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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복음은 낙하산 인사발령>의 줄거리:
인사에서 ‘낙하산’이라는 단어가 성립되려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능력과 인맥입니다. 정상적인 입사절차나 승진 단계를 거치지 않았기에 대부분 낙하산 인사들의 특징은 무능입니다. 주어진 지위나 직책이 겉돌고 버거워 잘 안 맞는 거지요. 그래서 혹시 드물게 낙하산 인사일지라도 탁월한 능력과 걸맞는 실력을 보이면 농담으로 ‘특전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복음은 예수님 인맥에 근거된 낙하산 인사발령입니다. 그럼 어떻게 복음의 특전사가 될 수 있을까요?
복음은 낙하산 인사발령
(에스겔 40:1~49)
1. 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에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2.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에 이르러 나를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에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3. 나를 데리시고 거기에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더니
4.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복음은 낙하산 인사발령>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복음은 낙하산 인사발령’
낙하산 인사란 배후에 있는 높은 사람의 압력이나 연줄로 채용이나 승진 따위가 불공정하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낙하산을 타고 공중에서 수직으로 내려오는 모습에 비유한 것입니다. 모든 사원들이 힘들게 입사해서 또 힘들게 일을 하면서 승진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경쟁에서 밀린 사람은 십년이 지나도 전혀 승진을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전문성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오직 연줄을 통해 임원의 자리에 앉습니다. 이런 모습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비하하기 위해 낙하산 인사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낙하산 인사의 정점에는 무능함이 빠질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돈의 힘과 나쁜 인품과 인맥까지 합쳐지게 되면 낙하산 인사의 정점을 찍게 됩니다. 반대로 낙하산 인사로 들어왔을지라도 일을 잘하고 인간성이 뛰어나면 그런 사람은 낙하산이지만 공수부대 요원이나 특전사라고 농담 삼아 말하기도 합니다.
한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에 대해서도 낙하산 인사와 같은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맥에 근거된 낙하산 인사발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놓여 있는 자리는 예수님의 인맥으로 낙하산 인사발령이 된 자리인 셈입니다. 일단 발령을 받았으니 인정받는 공수부대의 요원이나 특전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맥으로 자리를 얻었으니 그 자릿값을 잘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도 티를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능한 낙하산 인사로 머물지 않고 공수부대 요원이나 특전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될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이 어떤 이유에서 예수님의 인맥에 근거된 낙하산 인사발령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늘 본문에서는 성전의 환상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땅 위에 지어지는 성전이 아니라 마음으로 생각하는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보고 있는 성전의 환상은 역사상 실제로 땅 위에 세워진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세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성전의 의미를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낙하산 인사발령이 공수부대 요원이나 특전사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어제 네팔에서 사역을 하시는 선교사님이 강릉을 방문하셨습니다. 70세가 넘으셨는데 20년이 넘도록 네팔 오지 선교를 하신 분이십니다. 이 분의 본래 집은 미국 LA 근처에 있다고 합니다. LA와 네팔을 오고가시면서 20년 동안 네 곳에 교회를 세우셨고, 현지인 목사님까지 육성하셔서 선교의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이번에 두 달 동안 세우신 교회를 순회하신 뒤에 강릉에 들리신 것입니다.
대화를 하던 중에 네팔 오지 선교의 어려움에 대한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곳의 환경 자체가 너무나도 빈곤하고 열악하다 보니 하루가 삼년같이 느껴질 정도로 외로우셨다고 합니다. 또 네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다는 확실성을 심어주는 것이 힘드셨다고 합니다.
많은 네팔 사람들의 형편이 어려움으로 인해 가족들이 떨어져 사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지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선교사님께서는 이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외로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지만, 정작 인적이 뜸해지는 저녁이 되면 본인도 외로움을 느끼실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자격이 없는 선교사라고 자책하셨습니다. 선교사님의 상황이 된다면 외롭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기에 그러한 감정을 느끼시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보다 큰 문제는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다는 확실성을 어떻게 심어주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에베소서 2장의 말씀을 생각하셨답니다. 특히 6절에서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는 말씀에 대해 질문을 하셨지만, 이 말씀을 온전하기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5절의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라는 말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함께 살리셨다, 함께 일으키셨다, 함께 앉히셨다는 세 가지 동사는 곧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함으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에 참여함을 일컫습니다. 이 예수님의 동선을 따르는 것이 복음이고 진리입니다.
다만 여기서 번역상의 이유로 잘 언급되지 않는 요소가 있습니다. 헬라어로 기록된 본문은 문법상 부정과거의 시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정과거란 과거에 한 번 일어나서 결정된 일이 지속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시제입니다. 이 동사들의 시제를 따른다면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상태가 지속되어야 하고, 함께 승천한 상태가 지속되어야 하고, 함께 하늘에 앉혀있는 상태도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로는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삶에서 이러한 느낌을 지속적으로 받기 힘듭니다. 내 마음이 부활해서 승천했음을 느끼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하늘에 앉힌바 된 느낌은 전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복음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부활과 승천과 하늘에 앉힌바 된 상태가 지속되어야 하는데, 실제로 우리의 삶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땅에서 세상의 문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네팔에서 오신 선교사님도 이러한 실상을 염두에 두시고 하늘에 앉힌바 되었다는 말씀의 의미가 분명치 않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설교자가 이것을 분명하게 느끼지 못하면 성도들에게 분명하게 전할 수가 없고, 또 성도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분명하게 느낄 수도 없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신학 교수님께 질문을 드렸다고 합니다. 교수님께서는 이를 영적인 상태에 대한 언급이라고 설명해주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니겠지만 선교사님이 원하셨던 하나님과의 연결을 확인할 수 있는 해결책이 아니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자주 이 구절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말씀이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과 직결되는 내용이기에 함께 살리셨다, 함께 일으키셨다, 함께 앉히셨다는 의미를 제대로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과거에 일어나서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간단히 낙하산 인사발령의 예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재벌 회장님이 대학을 갓 졸업한 외아들을 본부장으로 낙하산 인사발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면 직원들 사이에서 “회장님이 아무 경험도 능력도 없는 사람을 단번에 본부장 자리에 앉혔다”라는 소문이 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앉힌바 된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의 인맥으로 하나님이 계신 보좌 우편으로 인사발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업무수행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아무리 회장님의 외아들이라도 대학을 갓 졸업한 신입이 본부장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회사 생활에 재미를 잃고 유흥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할 것입니다. 본부장으로 낙하산 인사발령을 해서 자리에 앉혔지만 신분에 걸맞은 역할이 나타나지 않고, 본부장이 가진 권한이 올바르게 사용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셨고 함께 앉히신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를 낙하산 인사발령을 내리신 것이고 지금도 유효한 상태입니다. 이것이 낙하산 인사발령으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예수님에게는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과 부활과 승천도 필요 없었습니다. 이 인사발령은 모두 나를 위해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께 마음을 드렸을 뿐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심을 통해서 나에게 인사발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 길을 예수님과 함께 지나서 부활한다는 것은 세상의 종노릇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 종노릇하면서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정한 가치들을 소유하면 기쁘게 여기고 없으면 슬퍼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살던 나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예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빠져나가는 터널인 십자가와 무덤에 인사발령을 내리셨다는 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자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다만 이 위치에 인사발령이 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환상으로 나타난 성전의 모습을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지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함께 일으키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부활과 승천의 자리에 낙하산 인사발령을 받았습니다. 부활과 승천의 자리는 곧 조물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리입니다. 대기업의 회장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출입증이 필요합니다. 회장님의 사무실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 지역입니다. 아무나 못 들어가는 하나님이 계신 자리에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참여함을 통해 접근자격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또한 능력 있는 특전사가 되기 위해서 내 능력은 필요 없고 마음으로 성전을 바라보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접근이 가능한 자격이 주어진 자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비전과 꿈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마음이 쏠리지 않습니다. 마음은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의 의미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성전을 마음으로 생각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함이 실제로 나타나고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했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계신 하나님 보좌 우편에 나도 위치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드린 나를 하나님이 계신 보좌 우편에 인사발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낙하산 인사발령을 체감하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성경은 분명히 부정과거 시제를 사용하며 우리의 인사발령이 예수님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사발령은 났지만 그 주어진 자리에서 지위와 신분과 권한을 행사할 줄을 모른 채로 살아갑니다. 선민들도 이것을 실천하지 못한 결과 망하고 말았습니다.
선민은 낙하산 인사발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공수부대 요원이나 특전사가 되지 못하고 조롱받는 인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들이 특전사나 공수부대 요원처럼 되는 길은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성전을 마음으로 생각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에베소서에서 2장 5~6절에서 나타난 함께 살리셨다, 함께 일으키셨다, 함께 앉히셨다는 의미가 드러나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스겔이 본 성전 환상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에스겔이 환상에서 본 성전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정확한 치수가 언급이 되는데, 실존했던 어떤 성전의 모습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솔로몬 성전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포로로 잡혀갔던 선민들이 에스라나 느헤미야에 의해 귀환해서 스룹바벨이 솔로몬 성전이 있었던 자리에 제2의 성전을 지었습니다만 이 성전과도 달랐습니다. 포로 귀환하여 지은 성전은 본래 솔로몬 성전보다 규격도 더 작고 초라했습니다. 포로 귀환자들이 재건한 제2의 성전은 훨씬 더 세월이 지나서 로마 치하에서 헤롯 대왕에 의해 다시 화려하게 증축이 되는데 이때의 성전과도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부분은 바로 4절의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환상으로 보여주신 성전의 모습을 백성들에게 전함으로써 그들 또한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전의 모습 중에서 바깥뜰과 안뜰에 대한 묘사가 집중되고 있습니다. 바깥뜰은 모임의 장소였습니다. 안뜰에는 번제단이 있었고 그 번제단에서 이루어지는 제사에 참여하고자 하는 자들이 모이는 곳이 바깥뜰이었습니다. 바깥뜰과 안뜰의 묘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이유는 바로 이러한 모습을 마음으로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 성전의 모습을 신약 시대의 예수님을 머리로 한 몸으로써의 교회를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물론 의미가 있는 해석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맥락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자면 성전의 환상을 보여주신 보다 직접적인 이유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에스겔서에서는 선민의 정체성에 대해서 집중적인 언급이 이루어져왔습니다. 에스겔은 선민의 정체성을 마른 뼈에 생기가 들어가는 부활 환상을 봄으로써 깨닫게 됩니다. 선민의 선민다움이 상실된 것을 마른 뼈 즉 죽음의 상태로 본 것입니다. 선민이 이방인들과 똑같은 영적 죽음의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죽은 뼈에 생기가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은 부활 즉 선민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에스겔은 선민의 정체성을 부활로 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요한복음 2장 19~22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자신을 가리켜 성전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에스겔이 선민의 정체성에서 부활을 보며 성전과 연관 지은 것과도 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함께 살리셨다, 함께 일으키셨다,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는 말씀을 한 것과도 의미적으로 일치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복음의 사건을 낙하산 인사발령으로 이해했습니다. 세상을 빠져나온 자격과 위치로 인사발령을 받았고, 부활과 승천의 자격자로 인사발령을 받았고, 하늘에 앉히신 자격자로 인사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마땅히 그 자리에 있는 자로써의 모습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을 바로 에스겔은 성전을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냈고, 이것이 우리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마음으로 바라봄으로써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보고 하나님께 전해들은 성전의 수치들을 모든 백성이 다 기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억하라는 의도가 아닙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토록 자세하고 중요하게 여기시는 마음가짐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마음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설교에서 우리는 이것을 십자가를 의식해야만 한다는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틈새 없이 마음으로 바라보는 동안 우리의 마음은 어느덧 예수님의 죽음과 무덤의 터널을 지나 부활에 이르고 승천해서 보좌 우편에 까지 참여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있으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함께 살리셨다, 함께 일으키셨다, 함께 앉히셨다고 한 것처럼 자리에 맞는 능력도 생겨나게 됩니다. 부활의 자리에서는 세상에 대한 자유가 생겨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치들의 유무에 좌우되지 않는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를 주기에 복음이 기쁜 소리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러한 복음의 낙하산 인사발령의 권한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시는 성전과 성전이 예표 하는 십자가 사건을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세상일에 마음을 다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종노릇하면서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세상을 이긴 자의 위치로 인사발령은 났으나 그에 합당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단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일을 늘 하고 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항상 돈을 의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항상 돈을 의식하면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똑같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렇게 의식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을 이긴 자의 자리로 인사발령이 난 상태의 합당한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과 승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서 가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뿐이라고 여길 때에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자로써 살아가게 됩니다. 초대교회에서 유무상통이 가능했던 이유도 바로 그러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 승천이라는 자리에 인사발령이 났으면 공수부대 요원이나 특전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에스겔에게 성전의 규격을 자세히 설명해주실 정도로 중요하게 여기신 하나님의 정성과 치밀함을 알았다면, 우리도 그렇게 틈새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부활과 승천이라는 자리에 어울리는 적격자의 모습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내 몫으로 내 기업으로 획득하기 위한 대상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세상으로부터의 자유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추구함입니다. 그것을 위해 오늘 본문에서 에스겔이 성전을 환상으로 보았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늘 보좌 우편에 인사발령 난 특전사로써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많이 먹고 마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시며 이를 마음으로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앉힌 자로써 인사발령 난 그 자리에 합당한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하늘에 앉히신 이유는 영원 전부터 예수님과 함께 누리시던 기쁨에 우리를 참여시키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이 기쁨을 갖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에스겔이 성전 환상을 마음으로 바라보았듯이, 우리는 십자가를 마음으로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낙하산 인사발령으로 주어진 복음 속에서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로써의 위치, 세상에서 종노릇을 벗어버린 자의 위치, 하나님을 추구하여 하나님만을 유일한 가치로 느끼는 자의 위치,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지는 위치에서 하늘의 특전사로써 기가 막히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렇게 쉽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가나 사상가 그 어떤 성인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던 자리가 우리에게 낙하산 인사발령으로 주어졌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마음으로 생각해야 될 성전이심을 믿고 의식하고 살아가게 해주시고, 인사발령의 자리에서 모든 지위와 권한을 누릴 수 있도록 이 복음을 놓치지 않게 붙들어 주셔서 십자가 생활화에 온 힘과 마음과 뜻을 다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