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등장한 걸출한 싱어송라이터이자 음악감독, 그리고 밴드의 프로트맨이었으며 동시에 영민한 디스크 자키였고 나아가 진보적인 시민 정신과 정치적 올바름을 지닌 탁월한 논객이기도 했다.
아무리 시간이 흐른대도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존재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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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 열풍이 지구촌을 휩쓸기 직전 시대인 1990년대, 보이 그룹과 걸 그룹에 의한 승자독식 구도가 만들어지기 전의 한국 대중음악계는 한마디로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시대였다.
각 장르와 포맷, 그리고 다양한 연령층의 슈퍼스타가 저마다의 목소리를 구가했다. 이 거대한 음악적 용광로의 에너지가 K-pop 전성시대의 자양분을 배양했음이 명백하다.
‘문화대통령’이라고 불린 기린아 서태지가 시대의 상징이었다면, 김건모와 신승훈은 댄스 뮤직과 발라드라는 주류 문법을 통해 시장의 승자가 되었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룰라와 쿨, H.O.T.와 젝스키스의 등장은 댄스 그룹의 원형을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들뿐만 아니다.
1990년대 후반에 부활한 가왕 조용필과 그 바로 다음 세대인 이승철은 라이브 콘서트에서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기존 성인 수용자에게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했으며 강산에와 전람회, 듀스와 패닉, 조PD 같은 1990년대 데뷔한 신성들이 포크에서 힙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금자탑을 이루었다.
그리고, 신해철이 있었다.
1990년대의 2인자라고 불린 인물. 그는 올림픽이 열리는 해의 대학가요제에 스쿨 밴드를 이끌고 혜성과 같이 등장하여 아이돌 스타가 되었다가 1990년대를 대표하는 락 밴드 넥스트의 함장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성숙한 음악감독으로 발전해갔다.
그는 그 자신이 한 말처럼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시키는 스트라이커는 아니었다.
하지만 솔로부터 밴드와 프로젝트 팀에 이르는 다양한 포맷으로, 그리고 소프트 락부터 아트 락, 헤비메탈까지 다양한 락의 지평과 발라드, 랩, 일렉트로닉 팝 등에 걸친 다양한 장르로 고된 순례를 감행한 지성적인 미드필더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신해철이 지닌 그 무엇보다도 가장 위대한 음악사적 가치는 다음의 세 가지다.
첫째, 주류의 경기장 안에서 히트곡에 목매지 않고 앨범 전체의 완성도를 중시하는 '앨범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인 것.
하나의 싱글 히트에 의존하지 않고 앨범 전체의 완성도를 중시하는 경향은 이미 1980년대 조용필에 의해 확립되었다.
그러나 신해철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한 앨범 내의 다양한 트랙들을 하나의 거대 주제로 엮는 이른바 콘셉트 앨범(concept album)의 기치를 구현함으로써 한국 대중음악의 내면적 성숙을 끌어올린 것이다.
둘째, 사전 검열이 존재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가사의 문학성과 주제의식을 지성적으로 확장시킨 것.
오랫동안 이 땅의 대중음악은 '사랑 타령'이라는 주제에 천편일률적으로 묶여 있었다. 그것은 권력 통제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해철은 존재와 사회에 대한 집요한 질문과 성찰을 했고, 대중음악을 통해 지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과 그 지평을 획기적으로 열었다.
마치 밥 딜런이 팝 음악사에서 지성적인 문제의식으로 대중음악의 철학적 혁명에 기여한 것처럼.
셋째, 앞 요소의 연장선이지만, 뮤지션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정치적·사회적 문제의식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발언함으로써 '딴따라' 혹은 '연예인'이라는 순응적 카테고리를 혁파한 것.
불의의 의료 사고로 그의 꿈은 미완으로 끝났지만, 2018년 그의 데뷔 30주년을 맞아 성취와 좌절로 점철된 그의 음악과 삶을 '신해철 In Memory of 申海澈 1968-2014'을 통해 얘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오로지 디지털 싱글만이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시대에 이제는 소멸해가는 '앨범'의 가치를 그의 디스코그래피로 다시 한 번 상기하고 싶었다.
신해철의 방대한 앨범 목락에서 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90년대에 발표한 음반 가운데 다섯 개의 베스트 앨범을 선정한다.
이 다섯 앨범은 그 자체로 1990년대 한국 대중음악사의 소중한 성과가 집결된 위대한 기념비다.
하나의 곡에 머물지 말고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울림을 즐겨보시길. 그리고 앨범 아티스트로서의 신해철의 진면목을 만끽하시길.
신해철 전 생애의 대표작이자 엽전들 1집(1974), 산울림 1집(1977), 들국화 1집(1985)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국 락 음악사의 명작.
락 청년으로서의 원대한 이상과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엿보게 하는 문제의식이 정교한 음악적 테크놀로지와 만나 콘셉트 앨범의 정점을 이룬다.
인스트루멘털 인트로에 이어, 격렬한 투쟁심이 질주하는 'The Destruction of Shell: 껍질의 파괴'가 앨범의 서장을 열고 절망의 절규인 'The Dreamer'를 거쳐 'The Ocean'의 장엄한 마무리에 이르는 여정은 예지로 충만하다.
아이돌 스타라는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 아티스트로 도약하는 아름다운 등용문.
그는 이 앨범을 통해 시장의 요구와 세대의 요청,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내면 자의식을 모두 충족시키는 의미심장한 승리를 거둔다.
동시에 이 앨범은 신해철이 한 명의 스타가 아니라 음악 전 과정을 지배하고 통솔하는 음악감독으로 성장했음을 보고하는, 마치 한 편의 시집과 같은 앨범이다.
그는 이 앨범으로 앨범 아티스트로서 거듭 태어난다. 모든 트랙이 독자적으로 히트할 만한 매혹을 담고 있지만, 이 노래들이 하나로 이어질 때의 울림은 더욱 깊고 그윽하다.
김민기, 한대수로 시작한 싱어송라이터 계보에 빛나는 생명력을 부여한 걸작.
앨범 완성도 측면에서 그의 전 디스코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에지를 지닌 앨범.
비락 어린이용 TV 애니메이션 OST의 포맷을 취하고 있지만, 이 앨범은 그저 그런 OST가 아니다.
타이틀이 암시하는 것처럼 신해철과 그의 밴드 동료들이 이루어낸,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Space Rock Opera' 그 자체다.
이 앨범은 그의 권능이 정점에서 빛나는 찬란한 고갱이이며, 수락곡들은 언제까지고 불멸로 남을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 앨범을 마침표로 그가 일군 밴드의 최선의 라인업이 붕괴하는 안타까운 순간이기도 하다.
그는 솔로로, 또 밴드의 프런트맨으로 숨 쉴 틈 없는 일정을 소화했으나 1990년대에만 세 편의 영화 음악감독을 맡았다.
다만 그는 OST를 주재한 영화가 모두 흥행에 실패하는 불운을 겪는다.
윤도현과 김창완이 주연을 맡은 초유의 락 무비 '정글 스토리' OST는 그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영화를 떠나 가장 웅혼한 울림을 자아내는 OST 앨범이다.
스크린에서는 실패했으나, 락이라는 프리즘으로 바라본 좌절한 젊음의 대서사시가 앨범으로 펼쳐진다.
세기의 마지막 해, 신해철이 음악감독으로서 의욕적으로 참여한 영화 '세기말'도 참패했고, 영국 유학의 결과물인 이 앨범도 시장에서 참패를 맛보았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을 향한 야망을 드러낸 이 앨범은 작곡가로서, 보컬리스트로서, 편곡자로서, 무엇보다도 엔지니어로서 자신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한 저주받은 문제작이다.
그의 열광적인 팬들조차 이 앨범 앞에서는 여전히 당혹해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락 이 앨범 전편을 통해 형상화하고자 한 묵시락적 상상력을 숭상하는 음악광들이 영원히 죽지 않는 좀비처럼 늘어날 것이라 믿는다.
1991년 고故 김현식의 음악 평론을 썼고, 이를 계기로 음악에 관한 글을 쓰는 일이 직업이 되었다.
노찾사 공연을 연출하고 락 음악 영화를 만들면서, 무엇보다 서태지 현상에 놀라고 신해철과 친숙해지면서 나의 삶은 한국 대중음악과 대단히 밀접해졌다.
세상엔 수많은 음악이 있지만, 우리말로 된 노래가 남루한 내 삶과 동행해준 것은 정말이지 축복과 같다.
지은 책으로는 '전복과 반전의 순간' 시리즈와 '신해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