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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터치다운 6점에 보너스 1점>의 줄거리:
미식축구에서 상대 진영 골라인을 넘어 엔드 존 안으로 공을 쥐고 뛰어 들어가든지 아니면 패스 되는 공을 그 안에서 받든지 하는 것이 바로 터치다운입니다. 그러면 6점이 주어지고 거기에 더하여 플레이스킥을 성공시키면 1점이 추가로 주어집니다. 완벽한 터치다운과 그에 따르는 추가 1점을 더해 7점 만점의 삶을 아브라함은 살았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방식으로 7점 만점을 이루는 자들이 그의 자손입니다. 그러면 대체 나는 지금 몇 점 짜리 삶을 살고 있을까요?
터치다운 6점에 보너스 1점
(창22:15~24)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20.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알리어 이르기를 밀가가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터치다운 6점에 보너스 1점>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터치다운 6점에 보너스 1점’
아브라함의 삶을 우리가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면, 터치다운 6점에 보너스 1점을 합한 7점 만점짜리 삶이었다는 것이고, 오늘 우리가 읽은 대로 그 아브라함의 삶이 이삭을 바친 사건을 기점으로 거듭 거듭 확인됩니다.
17절에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라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우리에게도 일어날 일이 터치다운 6점에 보너스 1점을 합한 7점 만점짜리 삶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구냐?
터치다운 6점에 보너스 1점을 합한 7점 만점짜리 삶을 사는 자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터치다운(touch down)이 뭔지는 아시죠?
미식축구에서 상대방 진영의 골라인이 있습니다. 그 골라인이 넘어가 있는 지역을 end zone이라고 합니다. 상대방이 전진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를 뚫으며 end zone 안에서 공을 쥐고 있으면 그게 바로 터치다운입니다. 상대방의 장애를 뚫고 공을 잡고 뛰어서 들어가든지, 그 안에 사람 몸이 들어가 있는데 쿼터백이 멀리서 패스를 한 것을 end zone 안에서 잡든지, 하여간 그 안에서 공을 잡으면 터치다운이고, 이렇게 터치다운을 하면 점수 6점을 주고, 끝나게 것이 아니라 보너스 점수를 줍니다. 가까운 거리에서 다시 러시를 하든지 아니면 발로 뻥 차서 H모양의 골대위로 넘어갈 수 있게 하면 필드 골이라고 해서 보너스 1점을 줍니다. 대부분 필드 골을 쏩니다. 러시해서 성공하면 2점을 주지만 그건 힘들고 지치기 때문에 그냥 필드 골을 쏩니다. 그렇게 보너스 1점을 얻어서 7점을 얻게 되는 것이죠.
이 터치다운과 필드골 보너스 1점이 합쳐지는 미식축구의 점수 규정을 가지고 삶을 바라보면 아주 좋은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과 연관해서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법정 스님의 책 중에 “홀로 사는 즐거움”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에서 올림픽 구호를 염두에 두고 쓰신 글이 하나 있어서 짧게 인용을 해봅니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달리기를 위해 멀쩡한 젊음들이 피를 말리며 뼈를 깎으면서 환호하고 좌절한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하는지, 사람이 참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묻게 한다. 그 높이와 멀리와 빨리 때문에 인간이 보다 빨리 망가지는 것은 아닐까? 너무 뛰지 말라. 조급히 서두르지 말라.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그 어디도 아닌 우리들 자신의 자리다.”
하여간 항상 멋져요. 법정 스님의 말씀은 항상 멋져요.
이런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라는 올림픽 구호를 염두에 두시면서 어쩌면 이렇게 깊은 이야기를 하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가 가야할 곳은 그 어디도 아닌 우리들 자신의 자리다’에서 ‘자신의 자리’가 뭐예요?
높이 뛰어 올라서 도달할 곳이 없다는 거예요. 도달해봐야 그곳은 내 자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멀리 달려가서 도달해봐야 그곳이 내 자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빨리 가긴 어디를 가겠다는 겁니까? 그게 내 자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내 자리가 아니라는 얘기는 내 마음의 자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스님이 말씀하시는 마음의 자리는 뭘까요?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이 터치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것을 불교적 용어로는 집착이라고 합니다.
터치해서 다운하면 정착합니다. 이 세상 그 어느 것, 어떤 자리, 어떤 신분 상승, 어떤 물질적 풍요와 모든 것에 마음이 터치해서 다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마음의 자리가 아니라는 이야기예요.
‘어디 높이 올라가면 내 자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높이 있는 그곳에 대한 마음의 터치 자체가 잘못된 것인데 어딜 가겠다는 것이냐?’라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런데 불교의 현자들을 간접적으로 대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들의 탁월함과 동시에 그들의 한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원래 사람의 마음은 터치다운 하도록 지으신 거예요.
touch라는 것은 가서 접촉하는 것입니다. 만나는 것이고 닿는 겁니다. 닿은 다음에 거기에 머무른다는 이야기예요.
불교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창조의 원리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터치다운하도록 되어 있어요.
불교에서 말하고 법정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 어느 것에도 터치되지 않은 상태로 머물러 있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입각해서 보자면 공상입니다. 그런 자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원래 터치다운하도록 되어 있고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터치다운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무엇에 가서 터치하고, 무엇에 머무르려고 하느냐는 대상이 문제라는 겁니다.
이 땅에 있는 그 어떤 것에도 터치하지 말라고 하는 점에서 불교는 탁월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터치해야만 한다는 이 진리에 입각해서 보면 불교는 항상 모자랍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들이 말하는 대로 그야말로 공허한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 터치하고 다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들이 불교에서 지적하고 법정 스님께서 염려하시는 것처럼 이 땅에 있는 것들에게 대해서 터치합니다. 이게 바로 죄악이고 타락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이 가서 터치해야 되고, 하나님께 다운해야 합니다. 거기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게 터치하고 다운합니다. 이것 안돼요.
안 되는 것은 맞지만 마음에 터치와 다운 자체가 없어야 된다고 하는 것은 공허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서 막혀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서처럼 당신 자신을 드러내 계시하시고 당신이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불교적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한계가 크지요. 탁월함과 동시에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제가 이해하고 있는 불교의 본질입니다.
자, 오늘 본문은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부분이 있어요.
앞부분에는 이삭을 바친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의 감동이 하나님의 사자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전달되는 것이 반복됩니다.
16-18절에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하셨다 하니라”라는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그리고 그 뒤에 갑자기 아브라함의 동생인 나홀이 나오고 그의 아내인 밀가가 여덟 명의 자녀를 낳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막내아들이 브두엘이고, 나홀의 첩인 르우마가 네 명의 아들을 낳게 됩니다. 나홀이 12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왜 이 이야기가 갑자기 나올까요?
이삭을 바쳐서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약속을 다시 한 번 결정적으로 확인해 주시고는 이 내용은 뒤로는 다시 안 나옵니다.
12장부터 지금까지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반복되다가 여기서 결정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다음부터는 약속에 대한 언급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나홀의 이야기가 나올까요?
가만히 보니 이 나홀의 본처인 밀가가 낳은 막내아들 브두엘이라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 브두엘이 누구의 아버지냐? 리브가와 라반의 아버지입니다.
리브가는 앞으로 이삭의 아내가 될 사람입니다. 그 리브가의 오라비인 라반이 바로 이삭의 아들인 야곱의 장인이 될 사람입니다. 라반의 딸 레아와 라헬이 이삭의 아들 야곱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17절에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라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실현되기 위해서 초기단계를 형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결정적인 하나님의 계획이 여기서 표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에게서 나온 자식들 중에 브두엘이라는 자식이 있고, 브두엘이라는 아들에게서 리브가와 라반이 나오는데, 이 리브가는 이삭의 아내가 되고, 라반이 낳은 딸들은 이삭의 아들인 야곱의 아내가 되어서 거기서 12지파가 나오게 됩니다.
이 이야기와 이삭을 바친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삭이 누구와 결혼해야 할 것인가를 아시고 이삭의 아들 야곱이 또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까지 다 아시면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거예요.
이렇게 아브라함과 연관된 축복의 약속이 성취되기 위한 미래의 모든 계획이 하나님 안에 다 갖추어져 있는 상태에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것이고, 이삭을 바치고 났더니 하나님의 계획의 초기단계가 이렇게 나홀의 후손을 이야기함으로써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을 바친 사건과, 이삭의 아내가 될 처갓집 이야기가 같이 붙어 나오는 이유가 뭘까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터치다운 6점과 보너스 1점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 계획은 어마어마합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전 인류를 향한 계획이에요.
본문에서 17절에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라고 하시고 18절에서도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천하 만민을 복 받게 하는 ‘네 씨’가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 때까지 인류에게 있게 될 어마어마한 축복이고, 이 축복의 규모를 생각하면 이런 축복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칭기즈칸이 역사상 가장 넓은 대제국을 이뤘다고 하지만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축복과 그 축복을 성취하시기 위해 계획해 놓으신 스케일이 어마어마한 거예요.
그런데 이 스케일의 초기 단계를 이 본문에서 보여주고 계시는 이유는?
터치다운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계획이 시동이 걸린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항공모함이 30~40대의 전투기를 탑재하고 5,000~6,000명가량 되는 승무원들이 타고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입니다. 그런데 단추 하나 누르면서부터 시동이 걸리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터치다운이 있고서야 하나님의 계획에 시동이 걸린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럼 터치다운은 뭡니까?
이삭을 바치라는 겁니다.
미식축구를 생각하면 공을 들고 상대방 엔드 존으로 뛰어가는 자들을 계속 막지 않습니까?
막을 때에 가장 강력한 수비수가 있어요. 그 가장 강력한 수비수의 역할이 이삭입니다.
하나님께로 내 마음이 가서 터치가 돼야 해요. 하나님과 마음이 접촉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그 하나님께 내 마음이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터치다운이에요.
그런데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지 못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수비수가 이삭이에요. 그 이삭을 제쳐버립니다. 그리고 터치다운을 이루어낸 것이에요. 본래 점수 6점이 주어지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진짜 점수는 터치다운을 통해서 얻은 6점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오는 나홀의 자손 이야기는 왜 나오느냐?
보너스 1점에 관한 이야기예요.
하나님께 터치다운이 되는 것을 막는 이 세상에서 우리 마음을 빼앗는 가장 강력한 수비수인 이삭과 같은 존재는 무엇입니까?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존재였습니까? 이 땅에서 아브라함의 모든 존재의미가 이삭 안에 담겨져 있었어요. 이삭이 없다면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려고 했던 모든 계획의 가능성이 다 사라져버리고 이 땅에서 아브라함이 존재하고 있었던 그 의미자체가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존재는 아브라함의 삶 전체의 의미가 집약된 아브라함 자신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삭을 죽이려고 작정했다는 것은 자기의 이 땅에서의 삶의 의미 전체를 자기 손으로 제로로 놓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브라함의 마음이 하나님께 터치다운이 되어버리고 그래서 하나님을 갖는 거예요. 하나님을 갖는 것이 6점이에요.
그리고 터치다운을 하고나면 필드골의 기회로 1점을 주는데, 그 1점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 이 땅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내게 가장 소중한 것들인 이삭들을 제거하고 터치다운 될 때에 나타나는 보너스 1점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없이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다.
창세기 1장 27-28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계획은 본래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다음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축복을 주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이 말씀은 모든 인간에게 허락하시는 축복의 약속이 사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축복의 약속과 똑같아요.
본문 17절에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장 28절에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같은 거예요.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위해서 갖고 계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모든 사람마다 다 하나님의 원대한 복의 계획이 있으신 거예요.
그런데 마귀가 끼어들면서 인간이 타락하여 어떻게 되었느냐?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어땠습니까?
선악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땅에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이 터치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이 뭔가에 닿을 때에는 반드시 그것에 대한 판단이 섭니다. 판단하지 않으면 닿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마음을 어디에 둡니까? 항상 하나님께 둡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는 일이 뭐냐?
내 마음을 하나님께 터치다운 시키는 거예요. 하루 종일 삶이 진행 될 때에 하나님께 가서 터치하고, 그 터치 된 하나님께 다운되어서 머물고 있는 것이 내 하루의 일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하루 동안 아담을 통해 이루시려고 했던 일들을 이루어 나가시는 거였어요.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께 터치다운을 할 때에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계획은 시동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항공모함이 버튼 하나로 시동이 걸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항공모함 같은 축복의 계획들이 다 그렇게 터치다운됨으로써 시동이 걸려 움직여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안 되는 거예요.
만약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면서 하나님께 대해 마음의 터치다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결국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것들을 다 포기하시면서도 끝내 하시는 일은 아브라함의 마음이 하나님께 터치다운 될 수 있도록 섭리하실 수밖에 없고, 끝내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방해가 된다고 하면 이삭을 제거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터치다운이 되지 않는 상태다 보니까 이 땅에서 일어나는 보너스 1점이 주어질 수가 없어요. 이 땅에서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커다란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도, 그 계획의 실행은 보너스 1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에게 터치 됐을 때에 그 자체의 복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하나님을 내 마음에 갖게 되고 하나님이 내 마음에 정착되게 되는 터치다운이 6점이라면, 이 땅에서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1점에 불과한 거예요. 어마어마한 복임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그렇게 터치가 되지 않으면 보너스 1점이 없는 겁니다.
이제 인생의 과제는 터치다운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내 삶을 몰아가시는 수밖에 없어요. 마음이 다른 곳에 터치되어 있는 상태를 제거해 나가실 수밖에 없지요.
어떻게 하면 터치다운이 되어서, 보너스 1점까지 얻어서 7점 만점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까? 이삭을 바쳐야 해요.
오늘 하루 사는 동안에 내 마음에 가장 우선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문제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게 이삭입니다.
그 이삭이 제거되어야 터치다운이 되고 하나님께 마음이 드려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마음에 소중하다고 느끼는 것들을 잘 가꾸고 돌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성공을 위해 가는 길에 있는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내 마음을 터치다운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자꾸 이 세상에서 이삭을 붙잡으려고 하는 내 마음을 죽여 버려야 해요.
왜냐하면 이삭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거든요.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에 이삭에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이삭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바치라고 한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의 마음이 이삭을 좋아하니까 그 아브라함의 마음을 죽이라는 것이지 이삭을 죽이라는 것이 아니었죠.
그 아브라함의 마음을 죽이는 과정이 겉으로 드러나서 이삭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실제로는 이삭에겐 문제가 없습니다. 이삭을 좋아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의 문제였기 때문에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것이었고, 결국 아브라함은 이삭을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을 죽인 겁니다. 그 마음을 이삭에게 가서 터치다운 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가서 터치다운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는 대로 행한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께 터치다운하지 못하면 엉뚱한 곳에 가서 자꾸 터치하고 다운하려고 합니다. 스스로 깨달아서 이삭에게 담겨져 있는 자신의 이 땅에서의 삶을 죽이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결국은 정말로 이삭을 뺏어갈 수밖에 없으신 것이죠. 나를 버리시지 않으신다면 하나님께 터치다운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욥에게서처럼 진짜로 갖고 가는 수밖에는 없지요.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 다가왔을 때에 죽음을 바라보다가 죽는 순간에 터치다운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를 통해 이루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항공모함 같은 계획은 시동이 걸리지도 못한 채로 인생이 끝나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러나 그나마 다행이죠. 터치다운이라도 해서 6점을 받으니까.
그러니까 하루빨리 다른 것 할 생각하지 말고, 이 땅에서 어떻게 잘 살 것이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하나님께 터치다운 하는 것에 주력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터치다운되어서 하나님께 마음이 가서 닿자마자 이 땅에서 나를 통해 이루시려고 하는 계획은 하나님에 의해서 시동이 걸립니다. 그것을 오늘 보여주신 거예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진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씨(가계)에서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인에게 구원의 여부가 각자 각자에게 결정될 것이다.’ 어마어마한 계획이지 않습니까?
이 어마어마한 계획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마음이 하나님께 가서 터치다운될 때.
아브라함이 그 계획을 위해서 이 땅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못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일어날 일은 머리털 끝만큼도 모두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땅에서 내가 해야 될 일은 하늘에 터치다운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그 순간이 나의 순간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끊임없이 내 마음에 다가오는 소중한 이삭들이 방해가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원수가 있다면 내게 소중한 것에 무언가 해를 끼쳤으니까 원수가 된 것 아닙니까? 그 소중한 것을 마음에서 제거해버리면 원수도 없어지는 거예요. 이 땅에서 소중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원수가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소중한 것이 있으니까 소중한 것을 해치는 원수가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어쨌든지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 마음을 터치다운하면 이제까지 유보되고 있었던 나를 통해 이루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이 시동이 걸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땅은 눈곱만치도 내 열심과 내 계획과 내 정성을 들여서 내 생각과 내 비전을 통해 이루어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매일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십자가를 통해서 이삭들을 제거해버리고 마음이 하나님께 가서 터치다운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될 유일한 일입니다.
그러면 하루 동안 일어날 일들과 10년 뒤에 일까지 다 계획하시고, 20-30년 뒤의 내 인생의 끝까지 다 계획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그 원대한 항공모함 같은 계획에 시동이 걸린다는 이야기를 오늘 하시기 위해 나홀의 후손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시는 겁니다.
그 동안은 계속 하나님이 찾아오셨지만, 이제 거꾸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터치다운이 되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항공모함 같은 원대한 계획에 시동이 걸린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는 본문인 것이죠.
우리를 통해 이루시려고 하는 그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시동을 겁시다.
그러나 그 시동이 걸려 다 이루어진다고 해도 1점에 불과한 거예요. 주님을 통해서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터치다운 될 때에 얻게 되는 그 하나님, 우리 마음이 터치하고 다운되어서 머물게 되는 그 하나님이 6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아브라함의 약속, 아브라함의 축복이 이루어져도 1점에 불과한 것인데, 하나님 만나는 것 자체가 6점이니 터치다운 하고 보너스 받아서 7점 만점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소중한 것들을 이것저것 주신 이유는 그것들에 대한 나의 마음을 죽임으로써 내 마음이 하나님께 터치다운되게 하려 하심인 것을 잊지 않게 하시고, 그렇게 십자가를 붙잡고 터치다운됨으로 저를 통해 이 땅에서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항공모함 같은 거대한 계획들이 시동 걸리는 삶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