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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현대인을 위한 복음
질문 18. 사람이 후회 없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https://youtu.be/t9Ws92ePtc8?si=aG8Zc0iyW0oxqMmk
제목: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하여
요한복음 8:31~36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설교를 위한 묵상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에 따라 인생길은 많이 달라진다. 그런데 그 선택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까? 어릴 때는 부모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다가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날이 온다. 그때가 성인이다. 그런데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의 선택에 영향을 준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의 선택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붙들고 있는 세계관 또는 가치관일 것이다. 그의 생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의 생각은 어디서 온 것일까? 왜 그는 그런 생각을 할까? 여기서 우리의 생각을 주관하는 힘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예수께서는 생각이 붙들려 있어서 종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고 하셨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Veritas Vos Liberabit)는 문구는 연세대학교의 모토이기도 하다. 진리의 전당은 자유를 추구한다. 그들은 어디에서 자유를 얻고자 하는 것일까? 아마 낡은 전통과 맞지 않는 인습, 그리고 무지와 공포 같은 것이 아닐까?
후회 없는 인생을 살려면 옳은 선택을 해야 한다. 옳은 선택을 하려면 자유로운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진리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진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이 설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왜 옳은 선택을 하는데 필수적인가를 보여주는 것을 그 목표로 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선택을 한다. 그런데 어떤 선택은 종의 선택이고 어떤 선택은 왕의 선택이다. 자신이 종인지 왕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진리는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보여주며 동시에 우리가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등불과 같다. 이 설교가 우리의 삶에 작은 불빛이 되기를 바란다.
설교 개요
1.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
2. 아버지의 경고 – 후회는 하지 마라
3. 세 번의 선택 – 결혼, 진학, 목회
4. 너는 특별하단다 – 맥스 루케이도
5.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6.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1.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
오늘 저는 후회 없는 인생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떤 선택은 십년을 좌우합니다. 그리고 어떤 선택은 평생을 좌우합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나서 후회를 하기도 하며 어떤 선택에 대해서는 정말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시 한 편이 있습니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 Robert Lee Frost)가 쓴 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 그것입니다. 그 시는 인생의 선택에 대하여 들려줍니다. 여러 사람이 이 시를 번역했는데 그 중에 이민정과 장원 씨의 번역을 소개합니다:
가지 않은 길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몸이 하나여서 두 길을 모두 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오래도록 서서 한 길이 덤불 사이로 굽어지는 곳까지
멀리, 저 멀리까지 내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길로 나아갔습니다. 똑같이 아름답지만
더 나은 길처럼 보였습니다.
풀이 무성하고 닳지 않은 길이니까요.
그 길도 걷다 보면
두 길은 똑같이 닳을 것입니다.
까맣게 디딘 자국 하나 없는 낙엽 아래로
두 길은 아침을 맞고 있었습니다.
아, 다른 길은 후일을 위해 남겨두었습니다!
길이란 길과 이어져 있다는 걸 알기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면서요.
나는 한숨을 쉬며 말하겠죠.
까마득한 예전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로 나아갔고,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고.
이 시인은 두 갈래로 나뉘어진 길에서 하나를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인생에서 우리가 내리는 선택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어떤 선택을 했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우리가 여기에 이르게 한 바로 그 선택이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다른 쪽을 선택했다면 오늘 우리는 다른 곳에 있을 것입니다.
2. 아버지의 경고 – 후회는 하지 마라
저의 아버지는 1935년에 태어나 2002년에 별세하셨습니다. 67세의 인생을 사셨던 저의 아버지는 해방되던 해에 열살이셨습니다. 학창시절을 보내는 동안에 한국전쟁이 있었으니 가난하고 힘든 시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섬마을에서 태어나신 아버지는 4형제 중에 셋째였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혼자 고등학교를 졸업하셨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하여 막내아들을 군대에 두번 보내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신체검사를 하러 가셨다가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 후에는 자세히 여쭈어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아버지는 군복무를 하지 않았으므로 그 후에 공직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평생을 두고 후회될 일이었습니다.
그 시절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섬에서 면장을 하는 동네 친구를 보면서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쉬웠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 아버지께서 저에게 들려주신 몇 마디 말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후회는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제가 중학생이던 시절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이제 아버지가 되고 나니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도 같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평생 후회하고 사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후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지나간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후회하는 대신에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 있는 한 여전히 선택을 해야 합니다. 어떤 선택은 우리의 인생길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됩니다.
어쩌면 사람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으므로 운명을 믿기도 합니다. 같은 길을 걷던 두 사람이 어떤 선택의 결과로 전혀 다른 길을 걷습니다. 그것을 누가 결정한 걸까요? 신자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를 발견합니다. 그때 신자들은 말하기를, 전에 자신이 결정한 그 선택이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해하는 것도 삶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때때로 부모는 자녀들의 선택을 우려합니다. 그래서 저의 아버지처럼 ‘후회는 하지 마라!’고 경고하기도 합니다. 부모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녀의 앞길을 걱정하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보기에 아무리 좋은 길을 선택해도 하늘이 그 걸음을 인도한다는 사실을 부모도 압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부모는 자녀에게 조언과 함께 축복의 기도를 해주면서 하나님께 자녀의 앞길을 의탁합니다.
3. 세 번의 선택 – 결혼, 진학, 목회
제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제 인생길에서 세 번의 중요한 선택이 생각납니다. 그 첫번째는 스물두살에 결혼하겠다고 결정한 일입니다. 저도 그 때는 막연하게 서른살쯤 결혼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저는 연애하는 사람과 가급적 빨리 결혼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남녀관계는 결혼 안에서만 합법적인 것이며 그 외에는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연애는 죄짓는 길로 빠지기 쉬운 것이라는 생각은 결혼을 서둘러야 한다는 결정을 하게 했습니다. 그 외의 문제는 극복해야 할 여정으로 여겼습니다.
두 번째 중요한 선택은 저의 진로를 신학으로 바꾼 것입니다. 사실 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신학을 공부하여 목회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서 일반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전공은 화학공학이었는데 마음은 이미 신학에 있었으므로 학교생활에 열정을 쏟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박차고 나와서 신학교에 들어갈 것을 다짐하고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우선 휴학계를 내고 군복무를 마치라고 조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군대에 들어갔고 제대 후에 대학을 졸업한 후에 신학대학원에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남은 대학생활을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할 것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보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으므로 부모님의 기대와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제가 꼭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아마 아버지는 종교가 아들의 길을 망쳐 놓았다고 한탄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신학의 길을 선택할 때 그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신학을 공부하고 전도사가 되고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생활하면서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늘 꿈꾸던 일이었으므로 학교생활에서 그랬듯이 늘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새소망교회와 금옥교회, 그리고 인정교회에서 부교역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제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지 않을 길로 여겼던 그 길은 교회를 개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 이르다 보니 저는 교회를 개척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2012년에 옹달샘교회를 개척하고 담임목사로서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 두렵고 흥분되는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저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과 하나님의 경륜을 발견한 것입니다.
두 갈래의 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내리막길이라 좀더 쉬워 보였습니다. 그것은 선배들도 추천한 길입니다. 기다리면 담임목사 청빙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권면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하나의 길이 제 앞에 보였습니다. 그것은 좀더 험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오늘의 차이를 낳았습니다.
제가 말하는 오늘의 차이란 신앙의 길을 구도의 길로 이해하고 하나님을 은혜의 하나님으로 이해하며 하나님의 계획을 하나님의 경륜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를 율법주의의 덫에서 풀어주었고 내세지향적이며 현실도피적인 신앙을 벗어나 현세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 개척이라는 그 길을 선택한 후에 제가 다다른 결과입니다.
4. 너는 특별하단다 – 맥스 루케이도
우리가 선택하면서 걸어온 인생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앞에는 여전히 걸어야 할 길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기도 합니다. 어떤 길은 우리 눈에 선명하고 어떤 길은 지나온 지가 하도 오래 전의 일이라서 멀리 아스라히 희미하고 아득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오랜 길을 걸어서 때때로 아픈 다리를 절기도 하면서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여행길은 콧노래를 부르며 동무들과 함께하는 즐거운 경험입니까? 아니면 앞사람을 추월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잠을 줄여가면서 애를 써야 하는 경주입니까? 우리의 여정은 다른 여행자들의 옷차림과 화려한 짐꾸러미와 장비를 바라보면서 부러운 생각과 한탄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인생에는 모순적인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학교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져 사는 법을 배웁니다. 그것이 교육입니다. 교육을 통해서 우리는 사회가 운영되는 질서를 배우고 조상들이 전해준 전통을 배웁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힘을 모아 협력하여 우리 사회가 운영되는 것을 배웁니다. 협동의 가치를 우리는 학교에서 배웁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학교에서 경쟁을 배웁니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여 이겨야 우리는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고 배우고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결국 학교에서 협동을 배우게 되는 걸까요, 아니면 경쟁을 배우게 되는 걸까요?
우리는 경쟁을 통해서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에 붙들린다면 점점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현재 모습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평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언제나 슬픈 그림으로 그려집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준 칭찬의 별점을 모으려고 애쓰게 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악평을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다가 몸이 병들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슬픈 것은 나와 함께 길을 가는 길벗을 경쟁자로 여긴다는 점입니다. 그와 함께하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긴장이 된다면 우리의 여행은 더욱 힘들어질 것입니다.
미국의 작가 맥스 루케이도는 이렇게 별점을 찾아 헤매면서 자신과 타인을 점점 병들게 하는 현대인에게 치료가 되는 책을 썼습니다. 그것이 ‘너는 특별하단다!’입니다. 그 책에서 주인공은 별점과 벌점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하나님으로 상징된 목수 엘리를 만나고 비로소 자신이 그 어떤 사람의 평가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는 특별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모순이 존재하는 세상 속에서 그 모순을 초월하는 특별한 가르침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를 얽어 매는 족쇄를 끊어버리고 자유롭게 길을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5.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께서는 자기 시대의 사람들이 이렇게 족쇄에 붙들려 살고 있음을 간파하셨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평판에 얽매어 살면서 바른 길을 따를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른 소리를 내는 사람을 보고서도 자신이 무슨 해를 당하지 않을까 하고 주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을 문제 삼았습니다. 주변에서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그런 행동을 보시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편에 서서 자신의 안전을 추구하는 사람들임을 알아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고 할지라도 결코 그 사람들은 자신을 따라 하나님 앞에 올 수 없을 것을 아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여전히 세상에 속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한복음 8:21~24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무엇엔가에 묶여 종살이를 하고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종살이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생각과 양심을 따라 살 수 없고 오직 더 힘센 사람의 생각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선택의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가 선택한 일을 돌아보면 이십대 초반에 결혼해야겠다고 결심한 까닭은 남녀관계는 부부생활 안에서만 합당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신학으로 길을 바꾼 까닭은 그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교회개척을 결심한 까닭은 그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떤 선택을 할 때는 그 선택을 내리게 된 어떤 생각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까닭은 주변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오래 전부터 그런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때 그것을 결정하게 하는 우리의 생각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은 곧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누구에게 무엇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예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그 이전과는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뱃사람으로 살던 시절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삶은 갈릴리 벳새다에 사는 다른 어부들의 삶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런 선택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실되게 배워서 참 제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6.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기독교인이 설립한 연세대학교의 모토입니다. 모토는 좌우명입니다. 좌우명(座右銘)은 ‘늘 자리 옆에 갖추어 두고 생활의 지침으로 삼는 말이나 문구’입니다. 미국의 존스홉킨스대학도 같은 모토를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모토는 ‘베리타스 보스 리베라비트’(Veritas Vos Liberabit)인데, 이 말은 라틴어로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입니다. 많은 대학에서 진리를 통해 자유를 얻자는 목표를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과연 대학에서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까?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배운 사람이라 역시 뭔가 다르구먼!’ 또는 ‘그 사람은 헛배웠구먼!’ 어떤 사람은 대학공부를 통해서 더욱 성숙하고 포용적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대학을 여러 개 졸업하고 해외유학을 하고 박사학위를 받았어도 여전히 고집불통입니다. 우리는 학위가 곧 진리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까?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예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통해서 자유롭게 된다는 말은 우리의 선택을 결정하는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수정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점검하고 그것을 바르게 교정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의 생각이 교정되어 바르고 견고해지며 넓어질 수 있습니까? 그런 일은 진리를 배우는 사람이 겸손할 때 일어납니다. 자신의 생각을 객관화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대조해 보면서 자신을 반성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생각은 조금씩 변화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겸손을 잃은 사람들은 아무리 많이 배워도 그 완고한 생각을 고치기 못하고 더욱 외골수가 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는 국회청문회나 국정감사장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사는 농부에게도 명확한 진실을 못 보는 국회의원이나 장관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죄의 족쇄에 꽁꽁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 요한복음 8:36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성경책도 그 가르침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앉아서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성경의 이야기는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그의 생각은 결코 수정될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도 배울 수 없습니다.
설령 그가 성경을 모두 외운다 할지라도 그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의 지식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기쁨이나 확신도 주지 않습니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을 예수께서는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부르셨습니다(계 3:1 - 사데교회). 저는 지난 금요일 기도 시간에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예수님께 속하고 예수님으로 옷 입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겠구나!’
내가 예수께 속한다는 말은 그의 이름으로 부른다는 말입니다. 스물네 살에 저와 결혼한 박해자 씨는 제 아내입니다. 우리 교회는 박해자 씨를 사모님이라고 부릅니다. 사모는 목사의 부인을 가리키는 호칭입니다. 그것은 박해자 씨가 저에게 속했으며 제가 박해자 씨에게 속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속할 때 비로소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세례이며 그것이 매 순간 우리가 확인해야 할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생각은 늘 새롭게 되고 또 자라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경험을 했으므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고린도후서 10:5, 표준새번역성경
오늘 설교의 제목은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하여’입니다. 인생은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인생은 달라집니다. 우리는 선택하고 후회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후회해도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선택은 우리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꿉니다. 그리고 그 선택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 생각은 우리가 배운 것에 따라 형성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배울 때 진리가 우리의 생각을 바르게 펴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우리에게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 선택의 결과로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말은 사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우리는 선택할 수 없는 족쇄에 매여 있는 종과 같이 살 때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인생이 바뀌고 천국의 기쁨을 누리려면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생각이 새롭게 되어야 하며,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순종하고 겸손하게 그 가르침을 받는 길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구도자의 길입니다. 오늘도 이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우리들과 주님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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