乙支黜隋 萬春破唐
(을지출수 만춘파당)
을지문덕은 수나라를 물리치고, 양만춘은 당나라를 깨뜨렸다.
을지문덕 - 수나라를 몰락의 길로 밀어 넣다
서기 221년부터 370여 년간 지속된 중국의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는 훗날 수문제(隋文帝)가 되는 양견(楊堅)이 통일 왕조인 수(隋)나라를 세움에 따라 마감하게 됩니다. 수나라는 중국 역사상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에 이은 세 번째 통일왕조였는데, 불과 3대 황제에 걸쳐 38년 밖에 나라를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중국 대륙이 혼란과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통일왕조를 세우면, 한반도의 정세 역시 크게 요동쳤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의 통일왕조는 반드시 한반도에 대한 침략을 도모했기 때문입니다. 한(漢)나라의 고조선 침략으로부터 시작하여,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 당(唐)나라의 고구려와 백제 침략, 원(元)나라의 고려 침략, 청(淸)나라의 조선 침략 등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오직 명(明)나라만이 예외인데, 그것은 조선(朝鮮)이 개국 당시부터 속국(屬國)으로 사대(事大)의 예를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수나라는 모두 4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략하였습니다. 중국 대륙을 통일한 지 꼭 10년 만인 서기 598년 제1차 전쟁을 시작한 이후부터 서기 614년 제4차 전쟁까지 무려 17년 동안이나 고구려를 침략한 것입니다. 특히 수나라는 고구려와 돌궐이 연합해 자신들에게 대항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612년부터 3년 동안 계속해서 고구려에 침략군을 보냈습니다. 이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살수대첩(薩水大捷), 즉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나라 군사 30여만 명을 죽인 전쟁은 612년에 일어난 제2차 고·수 전쟁 때입니다.
당시 수나라의 양제(煬帝 : 양광)는 고구려를 치기 위해 24군(二十四軍) 113만 명의 군사를 집결시켰습니다. 그러나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길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수나라는 요하(遼河)를 건너는 데는 성공했지만, 고구려 병사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악전고투 끝에 여러 명의 장수까지 잃었습니다. 요하를 건넌 후, 양제는 몸소 육군(陸軍)을 이끌고 고구려의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초조해진 수나라는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平壤城)을 직접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별동대(別動隊)로 9군(九軍) 30만 5천 명을 선발했습니다. 수나라 장수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于仲文)이 이끄는 별동대(別動隊)가 압록강 가에 이르자, 을지문덕은 왕명을 받아 거짓으로 항복한 후 적진(敵陣)의 허실(虛實)을 살폈습니다. 거짓 항복에 속아 을지문덕을 돌려보낸 우문술과 우중문은 때늦은 후회를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이에 그들은 군대를 내몰아 압록강을 건너고 을지문덕을 공격했습니다. 이때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사들이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거짓으로 패한 척하면서 그들이 살수(薩水 : 청천강)를 건너 평양성(平壤城) 30리 밖까지 진격하도록 유인했습니다.
수나라 군사가 자신의 거짓 항복과 유인 작전에 완전히 말려들었음을 확신한 을지문덕은 우중문을 우롱하는 한 편의 시(詩)를 적어 보냈습니다.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귀신같은 책략은 천문(天文)을 꿰뚫고
신묘한 속셈은 지리(地理)를 통달 했도다.
싸움에 이긴 공은 이미 드높으니
만족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오.
- 『삼국사기』 「열전」 '을지문덕'
시(詩)를 읽은 우중문과 우문술은 을지문덕이 다시 거짓 항복을 해오자, 이것을 핑계 삼아 퇴각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자 을지문덕은 퇴각하는 수나라 군사를 사방에서 공격했습니다. 고구려군의 공격에 힘겨운 퇴각을 하고 있던 수나라 군사가 살수(薩水 : 청천강)를 절반쯤 건널 무렵, 때를 기다리던 을지문덕은 총공격을 시도했습니다. 을지문덕이 후방 부대를 쳐 수나라의 장수(將帥) 신세웅(辛世雄)을 죽이자, 여러 부대들이 동시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수나라의 장수와 병사들이 하루 동안 압록강까지 무려 4백 50리를 뛰어 달아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9군(九軍) 30만 5천 명이었던 수나라의 군사 중 살아서 도망친 자는 불과 2천 7백 명이었습니다.
살수(薩水)의 대 패배 이후에도, 수나라는 나라가 망하는 618년까지 두 차례나 더 고구려를 침략했습니다. 그러나 제2차 고·수 전쟁 이후, 과도한 전쟁과 부역(負役)에 분노한 백성들의 반란이 들불처럼 번져 나갔고, 결국 양제(煬帝)가 호위장군인 우문화급(宇文化及)의 손에 살해당하자 몰락하게 됩니다. 을지문덕이 지휘한 '살수(薩水) 대첩'은 수나라를 몰락의 길로 밀어 넣은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양만춘 - 당 태종에게 굴욕을 안기다
당(唐)나라 제2대 황제(皇帝)인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양만춘(梁萬春)이 쏜 화살에 눈을 잃은 어리석은 침략자로 기록되어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중국 역사의 평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는 당나라를 개국할 당시 지방의 군벌(軍閥)과 호족(豪族)들을 실질적으로 평정한 명장(名將)이었고, 황위(皇位)에 오른 이후에는 '정관지치(貞觀之治 : 정관의 태평치세)'를 연 황제였습니다. 태종이 당나라를 다스린 23년간은 중국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선정(善政)과 태평성대를 누렸던 시대였습니다. 이 때문에 당 태종은 후대의 학자와 역사가들에게 '가장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황제'로 추앙받았습니다.
실존했던 황제 중 중국사 최고의 성군(聖君)이라는 평가를 받는 태종에게 단 하나의 오점(汚點)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구려 원정과 패배'였습니다. 그 이유는 고구려 원정이 충신들의 만류와 간언(諫言)을 뿌리치고 무모하게 시도한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당 태종은 집권 말년 들어 유독 고구려 정벌에 집착했습니다. 신하들의 거듭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 태종은 고구려에 대한 전쟁 준비를 해나갔습니다. 그리고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칠 정치적 명분(名分)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때 고구려에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영류왕(榮留王)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 태종은 이 사건을 빌미삼아,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합니다. 서기 645년, 드디어 당 태종은 대군(大軍)을 이끌고 고구려의 요동 지역을 공격합니다. 개모성(蓋牟城)·요동성(遼東城)·백암성(白巖城) 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15만에 이르는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聯合軍)을 물리친 당나라 군대는 양만춘이 굳게 지키고 있는 안시성(安市城)에 이르게 됩니다.
당나라 군대의 입장에서 볼 때, 안시성은 후방 보급로 확보를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 할 곳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당 태종은 총력전을 벌여 안시성 함락에 나섰습니다. 당시 안시성은 연개소문이 보낸 대규모 지원군이 당나라 군대에게 격파당하는 바람에 완전히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당나라 군대의 총공격 앞에서도 안시성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산 전체가 성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천혜의 자연 조건에다가 안시성 성주(城主) 양만춘의 지휘 아래 군사는 물론 모든 백성들이 일치단결해 성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당시 전투 상황이 『삼국사기』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나라 장수인)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군사를 독려해 안시성(安市城)의 동남쪽 구석에 흙산을 쌓고 점차 성(城)으로 침략해 들어갔다. 이에 성 안에서도 또한 성 높이를 더욱 올려 쌓아 맞서는 한편 병졸들이 나누어 교대로 싸우는데, 하루에 6~7번을 되풀이했다. 성(城)에 충격을 주는 돌격 수레와 돌 쇠뇌에서 돌을 날려 문루와 성(城)을 무너뜨리면, 성 안에서는 목책을 세워 허물어진 곳을 막았다. 도종(道宗)이 발을 다치자, 황제(皇帝)가 친히 침(針)을 놓아 주었다. 60일 동안 50만 명이 동원되어, 밤낮을 쉬지 않고 흙산을 쌓았다. 흙산의 정상이 성(城)에서 불과 몇 장 거리 밖에 되지 않아, 성(城) 안을 굽어 내려볼 수 있었다. 도종(道宗)이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에게 군사를 이끌고 흙산의 정상에 주둔하면서, 고구려 군사를 대비하게 했다. 그런데 흙산이 무너져 성(城)을 짓누르자, 성(城)이 무너져 내렸다. 부복애(傅伏愛)는 사사로운 일로 자리를 비웠고, 고구려 군사 수백 명이 성(城)이 무너진 곳으로 출전(出戰)하여 흙산을 탈취하고 점거하는 한편 참호를 파고 지켰다. 황제(皇帝)가 분노하여 부복애(傅伏愛)를 참수하여 돌려 보이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여러 장수들에게 흙산을 공격하게 했으나 사흘이 지나도 빼앗지 못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이렇듯 당 태종이 온갖 방법과 갖은 수단을 동원해 공격해도 안시성은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요동의 매서운 추위가 닥쳐와 풀이 마르고 물이 얼며, 군량미(軍糧米)마저 떨어져가자 할 수 없이 태종은 군사를 퇴각시키게 됩니다. 중국 대륙과 동아시아 전역을 휩쓸며 최고의 위용을 자랑한 당 태종에게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지만, 이미 전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습니다.
안시성의 패배 이후, 태종이 고구려 침략을 얼마나 후회했는지를 밝혀주는 두 가지 기록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위징(魏徵 : 정관의 태평치세를 연 충신으로 643년에 사망함)이 살아 있었다면, 내가 고구려 원정에 나서는 것을 말렸을 것이다."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앞둔 최후의 순간에 남긴 "더 이상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이었습니다.
한자 익히기
乙(새 을) 支(지탱할 지) 黜(내칠 출) 隋(수나라 수)
萬(일만 만) 春(봄 춘) 破(깨뜨릴 파) 唐(당나라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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