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본 문 / 요한복음 12장 46절
주 제 / 그리스도인은 빛 가운데 거하면서 빛의 자녀다운 열매를 맺어야 한다.
작성일 / 2022년 12월 4일. 대림절둘째주일. (№ 22-49)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 12:46)
Ⅰ 빛이 없는 세상 (창 1:2; 렘 4:23∼24)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창조하신 것은 ‘빛’이다. 하나님은 그 빛을 보고 기뻐하셨다(창 1:3∼4). 왜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셨고, 왜 그 빛을 기뻐하셨을까? 빛이 없는 세상은 너무 참혹했기 때문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창 1:2a). 빛이 없는 세상은 ‘무질서한 세상’, ‘텅 빈 세상’, ‘캄캄한 세상’이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셨다. 그 빛으로 인하여 질서가 생기고, 채워지고, 밝아지니 기뻐하셨던 것이다.
‘빛이 창조되기 전의 세상’, 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세상’을 누가 보았을까? 인간이 창조되기 전의 상황이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우리는 그저 말씀을 통해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예레미야’이다. 예레미야 4장 23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렘 4:23) 예레미야는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에서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세상’, ‘빛이 없는 세상’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멸망한 예루살렘’을 본 것이다. 예레미야의 눈에 멸망한 예루살렘은 빛이 창조되기 전의 세상과 같았다. 도시 전체가 혼란에 빠졌고, 다 무너져 텅 비었고,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 예레미야는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한다. 예레미야 4장 22절이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렘 4:22).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악을 행하는 자리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게 만들었고, 선을 행하는 자리에서는 미련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예루살렘 멸망’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어리석음이 불러온 비극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시대의 이스라엘이 그러했다. 로마지배를 받는 어려운 상황에서 지도자라 하는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이 ‘오염된 율법’으로 백성들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로 만들었다. 그래서 혼돈했고, 공허했고, 어두웠다.
Ⅱ 빛으로 오신 예수 (요 12:46)
그런데 예루살렘의 비극을 목도한 ‘예레미야’는 이렇게 기도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악을 행하는 길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선을 행하는 자리에서는 미련함의 극치를 보인 예루살렘이 결국 지옥처럼 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은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비록 지옥 같지만 하나님의 성품이 인자하시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희망의 기도를 올린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가 메시아를 예언했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사 42:3). 장차오실 메시아는 결코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신다고 예언했다. 인자와 긍휼이 풍부하신 하나님의 성품으로 오시기 때문에 혼돈하고, 공허하고, 어두운 우리의 삶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질서 있고, 알차며, 밝은 삶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예레미야’와 ‘이사야’의 주장이 옳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 혼돈하고 공허하고 어두운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빛으로 오셨다. “왜 이렇게 망가졌니?” 책망하려고 오신 것 아니다. 불쌍히 여겨 치료하시려고, 회복시키려고 빛으로 오셨다.
그런데 막상 빛이 나타나자 모두가 그 빛을 환영한 것은 아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악행이 들어날까 하여 빛을 미워했다(요 3:20). 치료받을 의사가 없는 사람들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럼 누가 그 빛을 환영할까?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요 3:21).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 속한 삶이었음을 나타내려고 빛을 환영한다. 이 사람들은 어두운 세상에서 살고 있었으나, 어둠에 동화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혹시 잘못된 일이 있으면 회개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어둠에 살고 있지만, 어둠에 동화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빛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 세상이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롯의 아내가 소돔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구원의 길에서 소금기둥이 된 것처럼, 저도 어두운 세상에 익숙해질까 두렵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밝히 비추소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대림절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다.
Ⅲ 빛의 자녀들을 향한 권면 (엡 5:8∼9; 요일 2:9∼11)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은 ‘대림절신앙’을 가진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이 있다. 에베소서 5장 8∼9절을 보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8∼9). ‘어둠’으로 살다가 예수 믿고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 빛의 자녀답게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럼 빛의 열매란 무엇일까?
첫째, ‘착함’이 빛의 열매이다. 어둠의 특징은 ‘악함’이다. 속이고, 빼앗고, 죽인다. 반면 빛의 특징은 ‘착함’이다. 투명하고, 봉사하고, 살린다. 전에는 악하게 살았더라도,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권면이다.
둘째, ‘의로움’이 빛의 열매이다. 어둠의 특징은 ‘불의’이다. 자기만 이익 되게 한다. 반면 빛의 특징은 ‘정의’이다. 함께 잘되게 한다. 전에는 불의하게 살았더라도,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권면이다.
셋째, ‘진실함’이 빛의 열매이다. ‘어둠’의 특징은 ‘거짓’이다. 비밀이 많다. 함정이 많다. 반면 빛의 특징은 ‘진실’이다. 전에는 감추고 속이며 살았을지라도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 진실하게 투명하게 살아야 한다는 권면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빛의 자녀답게 빛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라고 권면한다. 착하게, 정의롭게, 진실하게 살라고 권면한다. 그것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도 대림절신앙으로 사는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이 있다. 요한일서 2장 9∼11절을 보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 2:9∼11). “나는 빛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부하는 사람이 만약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어둠에 있으면서도 왜 빛 가운데 있다고 생각할까? “…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어둠은 자기 자신까지도 볼 수 없게 만든다. 착하지 않는데 착한 사람이라 생각하게 한다. 정의롭지 않는데 정의로운 사람이라 생각하게 한다. 진실하지 않은데 진실한 사람이라 생각하게 한다. 형제를 미워하는데 ‘빛에 속한 사람’이라 생각하게 한다. 어둠은 자기 자신을 볼 수 없게, 하나님을 볼 수 없게 우리의 눈을 가린다. 분별력이 없게 만든다. 착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어두운 세상을 살면서도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하나 간수하기 힘든데, 형제의 아픔을 걱정하는 사람, 그래서 형제의 아픈 상처를 끌어안고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가 타고 온 나귀에 아픈 형제를 태워 서 치료한 곳으로 데려간다. 자기 돈 들여 치료한다. 사도 요한은 바로 그런 사람은 ‘빛의 자녀’인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형제사랑이 빛의 열매란 뜻이다.
Ⅳ 빛으로 오신 목적에 응답하자. (요 12:46)
오늘의 본문을 다시 읽자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다. 그 목적은 저와 여러분을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고, 질서 있는 인생을 살게 하려고, 알찬 인생을 살게 하려고, 밝은 인생을 살게 하려고 빛으로 오셨다. 우리가 어둠의 자식이 아니라, 빛의 자녀인 것을 자각하게 하려고 빛으로 오셨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악하고, 불의하고, 거짓투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둠의 자식이 아니다. 빛의 자녀이다. 빛의 자녀답게 착하고 정의롭게 투명하게 살면서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빛의 열매’가 풍성한 삶이 된다. 2022년 대림절에는 자신이 ‘빛의 자녀’임을 재차 확인하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우리 영광교회 성도들에게 대림절신앙을 주소서, 빛의 자녀임을 자각하고, 빛의 자녀답게 빛의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