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사망 200주년, 워털루에서 운명 갈린 동갑내기 전쟁 영웅
지난 5일(현지 시간)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사망 200주년을 맞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왼쪽> 묘에 헌화했어요.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도 '영웅'과 '독재자'로 평가가 갈리는 인물인데요, 사망 200주년을 맞아 전 세계에서 그의 공적을 기리고 평가하는 '나폴레옹 다시 보기'가 한창입니다.
거의 전 유럽을 석권한 나폴레옹은 '전쟁의 신'으로 기억되지만, 마지막으로 치른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는 처참하게 졌습니다. 그러곤 대서양의 외딴섬 세인트 헬레나로 귀양 가 1821년 5월 5일 세상을 떠났죠. 당시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해 나폴레옹 시대를 저물게 한 사람은 바로 영국의 웰링턴 장군(1769~1852)이에요. 나폴레옹과 같은 해 태어난 동갑내기 웰링턴은 나폴레옹을 물리쳐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얻었고, 이후 영국 총리까지 올랐어요. 그런데 200년이 지난 오늘날 패자인 나폴레옹이 승자인 웰링턴보다 더 큰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시골 출신 황제 vs 귀족 출신 총리
나폴레옹과 웰링턴의 삶은 시작부터 달랐어요. 나폴레옹은 1769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지중해의 작은 섬 코르시카에서 하급 귀족 출신으로 태어났어요. 그는 열 살 때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 본토로 건너가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어요. 프랑스 귀족 자제가 즐비한 사관학교에서 시골 출신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사투리를 쓰는 촌놈으로 놀림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나중에 지휘관이 됐을 때 시골 섬 출신 특유의 거칠고 솔직한 태도로 농민 출신 사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해요.
반면 웰링턴은 아일랜드 귀족 출신이었죠. 본명은 아서 웰즐리인데, 1814년 영국 왕에게 공작 작위를 받아 1대 웰링턴 공작이 됐어요. 평소 사람들 앞에서 자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을 뿐 아니라, 신분이 낮거나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에겐 거들먹거렸다는 평가가 전해질 만큼 뼛속까지 귀족이었던 모양입니다. 부하들에게도 인기가 없었다고 해요. 그는 열두 살 때 명문 사립학교인 이튼칼리지에 들어갔는데, 나중에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한 후 "워털루의 승리는 이튼의 교정에서 시작됐다"는 말을 하기도 했어요. 이튼칼리지는 웰링턴 장군을 포함해 영국 총리를 20여 명 배출한 학교예요. 현 보리스 존슨 총리도 이튼 출신입니다.
쿠데타로 권력 장악 후 황제 즉위
나폴레옹은 사관학교 졸업 후 장교로 활약했어요. 당시 유럽 지배층은 시민들이 절대 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1789~1794) 바람이 유럽 전역에 확산될까 봐 두려워했어요. 그래서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여러 나라가 '대(對)프랑스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싸우기 시작합니다. 나폴레옹은 대프랑스 동맹과의 전투에서 공적을 세우며 인기가 높아졌고, 1799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어요. 5년 뒤엔 황제에 즉위했죠. 이후 군사, 법전, 교육,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대변혁을 일으켰어요. 또 유럽 국가들과 전쟁을 벌여 스페인부터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까지 유럽 대부분을 점령했고, 프랑스 영토를 3배로 넓혔습니다.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 원정으로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굶주림과 추위로 많은 병사를 잃었죠. 마침내 1814년 영국 등 대프랑스 동맹군에게 파리를 함락당하고, 이탈리아 서해안 엘바섬으로 추방당했어요. 이에 프랑스 혁명으로 처형당한 루이 16세의 동생이 루이 18세로 즉위하면서 프랑스는 왕정이 복고(復古·과거로 돌아감)됐죠.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동맹군의 감시를 피해 엘바섬을 탈출했어요. 그가 프랑스에 돌아왔을 때 많은 지지자가 환영했어요. 루이 18세는 벨기에로 도망갔고,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기까지 100일간 프랑스를 다시 지배했답니다.
웰링턴은 이튼칼리지에서 성적이 그다지 좋지 못하고 아버지가 사망한 뒤 가세가 기울자 1785년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로 옮겼어요. 1796년부터는 식민지 인도의 총독이었던 형을 따라가 10년 동안 폭동을 진압하며 공을 세웠죠. 이후 유럽으로 돌아와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의 수많은 전투에서 활약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유배된 후 전후 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유럽 각국이 참여한 '빈 회의'가 열렸는데, 웰링턴은 영국 대표로 파견될 정도로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나폴레옹 시대를 끝낸 워털루 전투
1815년 나폴레옹이 다시 프랑스 권력을 잡자 영국 등 동맹국들은 그를 타도하고자 했어요. 이에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웰링턴이 이끈 영국·프로이센 연합군이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 지역에서 격전을 벌인 게 '워털루 전투'입니다.
나폴레옹은 먼저 프로이센군을 공격해 퇴각시킨 다음 영국군을 총공격했어요.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로 기우는 듯했는데, 갑자기 퇴각하던 프로이센군이 돌아와 프랑스군을 기습 공격하면서 영국·프로이센 연합군이 승리합니다. 이렇게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의 23년에 걸친 오랜 전쟁도 끝났어요. 하지만 웰링턴은 추후 동시대 가장 훌륭한 장군이 누구냐는 질문에 "현재에도, 과거에도, 미래에도 바로 나폴레옹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전투에선 이겼지만, 군사 전략가로서 나폴레옹 능력에 경의를 표한 것입니다.
☞곳곳에 이름 남긴 웰링턴 장군
웰링턴 장군 이름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어요. 뉴질랜드 수도 웰링턴이 그의 이름을 딴 것이고, 많은 사람이 신는 고무 장화 '웰링턴 부츠'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어요. 웰링턴은 당시 장식품이 달린 가죽 군화가 거추장스러워 개선하라고 지시했고, 단순하고 실용적인 부츠가 탄생했어요. 이 부츠는 처음엔 '웰링턴 장군의 부츠'로 불리다가, 아예 제품명이 '웰링턴 부츠'로 굳어졌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고무로 된 웰링턴 부츠를 신어요. 소고기에 푸아그라(거위 간)와 버섯 페이스트를 바르고 페이스트리 반죽으로 얇게 감싸 구워 낸 영국 음식 '비프 웰링턴'<사진>도 웰링턴 이름을 딴 것으로 전해져요. 워털루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웰링턴 장군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등 여러 설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