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대답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 존자 베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는 곧 ‘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아’는 … ‘기름부음받은이’라는 뜻입니다. … 주님께서는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받은이’라고 불립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 동료들이라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례 때 성령의 은총을 받기 위하여 크리스마 성유로 기름부음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존자 베다 『복음서 강해』 1,16.)
참고로, 영국에서 태어난 베다(672년경)는 일곱 살 때, 친척인 베네딕투스 비스코프 수도원장(628~689년)이 베다를 웨어머스(Wearmouth)에 있는 성 베드로 수도원에서 교육받도록 맡겼습니다. 베다는 30살 때 사제품을 받고 평생을 수도원에서 살았습니다.
베다는 수도원에서 의무적으로 매일 부르는 성가와 성경 공부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배우고 가르치고 쓰는 것이 그에게는 늘 큰 기쁨이었습다. 9세기에 사람들은 베다를 ‘존자’, 즉 ‘존경스러운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단테는 베다를 태양이 빛나는 하늘에 있는 위대한 스승이라고 칭찬했습니다(「천국」 10,131). 베다는 735년 중병에 걸린 뒤, 예수 승천일에 죽었습니다.(735년 5월 25일).
그리스도께서 몸소 기름부음 받으셨던 바로 그 성령으로 우리도 세례를 통해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여기에 대해 암브로시우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의지는 하느님의 의지와 다릅니다. 인간은 (재물과 자신의 안락만을 추구하고) … 자기 목숨을 살리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가 수난당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의 수난을 가로막고 나서자, 주님께서는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암브로시우스 『신앙』 2,7,52.)
참고로, 암브로시우스는 트리어에서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372년 경에 서로마제국 황제의 관저가 있는 밀라노의 집정관(지방장관)이 되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374년에 세례를 받고 그해 12월 7일 주교품을 받았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신자들을 가르치는 동시에, 신학을 배웠습니다.
390년 테살로니카에서 군중이 폭동을 일으키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수천 명을 죽였습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390년 성탄절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밀라노 대성당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암브로시우스는 공적으로 참회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성당에 들어올 수 없다고 황제를 가로 막았습니다. 황제는 어쩔 수 없이 그냥 돌아가 다음 공적으로 참회를 한 다음 부활절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암브로시우스가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하신 주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암브로시우스의 생애」 45,2) 암브로시우스는 397년에 죽었습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교회의 반석이고 사도들 가운데 첫 번째 사도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다시 회개하여 말과 행동을 일치시켰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말과 행동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라고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어떤 괴로움도 견디어내면서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보다도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대해 아를의 카이사리우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여, 그리스도를 따르고 싶습니까? 주님께서 겸손하셨던 것처럼 겸손하십시오. 주님의 위대함에 다가가고 싶다면 주님의 겸손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인간이 죄를 지어 길이 험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로 그 길을 평평하게 하셨고, 좁은 길을 큰 길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이 길을 두 다리로 걸어가야 합니다. 겸손과 사랑이라는 두 다리로 걸어가야 합니다. 누구나 꼭대기에 오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내딛어야 할 첫걸음은 겸손입니다. … 첫 계단인 겸손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설교집』 159,1,4.)
참고로, 카이사리우스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470년경 부르군드에서 태어났습니다. 20살 때 그는 레렝스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아를로 가서 그의 친척인 아를의 주교인 에오니우스한테서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503년 아를의 주교 에오니우스는 자신의 후임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게르만족과의 정치적 충돌 때문에 보르도로 추방당했고, 또 다시 라벤나로 유배가서 살다가 고트족 왕 테오데리크가 그를 석방시켜 주었습니다. 514년 교황님이 그에게 팔리움을 수여하고 비엔의 수석대주교이자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의 교황 대리 대주교로 승인하였습니다.
그는 주교가 된 초창기에 성 요한 수녀원을 세웠으며, 그의 누이 수녀카에게 수녀원을 책임지게 했습니다. 그는 542년 8월 27일 죽을 때까지 이 수녀원에 머물렀습니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는 6세기에 갈리아에서 활동한 가장 저명한 주교이자 인망 있는 설교가였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겸손과 사랑이라는 두 다리로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시다. 그리하여 성덕이라는 꼭대기로 올라갑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