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혼이 잠든 무령왕릉
이 명 철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AD461년에 맞추고 타임머신에 탑승하였다.
무령왕이 왕위에 오른 해였다.
동성왕이 시해(弑害)된 501년, 40세의 나이로 즉위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왕은 재위기간 동안 민생 안전과 백제의 국력을 신장하여 국제적 지위를 강화하는 등, 대ㆍ내외적으로 큰 업적을 이룩하시는 것을 타임머신의 속력을 빨리하며 살핀다.
살핀 결과 왕의 업적은 아들 성왕(聖王)으로 하여금 백제의 중흥을 열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란 확신도 갖는다.
왕이 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속력을 늦추지 않았더니, 3년째 되는 525년 8월 12일에 지금의 공주 송산리에 안장되는 것까지 볼 수 있었다.
왕릉에 안장되는 데서부터는 당시의 제도와 풍습을 알 수 없기에, 타임머신에 동승한 공주 제일의 해설사님의 해설이 시작되었다.
자상하면서도 해박한 지식으로 물이 흐르듯 미풍이 불듯 무령왕릉의 신비를 하나하나 벗겨주는 것이었다.
"백제웅진 도읍기의 왕과 왕족들은 이 계곡에 무덤을 썼습니다.
무령왕릉(武寧王陵)도 이곳에 안장을 하고 있습니다."
해설사님은 더는 과거로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총 7기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계곡의 서쪽에 무령왕릉과 5~6호분, 동쪽으로 1-4호분이 있다.
타임머신을 타기 전 무령왕릉은 6호분 배수로 공사를 하면서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상시시키면서, 묘실 안으로 들어갔다.
묘실 전체는 벽돌로 쌓은 벽돌무덤으로 입구통로에 해당하는 연도와 시신을 안치하는 현실(玄室)의 두 부분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 벽돌무덤 안에서는 지신(地神)에게 무덤의 터를 샀다는 기록을 묘지석(墓地石)에 새기고 있었다.
후세에 증거가 될 가장 중요한 유물이 될 것 같았다.
나라와 민족의 반역자가 되면서까지 제 것으로 꿀꺽 삼키는 나 살던 시대의 파렴치한 사람들에 비하면 얼마나 신성한 일인가.
이 묘지석에는, '왕은 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셨고, 3년째 되는 525년 8월 12일 왕릉에 안장하였으며, 시간의 속력을 빨리하여, 왕비는 526년 12월에 돌아가셨고 529년 2월 12일에 왕릉에 안장하였다'고 새기는 것이었다.
무덤을 사기위해 실재 사용되던 돈을 토지신에게 지급하고 땅을 산 증명서인 매지권(買地券)까지 작성하는 신성함. 왕이 산 땅에 왕릉을 썼으니, 이보다 더 확실한 자기 땅에 쓴 무덤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그러한 욕심 없는 신성함과 정성이 있었기에 1500년이 넘는 지금까지 도굴하나 당하지 않고 보존되어 있었으리라.
타임머신의 속력을 늦추어 천천히 무덤 속을 살폈다. ‘무덤 안이 어둡고 으스스하다.
벽에 희뜩희뜩 벽화가 아닌 회를 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사신도(四神圖: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그려 놓았다.
왕과 왕비가 사용했던 모든 것들이 왕과 왕비와 같이 묻힌다.
하나도 흐트러짐 없이 질서 정연하다.
벽에는 등잔을 놓아 불을 켜놓고, 베게며 금관, 귀걸이 목걸이, 글자를 새긴 반지, 발받침대 등이 살아있는 사람인 양 놓아졌다.
무덤 입구가 막히면 그러한 부장품들이 더욱 빛을 발할 것이고, 묻힌 이들의 뼈와 살은 흙이 되어 시공의 태허로 돌아갈망정 부장품들은 남아 백제역사의 진실을 말할 것이다.
왜곡된 역사의 흐름이 있을지라도 억울하면 속내를 드러내어 왜곡을 바로 잡을 것이다.
지금은 왕과 왕비의 치장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우리 살던 현제로 돌아오면, 저 부장품들은 모두 국보가 되고 보물이 되어있을 것이다’란 생각을 하는 사이 미래로 돌려놓은 타임머신은 어느 듯 현세로 돌아와 있었다.
현세로 돌아온 전북의 해설사들은 차로 이동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걷는 길을 택했다.
무령왕릉과 고분군을 돌아 발로 걸어서 손으로 만져보고 눈에 비추인 대상을 마음으로 보기 위해서다.
정상에 오르니 멀리 공산성이 보인다. 여러 번 가서 본 곳이기에 바라만 보아도 정감이 든다.
무령왕릉의 뒤편 정상에서 해설사님들은 공산성 등을 바라보며 포즈를 취해본다.
뒤돌아서 걸어가면 내려가는 길에 횡혈식 무덤 두 기가 있다.
이 무덤의 주인도 상당한 신분이 있는 분이리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갔을 때 여기 무덤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국립공주박물관 앞 야외전시장에는 공주의 대통사지 석조와 서혈사지의 석조여래좌상 등 70여 점의 석조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백제인의 석공 기술과 불교미술을 본다.
고구려와 신라뿐 아니라 그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백제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이 다소곳이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박물관 안에는 대전과 충남지역에서 출토된 국보 19점과 보물 3점, 문화재 16,0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저러한 유물들이 천년의 세월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가 새 세상에 출현하여 백제의 한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니, 생각할수록 가슴이 시리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능력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으니 말이다.
어지럽혀있다고 말하지 말라. 저 자체가 다 보물이다.
약탈과 도굴, 왜곡과 이간질이 아무리 심하다 한들 세월 속에 묻혀 있는 영혼까지 약탈하고 왜곡하던 못하였으니, 저 은은한 백제의 빛이 하늘과 땅 사해에 빛나고 있는 것을 어찌 다시 왜곡할 수 있으랴.
물질적 현상은 공(空)하여 소멸할지 몰라도 허공이 영원하듯 백제의 혼도 허공과 같이 영원하여 역사 속의 백제는 언제까지나 살아 숨 쉬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