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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 47. 검과 뭉치를 가지고 - 마 26: 51. 칼을 빼어
7. 잡히시다 ( 26: 47-56. 막 14: 43-50. 눅 22: 47-53. 요 18: 3-12 )
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 26: 47. 검과 뭉치를 가지고 -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 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
유다는 위선적 입맞춤으로 주님을 잡히시게 했다.
이 세상에는 돈 욕심, 배신, 폭력이 있으나, 천국에는 의와 사랑과 진실이 있다.
1] 말씀하실 때에
예수의 체포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대화를 막 끝마치는 것과 더불어 체포자들이 예수의 무리 모인 곳으로 들이닥쳤다.
2]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공관복음서 모두가 유다를 '열둘 중에 하나'로 기술하고 있다. 아마 이것은 당시에 일반화된 유다의 별칭이거나 아니면 배신행위가 얼마나 가증스럽고 불충(不忠)한 것인지를 드러내 보이기 위한 표현인 듯하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지극히 명예로운 대명사였지만 그 중의 '하나'는 지극히 저주스러운 대명사가 되었다.
* 막 14: 43 -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 눅 22: 47 -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마태는 유다가 언제 제자들 사이에서 빠져 나가 예수를 잡으려고 하는 자들과 어울렸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반면에 요한은 유다가 마지막 만찬 때에 떡 조각을 받은 후 제자들의 무리로부터 이탈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 요 13: 30 -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아마 유다가 대가를 받고 알려 주기로 한 것은 민란을 일으키지 않고 어느 조용한 곳에서 예수를 체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정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주로 어떤 곳을 자주 찾으시는지를 익히 알고 있던 유다는 그분이 유월절 식사 후 감람산 겟세마네로 가실 것을 알고 나가서 무리를 끌고 그곳으로 왔다.
3]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이때 유다를 따라온 '큰 무리'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사람', 곧 산헤드린의 서기관들과 평의원들이었다. (21: 23).
이와 더불어 눅 22: 52에는 '성전의 군관들'로, 요 18: 3에는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로 되어 있다.
특히 요 18: 3, 12에 사용된 군사용어로 미뤄볼 때 성전 경비대 및 기타 고용된 건달패 그리고 로마 군인들도 다수 있었던 것 같다.
* 눅 22: 52 -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 요 18: 3 -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많은 학자들이 이때는 아직까지 로마 군인들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어느 정도는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특히 로마 병사들은 명절 기간의 치안 유지를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산헤드린으로부터의 병사 파견 요청을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처음부터 이 음모의 내막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만약 그것을 아내에게 이야기해줬다고 가정한다면 그 아내가 꾸었던 꿈을 설명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 마 27: 19 -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칼'은 로마 군인을, '몽치', 곧 곤봉은 유대인 성전 수비대의 사병들을 지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마태는 '큰 무리'라는 표현으로 예수를 잡으러 온 사람들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혹자는 이때에 예수를 잡으러 파견된 자가 약 200명에 달했으며, 그 주위의 구경꾼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Lenski).
55-56절에 비추어볼 때, 예수께서 스스로 기꺼이 고난의 잔을 받아들이고 있으므로 그렇게 많은 무리는 사실 필요가 없었다.
마 26: 48. 그를 잡으라. -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
유다는 그들과 군호를 짜고 자기가 입을 맞추는 자가 예수임을 알려주었다.
1]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당시는 사진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우거진 감람나무 사이의 어두운 밤이었으므로 요주의(要注意) 인물을 찾아내기가 상당히 까다로웠을 것이다.
따라서 유다는 예수가 있는 곳에 도달하기 전에 무리들과 신호를 맞추어 손쉽게 체포하도록 했다.
2]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당시 유대인들에게 입맞춤이란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는 일반적인 인사법이었다. 정상적인 인사 형태인 입맞춤이 어둠 속에서 체포의 군호로 사용됨으로써 마침내 배신과 위선의 상징으로 굳혀지고 말았다.
* 삼하 20: 9 -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내 형은 평안하냐?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와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이곳에 몰려온 무리들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때 그의 말을 들었던 무리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입맞춤에 의한 확인이 필요했다.
49절에서 다시 반복해 사용된 '입 맞추다(*, 카타필레오)는 동사는 본 절에서 사용된 '입 맞추다'라는 동사와 어근은 같으나 형태가 약간 다르다. 즉 본 절의 입맞춤은 단순한 인사로서의 형식적인 표현이라면, 49절에서 사용된 동사의 의미는 '반복하여 거듭 입 맞추다' 또는 '친밀하고 뜨거운 포옹' 정도의 뜻이다.
여하튼 제자와 스승 사이에 있어서 제자가 먼저 스승에게 입 맞추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고 한다. 제자가 스승에게 먼저 입 맞출 수 없는 이유는 제자와 스승이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다의 입맞춤은 예수와의 사제(師弟) 관계가 최종적으로 부정되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유다의 이 행동은 일종의 모욕적 행위를 뜻한다.
본문의 이 장면은 다윗 시대 요압이 아마사에게 입 맞추려는 체하면서 칼로 그를 찔러 죽인 사건을 연상시켜 준다.
그들은 겉으로는 평화와 정의와 사랑을 부르짖지만, 속으로는 파멸과 불의와 탐욕을 획책한다. 이러한 야누스(Janus)적인 성격이 사단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악인의 전형적 속성이다.
* 삼하 20: 9-10 – 9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내 형은 평안하냐?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와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하지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의 배를 찌르매 그의 창자가 땅에 쏟아지니 그를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 고후 11: 13-15 – 13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마 26: 49. 랍비여 -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
유다는 예수를 랍비라고 불렸다.
1]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이는 통상적인 인사말이다. 여기서는 예수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기보다 따라온 무리들에게 확연히 들리도록 하는 또 하나의 신호였다.
마태복음 전체에서 제자들이 예수를 '랍비여', 즉 '선생님이여'라고 부른 경우는 본 절과 25절에 두 곳 뿐이다.
두 경우 모두 예수를 팔아넘길 가룟 유다에 의해서 불리어진다. 제자들이 예수를 부르는 호칭은 '주님이여'이다.
마 26: 50. 친구여 -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
예수는 군호로 입맞춤하는 유다에게 친구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친구'의 헬라어 '헤타이로(*)는 동의어 '필로스'(*)가 개인적 친분을 뜻하는 것과는 달리 주로 직업적인 동료 관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따라서 그 말 속에는 적의나 반감이 없을 뿐 아니라 그렇다고 애틋한 사랑이 내포되어 있지도 않다. 예수께서는 유다를 '배신자' 또는 '악한 자'로 비난하지 않으시고 정중한 예의로 인내하신다.
2]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 말은 마가복음에는 없는 부분이고, 누가복음에는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눅 22: 48)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한 헬라어 표현인 '에프 호 파레이'(*)의 의미는 확실치가 않다.
새 번역에는 '네가 무엇을 하러 여기 왔느냐?'라는 의문형으로 번역되어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의문형보다는 오히려 생략적인 명령형으로 이해하고 있다. (원문에는 '행하라'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공동 번역에서는 '어서 할 일이나 하라'는 명령형으로 번역하고 있다. 즉 '네가 온 목적을 행하라'라는 뜻이다.
요 13: 27에서는 예수께서 '네가 할 일을 어서 하라'(새 번역)고 말씀하시는데, 의미는 일맥상통한다. 예수의 이 말씀은 자신에게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아시고 의연히 그 일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즉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服從)시키고 있음을 보여주고 계신다.
3]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이때 성전 수비 대장 또는 로마의 하위급 장교의 명령에 따라 예수께서 결박당하셨을 것이다. 예수는 어느 죄인보다 손쉽게 결박에 응했음이 분명하다.
* 요 18: 12 -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마 26: 51. 칼을 빼어 -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
요한복음 18: 10은 칼을 쓴 그 제자가 베드로이며 그 종의 이름이 말고라고 증언했고, 누가복음 22: 51은 주께서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고 증언했다.
기독교는 칼을 사용하지 않고 폭력이나 물리적 힘으로 사람들을 정복하거나 다스리지 않는다. 또 기독교는 돈이나 사람의 지혜나 조직을 의지하여 일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모두 인간적이고 세상적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진리를 말로 전하고 사랑의 실천으로 전한다.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볼 때 무력(無力)하게 보일지 몰라도, 말과 사랑은 칼보다 강하다.
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다른 공관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마태복음도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다치게 한 주인공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장본인은 베드로였다.
* 요 18: 10 –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요한은 베드로에게 귀를 잘렸던 대제사장의 종이 '말고'라는 사람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혹자는(Robertson) 마태복음을 비롯하여 공관복음서가 베드로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복음서가 기록된 후인 A. D. 68년까지 생존했었던 베드로의 안전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베드로의 행동은 심리적으로 보아도 수긍이 간다. 예수로부터 여러 번에 걸쳐서 변절(變節)하리라는 경고를 들은 그로서는 자신의 충성심을 시험하는 때가 드디어 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2]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신의 폭력 행위를 말리고, 또 순순히 결박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는 충동적인 용기가 사그라졌을 것이다.
그의 감정적인 충성심의 표현은 사실상 주께서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베드로가 참다운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직은 더 많은 연단을 거쳐야 할 것이다.
한편 베드로가 체포되지 않은 것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내는 견해도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즉시 상황을 진정시켰을 뿐 아니라 떨어진 귀를 원상으로 회복시켜 주었으므로 더 이상의 문책(問責)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눅 22: 51 -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이 '칼'을 휘둘렀던 점과, 눅 22: 49에서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라고 '우리'를 언급한 것을 근거로, 제자들 모두가 '칼'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이 열심당의 극좌파인 '시카리'파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 마 10: 34 -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눅 12: 49-51 –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 눅 22: 36 –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해석인 듯하다. 오히려 베드로는 예수의 수난 예고가 있은 후부터 예수의 신변을 보존할 목적으로 단검을 준비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