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오늘 말씀에서 또 다시 기도의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6:5-15절에서 기도의 관한 교훈을 주시는데 거기에서는 올바른 기도의 방식과 기도의 내용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다면 오늘 말씀에서는 우리가 기도를 할 때에 응답의 확신을 가지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유는 응답하실 것을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서 기도하는 것은 여전히 중언부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7절 말씀에서는 세 개의 현재 명령형과 미래형말씀이 서로 연결됩니다. 그 세 가지는 첫째 구하라는 현재 명령과 주실 것이요라는 미래형이 나오고, 찾으라는 현재 명령형과 찾아낼 것이요라는 미래형, 그리고 두드리라는 현재 명령과 열릴 것이니라는 미래형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현재형과 미래형을 함께 쓰셨을까요? 이유는 현재 명령형을 쓰신 이유는 기도는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적으로 기도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특히나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말씀은 원래 고대의 구걸하는 사람들의 지혜에 속한다고 합니다. 문전 박대를 당해도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구걸하면 결국은 얻어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밥 한 그릇 얻어먹는데도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밥 한 그릇보다 못하진 않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서에서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기도의 자세가 우리에게 있어야 함을 다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라는 말씀은 구약에서 예배드릴 때 사용하던 표현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다는 표현인데요. 찾으라는 표현은 기도를 실제적으로 잊지 않고 나의 기도에 관심을 갖으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과 저 또한 기도를 해 놓고 내가 한 기도에 관심을 갖지 않고 기도할 때에만 내 입술로 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해야 할 기도의 또 하나의 모습은 찾는 기도입니다. 건강을 위해서 기도했다면 약을 먹던지, 병원에 가던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치유하시는지, 어떻게 일하시는지 관심을 갖고 찾아야 합니다. 직장을 주세요. 라는 기도 또한 기도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또 결혼을 위해 기도했다면 내가 어떻게 찾아야 하겠습니까? 공부를 위해 기도했다면 또 어떻게 찾는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설교를 잘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면 구하는 기도만 하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무릎 꿇고 기도 한 다음에 또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전도하기를 원합니다. 교회가 부흥되길 원합니다. 우리가 하는 이 모든 기도 후 나의 찾는 기도는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 이 새벽에 구하는 기도를 했다면 무릎을 펴고 일어서서는 찾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찾지는 않고 구하기만 했습니다. 주님은 찾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찾아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찾는 것까지 우리의 몫입니다.
다음으로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는 기도의 연속성과 반복성 그리고 응답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합니다. 문을 두드린다고 다 열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반복성과 연속성이 나타나는데 문을 열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만 두드리는 것은 내가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간결하게 말해보면 기도는 내 책임, 문을 두드리는 것은 내 책임입니다. 그러나 응답은 주님이 하십니다. 응답의 시간, 문이 열리는 시간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이십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떨어진 명령이 있습니다.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반복해서 연속적으로... 오늘 그 기도를 포기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여기에서 9-11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시는데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하면 돌을 주는 아버지는 없다.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아버지는 없다. 라고 합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버지와 비교해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즉 하나님을 말씀하십니다. 왜 비교를 하냐면 사람의 아버지도 그런 아버지는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가 너희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장 선한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하나님께 분명히 우리가 떡을 구하고 생선을 구했습니다. 건강과 평안과 자녀들의 보호하심을 구했습니다. 사업도 잘되고 걸림돌이 업이 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 응답을 받아보니까 내가 구한 떡이 아니라 돌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생선을 구했는데 내가 생각하기엔 뱀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힘듭니다. 내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럼 오늘 말씀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라는 말씀을 봅시다.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좋은 것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내가 떡을 구했는데 돌을 주시고, 생선을 구했는데 뱀을 주셨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돌과 뱀이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 맞다면, 확실한 응답이라면 그것이 돌이더라도 뱀이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면 그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때로 내 생각과 다르게 하나님이 응답하시더라도 기억합시다.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하심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12절을 보아야 합니다. 12절은 기독교의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보편적으로 모든 종교에서 전하는 말씀입니다. 기원전 5세기 경에 헬라의 소피스트들에게서도 발견되고, 헬라 철학에서도 이 말은 합니다. 동양의 유교에서도 인도의 윤리 사상에서도 이 말은 찾아볼 수 있는 인류의 보편적인 도덕 원리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이 말씀을 구하라 찾아라 두드리라는 기도의 교훈 뒤에 말씀하셨을까요?
이유는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로 대접을 받고자 하느냐? 그렇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하나님 대접해 드리는 가장 본질적인 것은, 내가 떡을 구했는데 돌을 주셔도 내가 생선을 구했는데 돌을 주셔도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이 옳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라고 믿어드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 대접해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리고 나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에게 주길 원한다. 나를 신뢰하기를 원한다. 분명히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직접 산에서 하신 약속이십니다. 이것을 신뢰합시다. 하나님을 하나님 대접 해 드립시다. 그 다음 어떻게 응답하시는지 오늘도 구하고 찾고 두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