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을 뺐다. 오른쪽 입 옆에 볼펜을 찍어 놓은 듯한 작은 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은 조금 더 자랐고 짙어졌다. 파운데이션으로도 커버가 안 되어 외출할 때마다 거슬렸다. 한국방문 길에 병원을 찾았다. 점 위에 마취제를 바르고 레이저 시술하던 의사가 멈추고 말했다. “생각보다 깊어서 한 번으로 안 되겠어요. 한 달 후에 다시 한 번 오셔야 해요.” 점을 뺀 곳에 투명 테이프를 붙이고 병원 문을 열고 나오자 겨울바람이 매섭다. 살을 찌르는 듯한 칼바람을 등에 지고 명동역으로 향했다. 서서히 마취가 풀리면서 상처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안산행 전철이 다가왔다. 친구 경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경이 생각을 하자 점을 뺀 자리의 통증이 명치로 내려온다. 설레기도 하고 아리기도 하다. 늦둥이로 태어나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경이가 아프다. 늘 긍정적이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참 예쁜 친구였다. 경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기 시작한 건 결혼 말이 오가면서부터였다. 엄마의 결사반대로 집안에서 큰 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시할머니와 시부모, 그리고 출가 전인 두 동생이 있는 집 맏며느리로 곱게 키운 막내딸을 보낼 수 없다며 엄마는 눈물로 보냈다. 점점 쌓여가는 불만은 날 선 칼날이 되어 서로를 향해 날카롭게 찔러대곤 했다. 마음이 피폐해진 경이는 몸져누운 엄마를 두고 끝내 결혼했다. 시집살이는 엄마의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그러나 경이는 내색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냈다. 모두가 대견하다며 그녀를 칭찬했다.
결혼 후에도 직장을 다니며 연년생으로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바쁜 탓에 연락이 뜸했다. 나 또한 많은 변화가 있었고 늘 마음으로 그녀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기도로 대신하곤 했다. 어쩌다 전화 통화를 해도 길게 할 수가 없었다. 점점 통화하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녀의 시동생들은 결혼했고 시할머니,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내로, 며느리로, 엄마로 큰 탈 없이 지냈다. 문제는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세상에 둘도 없이 다정하던 시어머니가 돌변한 것이었다.
며느리가 아니라 딸처럼 대하던 시어머니의 행동과 말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다. 밖에서는 며느리 칭찬을 하면서 집에서는 다르게 대하니 혼란스러웠다. 회사 일로 지쳐서 돌아오면 김치 만들 재료가 부엌 가득 펼쳐져 있었다. 하루가 멀다고 종류별로 김칫거리를 사다 놓았다. 아무리 청소해도 지저분하다 트집을 잡고 어쩌다 방에서 쉬고 있으면 거실에서 얼마나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는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전쟁 같은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경이는 마음의 병이 깊어 갔다. 그걸 알아채기까지는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날도 아침 밥상을 차리고 출근하려는 순간 경이가 퍽! 그 자리에 쓰러졌다.
눈을 떠보니 병원 응급실이었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이것저것 검사를 하고 링겔 바늘을 팔에 꽂은 채 그녀는 잠이 들었다.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나자 의사는 ‘무슨 스트레스가 이렇게 많아요?’ 나지막이 물었다. 의사의 따뜻한 목소리에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가슴 저 밑에서 뭔가 쑤욱 올라와 목젖을 타고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천천히 속에 있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는 의사의 눈빛만으로도 다소 응어리가 풀리는 듯했다.
경이는 회사가 걱정되었다. 문밖에서 기다리던 남편이 의사의 호출에 안으로 들어왔다. 회사에는 연락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퉁퉁 부은 눈과 눈물로 얼룩진 경이의 얼굴을 본 남편은 연거푸 미안하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남편의 눈에 이제야 아내의 아픈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한때 모든 걸 다 내려놓으려 했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고스란히 숨기고 살아낸 인고의 시간이 욱신거렸다.
‘다음 정거장은 안산, 안산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어느새 전철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녀를 만나기 십 분 전,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그동안 살아온 세월을 어찌 물어야 할지, 또 어떤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역을 빠져나오자 서울에서 맞았던 바람보다 더 차갑다. 살갗이 에이는듯하다. 점을 뺀 자리가 찌릿찌릿하게 통증이 올라온다. 바람을 피할 겨를도 없이 저쪽에서 경이가 반갑게 손을 흔든다. 그렁그렁 눈에 맺힌 눈물을 설핏 보았지만 모르는 척 경이 차에 올랐다. 내일은 연차를 내서 회사에 안 가도 되고, 남편의 도움으로 외박도 허락되었다며 환하게 웃는다. 이미 예약해 놓은 식당에서 한정식을 맛있게 먹고 호텔로 향했다. 여전히 씨름 중이지만 그녀는 담담하게 얘기하며 버텨낼 근력이 생겼다고 했다. 그렇다고 다 지나갔다는 말은 아니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경이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릴 뿐,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쏟아지는 눈물만 연신 훔쳐냈다. 우리는 간간이 들리는 차 소리를 들으며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들었다.
어느새 점을 뺀 자리는 희미해졌다. 두 번의 시술 후 진피층 깊은 곳에서부터 새 살이 올라왔다. 흐릿하게 흉터는 아직 남아 있지만 파운데이션으로 커버가 되니 괜찮다. 점이 빠져나간 자리를 보면서 그새 잊고 있던 경이를 생각한다. 피부에 난 작은 상처도 이렇게 아프고 아물 시간이 필요한데 내 친구 경이의 마음속에 깊이 파인 상처는 오죽했을까. 얼마나 많은 회복 시간이 필요할까. 깊은 상처가 흉터로 아물어지고, 그 흉터마저 희미해져 화장기 없는 얼굴과 마음으로 서로를 마주할 수 있는 날을 꿈꿔본다.
최지나 / 2010년 문학시대 신인상 등단,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