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교회는 개척한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였다. 1951년 10월에 이웃 월림교회의 김제홍 집사의 주선으로 설립되었다. 전임 목회자였던 양태선(梁泰善) 전도사가 떠난 지 몇 개월 뒤, 그러니까 개척된 지 6개월 만에 내가 2대 교역자로 부임한 것이다. 당시 홍원교회는 핵심집사였던 이상진 씨와 김운환의 모친 한집사 간에 알력이 생겨서 문제가 진정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전임 사역자는 그것을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교회를 떠났다. 전임 목회자가 분쟁하는 두 집사 가운데 이상진 집사 집에서 유숙했기 때문에 문제 해결을 할 수 없었던 것을 감안하여 나는 분쟁과 관계가 없었던 제 삼자의 집에서 행랑채를 얻어 기거하기로 했다.
죽림교회를 떠나기 3주 전에 아내가 해산을 했다. 첫 딸은 살림밑천이라 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위로와 기쁨을 주셨다. 부임할 교회의 김집사를 1주일 전에 만났고, 그분을 통해 교회정보를 받은 뒤에 교회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에 거주할 주택을 마련해달라고 부탁했다. 드디어 1952년 4월 3일 죽림교회를 떠났다. 이날 전송을 나온 교우들이 석별의 정을 나누면서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30리 길을 걸어서 새 교회에 도착했다.
우리 가정이 거처할 주택은 홍원리 경계에 있는 원신리 윗마을로서 5-6세대가 드문드문 서있는 외딴 마을이었다. 교회까지는 재를 넘어 15분 이상 걸어가야 했다. 그런데 그 집은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오석구라는 중학생의 집이었다. 그 부모는 불신자였지만 행랑채를 무료로 내주어 우리 가족이 살 수 있게 되었다. 이 집의 호주는 염전(鹽田)사업을 하는 사장으로 집에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청천벽력과 같은 비보를 듣게 되었다. 사업을 하던 그 집 가장이 서산에서 목조선에 소금을 싣고 군산으로 가다가 그만 배가 침몰해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이 터진 지 몇 주일 뒤에서야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순식간에 그 집은 초상집이 되고 말았다. 온 가족이 대성통곡을 했다. 나는 자격지심으로 매우 난처했다. 주의 종이 집세도 내지 않고 있는 집에서 기거하자마자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다니, 도무지 면목이 서질 않았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나는 눈이 퉁퉁 부은 가족들을 우리 방으로 불러들였다. 이런 어려운 때에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으니, 우리 모두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했다. 그 집 부인과 오석구, 그리고 여동생 두 명과 우리 식구는 함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이 가정에서 주의 종을 선대하였는데, 왜 이런 불행이 닥쳐야 합니까.” 나의 기도는 가슴을 찢는 기도였다. “지금까지 들어 온 소식은 모두 낭설이 되게 하시고, 곧 이 가정의 호주되는 오선생이 살아서 돌아오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가정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나의 간절한 기도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엉터리기도인가?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오게 해달라니... 그 집 식구들은 나의 이런 기도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음 날 저녁 문 밖에 나갔다. 집 앞에는 고개를 넘어오는 길이 있었다. 건장한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혹시 그 사람이 오선생이 아닌가하여 급히 달려나갔다. 내가 헛것을 본 것은 아닌가? 눈을 비비고 또 비비고 보았다. 이게 혹 유령은 아닌가? 그는 분명 오선생이었다. 그가 나를 발견하고는 “전도사님”하며 소리를 질렀다. 분명히 그가 살아 돌아온 것이다. 나는 단숨에 뛰어 가서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나는 하나님께 진정 감사를 드렸다. 주님께서 나의 “엉터리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더니,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사업에 실패하고 빚에 쫓겨 다니는 것을 본 친구가 그런 거짓 헛소문을 퍼뜨린 것 같습니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머무는 집에서 초상이 나지 않고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게 된 것은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었다. 과연 세상은 희비(喜悲)의 교차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홍원교회 주일학교 학생일동(195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