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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방
평화의 방 천장화
본관 남서쪽 모서리에 있는 평화의 방(Salon de la paix)은 거울의 방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여러 장의 거울, 대리석, 황금빛 청동 장식물 등으로 풍성하게 꾸며진 이 방의 전체적인 장식은 거울의 방, 전쟁 전시실과 더불어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방의 둥근 천장과 아치형 상부에 있는 천장화는 거울의 방 천장에 묘사된 이야기 시리즈의 종결 부분으로 루이 14세 형제의 결혼으로 맺어진 스페인과 바이에른과의 동맹 관계를 상징하는 4마리의 멧비둘기가 이끄는 마차 위에 앉아 있는 프랑스는 프랑스에 대항해 연합한 강대국들에게 올리브 나뭇가지를 건네주는 그림으로 평화와 결혼의 신은 프랑스를 호위하고 있고, 영광의 신은 불멸을 상징하는 원형의 관을 씌워주고 있으며, 장엄함의 신은 건축물의 설계도를 하사하고 있다. 그 주위로 독일, 스페인, 네덜란드는 행복과 평화를 맞이하고 있으며 그리스도 교권의 전 유럽 국가들은 정의, 신앙심, 예술을 찬양하면서 동서에 무기를 발로 밟고 있다. 1710년 이후 거울의 방과 경계를 이루던 아치가 이동식 칸막이벽으로 폐쇄되면서 이 방은 왕비의 처소의 일부가 되었고, 그 후 왕비의 놀이의 방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말을 탄 루이 14세
천장화
전쟁의 방 (Le salon de la Guerre)은 루이 필립 왕(King Louis Philppe)이 과거 왕실의 가까운 친척들의 처소로 쓰였던 남쪽 측면 건물 2층을 완전히 개조하여 프랑스의 전쟁사를 간략하게 재조명하기 위한 거대한 전시실을 만든 것으로 천정에는 루이 14세(Louis XIV) 초상화가 그려진 방패를 중심으로 하여 승리에 쌓인 프랑스를 상징하고 있다.
클로비스에서 나폴레옹 시대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역사가 좌에서 우로 전개되는데 주로 전쟁 영웅, 기병, 군 참모, 부상자들을 등장인물로 하는 사건 위주의 역사 전개로 그 중심에는 군 최고 통수권자인 국왕의 권위가 자리하고 있어 프랑스 국왕의 정통성을 국민에게 알리려는 거대한 역사 전시실로서의 역할을 하고자 했다고 한다.
타유부르의 전투(Battle of Taillebourg)
플뢰뤼스 전투(battle of fleurus)
프리드란트 전투(battle of friedland)
취리히 전투(battle of zurich)
퐁트누아 전투(battle of fontenoy)
바그람의 전투(battle of wagram)
왕비의 침실 전경
왕비의 침실(Chambre de la Reine)은 이 방의 마지막 주인이었던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d'Autriche)는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왕비로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 막내딸로 태어나 오스트리아와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와의 동맹을 위해 루이 16세와 정략결혼을 했으나 왕비로 재위하는 동안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38살 생일을 2주 앞두고 단두대에서 처형된 비운의 왕비로 그녀가 이 방을 떠나야했던 1789년 10월 6일까지의 상태로 대부분 복원되었다고 한다. 이 방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녀를 출산한 곳으로 거울 위로는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인 마리 테레즈, 오빠인 요셉 2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침대 바로 옆에 작은 문이 있는데 이것은 왕비가 아이들 방에 곧장 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왕비의 침실 침대
청동조각 장식의 적갈색 대리석 벽난로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이 방에 다시 설치되었고 그 후 목재 장식, 측면 벽의 장식 거울도 재 설치되었는데 현재 이 방의 전체적인 모습은 프랑스 역사박물관 정비 계획과 때를 같이하여 1834년 루이 필리프의 지시에 따라 부분적으로 복원 된 것으로 흰 바탕에 꽃다발과 공작새 깃털 문양을 수놓은 견직물은 여름용 가구를 배치할 때 장식용으로 쓰기 위한 것으로 원래 모습 그대로 리용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마리 앙트와네트와 그녀의 아이들
왕비의 침실 집기들
방에서 칸막이로 둘러싸인 곳에는 왕비가 사용하던 호화로운 보석함이 놓여있고 이곳과 방을 구분하던 난간도 완전히 복원되어 루이 15세의 왕비 마리아 레슈친스카가 사용하던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마리 앙트와네트는 아마도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이전 왕비들의 꾸민 일부 장식에는 손대지 않은 것 같다. 왕비의 처소 여러 방 중에서 화려함이 극치를 이루는 왕비의 침실은 오늘 날 베르사유 궁 전체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실내장식의 한가지로 꼽힌다.
머큐리의 방
머큐리의 방(Salon de Mercure)은 침실(Bed Chamber)라고도 불리우며 천정에는 새벽 별과 함께 수레에 오르는 머큐리(Mercure)를 볼 수 있고 이 방은 초기에 왕의 침실로, 나중에는 방문객 대기실로 사용되었으며 루이 14세(Louis XIV)와 루이 15세(Louis XV) 장례식이 거행된 곳이다. 참고로 머큐리(Mercure)는 프랑스어인데 '메르퀴르'라고 읽으며 '수은'이란 뜻이며,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신 이름이기도 하다. 대접견실에 속해 있으며, 국왕의 공식적인 침실이기도 했던 머큐리의 방은 루이 14세 시대의 왕실 소장품 중 가장 아름다운 회화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던 장소였지만 현재 이들 작품은 대부분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되어있고 측면 벽에 <음악 콘스트>와 난로의 벽면에 티치아노의 그림 2점이 전시되어 있을 뿐이다. 이 방에 있는 멋진 침대는 의전용이며 최근에 복원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머큐리의 방 천정화. "새벽별과 함께 수레에 오른 머큐리신"
현재 머큐리의 방에는 완성한 천장화만 남아 있는데 천장화 중앙에는 머큐리 신이 새벽 벽을 앞세우고 두 마리의 수탉이 이끄는 마차를 타고 있다. 아치형 상부에는 <외국 대사를 맞이하고 있는 알렉산더와 칼라누스><학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2세><인도대사를 맞이하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자연사를 기술할 수 있도록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국적인 동물들을 가져다주고 있는 알렉산더 대왕>등 고대 에피소드 들은 국왕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뜻에서 그려진 것들이라 한다.
대관식의 방
대관식의방 천정화 '브뤼메르18일'
브뤼메르 18일 쿠데타(18 Brumaire)는 1799년 11월 9일<프랑스 혁명력 안개 달(霧月,브뤼메르) 18일>로 나폴레옹이 총재 정부를 전복하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사건으로 그는 집정 정부를 수립하고, 스스로 제일 집정이 된 날이다.
대관식의 방 기둥
중앙에 위치한 자기(porcelain) 기둥은 나폴레옹 1세의 독일 전쟁 승리를 기념한 것이다.
나폴레옹황제의 대관식(베르사유궁전 대관식의 방)
나폴레옹황제의 대관식(르부르박물관 원본)
대관식의 방에는 David가 그린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그림이 걸려 있다. 다비드의 작품이 두 개 있는데 나폴레옹이 수주한 원본 대관식 그림은 루브르에 있고 베르사유에 있는 것은 같은 화가가 나중에 그린 복제품이다. 복제품에서 David는 자신이 짝사랑한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폴린에게 분홍색 드레스를 입혔는데 (베르사유에 있는 그림의 왼쪽 두 번째 여인) 원작에선 모두 흰 드레스를 입고 있다.
대관식 때 나폴레옹의 의상
1804년 12월 2일, 나폴레옹의 대관식이 열린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교황을 비롯한 많은 하객들이 모여 새로운 황제의 탄생을 축복하고 있는데 그림에는 주인공인 나폴레옹 대신에, 황후 조세핀의 대관식을 묘사하고 있다.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은 시대적으로 루이 16세를 계승하는 자리였으나, 정치적 야망이 컸던 나폴레옹은 이전의 왕들과 자신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과거 서유럽을 통일했던 카롤루스 대제의 계승자로 선언하고 실제로 자신의 대관식을 빛내기 위해 카롤루스가 왕위의 표상으로 사용했던 왕관, 홀, 검을 찾아올 것을 명령하는 한편 역대 프랑스 왕들이 대관식을 치른 랭스 대성당을 거부하고, 노트르담 대성당을 즉위식 장소로 선택하는데 이는 자신은 부패한 부르봉 왕조를 계승하는 군주가 아닌, 위대한 프랑크 왕국의 대를 이은 후손임을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또한, 이 그림에서 나폴레옹의 머리를 보면 화려한 보석들로 장식된 프랑스 왕들의 왕관과는 전혀 다르게 고대 올림픽 경기의 영웅들이나 카이사르 같은 로마제국의 영웅을 연상시키는 월계관을 쓰고 있고 복장도 프랑스 왕들의 전통적인 청색과 황금색의 대관식 외투를 입지 않고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입었던 토가를 걸치고 있다. 아울러 그림 속 여인들의 복장 역시 마치 고대 신화 속 여인들을 연상케 하는데 나폴레옹은 대관식에 출현하는 모든 사람들의 복장까지도 자신이 직접 지정했다고 한다. 이는 나폴레옹이 기존 귀족들의 생활 방식에 대항해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에 눈을 돌려 새로운 패션과 예술 장르(신고전주의)로 과거의 역사를 지우고, 새로운 권력의 출현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조세핀 왕비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나폴레옹
대관식을 스케치하던 다비드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되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는데 교황이 관을 나폴레옹의 머리에 얹으려 할 때 갑자기 나폴레옹이 벌떡 일어나 교황이 든 관을 빼앗아 자신이 직접 써 버린 것이다. 교황이 머쓱해지고, 다비드를 비롯한 모든 참석자들은 깜짝 놀라자 나폴레옹은 조세핀에게 다가가 자신이 썼던 관을 황후에게 씌우는데 이는 자신이 권력의 상징인 관을 직접 써 보임으로써, 자신이 위대한 인물임을 과시한 것이다. 다비드는 이 부분을 그리면서 처음에는 나폴레옹 자신이 직접 관을 쓰는 모습을 그리려고 했지만, 불경스럽게 보일 수도 있어 망설이다 어쩔 수 없이 나폴레옹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관을 씌워 주는 매우 자상하고 아름다운 장면으로 대관식 그림을 대신했고, 나폴레옹은 매우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독수리 문장의 분배 뒤 황제에게 맹세를 하는 군대
우리가 베르사유궁전을 간 지금이 초성수기인지 파리의 궁전 내 곳곳은 인파로 넘쳐 떠밀려 가듯 관람해야 하고 사람들의 체온으로 무척 덥다. 궁전 곳곳 어느 곳에도 관람객으로 넘쳐 쉴 곳이 없었지만 그래도 오디오가이드를 들으며 베르사유 궁전내부를 관람하면서 좋았던 점은. 궁전 증축의 역사를 쉽게 알 수 있었다는 점이다. 프랑스 왕조가 거듭되면서 궁전은 계속 증축되고 업그레이드가 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는데, 그 변화를 미니어처와 동영상으로 잘 전시되어 있다.
왕실 예배당, 왕의 침실, 비너스의 방, 다이아나의 방, 아폴론의 방, 전쟁의 방, 거울의 방 등등 이루 다 셀 수도 없는 방들과 그에 걸 맞는 장식품, 그림들 집기류들은 화려함의 극치에 달한 느낌을 받아 왕가의 호사 뒤에 백성들의 배는 얼마나 굶주렸을까? 베르사유 궁전의 여인으로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위를 하는 백성들에게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 고 했다는 설도 있지만 궁전을 구경하다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유럽여행을 하다보면 왕이 거처하는 궁전뿐만 아니라 성당들의 웅장하고 화려함, 그리고 목자임을 자처하는 종교인들의 생활공간을 보노라면 백성들은 정치와 종교 이중착취에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고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루이 14세의 청동 기마상
베르사유 궁전 내부를 돌아본 우리는 그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궁전을 나와 주차장 옆 넓은 광장에 우뚝 서 있는 루리 14세의 청동기마상을 보러 간다. 대왕 또는 태양왕이라고 불린 루이 14세는 절대왕정의 대표적인 전제군주로 루이 14세는 루이 13세와 안 도트리슈가 결혼한 지 23년 만에 태어나 5세 때 즉위하여, 모후를 섭정으로, J.마자랭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보필을 받았으나 30년 전쟁과 관련된 에스파냐와의 전쟁으로 나라가 피폐하여 국민들은 점차 반항의 기미를 보였고, 파리고등법원은 국민의 입장을 대표하여 왕권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으며 대 귀족과 불평분자의 책모가 작용, 프롱드의 난이 일어나 전국을 혼란에 빠뜨리자, 왕은 파리를 떠나 모후와 함께 각지로 유랑하는 고난을 겪기도 하였는데 이 난은 오랫동안 왕에게 불쾌한 기억으로 남게 되고, 파리가 싫어져 나중에는 궁전을 베르사유로 옮겼다고 한다.
프롱드의 난이 진압되고 재상 마자랭이 죽자, 왕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는데 왕은 재상제를 폐지하고 자신이 직접 고문관회의를 주재하여 대신들에게 자기의 결정사항을 집행하게 하였으며 정부의 관료를 전국 각지에 상주시킴으로써 명령에 따라 손발처럼 움직이는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는 한편, 중상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보호관세에 의한 무역의 균형을 꾀하는 외에 산업을 육성하고 식민지의 개발을 추진하였고 유럽의 열강을 상대로 각종 전쟁을 강행하여 유럽의 지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나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한 후 자신을 지상에서의 신의 대행자라 하여 왕권신수설을 주장하고, 하나의 국가에 하나의 종교를 표방, 1685년에는 낭트칙령을 폐지하고 신교도를 박해하자 상공업에 종사하던 신교도들이 국외로 이주함으로써 타격을 받았으며, 여러 차례의 대외전쟁과 화려한 궁정생활로 재정 결핍을 초래하고 절대왕정의 모순이 증대하여, 후에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는 한 원인을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