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장 : 유다 왕국의 역사 2 - 1
1. 남북 투쟁 시대(B. C 931-870, 왕상 14:21-15:24, 대하 10-16장. 르호보암-아사)
솔로몬 왕국이 분열 되었을 때는 유다 지파만이 르호보암을 따랐다.(왕상 12:20)
베냐민 지파도 처음에 여로보암을 좆았으나, 지리적으로 유다와 인접한 관계로 남 유다 소속이 되었다.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세우고 레위 지파가 아닌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삼았을 때에, 레위 지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남 유다로 귀환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르호보암의 세력이 강화되었다.(대하 11:13-17)
1] 르호보암(주전 931-913 왕상 14:21-31, 대하 10-12장. 유다 왕국의 첫째 왕)
르호보암은 41세에 남 유다의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17년을 다스렸다. 다윗을 따르지 않고 솔로몬의 영향을 받아 문란하도록 우상을 섬겼다. 암몬 족속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왕상 14:21,31)
(1) 북 이스라엘과의 전쟁(왕상 14:25,26,30)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키자 르호보암은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 중에서 용사 18만을 뽑아 여로보암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마야를 통하여 이를 금하셨다. 그 후 그는 북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항상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2) 애굽 왕 시삭의 침략(왕상 14:25-27, 대하 12:2-12)
하나님께서는 르호보암의 교만함을 징벌하시기 위하여 르호보암 제 5년에 애굽왕 시삭의 침입을 받게 하셨다.(대하 12:1,2,5,7,8) 시삭은 여로보암이 애굽에 있을 때에 그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던 왕이다.(왕상 11:40) 르호보암은 애굽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을 때에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과 솔로몬 때에 만든 금 방패까지 조공으로 바치고 겨우 나라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붙였노라....여호와께서 저희의 스스로 겸비함을 보신지라....저희가 겸비하였으니 내가 멸하지 아니하고 대강 구원하여....그러나 저희가 시삭의 종이 되어 나를 섬기는 것과 열국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알게되리라"(대하 12:4-8)
2] 아비야(주전 913-911, 왕상 15:1-8, 대하 13:1-22. 여로보암을 이김)
아비야는 르호보암의 뒤를 이어 유다 왕이 되었으며 예루살렘에서 3년간 통치하였다. 그는 르호보암의 죄를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다윗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해 주셨다(왕상 15:4, 왕상 11:13,36). 아비야는 약 40만의 군대로 북 이스라엘의 80만의 군대를 물리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으로 50만의 희생자를 내었고, 종교 중심지였던 벧엘과 몇 성읍들을 빼앗겼다(대하 13:19). 그는 북 이스라엘의 배반을 꾸짖었으며, 위기를 만났을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원함을 받았다.(대하 13:4-12)
3] 아사(주전 911-870, 왕상 15:9-24, 대하 14-16장. 성공과 실수)
아사는 아비야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에서 41년간을 통치하였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모든 우상을 제거하였다.
(1) 종교 개혁 운동(왕상 15:11-15, 대하 14:2-5, 15:8-18)
그의 개혁 운동은 궁중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어머니가 우상 숭배를 하자 이를 꾸짖고 태후의 위를 폐하였다.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들을 찍어 불살랐으며, 열조의 모든 우상들과 남색하는 자들을 제거해 버렸다. 그러나 산당은 그대로 두었다. 그는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히 행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막아 주시고 나라에 평안을 주셨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에 감사하면서 나라를 견고케 하기 위하여 성곽을 만들며 성읍들을 건축했다. 그의 개혁 운동은 선지자 아사랴의 조언이였다. 그의 경건 운동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에브라임, 므낫세와 시므온 지파 중 많은 사람들이 아사왕에게로 돌아왔다.(15:8,9) 그들은 예루살렘의 성회에 모여 온전한 번제를 드리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였다.(15:13-15)
(2) 애굽·구스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대하 14:9-15)
아사왕은 41년간의 통치 기간 중에 구스(에티오피아)사람 세라가 이끌던 애굽(구스)과의 전쟁과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와의 전쟁이었다. 세라의 군대는 군사가 100만이요, 병거가 300승이었다. 이것은 아사왕의 군대 58만과 비교해 볼 때에 두 배에 가까운 숫자였다. 아사왕은 적군이 마레사까지 진입하였을 때에 스바다 골짜기에 진을 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결국 아사왕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전쟁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블레셋 땅인 그랄까지 쫓아가 많은 전리품을 얻고, 블레셋까지 점령하였다.(대하 14:13-15)
(3) 이스라엘과의 전쟁과 하나님의 책망(왕상 15:16-22, 대하 16:1-10)
아사왕은 세라의 군대를 이긴 후에 신앙이 식어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 아사왕 16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공격해왔다. 바아사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연결해주는 요충지인 베냐민 땅 라마를 점령하고, 거기에 성을 건축하여 백성들이 유다와 연락하지 못하게 하였다. 아사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메섹(아람) 왕 벤하닷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아람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북방 이스라엘을 공격, 바아사는 철군 하게 되었다.
아사왕은 라마를 건축하던 모든 건축재들을 모아서 게바와 미스바의 두 성을 건축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하나니를 통하여 다메섹을 의지한 아사왕을 책망하자 왕은 분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하나니는 아사왕이 아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했다면 이스라엘뿐 아니라 아람까지도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아사왕은 2년 후에 병들어 죽었다.
2. 남북 동맹 시대(주전 873-835, 왕상 22:41-50, 왕하 8:16-29, 11:1-16, 대하 17:1-23:15)
1] 여호사밧(주전 870-845, 왕상 22:41-50, 대하 17-20장. 경건함과 잘못된 화해정책)
(1) 종교 개혁 운동
여호사밧은 아사의 뒤를 이어 25년간 나라를 통치하였다. 그는 왕이 될 때부터 아사가 시작한 개혁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경건한 인물로서 전심으로 여호와의 도를 행하려고 하였다.(대하 17:6, 19:3)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제하고(대하 17:6) 부왕이 미처 계속하지 못한 남색하는 자를 쫓아내었다(왕상 22:46). 그는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을 뽑고 또 방백들을 뽑아 각 성읍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게 하였다(대하 17:7-9).
(2) 군대 조직과 전쟁에서의 승리
여호사밧은 군대를 5개 군단으로 조직(유다 지파 3개 군단, 베냐민 2개 군단)하여 그 군대의 수는 100만이 넘었다. 북방 이스라엘을 방비하기 위하여 성읍들을 견고히 하고, 각 성읍마다 군대를 주둔시키고, 에브라임 성읍들에 영문을 두었다. 모압·암몬·에돔의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온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함께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아하시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왕은 특별히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찬송을 부르게 하였다. 이 전쟁은 대승리로 끝나 전리품을 나르는데 3일이 걸렸다. 그밖에도 국고성을 건축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이처럼 나라가 튼튼해지고 견고해 졌을 때도 북방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화친을 맺었다.
(3) 이스라엘과의 동맹
여호사밧은 이스라엘과 화친하기 위하여 아합왕의 딸 아달랴를 자부로 맞았다.(왕하 8:18) 그의 아들 여호람은 아달랴의 영향을 받아 종교적으로 크게 부패했다.(대하 21:6) 여호사밧은 이스라엘과 합작하여 에시온게벨에서 공동으로 배를 짓고 다시스와 무역을 통하여 오빌의 금을 가져오려고 하였으나, 선지자 엘리에셀의 예언대로 그 배가 파선함으로 실패하였다.(왕상 9:26-28) 여호사밧은 이스라엘과 군사 동맹을 맺고, 아합의 요청을 받아 아람의 벤하닷과의 전쟁에 참여하였다가 길르앗 라못에서 아합은 전사하고, 그는 구사일생으로 목숨만 건지게 되었다.(왕상 22:29-33, 대하 18:29-34)
그 후에도 여호람의 청원에 따라 모압과의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때 그들은 7일 동안 물을 얻지 못하여 군사와 가축이 다 죽게 되었다. 여호사밧이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모압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왕하 3:15-27). 그러나 선지자는 여호사밧이 이스라엘과 함께 참전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책망하였다.(대하 19:2)
2] 여호람(주전 848-841년. 왕하 8:16-24, 대하 21장)
아달랴의 섭정. 여호람왕의 유다 통치 8년간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그는 선친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아합왕을 따랐는데 아달랴 때문이었다(대하 21:6, 왕하 8:18).
하나님께서 다윗의 언약을 기억하지 않으셨다면 완전히 멸망당했을 것이다.(대하 21:7) 그는 왕이 된 후에 아달랴를 반대하는 자기 형제들을 모두 죽였으며, 이스라엘과 같이 우상숭배 정책을 썼다.
엘리야는 그의 가족들과 모든 재물을 빼앗길 것이며, 그의 창자에 중병이 들어 창자가 빠져 나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대하 22:11-15) 블레셋과 아라비아가 군대를 일으켜 유다를 쳐서 왕궁의 재물과 아들들과 아내를 탈취 당하였으며, 오직 여호아하스만 남고 자신은 예언대로 중병이 들어 2년 후에 죽었다(대하 21:16-20). 여호람 통치 중에 국세는 심히 약해져서 블레셋과 아라비아의 침략을 당하였으며, 에돔도 유다를 배반하여 독립하였고, 립나도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났다.(대하 21:8,9, 왕하 8:20-22)
3] 아하시야(주전 841, 왕하 8:25-29, 9:27-29, 대하 22:1-9. 아달랴의 섭정)
블레셋과 아라비아의 침공으로 여호아하스만이 살아남아 여호람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왕하 21:17), 1년도 못되어 죽었다. 그는 재임 동안 어머니 아달랴의 교도를 따라 아합의 길로 행하고, 이스라엘과 친밀한 교제를 유지했다. 그는 북방 아합의 아들 요람왕이 아람의 하사엘과 전쟁으로 그를 도우려 길르앗 라못으로 갔다. 그 전쟁에서 요람왕은 부상을 입고 이스르엘로 돌아왔으며, 그가 병문안 갔다가 반란을 일으킨 예후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에 아하시야는 자기의 부하들까지 잃어 왕위를 지킬 힘을 잃고 말았다.
4] 아달랴의 섭정(주전 841-835년, 왕하 11:1-6, 대하 22:10-23:15)
아달랴는 아하시야가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왕족들의 씨를 모두 죽여 버리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여호람의 딸이요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어린 아들 요아스를 간신히 피신시켜서 6년 동안 숨겨 키웠다. 아달랴는 그 어머니 이세벨의 뒤를 따라 남방 유다에서 피의 숙청을 자행하였다. 그는 바알 종교를 다시 부흥시키려 하였다.
제사장 여호야다의 반정이 없었더라면 유다는 다시 한 번 영적 암흑기를 맞을 뻔하였다. 아달랴는 여호야다의 반정으로 국민들의 칼에 죽었다(대하 23:21). 그러나 어린 요아스가 왕위에 오름으로 6년간의 암흑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북방 이스라엘과의 긴밀한 관계도 끊어져 얼마동안 두 관계는 평행을 이루어 나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