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無門關) 삼십칠칙(三十七則)
정전백수(庭前栢樹) 뜰 앞의 잣나무,
본칙(本則) 역(譯)
조주에게 어떤 승려가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조주가 말했다. 뜰 앞의 잣나무다. 趙州, 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州云, 庭前柏樹子.
평창(評唱) 역(譯)
무문이 말했다. 만약 조주의 대답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면 앞에는 석가도 없고, 뒤로는 미륵도 없을 것이다. 無門曰 若向趙州答處, 見得親切, 前無釋迦, 後無彌勒.
송(頌) 역(譯)
게송으로 읊다. 말은 사실을 드러낼 수 없고, 말은 기틀에 들어맞지 않는다네. 말을 따르는 자는 목숨을 잃고 글귀에 막히는 자는 헤매게 되리라. 【頌曰】言無展事, 語不投機. 承言者喪, 滯句者迷.
사족(蛇足)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어느날,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여기서 조사는 달마대사를 말한다. 달마대사께서 중국에 오신 뜻이 무엇이냐? 다. 그 묻는 말에 답이 절, 도량에 서 있는 잣나무라고 했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온 뜻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부처님 법 전하려고 왔는데 저기 눈앞에 보이는 잣나무라고 답을 했으니, 조주선사 잣나무가 공안화두(公案話頭)가 되었다. 왜? 조주선사는 묻는 스님의 답을 잣나무라고 했느냐? 이다. 알쏭달쏭 동문서답(東問西答)이다. 동쪽을 물었는데, 서쪽을 말한 꼴이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속에 묻는 스님의 의식(意識)을 끊어서 의정(疑情)을 유발(誘發)시켜 얽어 맺다. 혜개선사(慧開禪師) 평창(評唱) 평(評)이 날카롭다. 이런 식으로 매양 답을 하면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답(答) 속에는 앞에는 석가(釋迦)도 없고, 뒤에는 미륵(彌勒)도 없다고 했다. 불교는 부처님같이 쉽게 풀어주어야 하는데, 조사들 법문은 무슨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하느냐? 이다. 이러다가 법당 앞이 잡초만 무성하지 않겠느냐? 이다. 조주선사의 제자 중에 각철자(覺鐵子)라는 스님이 있다. 어느 날 법안스님이 물었다. 조주선사는 누가 무엇을 물어도 답은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라고 하신다는데 사실 참말입니까? 각철자(覺鐵子) 스님은 아니라고 하면서 선사(先師)를 비방(誹謗) 하지 말라고 했다. 조주선사는 그런 말 한 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법안스님이 또 묻기를 그대는 왜? 없다고만 하는가? 따졌다. 그러자 각철자(覺鐵子)스님은 끝끝내 그런 사실이 없다고 말했다. 이 문답(問答)도 문제다. 이렇게 정전수자(庭前樹子) 공안(公案)이 버젓이 있는데도 각철자(覺鐵子)스님은 없다고 했느냐? 이다. 공안화두(公案話頭)는 모르겠으면 의단(疑團)과 하나가 되어서 공안타파(公案打破)가 핵심과제(核心課題)다. 화두(話頭)를 타파(打破)하기 전에는 입도 뻥끗해서는 안 된다. 혜개(慧開) 선사도 그래서 그럴까? 말은 말이라 사실을 드러낼 수가 없고, 말은 기틀에 들어맞지 않는다네. 말을 따르는 자는 목숨을 잃고 글귀에 막히는 자는 헤매게 되리라. 하고 공안을 마쳤다.
화옹송평(和翁頌評) 역(譯),
정전백수자는 서쪽에서 온 답이라, 동쪽을 물었는데 서쪽을 답해서 공안화두가 됐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 물었는데, 묻는 사람은 남쪽, 답 자는 북쪽, 얼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네. 庭前樹子西來答 東問西答公案話 達摩祖師西來意 問南答北不見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