하나님의 이미 예비하심으로 바꿔서 이해하고 반응할 수 있는 실력입니다. 매사를 자기 뜻대로 행하다가 문제만 생기면 때에 맞춰서 구해주는 수호신 같은 하나님만 찾으려는 너무나 잘못된 미신적 사고와 습관을 완전히 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자기 뜻대로만 행하려다 그 길이 막히니까 하나님께 의심과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고 어서 빨리 와서 해결하라고 떼만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에게 거룩하고 완전하신 당신에 뜻에 합당한 완벽한 계획과 일정표를 이미 마련해 놓았습니다. 신자 주변에 있는 모든 사건과 사람과 여건은 그 계획이 아무 차질 없이 달성되게 만드는 통로 내지 도구입니다. 심지어 요나가 삼켜진 고래 배속의 음부 같은 흑암이나, 저희처럼 콜로라도 높은 산 절벽에서 브레이크가 고장 나는 일까지도 당신의 계획에 따라 예비해놓으신 것입니다. 신자가 할 일은 그분의 뜻을 최대한 분별하여 감사함으로 순종하면서 자신의 성장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어리석어 그분의 뜻을 미리 알 수 없으니까 앞서가시는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자기를 어디로 인도하던 묵묵히 기다렸다가 따라가야 합니다.
배를 삼킬만한 파도는 반드시 요나가 바다로 던져지는 순간 맞추어서 멈추어져야만 했고 고래도 그 직후에 요나를 삼켜야만 했습니다. 그 외의 일은 그분의 계획에 아예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바다의 큰 풍랑소리는 하나님이 요나를 찾으려고 부르는 사랑스런 음성이었고 그를 산 채로 삼킨 고래는 하나님이 보낸 천사였습니다.
그런 분이 바로 지금 당신의 인생은 물론 이 황당하고 우리 모두 생전처음 겪는 미증유의 고난인 코로나 사태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럼 그 모든 일의 궁극적인 결말도 그분의 뜻대로 완벽하게 선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신자이면서 그것도 새벽기도에 개근하면서 왜 계속 불안해하십니까? 마침의 하나님, 수호천사 같은 하나님 밖에 믿을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꼼짝 못하고 죽을 수 밖에 없었던 홍해를 하나님의 큰 기적으로 생명을 건지게 된 출애굽 후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리암의 선도 아래 역사상 최대의 찬양 집회를 열었습니다. 콜로라도 낭떠러지에서 제 아내의 “주여, 주여!”라는 외마디 울부짖음을 눈물로 감격하는 할렐루야로 바꿔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고래 뱃속에서 사흘간 죽었다 살아난 요나도 땅에 발을 딛자마자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노래했을 것입니다. 본문은 기도가 아니라 실은 요나가 부른 할렐루야 찬송가입니다.
지금 요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바꿔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썩어져 가던 옛 사람이 완전 죽었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습니다. 바울처럼 요나처럼 실제로 죽음의 체험을 거친 것입니다. 또 아담처럼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직접 성령의 가죽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세상 어떤 것도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 안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는 성령의 새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럼 우리도 새 노래로 그분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사실상 본문의 요나의 찬양마저 하나님이 미리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아무리 사방이 흑암에 잠겨있어도 요나처럼 하나님만 붙들면 코로나사태에도 당신의 때에 반드시 안전한 땅에 발을 디딜 수 있고 요나 같은 찬양을 그분께 올려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로 매일매일 나 혼자만 아는 그분의 은혜가 있습니까? 다윗처럼 원망 불평 의심까지 포함해서 하나님 앞에 현재 자신이 서있는 모습 그대로 신앙비망록을 작성해보십시오. 아니면 범사를 하나님 중심으로 묵상만 해도 반드시 감격에 넘친 찬양이 나올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 자신이 정말로 ‘마침’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미’의 하나님을 믿는지부터 확실히 해두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