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김원종 - 일찍부터 정신생활에 몰두 3. 고향 영양 복귀를 위해 땀 흘리다
1 나는 1974년 12월에 제대를 하고 영양지역장으로 발령받았으나 ‘의인이 고향에서는 대우를 못 받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나의 고향에서의 활동은 망설여졌다. 영양군은 6개면에 인구 6만 명의 작은 군이다.
2 나는 군내를 여리고성을 돌듯이 몇 번 돌면서 차비가 있어도 차를 타지 않고 연중 약 6천 리 이상을 걸어 다니며 활동하여 전 지역이 총회를 하면 70~80명 이상 모이게 되었다. 수비, 죽파, 입암, 계간리, 교역 본부 모두 우리의 힘으로 대지를 구입하여 교회를 신축하고 헌당식을 올렸다.
3 내가 협회 40일 수련을 받을 때 선생님께서 “온 산에 유실수를 심어야 본연의 에덴동산으로 복귀된다”라는 말씀을 새기고 기회만 있으면 내가 앞장서서 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식구 총회 때에 지역본부 건립을 위하여 개간을 하자고 건의했더니 만장일치로 찬성하였다.
4 그래서 개간지를 물색하던 중에 국유지로서 산림보호 지역 안에 수십만 평의 평지가 버려져 있어서 그곳을 선정하여 모든 책임은 지역장인 내가 지기로 하고 개간을 시작했다. 젊은 식구 4인이 한 조가 되어 4일간씩 자기 식량을 가져와 작업을 밤낮없이 해나갔다.
5 온 군민들이 ‘통일교회에서 온 산을 다 벗겨 나가고 있다’라고 떠들썩했지만 어쩐 일인지 영림서에서는 조용하였다. 우리는 4천 평을 개간하려 했으나 나중에 보니 5천 평이 넘었다. 곧 아담한 네 칸의 주택 1동과 연초 건조실 1동을 건축해서 연초경작 허가를 신청하고 담배도 1,300평에 이식해 놓았다.
6 3월에 접어들어 지역장 회의에 3일 간 참석하고 돌아오니 총무(최병선)와 식구(하길옹, 김성헌) 등 3명이 붙들려 가고 없었다. 7일간의 지역 자체 수련회를 마치고 면회를 가보니 검사의 선고가 끝나 징역 3년과 벌금이 많이 나와 있었다.
7 그런데 3사람 모두 자기가 책임자라고 해대는 통에 검사들은 아직도 사건을 마무리 짓지 못할 입장에 놓여 있었다. 식구들이 쇠고랑을 차고 나오는 것을 볼 때 눈이 아찔하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
8 어린 두 식구는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총무는 태연하였다. 총무가 낮에 잠깐 눈을 감았는데 음성이 들리기를 “너희 스승도 남한에서 3개월을 더 넘지 아니하였는데 너희들일까 보냐” 하고 하늘이 말씀해 주셨지만 두 식구에게는 거짓으로 들을까 봐 얘기를 못해줬다고 하였다.
9 얼마 후 판사는 청년들이 애국적인 마음으로 행한 처사라고 하여 크게 참작해서 1개월간 영창 생활과 벌금 1만 2천 원, 2년의 기소유예로써 풀려나왔다. 선생님께서 이 보고를 받으시고 “그 세 사람은 베드로를 심판했다”라고 하시면서 기뻐하셨다.
10 이렇게 해서 개간지는 우리에게 분배가 되어 그 해 농사를 지었는데 감자 150가마, 콩 2가마, 담배 한 차분을 실어 냈다. 그런데 1년간 농사지은 수확금과 사건의 경비와 벌금 등등을 계산해 보니 1원도 남지 않고 모자라지도 않았다.
11 우리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아무리 뜯어 맞추어도 그렇게 정확하게 들어맞을 수가 없었다. 하늘의 조정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 후 개간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지역 본부를 건립하려 했던 뜻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식구들의 헌금과 공기총을 판 이익금으로 36평의 교회를 건립할 수가 있었다.
12 처음 원리를 알고 나니 결혼한 것이 대단히 후회가 되었다. 원리를 알아 느껴지는 것은 인간 조상의 타락이 불륜한 사랑으로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랑의 법도가 있을 것으로 알고 결혼 10개월이 되었지만 아내를 설득시켜 성별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5년이 지난 1965년에 기성 가정 축복을 받게 되었다.
13 그 후 곽정환 지구장님의 지원으로 영양 읍내에서 소비조합과 통일약국을 설립하였다. 이때 건물은 영양지역에서 담당하고 곽정환 지구장께서 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시고 모든 사업자금을 대시면서 지구사업 부장을 파송하여 운영하게 하셨다.
14 농촌에는 비싸게 일용품과 농업용품을 사다 쓰고, 농산물은 중간 상인들의 농간으로 헐값으로 팔아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판국에 시장에서 30원에 판매하는 상품을 우리 소비조합에서는 20원에 팔고 1할인 2원을 소비자의 통장에 저축을 해주었으니 장날이 되면 구름떼처럼 사람이 몰려 줄을 서서 물건을 사는 것이었다.
15 그래도 우리는 매일같이 꽁보리밥에 김치 깍두기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봉사하였다. 통일 약국도 식구들의 봉사로 운영되었다. 그랬더니 영양군 내에서 통일교회가 돈이 제일 많은 단체로 소문이 나서 영양에서 제일 큰 약국을 우리에게 사라고 하였다.
16 우리의 소비조합과 약국이 크게 운영이 되자 시장의 중간 상인 등은 우리 가게에 와서 “우리 가족 다 먹여살리라”라고 목놓아 울면서 아우성을 쳤다. 그러나 그렇게 성황을 이루었던 사업도 결국에는 인사이동으로 떠나오고 난 후 세상 사람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17 그 당시 나는 “몸이 아프려고 해도 아플 여가가 없어서 아플 수가 없었다”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실감하였다. 지역장 생활가에, 반공 강의, 개간지의 농사, 지역 본부 건립, 구역 순회, 부흥회, 공적 집회 등 눈코 뜰 새 없이 일이 산적해 있었다.
18 영양에서 잊지 못할 일은 본가에 있는 마지막 소 한 마리를 팔아먹은 사건이다. 1967년도로 기억되는데 전국 지역장 총회 때에 선생님께서 친히 공기총을 들고 나오셔서 “K 통일 산업의 운영을 위해서 공기총을 팔아야 한다” 하시며 심각하게 말씀하셨다. 그 후 수일 내에 각 지역별로 등급을 매겨서 공기총 판매 액수가 하달되었다.
19 지역장들은 철야를 하면서 어떻게든지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나는 그때 공기총 대금을 만들기 전까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금식을 하면서 구역을 순회하겠다고 결심하고 영양 군내를 걸어 다니면서 식구들에게 호소하였다. 4일간을 순회하고 5일째 본가에 도착했는데 일어날 기력이 없었다.
20 우리 집에는 소가 다섯 마리 있었는데 1마리는 교회에 바쳤고, 내가 집에 없으니 다 팔아먹고 마지막 1마리가 남아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러니 이 소는 형수님과 노모, 아기 엄마 세 사람과 어린 것들의 생명선이나 다름없었다.
21 어쨌든 나는 소를 팔아서 하늘의 딱한 사정을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해 드리는 조건을 세워야 하겠는데 섣불리 해서는 들어주지 않을 것이므로 식구들을 모아 놓고 “나는 지금 책임을 다할 때까지 금식할 것이므로 책임 못하면 죽을 것이오. 내가 금식하다 죽으면 당신들은 소 가지고 잘 살아주오” 하고 유언을 했다.
22 그리고 “소 값으로 공기총을 줄 테니 공기총을 팔아서 소를 사면 하늘의 사정도 들어 드리니 그게 일거양득이 아니겠느냐”라고 하니 죽는다는 말에 승낙을 해주었다. 이튿날 소를 몰고 24km 떨어진 영양 읍내에 가서 3만 3천3백 원에 판 돈과 식구들의 헌금을 합하여 10만 원의 공기총 대금을 바치게 되었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