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41
출애굽기 20장 13절 [제67-69문]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의 내용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명령 자체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지만, 5계명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람과의 모든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즉 모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역으로 모든 윗사람은 아랫사람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지는, 나아가 동료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5계명을 통해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제5계명을 해석할 때 5계명이 요구하는 바에 대해서는 윗사람들, 아랫사람들, 동료들로서 그들의 여러 자리들과 관계들 안에서 각자에게 속한 명예를 보존하며 의무를 실행할 것을 요구한다고 설명하고 있고, 금하는 바에 대해서는 그들의 여러 자리들과 관계들 안에서 각자에게 속한 명예와 의무를 경시하거나 대적하는 것을 금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관계를 요약해서 말하자면 아랫사람의 경우 윗사람을 대할 때 주께 하듯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고, 윗사람의 경우 아랫사람을 대할 때 자기 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해서는 안 된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지위가 높든 낮든, 소명이나 은사와 관련해서 하나님이 주셨든 주지 않으셨든 나보다 윗사람이라면 아랫사람인 나는 주님께 하듯 해야 한다는 것이고, 내가 윗사람으로 있다면 자기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반드시 의식하며 아랫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주를 의식하는 자로 주께 하듯 하는 자세로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이것은 동료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모든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할 때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어야 하고, 또한 이웃에게도 유익이 되어야 되는 방향으로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에 대해서 살피겠는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67문부터 69문까지 제6계명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67문은 계명 자체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제67문. 제6계명은 어떤 것입니까?
답. 제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출20:13).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사람이 임의대로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창세기 9장 6절에 보면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릴 경우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설명할 때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말씀이 있는데, 살인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럼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살인만 하지 않으면 되는가?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6계명과 관련해 말씀하실 때 살인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결과와 함께 결과에 기여하는 모든 원인도 금하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6계명이 살인만 금하시는 것이 아니라, 살인의 뿌리가 되는 것도 금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역으로는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보존하는 것까지 6계명을 통해 요구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과 이웃의 생명이 보존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제6계명을 통해 요구하시는 바는 무엇이고, 금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할 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68문과 69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제68문. 제6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6계명은 우리 자신의 생명과(엡5:28-29) 다른 사람의 생명을(왕상18:4) 보존하기 위한 합법적인 모든 노력들을 요구합니다.
제69문. 제6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6계명은 우리 자신의 생명이나 우리 이웃의 생명을 불의하게 빼앗거나 그런 것을 의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금합니다(행16:28, 창9:6).
먼저 제6계명에서 요구하시는 바에 대하여 우리 자신의 생명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합법적인 모든 노력들을 요구한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이하 총회 공과 참조). 첫 번째로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해치는 모든 일을 피하고 건강을 지키는 데 힘써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먹고 마시는 일과 잠자는 일, 그리고 몸이 좋지 않을 때 약을 쓰는 일, 나아가 일상에서 노동과 휴식 등을 알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실제로 성경은 이런 내용과 관련해서 말씀하시는 부분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잠언 25장 16절입니다. “너는 꿀을 보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함으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먹고 마시는 데 있어서 알맞게 먹어야 한다는 것이고, 과식함으로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전서 5장 23절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매튜 풀 주석의 내용을 조금 말씀드리겠는데,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포도주를 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신앙적인 이유로 육신의 소욕을 절제하기 위하여 경건의 훈련의 일환으로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오직 물만 마셨던 것으로 보인다고 하면서 그 점에서는 디모데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디모데에게 물과 함께 포도주를 조금씩 마시라고 권하는데, 왜냐하면 디모데의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디모데는 음식을 소화하는 데 문제가 있었고 또한 몸이 약해서 자주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을 위한 도움의 방편으로 포도주를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무렇게나 무분별하게 마치 포도주를 음료인 것처럼 그렇게 사용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하도록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해치는 모든 일을 피하고 건강을 지키는 데 힘써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일보다 앞서서는 안 됩니다. 부모 공경에 있어서도 주 안에서 하라고 하신 것처럼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몸을 해치는 모든 일을 피하고 건강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일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롬14:8). 그래서 가르치는 바가 무엇입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고전10:31). 먹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고, 마시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지 못한다면 살아 있는 삶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생명을 함부로 해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무엇인지를 성경으로부터 배우고 그런 삶을 살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자신의 생명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고 그들의 풍성한 삶을 위하여 힘을 써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식량과 약과 일자리와 휴식 등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있을 때 그것을 제공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이웃이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다면 결코 마음으로만 안타까워해서는 안 되고, 필요한 도움을 실제적으로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야고보서 2장을 통해 가르치는 바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5-17)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참된 믿음은 결코 열매가 없는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고 권면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마음과 생각으로도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여길 수 있는 마음, 어떤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 바로 그런 마음으로 서로를 온유하고, 관대하며, 친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분노를 낼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죄로 나타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가급적 빨리 분을 풀려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마귀가 틈타기 때문입니다(엡4:26-27). 혹 누군가 나에게 어떤 피해를 줬다면 오래 참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하여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마5:44).
이런 마음과 생각이 입으로 나올 때 온화하고 정중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기 때문입니다(잠15:1). 여러분, 야고보서 3장은 특히 말에 대하여 매우 주의해야 될 것을 가르치는데,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말로 인하 실수가 많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혀는 작은 지체에 불과하지만 작은 것이 온 몸을 더럽힐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말로 인하 다툼을 피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외에도 우리는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칠 수 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방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21장에서 주인의 부주의로 그가 기르던 짐승이 어떤 사람을 죽이거나 상처를 주었을 경우, 그 주인이 제6계명을 범한 것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출21:28-29). 이런 측면에서 안전사고를 미리 예방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것들은 제6계명을 통해 요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럼 제6계명을 통해 금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생명이나 우리 이웃의 생명을 불의하게 빼앗거나 그런 것을 의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금한다고 설명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의 내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이하 총회 공과 참조). 첫 번째로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불의하게 빼앗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방탐함이나 술취함, 무엇을 먹고 마실까, 그리고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염려를 금해야 합니다. 오늘날 먹고 마시는 문제와 관련해 먹고 마시는 방송, 소위 먹방이 유행하듯 하고 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지나친 다이어트도 눈길을 끄는데, 이런 것들이 우리의 몸을 해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많은 일을 하는 것과 지나치게 오락을 즐기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못 느낄지 모르지만 그런 생활이 쌓여서 결국 우리 몸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실 때 우리는 직접적으로 우리 자신을 죽이는 일, 즉 자살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살하려고 하는 마음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인은 나 자신이 아니라 그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명을 우리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하나님께서 취해 가실 때까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지하고 보존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사용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불의하게 빼앗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을 금해야 하는데,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취하는 일을 금해야 합니다. 그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취하지만 않으면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상처를 입히는 것도 금해야 합니다. 이것은 실제 물리적으로 때리고 상처를 입히는 내용만이 아니라, 예를 들어 쉼 없이 노동하게 하거나 과격한 일을 시키는 것, 먹고 마시는 것에 있어서 불량식품을 만들거나 판매하는 것 등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쉽 없이 노동하거나 과격한 일, 그리고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인해 죽는 경우, 혹은 해를 입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6계명은 낙태에 대해서도 분명히 금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끊는 것도 금지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끊는 것도 금지되는데, 여기에는 출산하지 않은 뱃속의 아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매우 작은 모습에 불과하고 또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그런 형태는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수정란으로 생명을 주셨다면 그것이 하루든 한 시간이든 우리와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기에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적인 생명을 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거나 험담하거나 모함하거나 상처를 주는 말, 그리고 싸움을 거는 말 등도 금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이 나오도록 하는 마음도 금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시기하는 것, 또 보복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미움과 시기와 분노는 살인의 원인이요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최초의 실제적 살인은 아담과 하와 사이에 낳은 가인과 아벨, 즉 친형제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5계명으로 이해하자면 형제이기에 우애가 있어야 하고(벧후1:7),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히13:1). 그러나 형인 가인은 동생인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창세기 4장에 보면 다음의 이유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4:5-8) 히브리서 11장의 내용으로 하자면 가인의 경우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이라고 말할 때는 그리스도 없이 생각할 수 없는데, 제사라는 형식은 있지만 그리스도가 없는 제사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었던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그는 분을 품게 됩니다. 안색이 변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분을 냈고, 안색이 변했는데, 더 나아가서는 선을 행하는 바가 없다는 것까지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할 때 믿음 안에서 행하는 그런 선이 전혀 없더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가? 살인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 사건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그의 분노하는 마음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만이 아니라 살인의 원인이 되는 마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미움도 있을 수 있고, 시기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의 출발이 어디에 있느냐? 사람의 마음입니다. 분한 마음, 미워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 이 마음에 대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가르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했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이 그런 마음임을 알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렘17:9).
때문에 우리는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데 힘써야 합니다. 마음을 지키지 않고서는 우리의 육체를 제어할 수 없습니다. 잠언 4장 23절과 24절에 보면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마음을 먼저 지켜야지만 이어 나오는 구부러진 말, 삐뚤어진 말도 멀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지키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을 무엇으로 제어할 수 있는가? 잠언 4장 20절에서 22절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전 성경을 통해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음을 지키실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도록, 또한 우리의 입술을 하나님께서 주관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그 말씀을 좀 더 잘 지킬 수 있게 됩니다.
서두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마태복음 5장 21절과 22절에 보면 오늘 우리가 살피고 있는 6계명에 대한 해석의 한 부분으로 다음과 같이 가르치는 내용이 있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실 때 살인의 행위만이 살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분노와 그와 관련된 말들은 다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6계명에 대한 내용을 다시금 정리하겠는데, 이 부분은 토마스 카트라이트의 기독교 교리 강론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6계명을 위반하는 것에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있습니다. 내적으로 위반하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첫째로 근거가 없는 분노, 혹은 그 원인이 의로울 때에라도 한계를 넘어선 분노를 품는 것입니다. 둘째로 미움이고, 셋째로 질투이며, 넷째로 동정 없음입니다. 다섯째로 부탁에 대해서 건방지게 구는 것과 부탁 받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복수를 열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들은 다 사람을 자신에 대한,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살인자로 만듭니다(마5:21, 요일5:15, 약3:14, 암6:5,6, 롬1:31, 시5:6, 잠14:30).
그럼 외적으로 위반하는 것은 어떤 것이 있는가? 여기에 살아 있는 이웃에게 하는 것과 죽은 이웃에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이웃에게 외적으로 위반하는 것에는 표현을 동반하는 것과 그 밖의 것이 있는데, 표현을 동반하는 것으로는 마음의 분노와 증오를 표현하는 모든 행위들입니다. 점잖지 못하거나 눈살을 찌푸리는 표정, 머리를 경멸하며 흔드는 것, 비웃음, 코를 실룩거리는 것 등입니다(창4:5,6, 마27:39, 창21:9, 갈4:29, 시10장). 그 외 다른 것으로는 말로서 하는 것이 있고, 행위로서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로서 하는 것에는 마태복음에서 잘 표현되고 있는 것처럼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경멸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또한 그를 바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노기가 등등하여 말하는 것도 있습니다(마5:22). 특별히 경건한 자들은 눈먼 자들의 눈이 되어주고 못 걷는 자들의 다리가 되어주어야 하지만 오히려 육체의 어떤 부족함 때문에 조롱한다면 그것도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레19:4, 창21:9, 삼하6:20, 욥29:15). 또한 보기 흉하게 소리를 높여서 울부짖는 것과 다른 사람에 대한 불만과 불평을 하는 것도 있습니다(엡4:31, 약5:9). 행위로 하는 것에는 몸에 대한 것과 영혼에 대한 것을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선 몸에 대한 것으로는 사람이 계획해서, 또는 고의로, 증오로 인해서 그리고 정당성 없이 그 형제나 이웃의 몸을 때리고, 해하고, 불구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직접적인 몸에 대한 위반이라면, 간접적인 몸에 대한 위반에는 사적으로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그리고 우리가 상해를 입힐 생각이 없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도끼날이 빠져나가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는 일과 같은 것인데, 이런 경우 율법은 도피성 제도를 통해 구제 받도록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방어를 하되 단순히 자기를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해를 가하기 위한 목적, 혹은 복수를 위한 목적으로, 상대방에 대하여 상해할 목적으로 자신을 과잉 방어하는 것도 여기에 속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사람이 음란한 행위로서 자신을 소모하거나 시간을 들여서 폭식함으로 먹는 것도 여기에 속하고, 건강을 보존하고 회복하기 위해 의술을 사용하는 것을 게을리 하는 것도 여기에 속합니다. 또한 사람이 정당하게 여가를 사용하지 않는 것도 여기에 속합니다. 아기를 유산하게 되는 내용도 있는데, 단순한 유산이 아니라 과격한 행위를 함으로써 유산되는 것도 간접적 살인죄에 해당됩니다. 계단이 어린 아이들, 종들, 혹은 다른 자들이 자칫 다칠 수 있도록 만들어졌을 때, 혹은 우물과 배수구 덮개가 덮여있지 않음으로, 울타리가 없음으로 다치게 되는 것도 간접적인 상해에 속합니다. 간접적 상해 외에 공적인 상해도 있는데, 큰 길이 수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다치거나 사람들이 법을 어김으로 징벌하지 않을 때, 혹은 이러한 징계가 과도할 때, 나아가 징계가 정의에 대한 사랑 안에서 행해지지 않을 때 이런 것들이 공적인 상해, 다시 말해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위반하는 것이 됩니다.
영혼에 대한 것으로는 사역자들이 숭배 받는 목자들이 될 때, 그리고 양떼들을 양육할 수 없게 될 때, 혹은 그들에게 맡겨진 양떼들을 먹이려고 하지 않고 나태해 질 때 그것은 살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는 주된 그들 자신의 임무를 게을리 하고, 어떤 필연성이나 합법적인 소명 없이 그 밖의 일로 바쁜 것도 여기에 속합니다(잠28:19, 렘48:10, 사62:6, 벧전5:2, 행20:28). 말씀 사역자만이 아니라 위정자들 역시 자신의 통치에 속해 있는 백성들이 정해진 시간에 자주 말씀을 읽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듣지 못하게 하고, 성례를 받는 것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인데, 기독교 국가가 아닐지라도 주일을 어기게 만드는 그런 법 제도 등이 이런 일을 결과 되게 만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살아 있는 이웃에게 외적으로 위반하는 내용이라면 이웃의 죽음 이후 외적으로 위반하는 것도 있는데, 이웃의 몸과 관련된 것과 그에게 속한 것들에 대한 것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웃의 몸과 관련된 것으로는 친구들과 이웃들이 태만해서 정당하게 치러지는 장례식에 참관하지 않는 것이고, 적절하게 애도하는 마음 없이 장례식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죽은 이웃에게 속한 것, 즉 그의 소유물과 관련된 것으로는 그의 아내 혹은 남편, 그리고 자녀들과 이웃하여 살고 있는 자가 그들을 위해서 아무 것도 도와주지 않을 때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위반하는 것이 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과 관련해서 사형제도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간혹 뉴스를 통해 매우 악한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하여 사형 시켜야 한다는 댓글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개혁자들도 사형제도에 대해 대부분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그 근거로 로마서 13장 3절과 4절을 제시합니다. 읽어드리면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소위 위정자들에게 칼의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6계명은 도덕법입니다. 물론 율법 안에도 보면 사형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21장에 보면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십니다(출21:12). 부모를 치는 자, 부모를 저주하는 자 역시 죽일 것을 명하십니다(출21:15,17).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간통죄가 폐지되었지만 간통을 한 경우에도 사형을 명하십니다(신22:24). 그럼 도덕법으로써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과 율법 안에서 사형에 대해 말씀하시는 내용이 충돌을 일으키는가?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도덕법으로 모든 인류가,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서 지켜야 할 법입니다. 다만 한시적으로 죄를 억제하기 위해서 사형이라는 제도를 유대 민족에 한해 시민법으로 허락하신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근거로 사형제도에 대해 말씀이 허락하시는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한시적으로 허용되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하여 모세에 법은 이러한데, 예수님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보여주십니까? 모세의 법으로 보자면 사형에 해당하지만 예수님은 사형이 아니라 용서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특히 죄 없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리시면서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임을 드러내십니다. 때문에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이 도덕법으로 주어진 이상 아무리 악한 자일지라도 국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형 집행은 무기징역이 하나님의 뜻으로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입장입니다.
더불어 구약에서 전쟁을 통해 이방 민족에 대한 진멸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의 실행이라는 차원에서 봐야지,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이 살인을 명하셨다는 그런 내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그 생명이 보존되고 풍성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가운데 여섯 번째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과 이웃을 존귀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사람을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