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公)의 이름은 여광(汝光)이다. 우리 김씨는 청풍(淸風)에서 나왔다. 먼 조상의 이름은 대유(大猷)이니 고려 시대에 시중(侍中)을 지내셨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 이름이 관(灌)이신 분이 있었으니, 호조참의를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셨는데, 이 분이 이름이 의지(義之)인 한성부윤을 낳으셨고 이 분이 곧 공의 고조부이시다. 증조부의 이름은 이(理)로 부사(府使)를 지내셨고, 조부의 이름은 극함(克諴)으로 진사(進士)이자 첨정(僉正)을 지내셨다. 아버지의 이름은 우증(友曾)이시니 중종조(中廟朝)에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되셨고 벼슬은 통정대부 목사(牧使)이시다.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참판 이노(利老)의 따님이시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훌륭하여, 어려서부터 얽매이지 않고 호탕하였으며 집안의 재산을 늘리는 일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아버지 목사공(우증)이 일찍이 정주목사 자리에서 교체되어 돌아올 때, 당시 판관(判官)이 노잣돈을 너무 박하게 주었다. 감사 한형윤(韓亨允)이 이를 듣고 풍속에 관계된 일이라 여겨 장계를 올려 논핵했다. 그런데 판관이 교묘하게 자기가 빠져나갈 계략을 꾸미며 무함하는 말을 많이 하였고, 이로 인해 목사공이 도리어 조정에 죄를 얻게 되었다.
기묘년(1519년) 즈음에 이르러, 젊은 사림들이 훈구 공신들을 너무 억누르자 목사공이 술기운에 우연히 분개하는 말을 하였는데, 간악한 강윤희(康允禧)에게 무고를 당하여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신용개, 우의정 안당, 판의금 이계맹, 지의금 김안국, 승지 윤자임 등이 변호하여 구해주었고, 정암 조광조 선생 또한 너그럽고 공평한 논리를 펴주어 마침내 경흥으로 귀양을 가는 데 그쳤다.
이듬해인 경진년(1520년) 8월, 공(김여광)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 임금이 삼정승에게 의논한 후 즉시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병술년(1526년) 가을에 이르러, 공이 또다시 아버지의 정주목사 시절 일로 글을 올려 억울한 사정을 낱낱이 진술하였다. 당시 한형윤 공이 지의금사로 있으면서 그때의 사실을 상세히 알고 있었으므로, 동료들과 함께 누명을 벗겨줄 것을 청하였고 임금이 특별히 윤허하였다. 또한 애초에 의금부 관원들이 제대로 심리하지 못한 것을 들어 모두 문책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이르러 아버지가 앞뒤로 무고를 당했던 두 가지 일이 마침내 모두 밝게 씻어지게 되니, 사람들이 이로써 공의 지극한 효성을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은 아버지가 죄 없이 시대의 상황에 여러 번 액운을 겪는 것을 보고, 벼슬에 나아갈 뜻을 끊고 술(麴蘖)로 즐거움을 삼았다. 아버지의 공신 음서(勳蔭)를 물려받아 품계가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으나, 아들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가정(嘉靖) 을미년(1535년) 12월 28일에 졸(卒)하였다. 묘는 목사공의 묘 앞에 있으며, 방향은 같다.
부인 김씨는 연안(延安)의 이름난 성씨로, 문과 출신 부사 사결(事結)의 따님이다. 자애롭고 은혜로우며 곧고 미더워 옛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다. 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 어머니 홍부인이 아직 살아계셨는데, 부인이 시어머니 모시는 일에 어긋남이 없이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부인은 공의 친척 아우(族弟)인 우후(虞候) 숭의(崇義)의 아들을 데려다 후사(양자)로 삼았다. 부인은 공보다 30여 년 뒤에 돌아가셔서 공의 묘 왼쪽에 합장(祔葬)하였다.
양자로 들인 아들의 이름은 계(繼)이다. 학문과 행실로 사림(士林)에서 명성이 무거웠고 집의(執義)에 추증되었다. 네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 충백(忠伯)은 참의에 추증되었고, 차남 효백(孝伯), 삼남 인백(仁伯)은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사남은 예백(禮伯)이다.
첫째, 둘째, 셋째 집안의 자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고위 관직에 오른 자들이 줄을 이었다. 이는 이미 목사공(아버지)의 묘지에 갖추어 적었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서술하지 않는다.
아아! 지금으로부터 공이 돌아가신 때를 거슬러 올라가면 대략 200년이 가까워진다. 세대가 이미 멀어졌고 어른들도 모두 돌아가셔서, 족보(譜牒)에 실린 것이나 가승(家乘)에 기록된 것 모두 고증할 곳이 없다. 게다가 공의 자(表德, 사람의 본이름 외에 부르는 이름) 또한 사라져 전해지지 않으니, 하물며 평소의 행적(事蹟)이야 오죽하겠는가? 이것이 참으로 자손들의 통탄할 일이다.
비록 그렇지만 다 먹지 않고 남겨둔 열매가 다시 싹을 틔우듯 조상의 덕이 후손에게 머물러(不食之報), 세대가 멀어질수록 더욱 번창하고 있으니, 공의 숨겨진 덕과 그윽한 빛(潛德幽光)을 이를 통해 대략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기록하여 둔다.
주요 내용 해설 및 감상 포인트
이 글은 후손이 약 200년 뒤에 선조(김여광)의 삶을 기리며 쓴 글입니다.
기묘사화(1519년)의 이면: 아버지인 '김우증(金友曾)'은 정국공신(중종반정 공신)이었습니다. 당시 조광조를 필두로 한 신진 사림들이 공신들의 권력을 강하게 비판하고 압박하자, 술김에 이를 비판했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아 귀양을 가게 되는 아슬아슬한 정치적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들의 지극한 효성과 은둔: 김여광은 1520년과 1526년 두 차례나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결국 아버지의 억울한 누명을 모두 벗겨냅니다. 하지만 정쟁에 휘말려 아버지가 고초를 겪는 것을 본 그는 정치판에 환멸을 느끼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채 평생 술(국얼, 麴蘖)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게 살았습니다.
불식지보(不食之報): 주역(周易)에 나오는 말로 '맨 위의 과일은 따 먹지 않고 남겨두어 다시 씨를 뿌린다'는 뜻입니다. 조상이 쌓은 은덕이 후손에게 미쳐 자손이 번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후손은 비록 할아버지의 구체적인 생애 기록이 많이 유실되어 안타깝지만, 현재 가문이 이렇게 번창한 것을 보면 할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덕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고 칭송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원문
公諱汝光。我金出自淸風。遠祖諱大猷。高麗侍中。入我朝有諱灌。戶曹參議贈左贊成。寔生諱義之。漢城府尹。卽公之高祖也。曾祖諱理府使。祖諱克諴。進士僉正。考諱友曾。策中廟朝靖國功臣。官通政牧使。妣南陽洪氏。參判利老之女。公姿稟俊逸。自少犖落不羈。未嘗以家人產業經心也。牧使公嘗自定州遞歸。其時判官資送太薄。監司韓公亨允聞之。以爲有關風俗啓論之。判官巧爲自脫計。多有誣陷語。牧使公反以此獲罪于朝。至己卯間。年少士類太抑勳臣。牧使公乘醉偶發憤慨語。爲奸孼康允禧所誣告。事將不測。賴領議政鄭光弼,左議政申用漑,右議政安塘,判義禁李繼孟,知義禁金安國,承旨尹自任等伸救。靜菴趙先生又爲寬平之論。遂竄于慶興。翌年庚辰八月。公上書訟其冤。上議于三公。卽命放釋。至丙戌秋。公又以牧使公定州時事上言。悉陳冤狀。時韓公亨允爲知義禁。備諳其時事實。與同僚爲之請伸雪。上特允之。且以當初禁府官不能審處。並命推考。至是牧使公前後被誣兩事。卒皆昭洗。人莫不以此美公之誠孝焉。公見牧使公以非罪屢厄于時。絶意進取。以麴蘖爲樂。襲牧使公勳蔭。階大護軍。無子早世。以嘉靖乙未十二月二十八日卒。墓在牧使公墓前。同其向。夫人金氏。延安著姓。文府使事結之女。慈惠貞諒。有古女士風。公歿。洪夫人尙無恙。夫人承事無違。誠敬備至焉。夫人取公族弟虞候諱崇義之子爲嗣。後公三十餘年卒。祔葬于公墓之左。嗣子諱繼。以學行名重士林。贈執義。有四男。長忠伯贈參議。次孝伯次仁伯贈判書。次禮伯。伯仲叔三房子孫繁衍。至不可勝計。高官顯仕。累累相望。已具牧使公墓誌。玆不復述。噫。自今溯公之歿。大約近二百年矣。世代已遠。長老俱亡。譜牒所載。家乘所記。皆無所考徵。而公之表德。又逸而無傳。而況於平日事蹟乎。是實子孫之痛也。雖然不食之報。留在後人。彌遠而彌昌。公之潛德幽光。因可以槪見矣。是爲識。
후재집에 기록된 내용(厚齋:諱 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