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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코스 : 칠장사 - > 금광호수(수석정)
40코스를 걷고자 또다시 칠장사에 이르렀다. 2023년 3월 25일 39코스를 걸었으니 1년 3개월 만이다. 일주문에 들어서니 목탁 소리가 낭랑하게 들린다. 고요한 산속에 울려 퍼지는 목탁 소리는 탐진치貪瞋痴에 얽매인 속박의 사슬을 끊어 주는 듯 그 소리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혜소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일곱 도적을 교화하여 모두를 현인으로 거듭나게 하고 산은 칠현산, 절은 칠장사로 하였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는데. 금북정맥을 품고 있는 깊은 산세는 고려말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 개천사에 있던 고려조의 역대 실록을 이곳에 옮겨 보전하기도 하였다.
국보(오불회괘불 탱화)와 보물(인목왕후 어필 칠언시)를 보유한 천년 고찰의 산사는 이외에도 ”후 삼국시대의 태봉국의 군주 궁예왕이 활쏘기를 익히며 10세까지 유년기를 보냈던 곳이고, 의적 임꺽정이 갖바치 스님 병해 대사에게 바친 꺽정 불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또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원찰이며, 암행어사 박문수가 과거 시험을 보기 전에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나타난 나한이 과거 시험 구절을 가르쳐 주어 장원급제했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어 시험 합격을 비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칠장사에서 퍼옴)라고 하였다.
칠장사 주차장의 우측 끝자락에서 사찰경내로 진입하는 길을 따라서 천왕문에 이르러 대웅전을 향하여 두 손을 모으고 칠장산으로 향할 때 박문수 합격 다리가 있었다. 짧은 다리였지만 민중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매달아 놓은 리본으로 다리가 금세라도 가라앉을 것 같았다.
민초들의 소망은 무엇일까? 민심이 천심이라 하였다. 그것은 나에게만 소망을 이루어 달라고 염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헐뜯지 않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 합심하며 기회를 균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워야 함을 바라며 리본을 매달았을 텐데 이 땅의 기득권자들은 과연 그러할까?
사람은 올곧아야 하고, 사회는 정의로워함을 다시금 상기해 보며 박문수 합격 다리를 건넜다. 한 사람만이 지날 수 있는 좁은 등산로인데 매우 경사진 오르막의 등산로였다. 오랜만에 땀을 흘리며 산길을 오른다.
거친 숨을 고를 때 칠장산 0.9km를 알리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1km도 되지 않는 거리지만 등산로가 매우 가팔라서 숨을 헐떡이면서도 기어가도 30분이면 올라가지 않겠나? 라는 자만감이 들었다.
자만감이 가득한 발걸음은 곧바로 후회로 돌아왔다. 칼날을 세워 놓은 듯한 등산로에서 온몸이 땀으로 가득 찬다. 김 총무는 처음으로 땀을 닦는 산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평지의 둘레길을 걷다가 오랜만에 땀을 흘리는 산행을 하고 있어 즐겁다는 말인지? 아니면 땀을 흘릴 만큼 힘든 산행을 하고 있다는 고통을 우회적으로 말하는지 알 수 없지만, 산행의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고통스러움이 함께 내포된 말이 아닐까?
고통스럽게 산을 오르면 그 고통의 배가되는 기쁨을 누려주는 것이 산이란 생각을 상기하며 다소 보폭을 적게 하여 올라갈 때 젊은 청년이 땀을 흘리며 쉬고 있다. 한번 정도는 쉬면서도 숨을 고르지 않을 수 없는 곳이었다.
된비알의 오르막에서 왜 쉬고 싶지 않겠나 마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쉬지 않고 오르는 것도 산행의 또 다른 재미이기에 흐르는 땀을 보약으로 여기며 쉬지 않고 오른다.
올해 들어 가장 많은 땀을 흘리며 칠장산과 칠현산 갈림길에 이르렀다. 능선에 오르기까지 평지라면 10분이 갈 수 있는 거리를 가파른 산길로 계속되어 25분이 소요되었다. 이곳에서 칠장산까지는 0.5km이고 가야 할 칠현산은 2.1km이다. 칠장산까지 비록 500m의 짧은 거리에 있지만 경기 둘레길에서 벗어나 있고 오늘 기온이 30도가 넘은 무더운 날씨였기에 칠현산으로 향하였다.
칠현산으로 가는 산등성이는 금강의 북쪽 울타리가 되는 금북정맥이다. 백두대간 속리산 천왕봉에서 힘차게 달려온 백두의 정기(한남금북정맥)는 칠장산에 이르러 수원의 광교산으로 뻗어가 김포의 문수산으로 힘차게 내달리며 한강의 남쪽 울타리인 한남 정맥을 이루고
또 다른 한줄기는 칠현산에 이르러 서운산을 일으키며 서해의 안흥진으로 뻗어가 금강의 북쪽 울티라가 되는 금북정맥의 산줄기를 이루어 놓았으니 칠장산은 한남금북정맥, 금북정맥, 한남정맥으로 갈라지는 3 정맥의 분기점이 되는 매우 중요한 산이 된다.
경기 둘레길과 함께 가는 금북정맥의 산등성이는 완만한 능선으로 뻗었고 바람까지 불어와 땀 흘린 고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새로운 흥이 돋울 때 박문수 어사의 몽중 등과시가 세워져 있었다.
落照 : 夢中登科詩(어사 박문수)
落照吐紅掛碧山 : 지는 해는 붉은 빛을 토해 푸른 산에 걸려있고
寒鵝尺盡白雲間 : 차가운 하늘 갈가마귀 자로 잰듯 흰구름 사이로 날아가네.
問津行客鞭應急 : 나루터를 묻는 길손은 말채찍이 바빠지고
尋寺歸僧杖不閒 : 절 찾아 가는 중들의 지팡이 또한 쉼이 없네.
放牧園中牛大影 : 목장의 언덕위에는 소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望夫臺上妾低鬟 : 지아비 기다리는 누대위의 아내의 쪽진 머리가 낮아지는데
蒼煙枯木溪南里 : 푸른 고목 들어선 냇가의 남쪽마을에
短髮樵童弄笛還 : 더벅머리 초동이 피리불며 돌아오네
몽중등과시는 암행어사의 표본이요 대명사로 우리에게 익숙한 박문수의 과거 시험 장원 급제시이다. 그 깊은 의미는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느냐마는 이 시를 대하니 항시 틈만 나면 몽중등과시와 단종의 자규시를 읊조리던 고향의 선배이신 이은영 형이 생각난다.
우리 같은 사람은 조선 시대에 태어나서야 할 사람이라고 말하던 형이었는데 불행히도 60대 초반의 나이에 치매에 걸려 연락이 끊긴 후 지금은 생, 사조차 알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애달픈 일이다.
순수하고 올곧았던 형은 무엇이 그토록 어사 박문수를 찬미하게 하였을까? 고향의 어른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사의 청렴 때문일까? 재야 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박문수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셨다.
” 그는 정직하고 청렴한 벼슬아치로 늘 아랫사람을 자상하게 돌봐 주었으며, 일상생활에서는 유머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그는 엄숙하고 근엄한 선비의 풍모가 아니라 서민의 벗이었다.
오늘날 관리의 부정이 늘 말썽이 되고 유능한 관리보다 눈치 보는 관리가 판을 치는 마당에 박문수 같은 청렴하고 강직하면서도 유능한 인물을 떠올려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산군들은 금북정맥을 알리는 표지기를 곳곳에 부착하여 놓은 주 능선을 걸으며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내는 칠현산을 바라보며 진행할 때 ‘칠순비 부부탑이’ 있었다.
칠순을 기념하여 세울 것으로 추정되는데 부부가 함께 오래도록 살아간다는 것은 유행가 가사처럼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일 것이다.
금북정맥의 산등성이는 오르고, 내리는 길의 연속이었다. 짧게 그러나 가파른 길을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니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을 실감하듯 숨이 찼다. 칠장산에서 칠현산, 덕성산으로 이어지는 산등성이는 같은 500m 다른산과 비교할 규모가 아니었다. 얼마나 장대하였으면 같은 산등성이에 솟은 봉우리를 3개의 산(칠장, 칠현, 덕성산)으로 나뉘어 놓았을까?
높이와 비교하면 산의 규모가 광대하고 골짜기가 깊고 경사가 급하여 올라보면 산의 기운에 흠뻑젖는 우리의 산줄기인 1대간, 2정간, 12정맥가운데 하나인 금북정맥으로 자신의 위치를 당당하게 지키고 있는 산이었다.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칠현산에 올랐다. 더위 속에 올랐기에 산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칠현산516.2m를 알리는 검은돌의 표지석이 빛을 뿜고 있었다.
덕성산을 향하여 걸어간다. 산길은 여전히 숲속의 길이다. 빽빽이 들어찬 나무들로 인해 주변을 조망할 수 없음이 아쉽지만 오늘 같은 더위에는 그늘진 숲이 고마웠고 가끔 가슴에 와닿는 바람에 시원하다는 표현은 모욕의 언사였다.
날은 더워도 지칠줄 모르고 진행하여 덕성산 갈림길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덕성산까지는 0.1km 위치에 있지만, 금북정맥의 주 능선과 경기 둘레길에서 벗어나 있어 배낭을 내리고 휴식을 취했다.
하산을 앞두고 걸어온 길을 살펴보니 칠장산, 칠현산, 덕성산으로 뻗어간 산줄기는 칠장산에서 덕성산까지 불과 5km밖에 되지 않는 하나의 산등성이에서 솟아있는 3개의 산봉우리였다.
그렇다면 이곳은 서로 독립된 3개의 산이 아니라 칠장봉, 칠현봉, 덕성봉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산이기에 이들 3봉우리 전체를 혜소국사가 이름한 칠현산으로 하고 칠장산, 덕성산은 산이 아닌 봉으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명산 지리산의 그 장엄한 준령 가운데 어느 봉우리를 산으로 이름하여 부르는가? 천왕봉과 수십km 떨어져 있는 반야봉도 산이 아닌 반야산이 아닌 지리산 반야봉으로 부르듯이 같은 능선 위에 솟은 봉을 산으로 부를 수는 없다. 덕성봉(산)은 오르지 않고 금북정맥 주 능선으로 하산할 때 경기 둘레길은 사흥리로 진행하여야 하고 금북정맥은 옥정재를 향하여 뻗어갔는데 이 지점이 급경사로 이루어진 갈림길이 되어 매우 독도에 주의가 요구되는 곳이었다.
이제 금북정맥과도 헤어지고 경기 둘레길을 걸어가는데 산길이 급경사의 내리막길이 되어 미끄러지기 쉬운 곳이 되어 김 총무에게 이곳은 겨울철에는 오기 힘들겠는데요라고 하자. 김 총무는 겨울에는 아이젠을 차지 않을 수 없으니 오히려 오고 가기 편한 곳이라고 한다.
옳은 말이다. 차라리 아이젠을 차면 편안히 미끄럽지 않게 하산을 할 수가 있지만, 그냥 등산화만을 믿고 경사진 곳을 내려가는 것이 더 위험한 것이다.
경사진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의 산림녹화 중인 벌목지대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무를 베어내고 새로이 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푸른빛으로 수를 놓는 산림녹화 사업이 얼마나 산을 푸르게 하는지를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녹화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바로 옆에 뻗어있는 임도는 6월의 폭염에 노출되어 걸어가기에는 고통스러운 길이 될 것 같아 김 총무에게 설마하니 저 임도로 걸어가지는 않겠지요? 하니 그럴 일은 없겠지요? 라고 응답한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이면 그 마음이 곧 하늘님의 마음이기에 임도로 가지 않을 것을 믿고 오르막길을 내려서는데 가야 할 길이 임도를 향하고 있었다. 우려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제까지는 비록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여 땀을 흠뻑 흘리며 걸어왔을지라도 그늘 속의 길이었는데 이제는 불볕더위 속을 걸어가야 한다. 산 넘어 산이요 물 건너 또다시 물을 만난 격이지만 두려움보다 웃음이 나왔다.
가마솥더위의 그늘 한점 없는 임도였지만 칠현산 산줄기를 넘어와서 그런지 그다지 힘들이지 않아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칠현산이 고개를 들었다. 기회가 되면 칠장봉에서 덕성봉까지 종주할 수 있기를 기대도 해보는 여유 속에 임도를 내려서니 사흥리였다.
산기슭을 밭으로 조성한 사흥리를 지나 금냉이교를 건너 사간마을에 이르니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다정한 정을 느끼게 하였는데 누군가가 걸어 놓은 어머니, 아버지의 숨결이 서려 있는 고향의 땅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노래 때문이었을까?.
예전에 이 길은
서너 말 쌀자루 머리에 이고도
노루처럼 가볍던 어머니
안성장터 가던 길
예전에 이 길은
사나흘 불길 속에서 익어가던 자배기
등에 지고
아버지 안성장터 가던 길
덕성산 계곡에선 사시사철 푸른 물 내리고
조령鳥嶺이라
새들도 광혜원 넘어간다
칠현산, 덕성산 사이쯤에서 둥지를 트는
저물 무렵
어머니 마중하려
한없이 서성이던
이 길은
기다림이 그리움으로 고인
호숫가 그 머무는 자리
과거에는 기다림으로 가득했던 곳이기에 오늘날에는 그리움으로 맺힌 곳이 되어 그대로 발길을 지나치지 못하고 멈추게 하는 곳이었다. 예전에 사기를 굽던 곳이라 하여 사기막골이라 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사간마을로 바뀌었다.
오는 손님 따뜻하게 맞이하고 가는 손님 아쉬워하는 솟대만 남아 그 옛날의 정서를 대신하고 있는 듯하였다. 사간마을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석암마을로 향할 때 반대 방향에서 주행하여 오는 승합차가 갑자기 정지하며 ‘경기 둘레길을 걷고 있어요, 대단하시네요? 라고 인사를 건넨다.
경기 둘레길을 종주하는 사람을 만나면 반가움에 수고한다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적은 종종 있었지만,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차를 멈춰 세우고 위로와 격려의 인사를 하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
그만큼 경기 둘레길 종주는 많은 사람의 주요 관심사가 되어 우리 땅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반듯이 걸어야 할 시대의 과제가 된 것이다. 자동차를 세우고 따듯한 위로의 한 말에 불볕 더위 속의 괴로움은 시원한 바람이 되었다.
금광초등학교 조령 분교를 지나고 사흥교를 건너 사흥리 입구 삼거리에 이르니 경기 둘레길 40코스를 알리는 이정표에 금광 호수 4.3km를 알린다.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불볕더위 속의 아스팔트 길이 되어 구도자 고행의 길로 다가왔다.
위로는 햇볕의 뜨거운 기운이 가득하고 아래로는 아스팔트의 지열이 가득한 그늘 한 점 없이 뻗어있는 찻길을 걷는 것은 고통이었다. 더욱이 얼마쯤 걸어갔을 때
오른쪽으로 금광 호수의 물결이 눈에 띄어 목적지에 다다른 것으로 마음의 긴장이 풀어지는데 경기 둘레길은 금광 호수를 향하여 방향을 전환하지 않고 오로지 아스팔트 길로 진행하였다.
이 골목에서 금광 호수로 향할까? 아니면 저곳에서 방향을 전환할까? 하며 어서 빨리 금광 호수로 향할 것을 바랬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처럼 경기 둘레길은 오로지 앞으로 뻗은 아스팔트의 찻길로 계속 되였다.
하지만 무더위와 경쟁에서 불볕더위를 뚫고 마침내 금광호수변의 청목뜰에 도착하였다. 동산을 넘는 길목에서 마시는 물은 꿀물이요 참외는 꿀 자체였다. 청목뜰은 청록파 시인의 한 분이신 박두진 선생의 문학을 기리는 뜰이다.
이곳에서 오늘의 종착지인 수석정까지는 ’박두진 문학길‘이란 테마 산책로를 조성하여 입구에서부터 아늑한 길로 펼쳐졌다. 다소 가파른 언덕에 올라서니 산책로가 말끔하게 조성되어 있다.
박두진 문학길답게 여기저기 그 자취를 느낄 수가 있었다. 산책로를 걸으면서 청록파 시인에 대해 생각에 잠긴다. 어떤 사람은 청록파 시인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는 시점에 좌우 이념논쟁으로 나라가 혼탁해졌을 때에도 순수 서정시만을 발표함으로써 사람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고 하였다.
일제강점기 창시개명을 자행하자 승려이신 박한영 강백께서 ’이제 우리에게는 성도 없어지나요’라고 개탄하자 어떤 사람이 산중의 승려가 나라를 걱정하십니까 ? 라고 되묻는 말에 선생께서 이 땅의 우로雨露를 먹고사는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라고 대답하였단다.
시는 민중들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산물이다. 시가 사회현실을 외면한다면 그 시는 값어치가 없다고 본다. 초근목피에 시달리는 일제강점기에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팔백리/ 구름에 달가듯 가는 나그네/라고 노래 부를 수는 없다.
‘예술 주의의 문예라 하면 현 조선을 그리는 예술이 되어야 하며, 인도주의 문 에라 하면 조선을 구하는 인도주의가 되어야 할 것이라‘하는 단재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금 떠올린다.
호숫가에는 나무 데크를 설치하여 호수 위를 걸어갈 수가 있도록 수변 갑판 길을 조성하여 놓았는데 이 고장 출신 박두진 문학길답게 그의 시들을 곳곳에 걸어 놓았다.
데크길을 걸어가며 호수를 바라보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하지만 시상은 떠오르지 않는다. 부끄러워도 자신의 능력을 자각하며 남이 지어놓은 시를 읽으며 만족하지 않을 수 없다.
박두진 선생의 지은 시에 이흥렬 선생이 곡을 부친 ’꽃구름‘ 속이란 노래를 흥얼거리며 수석정에 이르렀다.
꽃구름 속에 : 박두진 작사. 이흥렬 작곡
꽃바람 꽃바람
마을마다 훈훈히 불어오라
복사꽃 살구꽃 화안 속에
구름처럼 꽃구름 꽃구름 화안 속에
꽃가루 흩뿌리며
마을마다 진한 꽃향기 풍기어라
● 일 시 : 2024년 6월18일 화요일 맑음
● 동 행 : 김헌영 총무
● 동 선
- 10시20분 : 칠장사 주차장
- 10시45분 : 칠장산, 칠현산 갈림길
- 11시20분 : 칠현산 고스락. 표지석, 돌탑
- 11시55분 : 덕성산 갈림길
- 12시25분 : 사흥리 임도
- 12시55분 : 사간마을
- 13시40분 : 청목뜰. 금광호수 입구
- 14시25분 : 금광호수 수석정
● 소요시간 및 거리
◆ 거리 : 14km. ◆ 시간 : 4시간 0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