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마태 25,1-13
지구는 두 운동을 병행한다. 하나는 ‘자기 안’의 축으로 홀로 회전하는 ‘자전’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밖’(태양)의 축으로 각기 궤도를 유지하는 타 행성과 함께 회전하는 ‘공전’이다. 우주 질서의 일부인 자전과 공전은 인간 사회에 투영될 수 있다. 군집으로 본래의 취약성을 타개하는 생명체에 속한 인류는 위계·서열로 무리를 이루는 타 동물과 달리 특정 가치·이념으로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역사를 형성해 왔다. ‘혼자 살기’(자생)보다 효율적인 ‘함께 살기’(공생)는 협업·분업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난제들과 직면한다.
가족·이웃·동료와 함께 살다가 배우자·자녀로부터도 단절된 채 생을 마감하는 인간은 ‘결국에 혼자’ 혹은 ‘그래도 함께’를 종종 실감한다. 혼자이기에 안정·자유를 누리면서도 불안·불편을 해소하려는 이는 ‘혼자 살아도 의존한다.’ 함께이기에 기쁨·행복을 맛보면서도 슬픔·불행을 회피하려는 이는 ‘함께 살아도 고독하다.’ 누구·무엇과 함께 있어야 외로움·두려움에 휘둘리지 않는 ‘혼자 있기’(자존)가, 누구·무엇으로부터 혼자 있어야 상처·증오에 흔들리지 않는 ‘함께 있기’(공존)가 가능하다. 상반된 생활 양식인 ‘혼자 살기’와 ‘함께 살기’가 자전과 공전처럼 동시적 연결 고리를 구성한다는 점은 ‘삶의 역설’ 중 하나다.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는 ‘혼자 있기’와 ‘함께 있기’의 중용을 묘사한다. ‘기름 없는 등을 가진’(어리석은) 처녀들은 ‘기름 있는 등을 가진’(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간청한다.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마태 25,8) 슬기로운 처녀들은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마태 25,9) 상황을 간파하는 “예지”(지혜 6,15)를 발휘한다. ‘혼자 살기를 배제한 함께 살기’는 무조건적 배려와 희생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지만, ‘혼자 살기를 병립한 함께 살기’는 타인이 대신 채워줄 수 없는 ‘등의 기름’(자기 몫)을 숙고한다.
‘세례받은 이들과 함께 있기’(교회)의 구성원 중 평신도에 대한 전통적 정의는 ‘성품의 구성원(성직자) 혹은 서원의 구성원(수도자)이 아닌 신자’라는 부정형(∼아니다) 진술이다. 평신도의 품위를 최초로 정립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 31항은 긍정형(∼이다) 진술을 통해 평신도를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에 자기 나름대로 참여하는 자; 자기 몫을 교회와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규정하고, ‘나름과 몫’으로 “세속적 성격”을 부각한다. 곧 평신도의 특성화 분야는 신앙 증거의 장소인 ‘세상’(가정·사회)이다.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는 어원상 ‘세례받은 이들과 함께 걷기’를 의미한다. 교회사에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평신도와 ‘함께 걷기’는 ‘성직자·수도자가 아닌 이들을 향한 특권 부여’가 아니라 ‘성직자·수도자보다 세상에 특화된 이들의 혼자 걷기’로부터 시작되고 완성된다.
“홀로 주님”(이사 37,20)은 성부·성자·성령의 ‘함께 주님’이며, 그 역도 성립한다. ‘혼자 있는 인간’은 ‘함께 있는 인간’이며, 그 역도 성립한다. ‘세상 안에 던져진 단독자’라는 자의식은 다음과 같은 신앙 고백을 도출한다.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 4,17)
출처: 가톨릭평화신문
상해한인성당/KMI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