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인터넷 사이트에 공개된 한 현역 외교관의 글입니다. 외교관을 꿈꾸는 분들에게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는 생생한 내용입니다. (저자와 상의없이 우리 카페 사이트에 글을 게재하여 미안합니다. 이미 인터넷에 공개되어 우리 사이트에 게재하여도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고로 이 글의 저자는 제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동료직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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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외교관의 꿈"
1. 내 꿈의 시작을 찾아서
언제부터 왜 외교관이 되고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생각나지 않는다. 단지 생각나는 것은 중학교 2학년때 부터 생활기록부 난에 나의 장래 소망을 외교관이라고 적기 시작했고, 그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외교관이 되는 것이 나의 꿈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오래 품어오고 어렵게 이룬 꿈 치고는 시작이 그리 거창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지만, 숨길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커다란 꿈이 반드시 거창하게 시작되는 것은 아닐것이다. 많은 다른 사람들의 꿈도 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느날 갑자기 마음속에 들어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일말 내 꿈의 시작을 찾아 더듬어 보면 중학교 1학년('78년도)때 사회선생님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만삭이 다되가는 임산부임에도 불구하고 고운 피부에 구슬같은 목소리로 사춘기에 접어드는 소년들의 인기를 끌었던 분으로 기억된다. 사회선생님은 서울에 상주하고 있는 각국 대사관을 찾아 다니면서 그 나라에 관한 홍보책자를 수집해 오라는 여름방학 숙제를 내 주었다. 친구들과 삼삼오오로 일본대사관, 중국 대사관, 영국대사관, 프랑스 대사관, 미국 문화원, 영국 문화원, 프랑스 문화원 등 시내에 대사관과 문화원을 신나게 돌아다니면서 자료와 책자를 수집했다. 조선호텔에 있던 네덜란드 대사관인가를 들렀을 때는 한 외국인 신사가 어린 우리를 친절하게 맞아주면서 음료수 까지 내놓는 친절을 베풀었다. 아마도 그때 "외국을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자기 나라를 소개하는 일을 하는 직업이 무었인가?"하는 생각을 갖게 되고, 그것이 바로 "외교관"이구나 하는 것을 알고 나서는 시나부로 내 마음 속 한구석에 외교관이라는 꿈이 자리잡기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일찌감치 외교관의 꿈을 가진 덕분에 내게 대학에서의 전공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한동안 방황기가 있었지만 학력고사 점수가 적당히 나오는 바람에 점수에 맞는 대학의 "정치외교학과"에 지망했고, 다행히도 합격의 기쁨을 맛볼수 있었다.
대학 면접시험에서 면접관으로 나온 이기택 정외과 교수와의 대화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정외과는 왜 들어왔어?"
"외교관이 되고 싶어서요"
"그걸 영어로 말해볼 수 있어? 외교관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줄 알아?"
"I want to be a diplomat. 외교관이 되기 위해서는 국가시험에 합격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지만, 고등학교 지리선생님은 외교관이 되기 위해서는 육사를 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교수님은 미소를 지으셨고, 나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2. 꿈을 향한 방황
대학생활은 처음부터 여러 면에서 내게 혁명적인 경험이었고 내 삶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주입식 교육을 받아왔던 내게 처음 부닥친 "사회현실과 정의"라는 문제는 내게 감당하기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또한 대학생활과 함께 갖기 시작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내게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요구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꿈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생각해야 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꿈을 향한 방황이 시작된 것이다.
외교관의 꿈은 사회적 현실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려하지 않고, 나만의 명예와 욕망의 충족을 위한 사치스러운 꿈인 듯 다가왔다. 결국 나는 하나님을 알기 이전에 가졌던 외교관의 꿈을 포기해야 겠다고 결심했고, 새로운 꿈을 찾기 위해 방황하다가 군대에 가기로 결심했다. 내 인생과 새로운 꿈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할 시간적 여유를 얻기 위해서 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좆아 정처없이 하란을 떠나는 심정으로 새로운 환경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싶기도 해서였다. 군대 시절을 헛되이 보내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에 1학년 가을학기가 시작되면서 카투사 시험에 응시했고 2학년 1학기를 마치면서 바로 입대할 수 있었다. 한여름을 훈련소에서 보낸 뒤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 때는 안경도 쓰지 않고 신장도 어느정도 되어서 인지 헌병으로 착출되어 용산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다. (외무부에 들어와서 안 일이지만 외무부에는 카투사 출신들이 꽤 많다. 30개월간의 카투사 생활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외무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꿈을 향한 방황 끝에 품게된 생각은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 불행했던 기억을 돌이켜 보면서,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청소년 시절 자칫 그릇된 길로 발을 들여 놓기 쉬운 시절에, 인생의 의미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 하는 것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선생님이 된다면 큰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의미가 있는 꿈이라고 생각된 것이다. 그래서 하임 길버트의 "교사와 학생사이" 이오덕씨의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차모 교수의 "현대 교육학 개론" 등 교육학에 관한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고, 제대후에는 야학에서 가르치는 기회를 갖어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교사를 향한 꿈에도 장애가 나타났다. 비사범대학 출신으로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교직과정을 이수하고 자격시험에 합격해서 교사자격증을 따야 했다. 교직과정 이수를 위해서는 2학년 1학기 부터 과목을 들어야 하는데 2학년 2학기로 복학을 해야 하니, 통상적인 방법으로 교사가 되는 것이 어려워진 것이다. 교사가 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다른 꿈의 가능성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교사를 일순위로 그리고 후보순위로 교수, 기자를 생각해 보았다. 여러가지 선택의 여지 앞에서 나의 달란트(talent)가 무었인가를 돌아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외교관의 꿈이 다시 고개를 들게 되었다.
꿈을 향한 방황은 나로서는 신앙적인 구도의 과정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진지한 고민이었다. 나의 꿈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달란트 또는 은사(적성이라는 것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이보다는 본질적이고 광범위한 개념이라 생각된다)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고, 내 달란트가 무었인지를 발견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게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가? 기자는 내 은사에 맞는가? 외교관은? 결국 외국어에 대한 관심과 그동안의 노력, 경험을 떠올리게 되었고 달란트 측면에서 외교관의 꿈을 다시 어프로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YES라는 영어써클에서 한여름을 영어의 바다에 빠져 살던일,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서 새벽차를 타고 학교로 달려오던 일, 무었보다도 카투사 군대생활을 통한 영어 문화권과의 접촉 경험.... 일단은 모든 가능성에 대해 마음을 열어 놓기로 했다. 바로 군대를 제대할 무렵이었다.
제대를 얼마 앞두고 소위 말년휴가 기회에 캠퍼스를 찾았다. '87년 11월 말에 제대 했으니 아마도 11월 초경이었다. 군대를 가지 않고 캠퍼스에 남은 친구들은 대학원 진학이다, 유학이다, 취직이다, 고시준비다, 군입대다 모두 대학졸업 이후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막 대학에 입학해서 사회정의, 민주주의를 외치며 캠퍼스와 거리를 메우던 열정은 어디에 갔는지 모두 현실이라는 벽을 넘어서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었다. 내게는 이들의 모습이 현실로 다가왔고, 더이상 고민만하고 않아있기 보다는 무언가 시작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고민하던 내게 나를 아껴주던 나이지긋한 한 같은학번 형의 한마디 격려의 말은 내 결심을 재촉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아직 우리동기 중에는 고시에 합격한 사람이 없어. 장근이 너는 성실하니까 우리동기중에 기대할 만한 사람이야." 그래 일단 시작하고 보자. 일단 길을 가면서 이 길이 올바른 길인지 하나님과 씨름해 보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포기하고. 결심을 내린 것은 '88년도 1월 말이었다.
3. 외무고시의 문을 두드리며
결심을 하기는 했지만 과연 내가 해낼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시험에 있어서 크게 부진한적도 없지만 그리 두각을 나타내 본 적도 없던 내가 전국의 유수한 인재들이 경쟁하는 외무고시에 합격할 수 있을까? 주위에서 외무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도, 합격한 사람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하고 얼마나 해야하는지, 아니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우선 청계천에 있는 중고책방에 들러서 "고시계"나 "고시연구" 같은 고시 관련잡지를 찾기 시작했다. 외무고시 준비에 관한 소개와 합격기가 나와 있는 과월호 잡지를 열권정도 사들고 집에 와서는 읽기 시작했다. 합격기를 읽으면서, 이미 외무고시의 관문을 통과한 사람들이 어떻게 이 길에 들어서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시작하고 준비해 갔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름대로의 청사진을 그려 보았다. 잡지에 소개된 대로 우선 1차 시험에 관한 수험서를 사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좀더 시작의 결심을 빨리 내렸더라면 1월 말에 있던 외무고시 1차시험에 응시해서 시험 분위기를 알아볼 수 있었을껄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다음 시험까지는 10여개월이 넘는 시간이 있었고, 2학기 복학까지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 1, 2차 시험을 동시에 준비할 수 있는 영어, 국제정치학과 준비에 비교적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제학과 제2외국어(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부장소는 학교 도서관을 이용하기로 했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학교근처에 하숙을 하기 시작했다. 1차시험 준비는 보통 3-4개월 정도 한다고 하는데 나는 충분하게 준비할 수 있도록 6개월 정도 준비하는 계획을 잡고 공부했다. '89년 1월 말 외무고시 1차시험에 처음 도전했다. 결과는 낙방. 준비 시간이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원인은 시험 직전의 2-3개월이 가장 중요한 시기인데, 이 시기동안 최대한 집중해서 공부하는데 실패했고, 시험전 공부장소를 집으로 옮기면서 자기 컨트롤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 도전에의 낙방은 오히려 내게 외교관의 길에 대한 확신, 무었보다도 이 길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길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신앙적인 체험이자 내 신앙의 고백이기에 여기서 길게 이야기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실패의 경험은 아픔보다는 기쁨으로 다가왔다. 이 것이 내길이라는 확신은 이후 시험 준비에 커다란 힘이 되었고, 마침내 나는 '90년 1월 1차시험, '91년 3월 2차시험과 3차 시험에 합격해서 오랬동안 품어온 외교관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