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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7장 10-18절
내 교훈은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오병이어 기적과 함께 그와 관련된 교훈의 내용은 한편으로는 그를 세상 임금으로 삼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훈이 어렵다는 것으로 인해 그를 따르던 자들조차 더 이상 따르지 않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미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안식일에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것으로 인해, 나아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으로 인해 박해하고 죽이려고까지 한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함부로 할 수 없었지만, 이제 그를 따르던 자들 가운데 다수가 이탈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좀 더 적극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반감을 표할 수 있었는데, 지난 시간 요한복음 7장 1절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 그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혹 하나님이신 그가 죽음이 두려워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닌가란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성경에 대한 정당한 이해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여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가 자신을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죽으시기 위해 왔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럼 왜 유대가 아닌 갈릴리에서 다니려고 하셨는가? 유대에 올라갈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유대에 올라갈 뿐만 아니라 명절 중간이 되었을 때는 성전에서 가르치기까지 하십니다(14). 공개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유대 지역에 있던 유대인들의 경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상황 가운데 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드러내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워질 때는 아직까지 올라갈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올라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예수님의 형제들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초막절이 가까워지자 속히 유대로 가서 자신을 세상을 나타내기를 간청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어릴 때부터 본 그들은 예수님의 범상치 않음을 알았을 것이고, 심지어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오병이어의 기적까지 들었던 상태에 있었습니다. 특히 오병이어와 관련해 그들은 예수님이 스스로를 나타내려고 하시는가 보다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간청하기를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은 없기에 일을 행하려 한다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낼 것을 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의 권함에 대하여 신앙에 근거한 것,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단호히 말씀합니다. 오히려 이들의 자세는 오병이어를 경험하고서 예수님을 세상 임금 삼고자 한 이들과 다르지 않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들에게 예수님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그리고는 왜 올라갈 수 없는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데, 세상은 나를 미워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가? 예수님께서 세상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올라가시지만 예수님의 형제들이 권할 때는, 다시 말해 유대인의 명철인 초막절이 가까워올 때는 아직 올라가야 할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저들의 권함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그 말은 저들이 가지고 있던 세상적인 생각들, 세상에 나타내고 그래서 세상 임금으로 군림할 수 있다는 그런 자세들에 대한 거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10절로 오면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권할 때는 올라갈 수 없다고 하셨지만, 명절이 되어서는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잘못 이해하면 변덕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또한 때가 되어서 올라가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인성을 취하신 분으로서 율법 아래 나셔서 율법에 순종하신 분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율법을 재정하시고 그 율법에 따라 심판하시는 분이시지만, 인성을 취하셔서 율법 아래 나심으로 모든 율법에 순종하셨는데, 택하신 자기 백성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지금 명절에 올라가신 것도 이런 측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올라가시되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여전히 유대인들의 박해와 죽이려고 하는 위험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고, 그런 유대인의 박해와 죽음이라는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런 행보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들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저들의 박해, 저들이 죽이려고 하는 것이 두려워 자신을 나타내지도 않고 은밀하게 올라가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두려워서라면 14절 명절 중간이 되었을 때 성전에서 가르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공개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이때는 지혜를 발휘하신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예수님께서 인성을 취하신 것은 죽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죽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때로 자신을 숨기심으로 일하십니다. 위험이 있다고 할 때 자신을 함부로 드러내시지 않습니다. 여기에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숨기심으로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자신을 드러내심으로 일하십니다. 분명 자신을 드러내시면 좋지 않은 상황임에도 그렇게 하십니다. 이 또한 오늘 본문을 통해,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하시는가? 숨기시든 드러내시든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요, 부차적으로는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때와 관련하여 말씀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동일하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아니냐로, 또한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유익이 되느냐 아니냐로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주의 몸 된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이 기준을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고 나아가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인데,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도 생각하지 않고 몸 된 교회의 유익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런 지혜를, 이런 분별을, 이런 조심성을 배워야 합니다. 간혹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신다는 것을 잘못 이해해서 자신을 함부로 위험에 빠뜨리는 일들이 있는데, 그것은 결코 지혜가 아닙니다. 무엇이 말씀을 따르는 것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인지, 무엇이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인지를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분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드러낼 수도 혹은 숨길 수도 있어야 합니다. 내가 위험하기 때문에 드러내기보다는 숨기는 것을 택한다면, 반대로 내 영광이 되기 때문에 숨기기보다는 드러내기를 택한다면 어느 쪽도 하나님의 영광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은 “명절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말씀하는데, 유대인들도 명절에는 예수가 유대 지역으로 올라올 것은 예상한 듯 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 남자라면 유대 명절만큼은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10절에서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셨기 때문에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디 있는지 찾고 있는 상황입니다. 요한복음 7장 1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를 찾는 목적은 예수를 죽이기 위함입니다. 이런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의 유익이 되기 때문에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은밀하게 명절에 올라가셨던 겁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유대인들 사이에도 예수님에 대한 논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부류는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고위 관직 혹은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유대인들 사이에는 예수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와 또 다른 이들은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무리를 미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로 나눠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가 행하신 일과 그가 말씀하신 것이 선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복을 얻을 수 있는 참된 길을 보여주기 위해 오직 선하고 신령한 것들만을 가르치고 있다는 측면에서 좋은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미혹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무지한 백성들을 속이고 미혹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 해석과 많은 부분 마찰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그를 미혹하는 자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분명한 것은 일반 유대인들 사이에 좋은 사람으로 혹은 미혹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바들이 있지만 제자들이 고백한 것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바는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지도자 중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밤 중에 와서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3:2) 예수님을 좋은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가 아직 거듭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좋은 사람으로 여길지라도 그가 참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유대교 틀 안에서 자라온 자들이기에 유대인들, 특별히 종교지도자들에 대하여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3절을 보시면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그래서 드러내 놓고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수군거리면서 말할 뿐입니다. 드러내놓게 되면 유대인들, 고위 관리들 혹은 종교지도자들이 해를 가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내놓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조차 자신을 드러내도록 만듭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난 뒤 장사하는 과정에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니고데모는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는데, 요한복음 19장 38절에서 40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여기 보면 예수의 제자이지만 한동안은 유대인이 두려워 숨기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제자이면서도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혹 예수님에 대하여 좋은 사람으로 말하는 자들 중에 이런 부류도 있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반드시 두려움을 극복하게 만들고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10:32-33)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하여 좋은 사람으로 보는 자들은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을 미혹하는 사람으로 보는 자들은 믿음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에 대하여 좋게 생각하는 사람, 반대로 미혹하는 사람으로 의견이 분분할 때, 그러나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다고 할 때 유대인들은 여전히 예수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명절 중간 쯤 되었을 때 예수님은 스스로 드러내십니다. 오늘 본문 14절입니다.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여전히 유대인들의 위협이 있었지만 명절 중간쯤 되었을 때, 어쩌면 그때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인지도 모르는데, 그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십니다. 무엇을 가르치셨는지에 대해서 나오지는 않지만 하나님 나라의 일과 관련해서 가르치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셨다는 것은 여전히 위험이 있는 상황이지만 주의 뜻을 올바르게 드러내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은 거짓된 교리로 누룩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마16:6). 종교 지도자의 가르침이 누룩과 같은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무리들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기도 하셨는데, 왜냐하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기 때문입니다(마9:36). 이러하기에 지금 예수님은 위험 상황 속에서도 주의 순전한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가셨던 겁니다. 그러니까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올라가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그가 그렇게 하심으로 교회의 유익이 된다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이 반응합니다. 15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우선 놀랍게 여겼다는 것은 그의 가르침이 권위 있는 자와 같았기 때문은 아닙니다(cf.마7:29). 왜냐하면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님에 대하여 멸시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즉 진리를 전한다고 해서 그 진리를 다 받는 자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를 멸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멸시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할 때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는데 어떻게 글을 아느냐는 데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유대 랍비들 중 한 사람의 문하에 들어가 꾸준히 배워야 합니다. 선생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적이 없습니다. 마치 글을 배우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글을 알고 읽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앞서 어떤 사람은 무리를 미혹하는 자로 이해하기도 한다고 할 때 이스라엘의 선생이 되기 위해서 과정을 밟아야 하는데, 그런 과정 없이 스스로 랍비라 칭하면서 가르치기 때문에 참 선생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글을 알 수 있는가? 어떻게 성경의 진리를 깨달아 전할 수 있는가? 이것이 저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이미 요한복음 6장에서도 나온 바 있습니다. 41절과 42절을 보시면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요한복음 1장에도 보시면 나다나엘이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45절과 46절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그러니까 그가 전하는 진리의 내용 자체보다는 그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으로, 그의 부모를 알고 있다는 것으로 진리의 내용이 막히고 있는 것입니다. 인성을 취하여 오셨기 때문에 나사렛 출신의 사람,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만 보고 있는 것이지, 그가 신성을 가지신 참 하나님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진리 자체가 주목되기보다는 진리를 전하는 자의 실상이 어떠한가 여기에 걸려 진리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가까운 원인이라면, 먼 원인은 이미 요한복음 6장에서 밝히신 바에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44) 즉 하나님께서 저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지 않았기 때문에 진리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때 먼 원인으로만 말하지 않고 가까운 원인으로 말하는 방식은 하나님 탓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로 있다는 것, 그들 스스로가 듣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 그들 스스로가 이런 저런 이유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는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가 말을 좀 어눌하게 하는 사람보다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이 더 쉽게 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좀 더 조리 있게 말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는 사람, 그가 진리를 더 잘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익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유효성의 주인이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즉 말을 잘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다소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전하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듣는 자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조명의 은혜를 베푸신다면 사람의 외적인 것은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고린도전서 2장을 보시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절부터 보시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1-5) 사람들이 속는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진리의 내용 자체보다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에 속습니다.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에 속습니다. 그러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또 설득력으로 진리가 아닌 것, 혹은 진리처럼 보이는 것을 전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사도 바울은 그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전하고자 했다고 말합니다. 진리 자체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아니면 전해질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만 증거 되기를 바랐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지혜로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만이 나타나기를 바람으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진리 자체를 말할지라도 그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일하심 없이는 결코 깨달을 수 없기에 진리를 전하면서도 그의 능력이 나타나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중요한가? 하나님이 주시는가, 주시지 않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시는가, 주시지 않는가와 관련해 전하는 자에게 있어서는 진리 자체를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으로 전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 자체로 전한다고 할 때 거기에는 전하는 자의 어눌함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전하는 자의 논리 자체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좀 더 논리적이고 좀 더 조리 있고 좀 더 잘 표현한다면 유익함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셔야지 만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전하고 아무리 좀 더 조리 있게 전하고 아무리 표현에 있어 풍성하게 잘 표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이상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진리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고, 말씀을 받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되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성령의 조명하심이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 탓을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먼 원인이 중요하지만 먼 원인 때문에 믿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진리의 내용이 증거 되었지만 그들 스스로가 듣지 않았을 뿐입니다. 아니 들어도 진리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스스로에게 원인이 있지, 하나님 탓을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시면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긴 것은 이 사람이 배우지 아니하였는데도, 랍비의 전통 교육을 받지도 않았는데도, 글을 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전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시면서 율법 아래 나셨지만, 신성으로서 율법을 재정하신 분이십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에서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말씀으로 처음부터 그런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신성과 인성의 연합으로 신성의 모든 것이 인성으로 하여금 나타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달리 말하면 어떠한 가르침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 신성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통해 증거 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들은 진리의 내용 자체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글을 알 수 있는가, 가르칠 수 있는가 로만 판단합니다. 배우지 않았다면 글을 알 수 없는 것이고, 글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진리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는 겁니다. 당연히 이런 입장에 있는 자들은 지금 예수님의 가르침이 사람을 미혹하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들에게 예수님은 16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쉽게 말하면 내가 가르치는 교훈의 출처를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말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내 교훈이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인지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유대인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출신을 봅니다. 예수님의 성장 배경을 봅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판단합니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입장이고, 목수의 자식으로서 랍비가 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마치 서울대 출신의 목사와 지방대 출신의 목사를 비교할 때 서울대니까 더 나을 것이라는 입장, 지방대이기 때문에 별 볼일 없다는 입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물론 세상 기준에 따르자면 학벌에 따라 판단하기도 하고, 확률적으로 보자면 틀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그렇게 따져 물을 수 없습니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저는 신학교 교수님들 중에서도 설교의 내용이 너무 엉뚱하게 증거 되는 것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신학교 교수님이라고 해서 진리만을 증거 하는가? 그렇지 않더란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가 전하는 내용의 출처가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물론 내 교훈이 내 것이 아니라고 할 때 실제로 예수님의 교훈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자신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 나셔서 율법에 순종하시기도 하시지만, 그분은 율법의 재정자요 입법자이십니다. 그러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요한복음 5장 그리고 6장을 통해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위격 상호 간의 관계를 따라 질서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질서를 나타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본질상 동일하시며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신 한 하나님이시지만, 성부가 전 신성의 근원이시요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신 분이시기 때문에, 또한 그분은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자신의 출처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선지자들이 활동하던 시대,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대를 지나 특별계시로서의 성경이 완성되고 난 뒤로는 반드시 회를 통해 목사 임직을 받은 자가 설교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제자였던 적이 없다는 것으로, 선생을 두지 않았다는 것으로 신학 과정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목사 안수를 주어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선지자와 사도들은 비상직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셨습니다.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사도가 된 맛디아의 경우도 지금 우리와 같은 투표 방식이 아니라 제비를 뽑는 방식입니다. 항존직분으로서가 아니라 비상직분으로서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특별계시가 완성되고 난 뒤는 그런 방식은 폐지되었습니다. 때문에 정당한 과정을 통해 목사로 임직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임직을 받았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설교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만을 가르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출처가 하나님이신 것처럼 우리의 출처는 그리스도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될 때 분별해야 할 부분이 이것입니다. 저 사람은 말을 잘 하는가? 저 사람은 청중을 휘어잡을만한 언변을 가지고 있는가? 저 사람은 졸리지 않도록 적절하게 재미를 주고 있는가? 이런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것을 가르치고 있는가? 하나님의 것을 가르치고 있는가?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말할 때 그들의 너그러움은 다른 데 있지 않았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것에 있었고, 그것이 과연 하나님을 출처로 한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데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분별을 해야 합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이런 분별이 전혀 없습니다. 저들 가운데 종교 지도자가 있다고 할 때 종교 지도자라면 그의 출처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지를 봐야 하는데, 전혀 엉뚱한 것으로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이러니 어떻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17절을 보시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자들이라면 내가 너희에게 교훈하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이해하고 있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저들은 하나님의 뜻,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진의를 드러내시면 항상 전통에 위배되는 것처럼 시비를 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처는 하나님이시지만 저들의 출처는 결코 하나님이 아님을 드러내고 계신 겁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사람이 만들어 낸 전통이 그들의 가르침이었던 겁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7장 28절과 29절에 보면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끝나고 난 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면서 그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리스도의 말씀에 권위가 있는가? 그의 출처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결코 하나님을 출처로 하지 않았습니다. 행함에 대한 강조는 많을지 몰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가르침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18절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십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어떤 자의 가르침만이 참되냐?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만이 참되다고 하십니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한번도 자신의 영광을 구한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했을 뿐입니다. 그분에게 영광이 돌아가도록 하는 가르침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어떠합니까? 마태복음 6장의 말씀으로 하자면 구제할 때에 은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은 모양으로 가르칠 뿐입니다(2). 기도할 때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는 것처럼 가르칠 뿐입니다(5). 금식할 때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는 것처럼 그렇게 가르칠 뿐입니다(16). 이것을 한 마디로 외식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외식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에서 반복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물론 저들에게 참된 가르침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하셨습니다. 즉 참된 가르침이라면 그런 가르침은 듣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가르침, 다시 말해 하나님을 출처로 하지 않는 가르침, 인간적인 가르침에 대해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분별하는 데 있어 중요한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출처로 하는가? 하나님을 출처로 한다면 그가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가? 이런 측면에서 인간에게 영광을 돌리는 방식의 모든 가르침은 결코 하나님을 출처로 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펠라기안주의가 이단으로 정죄된 것이고, 반펠라기난주의도 이단으로 정죄된 것입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찬양하도록 만드는 모든 가르침들이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그 은혜와 함께 우리의 몫이 있다고 하는 가르침도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거절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금 칼빈의 기독교강요 헌사에 나오는 로마서 12장 6절의 해석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거기서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라고 말할 때 그는 성경의 모든 해석을 시험하는 아주 명백한 규칙을 제시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규칙은 무엇인가? 우리 자신에게서 모든 영광 돌릴 기회를 제거하여 그분 홀로 영광스럽게 부각되는 것, 우리는 그분 안에서만 영화롭게 되는 것, 이것보다 믿음에 더 잘 부합되는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본성은 벌거숭이이지만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옷 입혀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선한 것이 전혀 없지만 그것을 하나님에 의해서 채움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죄의 종이지만 우리는 그분에 의해 자유함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눈 먼 자들이지만 그분에 의해 비췸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절름발이이지만 그런 우리가 그분에 의해 교정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심히 연약한 자로 있지만 그분에 의해 지탱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런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놀라지만 그 놀람은 그의 가르침이 권위가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왜 달랐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출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면 저들의 출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출처로 하되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그런 가르침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그런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유대인과 같은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하지만 그분의 영광을 훼손하는 인간적인 가르침, 인간의 자리를 마련해 두는 가르침이 얼마나 많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무엇이 참된 가르침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출처로 하지 않는 가르침,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 가르침은 그것이 어떠한 형태를 가지든 불의할 뿐입니다. 불의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받아들일 수 없는 가르침이란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가르침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내 교훈은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그리고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고 할 때 나를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것, 그것만이 참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분별로 주의 것만을 우리의 것으로 삼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