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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우리 아부지가 하대치요
선우진은 순천경찰서에 사흘째 머무르고 있었다.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고 있는 그는 선생을 할 때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그 변모는 군복과 평상복의 차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옷에 어울리도록 그의 말이나 행동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예사로 욕이 섞이는 말을 내뱉었고, 행동도 그에 걸맞게 거칠었다. 그리고 얼굴에 찬 기운이 서린 가운데, 흰창이 많은 눈에 독기를 품고 있었다. 변하지 않은 것이라고는 여자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하야말쑥한 피부색이었다. 어쩌면 피부색깔 때문에 찬 기운이 서리는 그의 얼굴은 더 잔인해 보이는지도 몰랐다. 그가 순천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이미 색출된 부역자나 좌익들 중에서 순천중학생들과 선생들이 몇이나 되는지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한 일은 그들을 직접 심문하는 것이었다. 그의 신분을 확인한 경찰에서는 그의 요구에 적극 협조했고, 그가 직접 심문에 나서는 것을 오히려 고마워했다. 경찰들은 무더기로 잡아들인 사람들을 심문하기에도 지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사흘째 줄기차게 심문을 계속해대고 있었다. 그 동안 그의 앞을 거쳐간 학생들이 서른여덟 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목적하는 바를 아직 달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날이 하루씩 지날수록 그의 감정은 차츰차츰 초조함 속에서 비비틀려 오르고 있었다. 그런 감정의 변화를 억누르며 심문을 해나가고 있는 그의 얼굴은 더 차갑게 변해갔고, 눈에 담긴 독기는 살기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의 초조감은 날이 가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조사대상자들이 자꾸 줄어드는데 아무런 단서도 잡히지 않는 데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서른네 명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감정의 고삐를 매놓고 있었다. 그 서른네 명 중에 선생은 여섯이었다. 그들은 학생들을 다 끝내고 심문할 작정이었다. 서른아홉번째의 학생끌어오게 한 선우진은 만년필을 들어 서른여덟번째 이름 앞에 가위표를 질렀다. 만약 이놈들을 다 조사해도 그놈들을 찾아내지 못하면 어쩌나..... 그는 남아 있는 이름들을 쏘아보면서 또 같은 생각을 되씹고 있었다. 아니야, 그 세놈이 여기 들어 있지 않더라도 어떤 단서는 찾아낼 수 있을 거야. 그놈들이 아무리 비밀을 지킨다고 해도 한통속인 놈들이 모를 리가 없고, 그런 놈이 한놈만 끼여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놈들이 누군지 알아내기만 해도 일단목적은 달성하는 것이다. 이름만 알아내면 추적은 그 다음에 하면 된다. 그놈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내야 된다. 셋인가, 넷인가, 전부를 잡지는 못하더라도 한둘만이라도 기어코 잡아내야 한다. 그놈들을 잡아내서......
"여기 데려왔습니다." 굵은 목소리가 지하실을 울렸다. 명단에서 눈을 뗀 선우진은 문 쪽으로 고개를 느리게 돌렸다. "아니! 서, 선우 선생님!" 학생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토해낸 소리였다. 학생이 한눈에 선우진을 알아볼 만큼 지하실의 전등불빛은 밝았다. "이쪽으로 와서 앉어." 선우진은 턱짓을 했다. 학생의 놀람에 비해 그의 얼굴이나 말에는 아무런 감정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로서는 벌써 서른아홉번째나 똑같은 장면을 목격하고 있을 뿐이었다. 학생은 그 냉담한 태도를 감지했음인지 쭈뼛거리며 그의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걸쳤다. 교복차림의 학생의 두 팔은 뒤로 묶여 있었다. "김광식!" "예에, 선생님....." 학생이 엉덩이를 들먹하며 다급하게 대답했다. "똑똑히 들어라, 난 이제 선생이 아니다.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알겠나!" 상체를 뒤로 젖히고 있는 선우진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어려 있었다. "잘 모, 몰르겄는디요." 말을 더듬는 학생은 목이 늘어나도록 힘들게 마른 침을 삼켰다. 그 불안에 떨고 있는 모습을 눈 아래로 깔아보며 선우진의 입가에 어린 쓴 웃음은 한결 진해지고 있었다.
"난 특무대다!" "야아!" 학생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트, 특, 특....." 흡뚠 눈으로 선우진을 바라보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선우진의 입가에 어린 쓴웃음은 더욱 진해지면서 꾹다물린 입술이 왼쪽으로 씰그러지고 이었다. 이놈들아, 내가 네놈들이 놓은 칼침이나 맞아가면서 죽으나 사나 선생질만 해먹을 줄 알았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생각 때려쳐라. 내가 네놈들 칼침 맞아 죽었을라면 애당초 삼팔선을 넘어오지 않았다. 네놈 빨갱이들, 씨를 말리고 말 거다! 그는 학생들이 질겁을 하고 놀랄 때마다 그 모습을 내리깔아보면서 자신의 선택에 만족을 느낌과 동시에 꿈틀꿈틀 살아올라오는 보복감정에 전신이 뻐근해지는 통쾌감을 느끼고는 했다.
"김광식!" "예에....."
"내가 묻는 말은 한 번씩뿐이다. 절대 두 번 묻지 않는다. 물을 때마다 거짓말을 해선 안된다. 만약 거짓말을 하면 참말을 하게 만들어준다. 그 맛이 어떤지 알고 싶으면 거짓말을 해도 좋다. 똑똑히 알아 둘 것은 이젠 내가 너희들의 선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괜히 어물거려 넘기려는 생각은 이 순간부터 싹 없애라. 여긴 적당히 넘어가는 교실이 아니고 경찰서 지하실이다. 그리고, 난 특무대고, 넌 빨갱이다." 선우진의 목소리는 책을 잃어나가는 것처럼 메마르면서도 나지막하게 흐르고 있었다. 학생은 그 말에 벌써 질렸는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내 말대로 할 수 있겠나!" "예에... 선생님" "조심해! 앞으론 다시 그놈의 선생님이란 소리 지껄이지 말앗. 알겠나!" 선우진은 느닷없이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심문의 시작이었다. "예에, 알겠습니다." 학생이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이빨로 물었다. "고개를 똑바로 들어라." 선우진의 목소리는 다시 메마르고 낮아졌다. 학생이 고개를 치켜들며 앉음새를 고쳐잡았다. "앞으론 절대 고개를 숙이지 말아라." 선우진의 독기 품은 눈이 학생의 겁질린 눈을 쏘고 있었다. "예에....." "넌 언제부터 빨갱이질을 시작했나?" "긍께..... 요분 난리가 일아나고부터구만요. 따른 것 똑별나게 헌 것은 웂고, 소학생들헌테 노래 갤치는 일만 했는디오." 김광식은 입에 붙은 '해방전쟁'이란 말을 애써 피하며 굳이 '난리'라고 했다.
"넌 초장부터 그따위로 거짓말할 거야?" "아니구만요. 선생..... 아니, 저어, 거짓말이 아니구만요." "좋아, 너 그럼 난리가 나기 전부터 빨갱이질한 놈들을 알고는 있지?" "예에, 다는 몰라도 몇몇은 알고 있구만요." "넌 내가 빨갱이학생놈들한테 칼부림당한 일을 알고 있지?""예에....."
김광식은 기어드는 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고개 똑바로 들어라!" 선우진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그 말을 물을 때마다 학생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떨구었다. 처음 몇 차례는 혐의를 품었지만 똑같은 반응이 되풀이되자 그것이 같은 입장으로서 갖게 되는 공통적 죄의식이라는 사실을 그는 깨닫게 되었다. "너, 그 짓을 한 놈들이 누군지 대!" "금메요, 고것은 몰르는디요." 마른 침을 삼킨 김광식은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같은 말 두 번 묻지 않는다는 말 잊었나! 누군지 대!" "참말로 몰르는구만요. 그 일얼 학생덜이 저질렀다는 소문만 짜아혔제 고것이 누군지넌 꿩 꿔묵은 자리였당께요. 그때 들통이 나서 잽히먼 영축웂이 징역살이럴 헐 판인디, 비밀얼 철통겉이 지키지 안혔겄는가요. 그러니 그때넌 좌익활동을 안헌 지가 알 방도가 웂는 일이제라." "글쎄. 내 말은 그땔 말하는 게 아냐. 네 말대로 그땐 그랬다 치더라도, 빨갱이놈들 세상이 되고나서는 그놈들이 공을 내세우느라고 그 말을 떠벌리고 다녔을 것 아니냔 말야. 그래도 거짓말하겠나. 어서 누군지 대!" "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제만, 지넌 그런 소문 암 것도 못 들었구만요." "요런 썅간나새끼, 너 진짜 말하게 만들어줄까!" 마침내 선우진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그의 얼굴이 싸늘하게 일그러지고, 눈에서는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짓말 아니구만요, 지넌 암 것도 몰른당께요. 지가 헌 일도 아닌디 알먼 다 말허제 워째 그짓말허겄는게라." "이새끼 개소리치지 말고 아가리 닥치고, 일어나!" 선우진은 '일어나!'를 갑자기 소리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학생의 몸이 반사적으로 웅츠러들었다. 선우진의 손이 우악스럽게 학생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학생은 일으켜세워지며 눈을 질끈 감았다. '삼팔따라지'라고도 했고, '식은 죽'이라고도 했던 선우진 선생이 몇 달 사이에 이렇게 무섭고 험악하게 변해버린 것을 학생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선우진은 학생을 끌어다가 천장에 박힌 쇠고리에 늘어져 있는 동아줄 끝을 학생의 묶여있는 손목 사이로 꿰었다. 그리고 동아줄을 사정없이 위로 치켜올렸다. 학생의 묶인 두 팔이위로 휘어지며 어깨와 목은 앞으로 내뻗는 형국이 되었다. 동아줄 끝을 쇠고리에 꿴 선우진은 그 끝을 계속 아래로 잡아당겼다. 학생의 팔은 더욱 심하게 위로 휘어지며 몸도 따라 올라왔다. 학생의 발끝이 겨우 시멘트 바닥을 딛게 되자 선우진은 동아줄을 쇠고리에 고정시켰다. 고개를 길게 늘여 뺀 학생은 신음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자아, 지금도 늦지 않았다. 그놈들이 누군지 대라!" 여전히 메마르고 나지막한 서우진의 목소리였다. "선생님, 참말이구만요. 지넌 암 것도 몰른당께요. 살려주시씨요, 선생님." 고개를 치켜들고 애쓰는 학생의 목소리는 울먹이고 있었다.
"요런 간나새끼, 닥쳐라. 난 너 같은 빨갱이새끼들을 제자로 둔 일이 없다. 정 거짓말을 하겠다면 어디 맛 좀 봐라. 다 털어놓지 않곤 못 배길 테니." 선우진은 벽에 걸려 있는 전깃줄을 내렸다. 두 줄의 전깃줄 끝에는 가락지 모양의 철사가 달려 있었다. 그는 그 동그라미를 학생의 엄지손가락에 각각 끼웠다. 그리고 빠지지 않게 손가락 매듭 바로 윗부분에다가 동그라미 크기를 조정해서 고정시켰다.
책상으로 돌아와 앉은 선우진은 담배를 피워물었다. 두어 모금을 깊게 빨았다가 내뿜었다. 특무대에 몸담으면서부터 피우기 시작한 담배였다. 주량도 배 이상 늘어나 있었다. "각오하라, 전기고문이다!" 선우진은 이 말을 내쏘는 것과 동시에 스위치를 접촉시켰다. "악! 으아, 아으악, 우아아 우왁 아우아, 으아와....." 학생은 비틀리고 막히고 말리는 온갖 비명을 토해내며 몸을 비비꼬고 떨어대고 푸득거리는 몸부림을 쳐대고 있었다. "어떤 놈들이냐, 빨리 불어!" 엉덩이를 빼서 상체를 뒤로 눕힌 자세로 앉은 선우진은 학생을 노려 본 채 담배를 내뿜고 있었다. "으아아, 아으, 아우크크, 아우와아....." 학생의 비명과 몸부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선우진은 스위치를 젖혔다. 거짓말처럼 비명과 몸부림이 뚝 멎었다. 학생의 몸이 처져내렸다.
"어떤 놈들이냐, 어서 대라!" "차, 참말로 몰르는구만요. 참말이구만요, 참말이어라." 학생은 고개를 치켜들려고 안간힘하며 힘겹게 말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새끼, 맛을 더 봐야 되겠다 그거지. 좋다, 얼마든지 보여주지." 아무런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은 채 선우진은 다시 스위치를 접촉시켰다. "우악!" 다시 비명이 지하실에 가득 차고, 몸부림치는 그림자가 뒷벽에 어지러운 무늬를 찍어대고 있었다. 선우진은 비스듬하게 앉은 자세로 담배 연기를 느리게 날려보내고 있었다.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그 시간이 배는 길었다. 담배를 발로 잉끄린 그는 스위치의 접촉을 끊었다.
"어떠냐, 이래도 바른 대로 안 댈 테냐!" "지, 지넌..... 지넌 아는 것이..... 웂구만이라. 지가, 지가 잘못헌 것은 공화국 만세 불르고, 노래 갤치고, 글고..... 의용군에 지원혔다가 아직 어리다고 퇴짜맞은 것뿐이구만이라....." 묽은 침을 질질 흘려대며 학생은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요런 간나새끼, 무슨 쓸데없는 개소리 치고 있는 거야." 의자에서 더디게 일어나 학생에게로 다가간 선우진은, "네놈이 계속 거짓말을 하면 온몸의 피가 다 말라붙어 새까맣게 타죽게 된다. 어서 그놈들이 누군지. 대!" 만년필 끝으로 학생의 턱을 걷어올리며 그는 싸늘하게말하고 있었다.
"살려주시씨요, 참말로 암 것도 모른당께라, 살려줏씨요....." 학생의 풀려버린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걸 봐! 이 명단에서 혹시 그놈들이 들었으면 찍어내. 그리고 말야, 이중에서 그전부터 맹렬하게 활동한 놈들을 골라내." 선우진은 학생 앞에 종이를 펼쳐보였다. 학생은 눈을 껌벅거려가며 목을 더 늘여뺐다. 학생의 눈길이 종이로 모아졌다.
"쩌그 저 홍성문이허고요, 윤태중이가 있구만요. 그 둘이는 전부텀 씨게 활동했구만이라." 학생은 무슨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생기가 도는 음성이었다. 선우진은 더 묻는 말이 없이 종이를 접었다. 그 둘을 지적하는 것으로 더 취조할 필요는 느끼지 않은 것이다. 그 두 학생은 다른 학생의 취조를 통해서 공통점이 드러났던 것이고, 김광식은 다시 그들을 지적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었다. 선우진은 동아줄을 풀었다. 매달리다시피 했던 학생은 갑자기 줄이 풀리는 바람에 몸의 중심을 잡지못하고 비틀거리다가 겨우 제대로 섰다. 선우진은 숨을 깊이 들이켜며 벽에 붙은 초인종을 눌렀다. 또 한 가닥의 분함과 초조가 가슴에 감기는 것을 느껴다.
"이리 나와!" "선생님, 고맙구만이라." 아까의 형사가 다시 나타난 학생의 팔을 끌었고, 학생은 끌려가며 선우진을 향해 고개를 꾸벅했다. 그러나 선우진은 그쪽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담배를 피워물었고, 만년필을들어 다시 가위표를 질렀다. 그는 한풀 꺾이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넌 그때 죽을 뻔했어! 그놈들은 너를 죽이려고 했어! 그는 냉정하게 자신에게 경고했다. 온몸을 난자당해 병원에서 두 달 동안 고통에 시달렸던 일이 현실로 펼쳐졌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건 기억일 수가 없었다. 그건 지난 일일 수도 없었다. 공산주의를 척결하지 않는 한 그건 오로지 현실일 뿐이었다. 육체적 고통 위에 정신적 고통까지 겹쳐졌던 그때를 그는 절대로 과거라는 시간 속으로 흘려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를 현재로 잡아두기 위해서 교직을 버리고 특무대원이 된 것이었다.
온몸을 칼질당한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알몸으로 삼팔선을 쫓겨 넘어와서도 그런 꼴을 당했다는 것이 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이북공산당에게는 집안을 파괴당하고 재산을 탈취당했는데, 이남 공산당에게는 마지막 남은 목숨까지 잃을 뻔했던 것이다. 삼팔선을 넘으며품었던 원통함과 분함이 절망과 낙담으로 바뀌었다. 내가 살 수 있는 땅은 도대체 어디인가..... 그 어디에도 어둠뿐인 참담한 절망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원한과 증오는 깊어질 뿐이었다. 그놈들에게 원수를 갚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는 심정이었다. 언제까지 당하고만 있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이 문제였다. 김범우가 위문을 왔을 때, 월남해서 남들처럼 경찰이나 군대에 투신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던 것도 결코 즉흥적인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김범우의 말에 더 대꾸하지 않았던것은 그의 말을 수긍해서가 아니었다. 몸이 너무 아팠던 것이고, 그와는 근본적으로 생각이달라 더 말을 하고 싶지않았던 것이다.
김범우는 아주 이해하기 곤란한 사람이었다. 공산주의 활동은 하지 않으면서 사고방식은 영락없이 공산주의자였다. 자본주의를 부정했으며, 지주계급의 몰락을 당연시했고, 월남민들의 행동방식을 비판했다. 다른 것들은 다 몰라도 월남민들에 대한 비판을 보면 그는 이북빨갱이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빨갱이들에게 온갖 피해 다 당하고 삼팔선을 넘어와 자유대한의 건설에 앞장서며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는 경찰과 군대 투신자들이나 서청단원 같은 열렬한 애국자들을 싸잡아서 그는 비판하고 들었다. 경찰과 군대 투신자들은 일제치하의 근무경력을 가진 민족반역자들이고, 서청은 개인적 감정 때문에 역사판단을 잘못한 채 미군정의 사병(私兵)릇이나 하는 반민족적 감정주의자들의 집단이라고 했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않고 예수교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미군정의 특혜 아래 교회를 무상으로 받거나, 자금지원으로 교회를 지어가며 친미주의를 확대 생산하는 동시에 반공주의를 찬양해서 민족주의를 해체시키며 민족분단을 거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범우의 논리대로 하지면 남쪽에는 반공만 내세우면 안될 일이 없고, 월남자의 태반은 거기에 편승한 감정적 이기주의자들이요, 반민족적 기회주의자들이 되는 셈이었다. 물론 자신은 김범우의 그런 악의적 궤변을 이해할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다. 만약 김범우가 지금 눈앞에 나타난다면 그건 가차없는 체포감이었다. 그가 비록 공산당활동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이상 불순분자가 아닐 수 없었다. 학식이 좀 들었다는 그런 불순한 부류들 때문에 사회혼란이 야기되고 정치불안이 조성되는 것이었다. 그런 부류들은 모두 잡아들여 정신개조를 시킬 필요가 있었다. 정신개조를 하지 않으면 그건 공산주의가 틀림없으니까 더 볼 것이 없었다.
상처들이 차츰 아물어가면서 붕대의 두께도 얇아져갔고, 변소길을 오갈 수 있도록 기동도하게 되었다. 그 즈음에 고향선배 송지운을 만나게 되니 것은 참으로 꿈만 같은 일이었다. 서로 환자복을 입은 몸뚱이를 얼싸안다가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도록 반갑고 눈물겨운 만남이었다. 송지운은 서청단원으로 토벌작전에 참가하고 있다가 복부에 총상을 입고 입원중이었다.
"아니, 이 꼴이 뭐야 이거! 칼질을 당한 게 한두 군데가 아니잖냐 말야. 이래가지구두 살아난 게 기맥히다야. 요런 빨갱이놈에 쌔끼들! 다 찢어죽여야 돼! 너, 선생질 당장 때려치우라우. 이 원수 갚게 날 따라나서. 우리가 요런 꼴 당할려고 삼팔선 넘어온 거야, 이거!" 송지운은 자기의 복부 상처를 내보이고나서 굳이 자신의 상처도 보자고 했다. 어쩔수 없이 위아래 환자복을 벗을 수밖에 없었고, 열군데가 넘는 상처를 본 송지운은 흥분해서 마구 소리질렀던 것이다. 그 흥분된 소리를 듣자 그 동안에 쌓여온 외로움이 풀리는 것을 느꼈고, 그 참담했던 절망감이 걷혀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일선에서 공 세울 만큼 세웠으니 퇴원을 하면 서청을 떠나기로 돼 있어. 좀더 안전하고도 정식부대인 특무대로 가는 거야. 너도 맘 단단히 먹고 학교 때려칠 작정해야 돼. 원수도 갚을 겸 신변 안전도 취할 겸, 일거양득이 아니라 일거삼득 아니냐 이거야. 빨갱이새끼들이 드글거리는 판에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가는 언제 또 그런 꼴 당할지 모르잖나 말야. 그러다 팍 죽기라도 해봐, 그런 억울한 개죽음이 어딨어. 이남빨갱이들이 미군 다음으로 미워하는 게 우리 월남민들이라는 걸 똑똑히 알아두라고." 송지운이 심각하고 진지하게 한 말이었다.
"난 형 같은 공이 없는데....." "그런 건 하나도 염려 말라구. 네가 입은 상처가 훌륭한 공적의 표시고, 특무대는 전투부대가 아니고 수사대니까 너 같은 학력 높은 사람을 환영하는 곳이야. 그리고 내가 추천서를 달면 너 하나쯤 문제 없어야." 퇴원을 하고 한 달을 더 집에서 요양을 하면서도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광주로 간 송 선배는 어서 결정을 내리라고 편지를 보내오고 있었다. 몸이 완치될 때까지 시간 여유를 달라는 답장을 보내며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학교에 다시 나가게 되었다. 학교고 학생들이고다 정이 떨어져버린 상태였지만 막상 떠난다는 결정은 쉽지가 않았다. 가슴에 돌로 굳어져있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원한과 증오와는 별개로 군대조직에 들어가서 일을 해낼 만한 자신감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차일피일하다가 반 년이 지났고, 빨갱이들의 세력도 표나게 약해져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송 선배가 여수분실로 자리를 옮겨왔다.
"너 때문에 억지로 좌천당해 왔어야." 술자리에서 송 선배가 한 말이었다. 그건 농담이었고, 그는 중간책임자가 되어온 것이었다. 그가 가까이 있게 되자 마음이 한결 든든해졌고, 학교생활도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송선배는 자주 만나면서도 그 이야기는 차츰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 계엄령이 해제될 만큼 좌익세는 꺽여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났다.
"빨리 학교에서 빠져나와 경찰서로 가라우. 경찰서에 가서 내 이름 대고 그대로 기다리고있어. 내가 곧 데리러 갈 테니까 말이야. 알겠어?" 송 선배가 전화통 속에서 소리쳤다. 그를 따라 진해로 갔고, 그가 떠미는 대로 특무대로 들어갔다. 칼질을 당한 흉터들은 특무대장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전선의 변동에 따라 부산까지 갔다가 광주로 이동하는 틈을 내어 굳이 순천에 들른 것이다. 순천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닷새였다. 선우진은 상대를 취조할 때 결코 소리를 높이지 않았고, 주먹을 쓰지도 않았다. 소리를 지른다고 바른말을 할 공산주의자들이 아니었고, 주먹을 갈긴다고 비밀을 실토할 빨갱이들이 아니라고 결론 짓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다보면 이쪽 감정만 상하게 되고, 주먹을 휘두르게 되면 이쪽 주먹도 아프게 마련이었다. 빨갱이들을 상대로 그런 손해를 볼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고문을 하자면 그보다 효과적인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전기고문을 즐겨 사용하고 있었다. "넌 역시 머리가 잘 돌아. 선배보다 한 발 앞서가는구나야." 송지운이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치며 한 말이었다. 특무대의 일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거나 나쁘지가 않았다. 송지운이 말했던 일거삼득에다가 권력행사를 하는 맛까지 곁들여 있었던 것이다. 선우진은 명단을 다시 훑어내리다가 선생들 이름에서 눈을 고정시켰다.
이명준의 얼굴이 퍼뜩 떠올랐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민족정기니 사회개혁이니를 떠벌여대는, 김범우와 다를게 없는 불순분자였다. 그놈이 벌써 처단을 당해죽었을까? 글쎄에..... 선우진은 여순반란사건 직후에 그와 벌였던 말싸움을 생생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다음 놈 데려왔습니다." "아, 잠깐!" 선우진은 다급하게 팔을 들고 돌아앉으며, "미안하지만 순중에 이명준이란 자가 선생을 하고 있는지 어쩐지 좀 속히 알아봐 주시겠소?" 왜 그 동안 그놈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다고 속상해하고 있는 그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당장 알아보죠." 형사가 고개를 끄떡이며 돌아섰다. "너, 이쪽으로 와서 앉어." 선우진은 전번과 똑같은 어조로 말했고, 똑같이 턱짓을 했다. "아이고메! 서, 선생님....." 선우진의 얼굴을 알아본 학생도 앞의 학생과 똑같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입 닫고 조용하게 앉아." 선우진은 매서운 눈길로 학생을 훑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서너 모금 빨았을 때 형사가 나타났다.
"이명준은 현재 근무중입니다." "뭐라구!" 선우진은 벌떡 몸을 이르켰다. 그리고 소리쳤다. "그자를 당장 체포하시오!" "예! 무슨 혐의가 았습니까?" 형사가 눈을 껌벅였다. "그자는 빨갱이요!" "아 예, 알겠습니다." 형사가 고개를 꾸벅하고는 급히 돌아섰다. 선우진은 담배연기를 깊이 빨아들이며 천천히 의자에 앉고 있었다.
백남식은 벌교를 떠난 지 넉 달 만에 다시 돌아왔다. 부대가 다시 주둔하게 된 것이 아니고 개인적인 용무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의 행차는 요란했다. 그의 차림부터가 보통 군인들과는 달랐다. 그의 철모에는 '헌병'이라는 흰 글씨가 크게 박혀 있었고, 군복도 국방색이 아니라 카키색이었고, 왼쪽 어깨에는 금줄이 서너 겹으로 늘어져 있었고, 권총 손잡이 끈에도 금실타래가 흔들렸으며, 붉은 군화는 유난히 목이 긴데다가 구두끈이 하얀 것이었다.
그는 그런 눈에 띄는 모습으로 지프차 앞자리에 버티고 앉아 횡계다리 쪽에서 나타났는데, 지프차는 거기서부터 읍사무소 앞까지 질주해대며 줄곧 크락숀을 울려댔던 것이다. 사람들은 질겁을 하며 차를 피했고, 대위 계급장을 단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넘치고 있었다. 그의 뒷자리에는 총을 똑바로 세워 잡은 군인 하나가 너무 엄숙해서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읍사무소 앞에서 급정거를 한 지프차는 계속해 크락숀 소리를 질러댔다.
"아, 됐어. 너희들은 여기서 대기하도록." 백남식은 차에서 뛰어내렸다. "옛, 알겠습니다." 두 부하가 잽싸게 차에서 뛰어내려 절도 있는 거수경례를 그에게 올려붙였다. 백남식은 경찰서 쪽으로 기운차게 걸어들어갔다. 그때, 요란하게 울여댄 크락숀 소리 때문에 문을 옆으로 밀치고 나오는 두 경찰과 마주쳤다. "아니 백 사령관님 아니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백남식을 알아본 두 경찰이 황급히 경례를 했다. "어, 수고들 하시오." 계급이 높은 장교들일수록 사병의 경례를 받는 태도가 소홀해지듯이 백남식도 손조차 올리지 않고 고개만 까딱하고 그들을 자나쳐버렸다.
"아니 이거 어쩐 일이십니까. 다시 주둔하게 되신 겁니까?" 권 서장은 반갑게 악수를 나누며 물었다. 함께 일을 할 때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상대였지만 불시에 다시 만나게 되니 반가움이 앞섰던 것이다. 생존 그 자체가 소중할 수밖에없는 전쟁상황이 만들어내는 감정이었다.
"아, 나는 개인용무차 온 것이오. 난 이제 그런 골치 아픈 일 할 필요가 없게 돼 있소." 백남식은 엄지손가락을 세워 자기 철모를 가리키며 거만스럽게 웃었다. "아, 그렇군요. 진급도 하시고 병과도 바뀌셨군요." 권 서장은 그때서야 백남식의 변한 모습을 대충 훑어보았다. "어쩌다보니 그리 됐소." "아주 잘 돼셨습니다. 여러모로 축하드립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권 서장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어쩌다보니 그리 된 게 아니라 재주를 넘어도 많이 넘으셨군. 진급만 한 게 아니고 병과까지 바꾸셨으니, 그게 돈힘이 아니고서야 될 법이나 한 일이냐. 돈힘이면 안될 게 없는 세상이니까 잘해보셔. 군정치하에서 만연된 관리사회의 부정부패가 전쟁이 나면서 군인사회로 옮겨간 것을 잘 알고 있는 권 서장으로서는 백남식의 거드름을 곱게 보아줄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사적인 용무로 왔다면서 굳이 경찰서를 찾아든 행동에 비웃음이 날 뿐이었다. 자기의 출세를 과시하고자 하는 그 어린애 같은 유치한 속셈이 빤히 들여다보였던 것이다. "사적인 용무라면 어떤 일이신지..... 제가 무슨 도울 일이라도 있습니까?" 권 서장이 담배를 권하며 물었다. "아니오, 처가에 찾아오는 길이오." "처가요?" 너무 엉뚱한 말에 권 서장은 놀라움을 그대로 드러냈다. "아 뭐, 그리 놀랄 것 없소. 내가 너무 급히 떠나느라고 미처 말을 못했었는데, 거 내가 하숙하던 집 있잖소. 그 집 셋째딸하고 연분을 맺은 사이요. 아직 혼례식만 못 올렸을 뿐이지." 백남식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핫. 핫. 핫 괴상스럽게 웃어댔고, "아, 예에에..... 예에에....." 권 서장은 느린 소리에 보조를 맞추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래, 네가 출세한 돈줄이 바로 거기였구나, 그는 비로소 감을 잡고있었다.
"며칠이나 계실 겁니까?" 권 서장은, 바쁜 일이 있어 그만 나가봐야 되겠다는 말을 하고 싶으면서도 일어날 채비를 위해 형식적인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전시상황인데 헌병이 오래 있을 수 있겠소? 하룻밤만 자고 떠나야지." 백남식은 권총을 추스르며 굳이 '헌병'을 강조했다.
"그렇지요. 전 무슨 일이 생겨 보성경찰서에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이거 기차시간이 급해서 그러는데, 이따가 또 뵙도록 하지요." 권 서장은 거짓말을 지어내고 있었다. "아, 마침 잘됐소. 내 처가도 그쪽으로 가는 길이니 역까지 내 차로 태워다주겠소." 백남식이 경박하리만큼 빠른 동작으로 일어났다. 순간 권 서장은 당황했지만 곧 그의 말을 받아넘겼다.
"고맙습니다." 권 서장은 지프차 뒷자리로 올라갔다. 백남식이 앞자리에 올라앉자 지프차는 몸이 출렁거릴 정도로 급하게 출발했다. 차는 급속력으로 달리며 크락숀을 울려댔다. 곧 사람을 깔아뭉개거나 어디를 들이받을 것 같은 기세였다. 얼마 안되는 거리를 그 지경으로 내닫다보니 역까지는 금방이었다. "아이고, 정신이 하나도 없소." 권 서장은 차를 내리며 머리를 내둘렀다. "그래야 차 타는 맛 나는 것 아니겠소?" 두 팔을 허리에 걸친 백남식은 또 핫핫거리며 웃어제쳤다. "자 그럼 또 뵙겠습니다." 권 서장은 서둘러 역으로 돌아섰다. 일단 대합실로 들어섰다가 백남식이 떠나면 되돌아설 작정이었다. 백남식의 차는 크락숀을 울려대며 곧 떠났다. 창밖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권서장은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의 활개짓과 전쟁판이 제대로 어울린다 싶었던 것이다. 권 서장은 백남식의 생각을 털어내며, 이근술을 찾아볼까 어쩔까 망설이고 있었다. 이근술이 사표를 쓰고 경찰복을 벗은 것도 마음 찜찜한 일이었는데, 그가 하필이면 읍내에 자리잡은 것이다. 며칠 전에 그 소식을 듣고부터 그의 마음에 괴로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괴로움은 이중삼중으로 층이 쌓인 괴로움이었다. 예비검속은 과연 옳은 행위였던가 하는 되물음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날 밤의 끔찍했던 장면들이 되살아나고, 그것이 무모하고 잔혹한 학살행위였다는 사실을 양심상 부인할 수 없는 한 그 명령을 그대로 따른 비겁과 죄의식은 점점 커졌으며, 그러면서도 이근술 앞에서 경찰복을 걸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적지 않은 괴로움이었다. 이근술이 읍내로만 생활터를 옮겨오지 않았더라도 억지로 잊기로 작정했던 그 일의 괴로움들이 새롭게 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근술을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보성으로 가지 않고 벌교에 자리를 잡기로 한 것은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보성에 비해 규모가 배 이상 큰 벌교가 새 터전을 잡기에 그만큼 수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지, 어떤 도움을 줄 만한 일은 없는 것인지, 계속 신경이 쓰이면서도 선뜻 발길을 내딛을 수가 없었다. 그냥 모른 척 해버리자고 그의 다른 마음이 속삭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힘은 층층이 쌓인 괴로움을 무너뜨리기에는 너무 미약했다. 그를 꼭 찾아가야 한다는 것은 강박감이 되어 있었다. 윤 부자네 대문 앞에 차를 정거시킨 백남식은 계속 크락숀을 눌러대게 했다. 그 요란한 소리에 동네아이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만 할까요?" 운전병이 크락숀에서 손을 떼며 물었다. "더 눌러, 대문이 열릴 때까지." 백남식이 내쏘았고, 다시 크락숀 소리는 짧게 빵빵거리기 시작했다. "넘 집 앞에서 이 무신 난리픈굿이여! 누구 귀창에 빵구 낼라고 작심혔다냐!" 여자의 이러 앙칼진 외침과 함께 대문이 벌컥 열렸다. "귓구녕이 먹었다냐, 인자 대문 열게!" 백남식이 사투리를 흉내내며 맞쏘았다. "워메! 요것이 누구다요." 일하는 아주머니가 화들짝 졸라고는, "우리 대장님 아니신게라" 하며 손바닥을 맞때렸다. 그리고 부리나케 돌아서며, "아짐씨이, 아짐씨이이, 대장님 오셔뿌렀소오." 목청을 뽑아늘이면서 안으로 내닫고 있었다.
백남식은 그때서야 느린 몸짓으로 차에서 내려섰다. "그것 나눠들고 따라들어와." 그는 두 부하에게 턱짓을 하고 돌아섰따. 그가 대문을 들어서는데 송씨와 딸들이 우르르 마당을 가로질러오고 있었다. 송씨와 연희를 한눈길에 싸잡아넣으며 빙긋 웃음지었다. "여어 오시게. 무사혔었구만." 송씨는 반가움보다는 장모로서의 체통을 살리려고 애쓰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어색하면서도 찌푸러들고 있었다. 반가움을 못 이긴 딸이 어느새 백남식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다들 무사했군요." 백남식은 모두를 휘둘러보며 능청스럽게 웃고 있었다. "대위님, 이거 어디다 놀까요?" 상자를 두 개씩 나눠든 두 부하가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어, 저 마루에 갖다 놔." 백남식은 마루 쪽을 손가락질하고는 마치 자기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송씨보다 먼저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요것이 머시당가요, 대장님?" 하나뿐이면서 막내둥이인 아들이 호기심이 찬 눈으로 마루에 쌓인 상자들을 보며 물었다. "응, 너 줄려고 가져온 선물이다. 뜯어서 먹어라." "야아, 우리 대장님 질이다!" 막내아들이 소리치며 상자들을 얼싸안았다. 그건 미군용 씨레이숀이었다. 백남식은 안방에서 송씨와 얼굴을 마주대하고 앉게 되었다. 아무런 눈치를 모르는 연희는 백남식 쪽으로 치우치게 앉아 있었다.
"며칠이나 있을 것인가?" 송씨가 꺼낸 첫마디는 이랬다. 백남식은 이상한 느낌이 스쳐 송씨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앉자마자 그런 말을 물으시오?" "그럴 일이 있네." 송씨의 얼굴은 무겁고도 흐렸다. "전쟁통인데 오래 있을 수야 없지요." "쟈가 홀몸이 아니시." "그래요?" 그건 분명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말이었지만 백남식은 짐짓 태연하게 대꾸했다. "요분에 걸음헌 짐에 혼례식얼 올려야 쓰겄네." 송씨의 어조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니, 난 하룻밤 자고 내일 떠나야 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요? 그게 뭘 그리 급한 일이라고."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없일 졸아붙여놓은 듯 강단지게 생긴 백남식의 얼굴에 노기가 드러났다. 그 얼굴이 차고도 고약스러워 보였다. 저놈이 무신 곤조 드러운 심뽀여.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떠받치며 마을을 추슬렀다.
"고것이 무신 기맥힌 소린가. 혼례식도 안 올린 처녀가 나날이 배불러지는 것 맹키로 이시상에서 더 다급헌 일이 워디 있다고 그런 태평시런 소리 허고 앉었는가 시방." 송씨의 얼굴도 백남식의 얼굴 못지않게 화가 백질되어 있었다. "아, 전쟁터에서 날마다 사람들이 수도 없이 죽어자빠져가고 있는 판인데 그까짓 혼례식이 그보다 더 급하고 중하단 말이오?" "여그넌 전쟁터가 아니여. 그냥 사람 사는 시상이제. 애맨소리 끌어 다붙이지 말고, 자네말투럴 가만히 보자니께 혼례식얼 올리고 잡덜 않는 모냥인디, 대체 어쩔 심판인지 똑떨어지게 말얼 혀보드라고." 송씨는 치맛귀를 잡아채서 야무지게 여미며 앉음새를 고쳤다. 방안의 험악해지는 분위기와는 달리 마루에서는 씨레이숀을 놓고 서로 다투는 소리들이 왁자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연희는 고개만 푹 수그리고 앉아 있었다. 백남식은 송씨의 기세에 정면으로 맞설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그래가지고는 손해만 볼 뿐 이익될 게 아무것도 없었다. 두고두고 챙겨야 할 큰 이익은 접어두더라도, 당장 해결해야 될 문제도 그르칠 판이었다. 그까짓 결혼식인지 혼례식인지 백 번인들 못하랴. 백남식은 재빨리 작전을 바꾸고 있었다.
"좋소, 내 맘을 딱부러지게 발하자면, 혼례식을 안 올리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 식이라는 것이 맨주먹으로 되는 일도 아니니 준비도 있어야 할고 할 텐데, 너무 갑자기 몰아대니 정신도 없고 시간도 없고 해서 좀 늦추자는 것뿐인지 다른 뜻은 없소." "고것이 참말이여?" 눈을 똑바로 뜬 송씨의 다짐이었다. "남자일언 중천금이요." 백남식이 점잖게 쓴 문자였다. "그러먼 되얐네. 나가 애시당초 자네 맨주먹인 거 다 알었응께 준비야 걱정할 것 웂고, 혼례식 올리는 시간이야 반 시간이먼 넉넉허고, 워쩐가, 낼 점심 전에 식얼 올리는 것이." 송씨가 다잡고들었다.
"야, 그리만 해준다면야 당연히 식을 올려야지요. 남자 체면이 좀 깎여서 탈이지만." 백남식은 선선하게 대답했다. "되얐네, 결정났네." 송씨가 어깨숨을 쉬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소." "무신?" 송씨는 제자리를 잡은 가슴이 또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결혼은 해도 전쟁통이라 데려갈 수가 없소." "아이고네, 속도 으지렁시럽기도 허시. 자네가 딜고 가겄다고 혀도 나가 안 보내. 난리 다끝날 때꺼정 고이 맡어줄 팅께 고런 걱정은 마소." 송씨는 비로소 마음이 풀려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고개를 든 연희도 안도하는 얼굴로 백남식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자네넌 인자 쉬소. 말자야, 싸게 일나그라. 지금부터는 준비혀야 쓴께." 송씨는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일어났다.
"아니, 홀몸도 아닌 사람을 부려먹을라고 그러시오?" 백남식이 화를 내는 척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이고메 으짤끄나, 폴세부텀 각시 편역들고 나오는 것 잠 보소웨. 일이야 다 사람 사서 헐 것이고, 야허고는 의논헐란 것잉께 속태우덜 말드라고잉." 말에서 신명이 일고 있는 송씨의 얼굴은 꽃빛으로 환했다. 연희의 얼굴도 부끄러움과 기쁨으로 생기 넘치고 있었다.
"참, 밖에 있는 애들한테 방 하나 비워주시오." 백남식은 벌렁 드러누우며 말했다. 자신의 용건은 저녁이나 먹고나서 꺼내놓기로 했다. 이제 그 일은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하나도 서두를 것이 없었다. 이미 지난번에 재산의 반의 반을 자신의 몫으로 정해놓았던 것이고, 결혼식을 치르는 것은 그 말로 된 약속의 권리행사였다. 그는 느긋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첩이야 많을수록 좋고, 재산까지 업고 오는 첩이야 더 말해 뭐 하나. 꿩 먹고 알 먹고가 바로 이런 것 아닌가. 이것도 다 능력있는 사나이의 놀음인 거라. 흐흐흐흐..... 백남식은 소령, 중령, 대령을 거쳐 별을 단 자신의 모습을 삼삼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백남식은 늘어지게 한잠을 자고나서 온갖 반찬으로 그득한 저녁밥상을 받았다. 매실주를 반주삼아 숨길이 거북하도록 배를 채운 다음 슬슬 용견을 꺼냈다.
"장모님, 장모님 눈에는 내가 달라진 것이 안 보이시오?" 백남식이 송씨를 '장모님'이라고 부르며 비식이 웃고 있었다. "잉, 채림이 전허고 달브기넌 달브디 여자라논께 워찌 달븐지 알겄다고?" 송씨는 어색하고 당황스럼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얼버무리고 있었다. 사위를 만들려고 먼저 몸이 달았으면서도 막상 '장모님' 소리를 듣게 되자 송씨의 마음을 이상스럽게 헝클어졌다. 저것이 딸년까지 욕심내서 그렇지 한동안은 밤새는 것이 아깝다 하고 얼크러지고 설크러진 사이였다. 깊어진 정을 더 어쩔 수 없이 한몸이 되기도 하지만, 몸이 품은 열을 풀어 내자고 서로 뭄을 섰어도 열만 풀리는 것이 아니라 열이 풀린 만큼 정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딸년과의 관계를 알았을 때 그 정은 다 끊었지만, 갑자기 '장모님' 소리는 듣게 되니 순간적으로 그 정이 되살아나며 가슴을 흔들었다. 문딩이, 나허고만 고이 정 통혔어도 그만헌 재산이야 띠줬을 것인지. 송씨는 이 느닷없는 생각을 어금니로 깨물었다.
"참, 군인 장모가 될려면 좀 알아두시오. 난 헌병이 된데다가, 대위로 진급을 했소. 헌병이 뭐냐 하면, 간단하게 말해서, 군인들을 다루는 경찰이오. 그러니까 옛날처럼 앞장서서 싸우지 않아도 되는 거요." "글먼 위태헌 것일 면헌 것 아니라고? 영판 용허시." 송씨가 관심을 내보였다.
"맞어요, 그건 아무나 그렇게 되는 게 아니요." "하면, 넘덜보담 똑별나야겄제." "근데, 그것만 자기고 되는 게 아니요. 군대도 사람 사는 세상이니까 요게 뒤를 밀어야 해요, 요게." 백남식은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손을 흔들었다. 그 동그라미를 보는 송씨의 얼굴이 사르르 변했다. 백남식은 그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아니, 장모님 얼굴색이 왜 변하지요? 내가 잘되는 것이 싫으시오?" 백남식은 총검술하는 기분으로 직선으로 찌르고 들었다. "아니시, 아니시, 자네가 잘돼야 나도 좋제. 항, 나도 좋고말고." 송씨는 고개까지 저어대며 억지웃음을 피워내고 있었다. "그리고 헌병이라고 다 안전한 게 아니오. 최전방에 투입되는 헌병도 얼마든지 있소. 안전하게 버티자면 다 요것 힘이오. 군인한테 전쟁은 한바탕 노름판인데, 개죽음을 하느냐 출세를 하느냐 하는 끗발은 바로 요것에 달렸소. 그래 내가 형편이 급해 요것을 미리 끌어다 썼니 내일 떠나기전까지 장만 좀 해줘야 되겠소." "얼매럴?"
송씨는 얼굴이 싹 굳어졌다. "엄니이, 사람 무색허라고 말얼 그리 물으먼 워쩐당가. 이따가 나가 엄니한테 전할라네." 연희가 화를 내며 불쑥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아이고 이년아 폴세부텀 서방눔 편엿들고 나서냐. 송씨는 이래저래 가기차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내질렀다.
"알것다, 니 알아서 해라." 송씨는 방문을 밀어치고 나갔다. "그래, 그래, 우리 연희 최고다. 넌 장군 마누라 자격이 충분해." 백남식은 연희를 끌어당겨 한 팔로 안고, 다른 팔은 치마를 헤치며 흐흐거리고 있었다. 백남식은 다음날 사모관대를 점잖게 차려입고 결혼식을 올렸다. 그 갑작스러운 결혼식에 읍내의 기관장이며 유지들 거의가 얼굴을 내밀었다. 송씨의 성화로 백남식은 서장이나 읍장에게 전화를 걸지 않을 수 없었고, 그의 전화를 받은 그들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살이인지라 여기저기 연락을 하게 되었고, 연락을 받은 사람들 또한 울며 겨자 먹기로 돈봉투를들고 얼굴을 디밀어야 했다. 다른 결혼식과는 달리 그 결혼식의 절정은 신랑 신부가 화합주 나누는 대목도 아니고, 맞절하는 대목도 안고 아홉 발의 공포를 쏘아올린 것이었다. 사람들이 제법 모여든데다가 돈까지 들어오게 되자 백남식은 정말 장가를 드는 것처럼 기분이 달떠올라 즉흥적으로 '가보'를 생각해내 예포 아닌 축총을 아홉발 쏘게 한 것이다. 송씨는 그 느닷없는 예식을 누구보다 좋아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백남식이 떠나게 되자 사람들은 그때서야 그들이 신랑 신부가 아니라 구랑 구부라고 입들을 모았다.
하대치의 두 아들 길남이와 종남이는 길가의 밭두렁을 지친 걸음으로 타박이며 걷고 있었다. 밭농사는 어느새 거지반 추수가 끝나 있었고, 마른 풀섶 사이사이에는 작은 가을꽃들이 피어나 있었다. 길남이는 오른손에 호미를, 왼손에는 테가 반이나 빠져 댓살이 멋대로 뻗치고 있는 헌 소쿠리를 들고 있었다. 소쿠리에는 이상하게 생긴 물건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종남이는 찡등그린 얼굴로 형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그 칙칙 끌어대는 걸음걸음에는 얼굴에 내밴 것만틈 진한 짜증이 묻어나고 있었다. 길남이는 그런 동생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엇인가를 찾아 연상 앞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성, 나 다리 아파 죽겄는디 쪼깐만 쉬다 가세. 고구마 묵음시로 말이시." 종남이는 참고 참았던 말을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하고야 말았다. 길남이는 들은 척도 안하고 걸음을 옮기기만 했다.
"서엉! 나 말 안 딛긴가. 나 다리 똑 뿌라질라고 헌단 말이시." 종남이는 바락 악을 썼다. 길남이는 동생의 마음을 환희 알고 있었다. 다리가 아프다는 것은 핑계고, 동생은 하나 남은 고구마를 마저 먹어치우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동생은 제가 엉뚱한 말을 꺼내게 되어 얻은 고구마라서 더 당당하게 소리치는지도 몰랐다. 어차피 외가집에 들어가기전까지는 먹어치워야 하기가 쉬웠다. 그리고 종남이의 배고픈 욕심이 집에까지 가져가게 할 리도 없었다. 길남이는 걸음을 멈추고 동생을 돌아보았다.
"성, 내 말 들어줄란가?" 종남이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길남이는 동생을 물그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동생의 삐쩍 마르고 희게 버짐이 핀 얼굴이 가여웠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따라 떠나버린 다음부터 동생은 부쩍 마르기 시작했다. "앉어, 다리 아프담서." 길남이는 바지주머니에서 고구마를 꺼내며 동생에게 눈짓했다.
"잉, 똑겉이 갈라야 써!" 종남이는 앉을 생각도 하지 않고 눈길을 고구마 박고 있었다. "앉기나 혀." 길남이는 고구마를 옷에다 씩씩 문지르며 동생에게 눈을 흘겼다. 종남이는 형을 따라 앉았고, 길남이는 대못칼을 꺼내서 고구마 한가운데에 금을 그었다. 대못칼은 소화 아주머니네에 살 때 철길 위에 대못을 놓아 기차가 서너번 길고 지나가게 해서 납작하게 한 다음, 숫돌에 갈아 날을 세운 칼이었다. 철길이 가까운 회정리나 칠동리 아이들은 그 대못칼을 거의가 갖고 있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로 요긴하게 쓰였다. 껍질이 잇물린 새꼬막을 까먹기가 좋았고, 나무나 책상에 이름 새기기가 그만이었고, 구슬치기에 구멍파기가 손쉬웠고, 밤껍질을 까고나서, 떫은 속껍질을 속살 다치지 않게 살살 벗겨내는 데는 없어서는 안될 물건이었다. 어떤 아이들은 싸움을 하다가 급해지면 그 칼을 불쑥 꺼내들기도 했다. 철길에서 멀리 사는 고읍들 여러 마을 아이들이나 장좌리 아이들은 그 칼을 먹을 것하고 바꿔야 했다. 사내아이들이면 누구나 그 칼을 갖고 싶어했다.
"이 금이면 되겄냐?" 길남이는 동생 앞으로 고구마를 내밀었다. 마음속으로는 동생을 더 크게 떼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금을 표시하게 되자 칼끝은 한 가운데로 가고 말았다. 동남이는 형의 손바닥위에 올려진 고구마를 눈 크게 뜨고 찬찬히 살폈다.
"성은 워떤 것 묵을라고?" 종남이는 어느 쪽이 더 큰지를 가려내가가 어려워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결국 형한테 묻고말았다. 형이 먼저 골라 잡으면 떼를 서서 그것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니 맘대로 니가 먼첨 골라." 길남이는 동생 덕에 얻게 된 것이니까 동생 마음대로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녀, 성은 성잉께 먼첨 골르소." 종남이는 속으로 혀는 낼름하면서도 말을 그렇게 했다. "그려, 나넌 나 쪽에 것 묵제 머." 형의 말을 듣는 순간 종안이의 눈에는 형 쪽의 것이 더 크게 보였다. 그래서 종남이는 숨가쁘게 소리쳤다.
"나가 고것얼 묵을라네!" "니가? 그려 글먼." 길남이는 별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었다. 종남이는 혀끝을 조금 내밀며 씨익 웃었다. 제 꾀에 형이 속아넘어간 것이 고소하기도 했고, 약간은 미안하기도 했다. "얼렁 짤르소." 종남이는 군침을 삼키며 마음이 바빴다. 길남이는 풀섶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허벅지에 고구마를 올려놓고 칼질을 하기 시작했다.
동생과 함께 늦고구마 캐는 밭 옆을 지나고 있었다. 흙 속에서 불거져나오는 고구마를 보자 부치기 냄새 진동하는 잔칫집 대문 앞을 기웃거릴 때처럼 뱃속이 요동쳤다. 신침이 지르르 흘러내리는 이빨을 맞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밭 옆을 빨리 지나치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짐씨, 우리가 한 고랑썩얼 맡어 캐디릴 팅께 고구마 한 개썩만 주실라요?" 그건 분명 동생의 목소리였다. 길남이는 후딱 뒤돌아섰다.
"잉, 니가 고구매가 묵고 잡은 모냥인디, 쪼깐헌 것이 공짜 안 바래고 고런 이견 내는 것이 똑똑타." 머릿수건을 쓴 아주머니가 팔을 들어 옆이마를 쓸며 말했다. "허 그 자석, 뉘집 아덜인지 소견 한분 멀쩡허시. 그려, 욜로 들어서서 한 두둑썩 캐그라." 종남이가 '고랑'이라고 한 말을 아저씨는 '두둑'으로 고쳐 말하며 선선히 허락했다. "참말이당가요, 아자씨?" 종남이는 신바람나게 밭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길남이는 그저 어리벙벙했다. 그런 엉뚱한 말을 비위 좋게 걸친 종남이도 어이없었고, 그 말을 선뜻 받아들여준 얼굴 모르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도 별나게 느껴졌다. 길남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엉거주춤 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동생은 국민학생이 되고서도 배고픈 것은 여전히 참지 못했지만 비위가 좋고, 야무진 말 잘하기로는 자신이 당할 수가 없다는 것을 길남이는 알고 있었다. "아서, 아서. 느그 그 새다리 겉은 폴로 무신 고구매럴 캐겄냐. 허고, 꽹이질 서툴러서 고구매나 찍어놀 것잉께 그냥 하나씩 묵기나 혀라. 그 맘얼 일헌 것으로 쳐줄 팅께." 아주머니가 팔을 내저었고, 어느새 고구마줄기를 잡아뜯으려던 종남이는 허리를 펴고 있었다.
"멋이고 공짜럴 바래는 것은 도적눔허고 달븐 것이 웂다고 우리 아부지가 갤차줘는디요." 종남이가 어주머니를 쳐다보며 또록또록하게 말했다. 아버지의 그 말을 길남이도 들은 바가 있었다. "허, 갤차도 지대로 야물딸지게 갤찼네그랴. 근디 느그 아부지가 누구냐?" "하대치요." 길남이가 눈짓을 할 틈도 없이 종남이는 말해버렸다.
"머시여, 하대치? 그 유명한 땅딸보 하대치가 느그덜 아부지라고?" 아주머니가 눈을 휘둥글하게 떴다. "야아, 우리 아부지요." 종남이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아니, 느그 엄니가 들몰댁이고, 느그 외할메가 구산댁이란 것이여?" 아주머니가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글탕께라. 우리 엄니고, 외할메요." "그려, 워쩐지 씨가 달브다 혔다." 허리를 펴고 선 아저씨가 고개를 끄떡였고, "금메 느그가 바로 그 집 자석덜이었고나." 아주머니도 일손을 놓고 짧고 바르게 혀를 차댔다.
"돼얐다, 고구매 캘 것 웂이 큰 놈으로 하나썩 골라묵어라." 아저씨마저도 그렇게 말했다. 그제서야 길남이는 가슴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가 떠나고난 다음부터 아버지는 그전처럼 잊은 척해야 하는 사람이었고, 더구나 남들 앞에서 아버지의 이름이나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되었다. "아닌디요, 우리 아부지가 알먼 큰탈 날 것잉께. 글먼 쩌그 저 고구마 줄거리라도 치울라요." 종남이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고눔 참, 영축웂이 즈그 아부지 탁했다. 그려, 정 그렇다면 고것이나 밭구석뎅이로 치워라." 아저씨가 허허대고 웃었다. 길남이는 호미와 소쿠리를 밭두렁에 조심스럽게 놓고 동생과 함께 밭고랑에 널려진 고구마 줄기들을 한아름씩 안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하나썩이면 쪼깐 섭허고, 아나, 한 개 더 가지가그라." 아주머니는 고구마 세 개를 큰 것으로 골라주었다. 동생은 고구마를 받아들며 눈을 찡긋거렸고, 길남이는 쑥스러워 그러지 말라는 눈짓을 했다.
"야아덜아, 근디 느그 멋허고 댕기냐?" 둘이서 군침을 삼키며 밭두렁으로 올라섰을 때 아주머니가 소리쳐 물었다. "개똥 줏으로 댕기는디요." 종남이가 빠르게 몸을 돌려 대답했다. "개똥? 누가 매타작당혔냐?" "야아, 외숙모가 갱신얼 못허고 끙끙 앓아눴구만요." "옳여, 서샌도 입산얼 혔제. 죄우당간 처남매부지간에 나섰다가 입산얼 해뿌렀이니 느그덜집안이 안팎으로 풍지박산이고, 느그 외할메 애간장이 썩어내레앉겄다." 길남이와 종남이는 금방 기죽고 시무룩해졌다.
"혼자만 좋자고 헌 일도 아닌디, 염병할 눔에 시상이여." 아저씨의 쿠렁하게 울리는 말이었다. "야아덜아, 개똥물도 좋제만 똥물도 좋고, 동전 가리내서 막거리에 타믹이는 것도 좋다고 외할메헌테 전혀, 알겄어?" 아주머니가 목청을 뽑았고, "와따, 젊은 년이 말도 많네. 나이 잡순 노친네가 비문히 잘 알 것이라고 그리 새살 까고 그려! 싸게싸게 일이나 혀." 아저씨가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아저씨가 화를 내는 것인 아주머니에게도, 자기들에게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길남이와 종남이는 주눅은 기분으로 밭두렁을 빨리 걸었다. 외숙모가 잡혀갔다 며칠이 지나 돌아오자마자 외할머니는 한쪽에 작은 구멍을 뚫은 대통을 삼베로 사서 똥통에 넣었다가 맑은 똥물을 받아냈다. 그러나 외숙모는 이를 응등물고 그 똥물을 마시지 않았다. 평소에는 외할머니 말이면 그리도 고분고분 잘 듣던 외숙모가 그 말만은 절대로 듣지않았다. 그래서 외할머니는 마른 개똥을 주워오라고 했다. 그날부터 외사촌들과 두 패로 갈려 마른 개똥을 찾아다녔다. 마른 개똥을 검게 볶은 겉보리에 섞어 달였다. 그 물은 진한 갈색이었다. 외숙모는 그것이 개똥물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곧 잘 받아마셨다. 외할머니가 시키지 않았지만 자기들이나 외사촌이나 그것이 개똥물이라는 것을 외숙모에게 말하지 않았다.
외숙모는 약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먹고 얼른 나아야 했다. 외할머니는 혼자서 나락을 베고, 밥을 해먹고 하느라고 죽을 고생을 하고 있었다. 개똥물은 볶은 겉보리를 섞어서 그런지 똥물처럼 지독스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안 몰론 개똥은 흔헌지 워째 몰른 개똥은 거리 흔털 않으까?" 종남이는 고구마를 아껴먹으며 물었다. "긍께 개똥도 약에 쓸라먼 웂다고 어런덜이 안 그러디야." "그 말언 나도 아는디, 워째서 그러냐니께." "나가 고것얼 워치케 아냐. 다 개똥 지 맘이제." "개똥이 사람이간디? 지 맘이게." 종남이는 입을 삐죽하고는, "성, 엄니 아부지가 은제나 올란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그 말 안허기로 혔쟎여!" 길남이는 고개를 홱 돌려 동생을 노려보았다.
"여그넌 아무도 웂는디 워쩌." "그려도 안돼. 저절로 오실 때꺼정 그런 생각 싹 다 잊어뿌러. 자꼬 생각허면 자꼬 말도허고 잡아진께." "성언 그리 된가? 나넌 하나또 안되는디. 성언 꿈 안 꾼가? 나넌 밤마동 엄니꿈 꾸는디." "낮에 자꼬 생각헌께 밤에 꿈이 꿔지제. 다 잊어뿌러. 니넌 인자 애기가 아니라 학생잉께 엄니 찾지 말어야 써." "온 식구가 항꾼에 사는 인공 때가 참 좋았는디. 아부지가 높기도 혔고." "니 참말로 미쳤냐! 고런 소리 허먼 니 어찌 되는지 몰르냐?" 길남이는 질겁을 했다.
"성언 순 겁보여. 우리찌리도 아무 말도 못허게 잡지먼 속 땁땁혀서 워찌 산당가. 성이 자꼬 이래쌓먼 나 엄니 아부지 찾어 산으로 내빼뿔 것이여." "야갸 시방 참말로 미쳐뿌렀네. 종남이 니 나헌테 되게 한분 맞고 잡으냐!" 길남이는 정말 화가 나서 주먹을 부르쥐었다. "아녀, 아녀. 그냥 혀본 소리여." 종남이는 손과 고개를 함께 저었다. 형은 순한 것 같았지만 한번 화가 났다 하면 아주 무서웠다.
"종남아, 니가 니 맘 다 알어. 성도 엄니가 보고 잡고 걱정되고, 아부지허고도 항꾼에 살고 잡고 그려. 꿈도 밤마동 꾸고, 근디도 그런 내색허면 워째 안되는지 니 몰르냐? 시상이 달라진 것이여. 아그덜이 정신웂이 인공 때 노래허다가 그 아그덜 엄니 아부지가 안 잽혀가드냐. 긍께로 인공때 일언 인자 싹 잊어뿌러야 혀. 그라고 말이여, 니허고 나허고는 딴 아그덜보담 훨썩 조심혀야 써." "다 알어. 김일성 장군 노래 대신에 전우에 시체를 넘고넘어럴 불러야 쓰고, 인공 만세 대신에 대한민국 만세럴 불러야 허는 것," 종남이가 앞만 보며 말했다.
학교에서는 진작부터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를 가르치며 인공 때 노래를 절대 불러서는 안된다고 반복했고, 극장의 확성기에서도 '전우의 시체는' 날이 날마다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눈치 빠르게 노래를 바꿔불러야 했고, 종남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눈치 빠르게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아이들은 무심결에 인공 때의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소스라치고는 했다. "그려, 그려, 아조 잘 안 것잉께 꼭 그리만 허먼 되는 겨." "그런 것 다 알고 있응께로 걱정 말고 성허고 나허고 있을 때만 엄니 아부지 이약 허잔것이란 말이시." 길남이는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꼬리에 고구마진이 거무칙칙하게 말라붙어 있는 동생의 버짐 핀 얼굴이 추워보였다. 자기도 동생의 나이 때부터 아버지 때문에 기를 펴지못하고 살았지만 그때는 그래도 할아버지도 살아 계셨고, 어머니도 집을 떠난 일이 없었다.
그 생각을 하자 동생이 더없이 안쓰럽고 딱하게 여겨져 길남이는 목이 메었다. "그려, 둘이 있을 때만 그리 혀." "성, 참말? 글먼 걸어." 종남이는 새끼손까락을 세워 형 앞으로 내밀었다. 길남이는 제 새끼 손가락으로 동생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가자, 할메가 기둘린디." 길남이는 동생의 손가락을 건 채로 걸음을 떼어놓았다. 종남이도 더 새끼손가락에 더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