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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일
당진 산악회 35회 차 백두대간 산행 화방재에서 삼수령간 22kM 구간
몸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가 몇번을 줄라댄다~~"꼭! 갑시다 횽님!!,형님이 간다면 어쩌구 저쩌구"
도져히 거부 할수없는 유혹
그 유혹이 아무리 달콤했다 해도 단호히!! 거부했어야 했다
하지만 어디 사람사는 것이 그렇게 단칼에 정리 할수 있는가~~~그래서 "일단 가보지 뭐!!"
화방재에서 지금의 내 처지로는 슈퍼맨 같아 보이는 산꾼들을 내려 놓고
버스 앞쪽으로 자리를 옮긴후 타 내리는 단풍을 즐기며 두문동재로 향하면서....
"화방재에서 두문동재까지는 지난 2012년 1차 백두대간 진행때 걸어 보았다는 깔끔치 못한 비겁한 위안"
두문동재로 향하는 길에 만나는 적멸보궁이 있는 "태백산 정암사"를 지나고
우리나라 무연탄 생산 중심지였던 함백산 자락의 우리나라 대표 탄광 중 하나였던 삼척탄좌을 눈으로 가름한다
화방재를 내려와 다시 양장구곡의 만항재를 향해 치고 오를때 누군가의 주절임으로
만항재의 높이가 주제가 되어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잠시후 확인되는 만행재의 높이는 "1330m"
개성의 고려 유신들이 이성계의 녹을 먹지 않겠다며 이곳 함백산 기슭 두문동에 은거
두문불출 생을 보내며 이곳에 올라 개경 쪽을 바라보며 망향제를 올렸다는 전설이 있는
만항재에 대하여.....1997년4월25일자 경향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올렸다
전국 포장도로 가운데 가장 높은 가장 높은 고개인
함백산 만항재(1340m)를 넘는 지방도 414호가 착공 7년만에 개통되어 새로운 드라이브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 도로는 태백시 어평재에서 정선군 고한읍까지 21,8Km의 함백산 일주도로로 강원도 산골의 풍광을 만끽할수있다
날씨가 좋은 밤에는 동해바다 수평선에 장광을 이루던
오징어배의 불빛을 즐길수 있었던 일망주제의 하늘 아래 첫 고개길 만항재
또한 만항재가 "천상의 화원"으로 불리는데 이유가 있다
만항재에 요즘처럼 야생화가 만발하기 전에는 이곳이 목장터였다
고한읍에 삼척탄좌가 생기고 광부들에게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만항재에 목장을 만든 것
하지만 목장은 실패하고 허허벌판이 되었다
지금도 천상의 화원에는 당시 소들의 사료로 쓰인 작물이 눈에 띈다고 한다
낙엽송이 이렇게 군락을 이루게 된 이유는 목장이 문을 닫은 후
고심 끝에 탄광에 쓰일 갱목으로 사용 가능한 낙엽송을 대규모로 심었기 때문
야생화도 시들어 가는 요즘 이곳 만항재를 찿는 이들은 오로지 산꾼들 뿐
최근 싸리재 밑으로 두문동터널이 뚫리면서 만항재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만항재에서 올려다 보이는 함백산은
표교차가 불과 240m에 불과해서 그런가 부드럽지만 볼록한 곡선과
젊은 여인의 젓꼭지 같아 보이는 정상의 석탑이 좀 만만해 보이지만
나는 그냥 눈으로 잠시 담아 보다가 두문동재를 향해 다시 흘려 내려가고 있다
두문동터널 입구에서 오른쪽 사잇길로 진입하면
정선과 태백을 잇는 옛 38번국도 두문동재를 오르게 된다
두문동재는 태백사람들이 부르는 명칭이고
건너편 정선사람들은 싸리골재라고 부른다
태백에서 고개를 넘으면 정선 고한 두문동,
정선에서 고개를 넘으면 태백 "추전"(싸리밭),
이는 제천사람들이 충주호를 바득 바득 청풍호라 부르는 동질의 강한 애향심 때문인 듯 싶다
두문동재든 싸라골재든
이제 이고개를 넘는 사람들은 만항재보다 더 뜸해졌다
고개 너머에 남한에서 가장 높은곳(해발 855m)에 자리잡은 추전역
추전역은 석산산업이 최고의 전성기였던 1973년 문을 열어
하루에 약 10톤의 선탄을 처리했지만석탄산업이 급격히 사양화 되면서
급기야 1995년에는 여객취급 업무가 중단되고 현재는 레일크루즈 해랑의 일부코스가 이곳에 정차하는 정도
이제는 자신도 없고,걱정도 되지만 걸어야한다
그래도 다행히 산행 안내 고도표에 고,저, 차이가 별로인걸 위안삼아...출발!!
근데 어멈!!~~
가제 걸음이 불안한데 지난번 A/S 다녀온 스틱이 말썽을 부린다
요번만 어케 사용 해보고 버려야쥐!!
두문동재에서 금대봉까지 예상대로 완만한 오름을 오르는 다섯명
금대봉에서 지금 같이 걷고 있는 남자둘과 여자둘은 오늘 산행목적과 희망 그리고 걷는 코스가 갈라진다
나는 어느쪽을 선택해야 할지 오르면서도 고민할 뿐 마음의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
그렇게 오른 금대봉...두문동재를 사이에 두고
금대봉 은대봉이라는 이름은 신라 선덕왕때 지장율사가
함백산 북서쪽 사면에 정암사를 창건하면서 세운 금탑, 은탑에서 유래된 것이라고도 전해진다
오름은 어느정도 감당할수 있을듯 싶은데 급격한 내리막은 도져히 감당할 자신이 없고
혹여 그들에게 큰 부담을 줄수 있을듯 싶어~~"다녀들 오시게 나는 천천히 예쁜 아줌마들 따라서!!"
남자 하나 여자둘
백두대간 산길중 조용하고 오봇,쾌적한 최고의 코스를 걷는다
원래 목적을 포기한 나와
오늘 예정된 풀코스를 포기했지만 또 다른 목적과 희망을 가지고 걷는 두여인
그렇게 걸으면서 언듯 생각나는 모티브...."삼포로 가는길"
(영화 삼포로가는길 한장면: 백일섭,문숙,김진규)
물론 말했듯이 걷는 지리적 환경은 판이하다
우리는 지금 滿山紅葉 의 부드럽고 폭신한 비단길 같은 산길을 걷고 있고....
"삼포로 가는길"에는 남자둘과 여자 하나가 그들이 살아 온 삶처럼
거칠고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길고 긴 눈길을 걸으며
희망적 메세지를 찿아가는 이야기를 1973년 신동아 9월호에 발표된 황석영의 단편소설
일정한 거처 없이 공사장을 떠돌아 다니는 노동자 "영달"
팔려갔던 술집에서 도망친 작부 "백화"
출소 후 떠돌아 다니다가 고향인 '삼포'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전과자 "정씨"
이 세 사람이 각자의 길을 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하며
노동자 영달과 작부 백화는 서로 호감을 가지지만 결국 헤어지고....
영달과 전과자 정씨는 삼포로 가는 기차 티켓을 사는데
정씨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삼포가 공사판으로 변해버렸다는 이야기에 허탈해하는
가난한 서민들의 애환, 경제개발로 인해 고향을 잃은 이들의 슬픔을 탁월한 솜씨로 그려낸 소설
이런 단순한 위안과 희망은
이미 잎세를 모두 떨궈 버린 멋진고목이 서 있는 수아밭령
지금까지 걸어 온 금대봉에서 수아밭령까지 이어지는 능선을
싸리재 혹은 "불바래기 능선"이라 부르는데 예전 이곳에 살던 화전민들이
산 아래에서 놓은 불을 이 능선에서 맞불을 놓아 진화한데서 유래 된다
수아밭령은 한강 최상류 마을 창죽과
낙동강 최상류 마을인 화전을 잇는 백두대간 사이의 고개라고 한다
인근에 한강 발원지인 검룡소와 용연동굴이 있다는 표지에....가볼까요?~ No!!
화전민 이야기에 지금부터는 걷는 컨셉을 바꾼다
"삼포로 가는길"에서...."바람의 언덕으로 가는길"
바람의언덕으로 가는 마지막 봉우리 비단봉에 서 걸어온 길을 되 돌아본다
함백산 봉우리는 구름에 가려있고 두문동재 넘어 내려오는길과
새로 뚥린 터널이 나란히 내려 달리다 만나 페루의 나스카 그림처럼 기하학적으로 그려 놓았다
발길을 돌리면 이젠 매봉산 능산의 하얀 풍력발전기와
이미 수확이 끝난 고냉지 채소(배추)밭이 가까이 편안하고 넉넉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 편안히 휴식에 들어간
고냉지 채소밭이 만들어진 과정은 그렇게 편안하고 넉넉하지는 않았다
1961년 5월1일 한국합심자활개척단 단원 200명이 강원도 대관령으로 떠났다
단장은 거지왕으로 알려진 "김춘삼"
자활개척단은 개척단은
61년 11월 68명으로 시작해 63년 712명, 64년 1771명으로 규모가 커졌다
이들은 강원도에 오대산과 매봉산에 화전을 근절하기 위해 밭을 개간했고
그가 개간한 당시 오대산 삼정평에 당시 국가재건회의 의장 박정희가 격려차 방문하기도 했다
박정희와 김춘삼의 관계는 매우 특별하고 각별했다
48년 국방경배대에 입대해 상사로 제대한 김춘삼은 박정희 대위 밑에서 군생활을 했었다
박정희 소령이 남로당 프락치사건으로 군사재판을 받을때
김춘삼이 증인으로 출석해 그가 빨갱이 짓을 한적이 없다고 증언해 준 은인관계
김춘삼은 박정희 정권전 자유당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매우 정치 지향적인 인물
1957년 명동 국립극장에서 치러진 "거지 선거"에서
수표교다리의 거지들을 동원한 김두한의 도움으로 거지왕에 등극했고
수만명의 전국의 거지들의 사회적문제로
골치를 앓던 자유당은 이기붕을 이곳에 파견해 그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이런 정치적 후원으로 50년대 전국10여 곳에 전쟁고아를 수용하는
합심원을 만들어 표면적으로는 부랑아 구제사업을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고아원생들의 착취와 중부시장을 중심으로 한 조직폭력 조직이였다
1959년6월25일자 동아일보 기사내용
고아원 합심원의 감찰대원이라는 소년들이 지나가는 시골소년들을
강제로 수용하려다가 이에 불응하자 강금구타하여 경찰에 검거되었다
1960년7월1일자 동아일보
경찰이 두둔해준 합심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다액의 횡령을 저지릴러 전국에 수배된
서울 깡패두목 김춘삼은 수일전 부산을 거쳐 전남광주 방면으로 도피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김춘삼과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의 박정희와는 철저한 공생관계을 이루게된다
가난했던 정부에서 복잡하고 정식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김춘삼은 몸을 던져 해결했고
박정희는 김춘삼의 뒤를 든든히 받혀주는 후원자였는데 그가 학사출신 남윤자여사와 결혼 과정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른다
62년 조선대학교 상대를 졸업한 남윤지씨는 졸업반 시절 거지왕 김춘삼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지프를 타고 조선대 앞을 지나던 김춘삼이 20년 연하의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 납치해 무등산에 보름간 감금했을 정도
남여사의 집에서 딸이 납치된 것을 알고 딸을 구하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박정희의 강력한 후원을 받는 김춘삼에게 공권력은 물론 아무것도 통하지는 않았다
훗날 "왕초"라는 Tv 드라마가 방영된 후 이필재씨와 인터뷰에서
"친정에서 말할수없는 반대를 헀다,아직 면사포를 쓰지 못했다"
납치결혼한게 사실입니까?...
.“기절시키지 않은 이상 ‘강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인연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김춘삼은 자활개척단원에게 국유지를 불하받아 논,밭으로 개간해 나누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폭력과 고된 노동을 견디고 그곳에 정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례로 삽교천 건너 공세리 성당앞에 넓게 펼쳐진 아산 밀두리 갯뻘을 농지로 개간할때
친구 아버지와 일부 당진사람들도 개척단에 참여했지만 그 결과는 그리 좋지 않은걸로 알고있다
81년 여름 군 제대후
서울잠 실의 친구가 초대해 주공아파트 주변 시장에서 술을 마시는데....친구왈~~"제기 김춘삼 지나간다!!"
당시 김춘삼의 주활동 무대가 잠실주변이라 했는데
50대초반의 김춘삼의 왜소한 체격에 놀라~~그가 과연 소문대로 대한민국 암흑계를 들었다 놓는 대표주먹인가??
몇년후...젊은시절 사회생활 적응에 실패하고 은든적 삶을 위하여
익산의 음성나환자들과 몇년간 어울릴때 당사자들한테 직접 들었던 김춘삼의 이야기
70년4월, 대전-전주간 착공한 호남고속도로 공사중
설계대로 대한민국 최대의 나환자촌 왕궁농장을 관통하는 도로공사가 진행되면서
마을이 갈라지는것을 페쇄적인 개념을 가진 나환자들이 반대하면서 목숨을 건 강력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음성나환자들 중에는 흉터로 얼굴이 험하게 뭉그러진 사람들은
대신 빛을 받으러 다니는 굿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는데...."아무리 독한 놈도 구신갈은 문둥이가 지네 집에 들어 눕는데야!!"
그런 그들에게 공권력은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투입된 조직이 김춘삼과 그의 일당들
처절한 싸움이였단다
마지막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음성나환자들은 목숨을 걸고 싸워고 싸워 보았지만
김춘삼의 독기에는 그들도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는 증언에... 아~사람이 어디까지 독해질수 있을까!!
비단봉을 내려오며
마가목의 화려한 단풍에 취했다가 이제 본격적인 바람의 언덕을 향해 걷는다
이 비탈에 넓은 밭을 조성하기 위해서
많은 노동자들이 눈물을 기역하지 못하고 다만 눈에 보이는 이국적 풍경에 마음을 빼았기고 있다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면
이미 고냉지 배추가 수확이 끝나서 황량한 벌판을 걷는듯 싶지만 이걸음도 상당한 매력은 있었다
황량한 벌판에 혹여 밭주인 게을러 보일수도,밭이 척박해 보일수 있는 많은 자갈들
하지만 고냉지 배추밭에는 이 자갈이 필수적인 요소인데....현지인들은 "자갈이 오줌을 한다!!"
고냉지 배추는 보통 6월말에 모종을 한다
그 배추모종이 자갈밭에 뿌리를 내리면 그때부터는 물을 주지않고 저 자갈들이 물 공급을 해결해 준다
한낮의 뜨거운 햇살의 열기로 달궈진 자갈들이 밤에 온도가 급격히 내려가거나
새벽에 수분이 많은 구름이 헐떡거리며 바람의 언덕을 넘어 잠시 쉬는 동안 저 자갈을 히롱하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아내처럼 물이 되어 밭을 적신다
이때부터 배추가 수확되는 9월중순까지
이 비탈 언덕을 거어 다닌다 해서 불리는 비탈댁 으로 불리는 아줌마들의 활약이 시작된다
비탈의 자갈들이 주는 오줌을 제대로 받으려면
공기와 구름이 자갈과 제대로 사랑하도록 잡초도 뽑아주고 배추벌레와 달팽이 잡아내는 중요한 역활
고냉지 배추의 성장하기 가장 좋은 온도는 22-23도
활착기가 지나 비가 잦거나 온도가 높아지면 배추무름병이 발생한다
결국 고냉지배추 농사의 성패는 결국 하늘이 결정하는 셈인데
우리가 오르는 바람의 언덕 초입에 많은 비에 자갈밭이 깊게 쓸려나간 부분이 눈에 띄어
배추의 수확시기에 집중호우로 고통을 겪었을 기상조건을 되돌아 볼수 있었다
삼복더위가 지나가는 8월 중순이면
이곳의 밤온도는 10도 정도로 내려간다 이젠 수확철이 다가오는셈
9월이면 본격적인 수확이 시작되는데 이때의 기상조건이 가장 중요하다
비가 내리면 무름병이 생겨 배추가 무너지고,수확을 안하고 놔두면 늙고, 쇠져 상품가치는 떨어진다
상품성이 좋은 배추는 3개들이 망으로 포장되는데
한망에 10Kg정도가 상품이고 상품성이 떨어지는 배추는 쌈배추용으로 출하를 한다
원래 이 바람의 언덕이나 고냉지 밭의 개간의 목적은
산 깊숙이 곳곳에서 산림을 황폐화 지키는 화전민을 이주시켜 그들이 산속에서 하던대로 농사를 지었던 걸
80년대에 들어서 이곳 환경과 조건이 배추성장에 가장 좋은곳으로 확인되면서 이제는 모두.. 배추!배추!! 고냉지배추!!!
그러나 급격한 기후변화로 아열대화로 진행되면서 이곳의 기후조건도 급격히 변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해피700이라 해서 해발 700m이상이면
삼복에도 열대야는 물론이고 모기도 없어 사람이 생활하기에 가장좋은 장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해발 1000m가 넘는 이곳에도 올 여름 평균기온이 28도로 올라갔고
모종시기에는 극심했던 가뭄이에 뿌리가 활착을 못해 심한 몸살을 앓았고
수확기에는 집중호우로 배추가 맥없이 무너져 평년의 1/3 정도 밖에 수확을 하지 못했다
기후변화가 이대로 진행된다면 예상보다 빠른 시간내 이곳에 재배될 작물이 또 바뀔지도 모른다
매봉산&바람의 언덕 표시석에 선다
초록평야가 아닌 허허 발판이 좀 서운하고, 턱트인 一望無際는 통쾌하지만
"바람의 언덕"이 허명이 아니라는듯 이곳에 오는동안 느끼지 못했던 서늘한 바람이 몸을 시리게 만든다
의규친구와 나연씬 어디갔나? 엿장수아씨 그리고 누구랑 같이 있었다면
크~~^^ 한잔!!의 힘으로 이정도 바람쯤은 감미로운 미풍으로 받아 넘겼을텐데......
3년 전까지 매봉산 언덕에서 배추농사를 지었다는 삼수령 휴계소 아줌마의 맨트
"그 배추속 매봉산언덕에서 뜯어 왔지요??...."먹지 마세요! 지금 배추밭은 잡초가 못 나도록 제초제를 그냥~~"
첫댓글 형님 상세하게 설명까지
재밋게 읽고 멋진사진
덤으로 잘보고 갑니다요^^
재밋게 읽었다니 제가 고맙지요 ㅛ
역시 맛갈나는 산행후기입니다.
몰랐던 역사공부에다 산행때 지나온길이 생생합니다.
구수한 입담으로 듣는 듯한 후기 잘 보고 갑니다....
덕분에 항상 산행을 즐기고 있습니다...탱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