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의 미학
-김애란의 <비행운> 중 ‘큐티클’을 읽고
송언수
졸업하고 회사를 다닐 때였다. 엄마에게 용돈을 받아쓰다가 월급이란 것을 받게 되었다. 용돈은 당연히 끊겼고, 월급에서 일정액을 적금에 넣고 남은 돈을 용돈으로 썼다. 물론 엄마에게 받던 것보다 훨씬 큰 액수였다. 내가 입을 옷을 사고, 친구를 만나 밥을 사먹고, 주변사람들에게 줄 선물을 사는 일이 참 좋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보석이나 명품에는 별 관심이 없으니, 씀씀이가 늘었다고는 하지만 낭비 수준은 아니었다. 필요한 곳에 아끼지 않았을 뿐이다.
학교에 가서 후배들에게 밥을 산 건, 내가 학교 다닐 때 졸업한 선배들이 와서 한 번씩 밥을 샀기 때문이고, 친구를 만나 밥을 사는 건 내가 돈을 벌고 있기 때문이었으니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사치였던 짓을 딱 하나 하긴 했다. 1년에 한 번씩 팬티를 새로 사는 거였다. 그전에 입던 것은 아무리 멀쩡해도 모두 다 버렸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돈을 버니까 그 정도는.
하지만 변기에 앉아 화장지를 끊을 때마다, 부드러운 두부조직이 식도를 건드릴 때마다 전에 없던 설렘과 만족이 찾아왔다. 그리고 만약 그런 ‘기분’도 구매할 수 있는 거라면 그걸 ‘계속하고’싶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는 낭비가 아니라 경제적인 행복이라고. 212p
팬티를 새로 살 때, 그리고 그걸 입을 때마다 나는 설레고 만족스러웠다. 결혼을 하고 따로 내 용돈이라는 항목 없이 주어진 생활비에서 살림을 살 때 제일 아쉬웠던 것은 일 년이 넘어도 같은 팬티를 계속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어릴 때부터 가져온 결핍이 원인이었겠지만 딱 꼬집어 이유를 댈 수가 없다. 아무튼 그랬다.
김애란의 소설 ‘큐티클’에 그 때의 마음을 묘사한 부분이 딱 마음에 들어왔다. 서른여덟의 그녀는 친구 결혼식에 가면서 처음 네일 관리를 받는다. 갓 스물의 그녀가 죄책감에서 소비를 시작했다지만 곧 낭비가 아니라 경제적 행복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리고 지금은 스스로 스무 살 그 때보다 건강한 구매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에 대견해한다.
그동안 참 많은 소비를 하며 살았다. 우리 생은 구매와 소비의 일상이다. 시어머니가 주는 푼돈으로 하루치의 끼니를 준비하다가 결혼 5년 만에 거제로 따로 살림을 났었다. 남편이 주는 생활비는 그대로 내 손에 들어왔고, 첫 한 달은 시장에 가면 살 것들이 넘쳐났다.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을 사고, 그날 먹을 것들을 사는 일이 참 즐거웠다. 시장에 있는 것들은 다 필요해 보였고, 사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다 한 달이 지나니 시들해졌다. 시장에 가도 필요할 것 같은 물건이 아닌 필요한 물건을 골라 사는 패턴으로 바뀌었다. 신선한 푸성귀나 해물을 보는 족족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기보다 딱 그날 먹을 것만 사게 되었다.
결혼식 시간보다 일찍 나와 네일을 받은 그녀의 손톱은 다른 사람들이 좀 봐주었으면 하는 그녀의 바람에도 어느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거면서 하이힐을 신고 나온 그녀는 결국 발이 아파 뒤뚱거려야 했다. 쇼핑센터 앞에서 카드 사은품으로 주는 캐리어를 받아 친구가 일하는 남산타워까지 끌고 가야했던 그녀는 상당부분 내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처음 해보는 일에 대한 설렘, 나만을 위한 소심한 사치, 나를 봐주었으면 하는 허영, 공짜에 대한 호기심과 절약으로 위장한 욕심까지. 그런 것들의 부질없음 또한 직접 겪어보고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나 그런 것들을 쌓여 진정한 ‘나’로 살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아이들을 보면, 저걸 왜 사나 싶은 것들을 사기도 한다. 그래도 그냥 놔둔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서 작은나무가 늙고 병든 소를 사는데도 그저 지켜보던 할아버지의 마음이고자 한다. 집에 오던 길을 못 견디고 죽어버린 소를 보며 할아버지는 작은나무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소를 사는 걸 말렸다면, 너는 나를 원망했을 거라고. 만약 내가 소를 사라고 했다면, 소가 죽었을 때 또한 나를 원망했을 거라고.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직접 해보고 깨닫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돈을 써봐야 돈 쓰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부모가 가르쳐주는 잔소리가 아니라 스스로 해보고 깨달아야 앞으로 남은 그들의 삶이 지혜로워지지 않을까 싶다. 우리 아이들이 진정한 ‘나’의 모습으로 살기를 희망한다. 그 또한 소비의 미학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