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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군(府君)의 휘(諱)는 수광(睟光),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이시다. 우리 이씨(李氏)는 태종(太宗) 공정대왕(恭定大王)의 아들 경녕군(敬寧君)에게서 나왔는데, 경녕군의 시호는 제간공(齊簡公), 휘는 비(
)이시다. 이분이 바로 부군의 오대조이시다. 부군의 고조(高祖) 휘 직(稙)은 모양군(牟陽君), 증조(曾祖) 휘 승손(承孫)은 선사군(仙槎君), 조부(祖父) 휘 유(𥙿)는 하동군(河東君)이시다.
부군의 선고(先考) 휘 희검(希儉)은 계부(季父) 신당군(神堂君) 정(禎)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 분의 후사(後嗣)가 되셨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종적(宗籍)에 기록된 사람들로서 봉호를 받다가, 공에 이르러 비로소 과거를 통해 현달하였다. 충성을 다해 명종(明宗)과 선조(宣祖)를 섬겨 내외(內外)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셨다. 머지않아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를 것 같았는데,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경연사(兵曹判書兼知經筵事)의 관직에 있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이후 부군께서 여러 차례 종훈(從勳)에 참여하였으므로, 두 차례 증직되어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에 이르고, 겸관(兼官)은 실직(實職)과 같게 하였다. 선비(先妣)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다. 어질고 아름다우며 순수하고 명석하였으며,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으셨다.
판서공(判書公 이희검)께서 일찍이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권세 있는 신하의 횡행(橫行)을 말했다가 장단 부사(長湍府使)로 좌천되셨다. 그러므로 부군께서 장단의 관아(官衙)에서 태어나셨으니, 가정(嘉靖) 계해년(1563, 명종18) 2월 22일 임신(壬申) 축시(丑時)의 일이었다. 처음에 대부인(大夫人 이수광의 어머니)께서 흑룡이 꿈틀대는 꿈을 여러 차례 꾸셨는데, 만삭 때까지 점차 커지더니 부군이 태어나셨다.
부군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이 있어서 다른 아이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또랑또랑하셨다.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성실함을 스스로 지녀, 장난하는 일이 없었다. 다섯 살에 가학(家學)에 나아가 공부하셨다. 판서공은 당시 이미 연세가 높아, 특별히 어여삐 여기실 뿐 일찍이 엄하게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러나 부군께서는 총명하고 잘 기억하여 본래 익힌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처음 글을 지을 줄 알게 되자, 입을 열어 말을 만들면 말마다 정교하고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하루는 판서공께서 눈을 소재로 시를 짓게 하셨다. 부군께서 지은 시에 “뜰 앞에 달 떠 있는데 소나무 그림자 없고, 난간 밖에 바람 불지 않는데 대나무에서 소리 나네.”라는 구가 있었다. 이 시구를 보는 사람들마다 경탄(驚歎)하며 사씨(謝氏)의 집안에도 없었던 일이라고 하였다.
13세에 사서 이경(四書二經)에 통달하셨다. 14세에 국학(國學)에 나아가 공부하였는데, 시관(試官)이 크게 칭찬하자 화려한 명성이 더욱 널리 퍼졌으며, 와서 붙좇는 벗들이 날로 많아졌다. 16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셨다.
기묘년(1579, 선조12) 봄에 판서공께서 돌아가셨다. 부군께서는 어린 나이에 상을 당하였고, 예제(禮制)보다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건강을 잃어 원기가 쇠약해졌으니, 마침내 고질병의 근원이 되었다.
신사년(1581)에 상기(喪期)를 마치고, 생원 초시에 합격하셨다. 부군께서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부지런히 공부하여 자립하지 못하면 선대의 유업을 이어 드날려 대부인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 없었으므로, 굳은 각오로 학문에 힘쓰셨다. 매번 글을 읽을 때마다 한밤중까지 그치지 않았으며 뒷간에서도 글 읽는 소리가 들렸으니, 부엌에서 밥 짓는 여종도 부군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때때로 시서(詩書)의 글을 욀 정도였다. 사찰에서 상주(常住)하며 열심히 공부하느라 집에 오지 못하신 적도 있었다. 당시 이율곡(李栗谷)이 문병(文柄)을 잡아 평가 수준이 매우 높았는데, 부군의 시문을 보고 칭찬해 마지않으면서 장원감이라고 인정해 주었다. 임오년(1582, 선조15)에 마침내 진사시에 급제하셨다. 을유년(1585) 10월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셨다.
병술년(1586)에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선보(選補)되셨다. 무자년(1588)에 임금께서 중국어를 익힌 사람을 뽑아 궁궐에 들어오게 하여 시험하셨다. 부군께서 수석을 차지하여 임금께서 내려 주신 말을 받으셨다. 가을에 전례대로 승진하여 정자(正字)에 이르렀다. 겨울에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천거되어 임명되셨다. 부군께서는 본래 명망이 높으셨는데, 함께 벼슬길에 진출한 사람들에게 시기를 받아,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국(史局)에 들어가셨으니, 말하는 사람들이 늦었다고 여겼다.
기축년(1589, 선조22)에 대교(待敎)로 옮기셨다. 가을에 어떤 일 때문에 파직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봉교(奉敎)로 서용(敍用)되셨다.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동료 관리들이 많이 관련되었기 때문에, 부군께서 혼자 사직(史職)을 맡아 밤새 붓을 잡았으므로 손에 동상이 걸렸다.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하고, 얼마 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옮기셨다.
경인년(1590)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호조와 병조의 좌랑(佐郞) 겸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셨다. 여름에 성절사 서장관(聖節使書狀官)에 차임(差任)되어 연경에 가게 되었으므로, 병조 좌랑에서 체직되어 전적(典籍)에 임명되셨다. 겨울에 일을 마치고 귀국하여 곧바로 황해 도사(黃海都事)로 나갔고, 광국 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및 평난(平難) 원종공신에 책록(策錄)되셨다.
신묘년(1591, 선조24)에 모친(母親)의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내직으로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서임(敍任)되었고, 정언(正言)으로 옮겼다가 호조(戶曹)로 체직되셨다. 정과(程課)의 성적이 뛰어났으므로, 특별히 표범 가죽을 하사받으셨다. 6월에 홍문관(弘文館)에 뽑혀 들어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옮기셨다. 10월에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임명되셨다. 처음에 사론(士論)이 전형(銓衡)을 담당한 자리를 중시하고 끼리끼리 도와 이끌어주었다. 그러나 부군께서는 엄숙한 태도로 조정에 나가고, 공무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자취를 감추어 일찍이 명함을 들고 남들을 찾아다니지 않으셨다. 백사(白沙) 이공(李公)이 대단히 탄복하여 말하기를 “요즘 세상의 선비 가운데 요직에 마음을 두지 않고서도 전랑(銓郞)에 오른 사람은 이모(李某)뿐이다.”라고 하였다. 정도(正道)를 지키며 화평하고 단아한 지조는 신진(新進) 때부터 이미 그러하셨다. 얼마 후 어떤 일로 파직되었으나, 곧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서용되었고, 다시 이조 좌랑이 되셨다.
임진년(1592)에 또 어떤 일로 인해 파직되었다가, 서반직(西班職)에 서용되어 부사직(副司直)이 되셨다. 4월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온 나라가 크게 술렁였다. 경상 우도 방어사(慶尙右道防禦使) 조경(趙儆)이 부군을 종사관으로 삼았다. 당시 제사(諸使)의 막좌(幕佐)들은 모두 한 시대의 지극히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방어사 조경 공은 부군과 같은 고을 사람으로, 이미 부군을 사모하여 함께 일하자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군이 독자로 형제가 없는 데다가, 대부인마저 늙고 병든 몸으로 집에 계신 사정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으므로, 부군에게 종군법(從軍法)에 따라 스스로 면직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부군께서는 평소 임금의 녹을 먹었으니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국가가 갑자기 곤경에 처했는데, 어찌 편안함을 꾀하여 위험을 피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곧바로 대부인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말을 달려 김산(金山)에 도착해 보니,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군대가 상주(尙州)에서 패하여 군사들이 모두 도망쳤으므로, 이미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부군께서 방어사(防禦使)를 따라 여러 차례 칼날이 번득이고 화살이 빗발치는 전장(戰場)을 만나 전후(前後)로 교전하면서도 일찍이 대열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는데, 그때마다 천행(天幸)으로 죽음을 면하셨다.
비로소 조정에서 부군을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서용하였는데, 부군께서는 한참 뒤에야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播遷)하였고, 대부인께서 병란을 피해 북쪽으로 가셨으며, 방어사가 호남(湖南)의 관군(官軍)과 진(陣)을 합하였으나 용인(龍仁)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들으셨다. 부군께서는 전장에 홀로 남아 임금과 어머니와 길이 막혔으므로 마음이 매우 심란하였다. 그러나 또 대의(大義)로 결단하여 필마를 타고 달려가 임금을 문안하였는데, 유혈이 낭자한 길을 이리저리 다니며 온갖 고생을 하셨다.
8월에 성천(成川)에서 세자를 뵈었다. 그 길로 용만(龍灣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 갔는데, 곧바로 홍문관부교리 겸 비국랑(弘文館副校理備局郞)에 임명되셨다. 9월에 상소하여 사정을 아뢰고 노모의 생사를 알아보게 해 달라고 청하셨다. 임금께서 하교하시기를 “함경도 전체가 변란 이후로 소식이 끊겼으니, 이모(李某)를 사호(使號)로 충당하여 들여보내, 나의 덕의(德意)를 선유(宣諭)하고 겸하여 함경도의 사정을 살펴보게 하라.”라고 하셨다. 이에 선유 어사(宣諭御史)로 차임되어 고개를 넘어 명천(明川)에 이르러 대부인이 계신 곳을 알게 되셨다.
이때 함관령(咸關嶺) 이북은 간사한 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곳곳마다 적을 후대하고, 두 왕자 및 재신(宰臣)과 관속(官屬)들을 구속하였으며, 장리(將吏)들을 죽이고 성읍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정절(情節)을 의심하여 가로막으니, 길을 다니기가 어려웠다. 부군께서 역말을 타고 군중(軍中)으로 들어가 격문(檄文)을 지어 군신(君臣), 역순(逆順), 화복(禍福), 이해(利害)의 도리를 가지고 깨우치셨는데, 간절하고 조리가 있어서 반측(反側)한 자들로 하여금 마음을 고쳐먹게 하시자, 듣는 자들이 씻은 듯이 경도되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였다. 이에 의병들이 더욱 떨쳐 일어나고 여러 성들이 향응(響應)하여 관북 일로(一路)가 마침내 무사하였으니, 이것은 부군의 힘이었다.
계사년(1593, 선조26) 정월(正月)에 복명(復命)하셨다. 사헌부 지평과 홍문관 교리에 세 번 임명되었고, 병조 정랑(兵曹正郞)과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에 한 번 임명되셨다. 옛 제도에 대관(臺官)은 비국랑(備局郞)을 겸할 수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신(大臣)들이 변란 후 절개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마땅히 표양(表揚)해야 한다며 부군에게 찬집(撰集)을 맡기자, 부군께서 대직(臺職)을 맡게 될 때마다 그대로 맡은 일을 마무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셨다. 여름에 병 때문에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로 옮기고, 병조 정랑과 홍문관 교리를 역임하셨다. 가을에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과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어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하셨다. 얼마 뒤에 집의(執義)로 승진하자, 시대가 중흥을 향해 가므로 일을 잘 진행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어야지, 임시변통하거나 세월만 보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차자를 올려 조목별로 열 가지의 폐단을 지적하니, 임금께서 넉넉한 비답(批答)을 내리셨다.
11월에 어가(御駕)를 따라 도성으로 돌아오셨다. 당시 여러 가지 일들이 혼란스럽고 어수선하여 사령(辭令)이 답지하였는데, 안으로는 군민(軍民)을 교유(敎諭)하는 일로부터 밖으로는 자게(咨揭)에 응하는 일까지 창졸간에 곧바로 이루어진 것은 대부분 부군 덕분이었다. 12월에 비국(備局)에서 이전에 맡았던, 절의를 지키다 죽은 사람들을 표양하기 위하여 찬집(撰集)한 것이 모두 네 권의 책으로 완성되었는데, 중국 사신이 때마침 이르렀다가 그것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갑오년(1594, 선조27) 봄에 역적 송유진(宋儒眞)이 처형되었는데, 부군께서 수개월 동안 국문(鞠問)에 참여하였으므로, 구마(廏馬)와 각궁(角弓)을 하사받으셨다. 6월에 승선(承宣)의 자리가 비자, 특명으로 자급(資級)이 기준에 미달한 사람도 함께 의망(擬望)하게 하였다. 이에 부군께서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초배(超拜)되셨으니, 대개 이전에 없었던 일이다. 겨울에 순서에 따라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가, 체직되어 대호군(大護軍)에 임명되었고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했는데, 이때부터 항상 이 직책을 겸하여 해임되지 않으셨다.
을미년(1595, 선조28)에 우승지(右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후 체직되어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옮기셨다. 2월에 대부인의 상을 당하여 슬픔과 예법을 두루 지극히 하였고, 부신(附身) 이후에는 성신(誠信)을 다하여, 상란(喪亂)과 어려운 상황을 이유로 서운함이 있지 않게 하셨다.
정유년(1597) 4월에 상을 마치고 우승지에 임명되었다가, 병 때문에 호군(護軍)으로 체직되셨다. 5월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셨다. 당시에 왜구가 다시 침략하자, 명나라 장수 양원(楊原)이 남원(南原)에 진을 쳤다. 부군께서 분호조 참의(分戶曹參議)로 차임(差任)되어 향도(餉道 군량을 운반하는 길)를 관리하게 되었으므로, 그날 곧바로 임금께 작별 인사를 드렸다. 그러나 상을 치르느라 야윈 부군의 몸이 회복되지 않은 것을 임금께서 살피시고 특명으로 보내지 말라고 하셨다. 가을에 황극전(皇極殿)에 화재가 일어났으므로, 진위사(進慰使)가 되어 연경에 가셨다.
무술년(1598, 선조32) 봄에 조정으로 돌아와 우승지, 예조 참의(禮曹參議), 좌승지(左承旨)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체직되셨다. 겨울에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거쳐 좌승지에 임명되고, 얼마 뒤에 체직되어 병조(兵曹)로 돌아오셨다.
기해년(1599) 정월에 다시 좌승지가 되었다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체직되셨다. 가을에 병조에서 다시 좌승지로 돌아왔다가 체직되어 대호군이 되셨다. 12월에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셨다. 당시 고관들이 알력이 심하여 서로 어지러이 배격하였는데, 이미 서애(西厓) 유 상공(柳相公)을 내쫓고, 아울러 완평(完平) 이공(李公)까지 자리를 불안하게 여겼다. 그러자 부군께서 병을 핑계로 스스로 면직하고, 또한 조정의 큰 혼란을 언급하셨다. 이에 시류를 따르는 무리들이 떠들어대어 거의 탄핵을 면하지 못할 상황이었는데, 체직되어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셨다.
경자년(1600) 봄에 병조 참의와 대사성을 역임하셨다. 5월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임명되셨다. 조정의 논의는 더욱 분열되어, 헌납(獻納) 이이첨(李爾瞻)이 떼를 지어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퍼뜨리고 온갖 계책으로 부군을 흔들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심지어 무명(無名)으로 투서하여 겁박하고 모함하였다. 부군께서는 동요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 사직을 고하면서 “훌륭한 재상이 조정을 떠났으니, 국사가 날로 잘못되고 있습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체직되셨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 두 번 병조 참의에 임명되셨다.
신축년(1601, 선조34) 정월에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題學)에 임명되어 《고문주역(古文周易)》을 교정하여 올리자, 임금께서 구마(廐馬)를 하사하셨다. 2월에 체직되어 대사성에 임명되셨다. 전란 뒤에 문묘(文廟)를 처음 세우고 비로소 중건(重建)할 것을 청하여 중상(中庠)과 강사(講舍)가 차례로 완성되었다. 6월에 병조 참의로 옮기셨다. 당시 제주(濟州)의 역적 길운절(吉云節)을 죽이고, 임금께서 어사(御史)를 보내 안무(安撫)하려고 곧바로 옥당에 명하여 교서(敎書)를 작성하게 하셨는데, 여러 학사(學士)들이 이를 크게 어렵게 여긴 나머지 오래도록 글을 짓지 못하였다. 마침내 부군에게 교서를 기초하게 하셨는데, 글이 완성되자 한 자도 정정할 것이 없었으니, 여러 학사들이 마침내 크게 탄복하였다. 겨울에 황태자(皇太子)를 책봉하는 예식이 끝나고 조사(詔使)가 장차 우리나라에 오게 되자, 부군께서 도사 영위사(都司迎慰使)에 뽑히셨으니, 실로 문한(文翰) 중에서도 매우 신중하게 선발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평양(平壤)에 도착했을 때 말에서 떨어져 병이 중해지자, 체직되어 호군에 임명되셨다.
임인년(1602, 선조35) 봄과 여름에 두 번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체직되셨다. 5월에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어 여러 유생들과 함께 《주역언해(周易諺解)》를 교정(校正)하셨다. 책이 완성되자 임금께서 구마(廐馬)를 하사하셨다. 선조(宣祖)께서 계비(繼妃)를 책봉하시는데, 예(禮)가 대부분 간략하고 질박하였다. 부군께서 차자(箚子)를 올리셨으니,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혼례는 두 성씨의 좋음을 합하여, 위로는 종묘(宗廟)를 받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사당을 알현한 후에야 부도(婦道)가 이루어진다고 여겼으니, 혼례의 중요함이 이와 같습니다. 지금 육례(六禮)를 이미 행하고 의문(儀文)도 빠짐없이 갖추어졌는데, 사당을 알현하는 중대한 예만 빠뜨리고 강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오례의(五禮儀)》에 기록되지 않아서 경솔하게 행하기 어렵다고 하신다면, 친영(親迎)의 예 또한 《오례의》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묘조(中廟朝)에 이르러 처음 시행되었고, 마침내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전범(典範)이 되었습니다. 하물며 사당에 알현하는 하나의 절차는 혼례에서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고례(古禮)를 상고하고 《회전(會典)》을 참고하여 역대 제왕들이 모두 행하였습니다. 어찌 근대에 행할 겨를이 없었던 법이며, 《오례의》에 기록되지 않은 글이라고 핑계를 대어 행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임금의 비답(批答)이 있었다. 겨울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가 호군으로 체직되셨다.
계묘년(1603, 선조36) 6월에 병조 참의를 거쳐 부제학에 임명되어 《사기찬(史記纂)》을 교정하여 올리자, 임금께서 또 구마(廐馬)를 하사하셨다. 가을에 이조 참의에 임명되셨다.
갑진년(1604) 여름에 체직되어 병조 참의와 대사성이 되고, 호성 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책록되셨다. 이에 앞서 요직에 있는 어떤 사람이 조정의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기를 좋아하여 자기와 견해가 다른 사람을 배척하였다. 부군께서 인사행정을 맡으셨을 때, 사류(士流) 3인을 대각(臺閣)에 의망(擬望)한 일로 탄핵의 논의가 일어났다. 그리고 당시 재상에게 본래 무뢰한이었던 조카가 있었는데, 재상이 갑자기 그 조카를 요직에 앉히려고 하다가 부군에게 제지당하자, 미워하는 마음이 쌓였다. 또 당시 마침 선묘(宣廟)께서 장차 존호(尊號)를 받으려고 하였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모두 상청(上請)하였는데, 부군만 홀로 하지 않으셨다. 이런 일로 말미암아 조정에 있기가 더욱 불안하게 되자,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안변 부사(安邊府使)가 되어 을사년(1605, 선조38) 봄에 임지에 도착하셨다.
이 해 여름에 가뭄이 들자 부군께서 친히 제문을 지어 비가 내리기를 기도하니, 그 날로 단비가 내렸다. 부지(府地)에 예전에는 연꽃이 없었는데,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이곳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연못을 파고 연뿌리를 심었었다. 중간에 황폐한 채로 또 수십 년이 흘렀는데, 이때에 와서 다시 연꽃이 피기 시작하자 부로(父老)들이 모두 감탄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가을에 관외(關外)에 홍수가 나서 민가(民家)가 무너지고 전답은 거의 다 물에 떠내려갔으며, 외로이 살아남은 백성과 굶어 죽은 시체가 눈앞에 넘쳤다. 또한 그 이전 해부터 북쪽 오랑캐가 변방의 관문에 함부로 들어와 징발(徵發)이 많아지고, 군사를 뽑고 군량을 조달하느라 밤낮으로 겨를이 없었다. 부군께서 이런 일들을 잘 처리하고 적절히 조절하셨으니, 백성들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고 궁곤(窮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임금께서 특별히 비단 옷의 안감과 겉감을 하사하여 포양(襃揚)하고 가상히 여기셨다. 그러나 부군은 업무에 시달려 병에 걸리고, 또 풍토(風土)에도 민감하셨다. 마침내 병오년(1606, 선조39) 3월에 면직하고 돌아오셨는데, 이전의 서운한 감정들이 그때까지도 남아 있어서 시기와 질투가 특히 심하였다.
정미년(1607) 겨울에 이르러 비로소 홍주 목사(洪州牧使)에 서용되셨다. 홍주에서도 안변(安邊)에서처럼 정사를 펼쳐 청정(淸靜)한 태도로 풍속을 교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셨다. 신 감사(申監司)에게 공문으로 보고한 뒤, 고을의 제생(諸生)들을 향교에 모아 학업에 힘쓰게 하였는데 법도가 있었으므로, 이웃 고을의 학생들까지 많이 모여들었다. 방백(方伯)이 부군의 치적(治蹟)을 상세히 갖추어 임금에게 보고하였으나, 부군께서는 또 병이 심해져서 기유년(1609, 광해군1) 4월에 마침내 관직을 그만두고 떠나셨다. 가을에 첨지중추(僉知中樞)에 서용되었다가 병조 참의로 옮기고, 얼마 뒤에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임명되셨다.
경술년(1610) 6월에 선묘(宣廟)의 부례(祔禮)가 끝나자,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고 예조참판 겸 승문원제조에 임명되셨다. 가을에 잇달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곧바로 사직하고, 체직되어 동지중추(同知中樞)에 임명되셨다. 가을에 광해군(光海君)의 세자 복장이 내려오지 않자, 주청부사(奏請副使)에 뽑혀 8월에 연경으로 가셨다. 부군은 세 차례 중국을 다녀왔는데, 스스로 청백(淸白)한 몸가짐을 견지하여 서적이나 향(香), 약(藥) 같은 물품을 털끝만큼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으셨다. 연경에 계실 때 전후로 안남(安南 베트남), 유구(琉球 오키나와), 섬라(暹羅 태국)의 사신들을 만나셨는데, 번번이 부군께 시문(詩文)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주리(侏離)와 조언(鳥言)을 하는 이들이 몽매하여 아는 것이 없었으나, 또한 공벽(拱璧)을 얻은 것처럼 모두 겹겹이 싸서 소중히 간직하였으니 가지고 가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안남의 사신은 부군의 시문 수십 편을 얻어 가지고 돌아가 자기 나라에 전파하여 집집마다 외우고 읊었는데, 일본을 통하여 끌려간 우리나라 사람 조완벽(趙完璧)에게 자랑하며 말하기를 “너는 너희 나라에 이지봉(李芝峯)이라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가. 이것이 바로 그분의 작품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그가 부군을 대단히 존모하고 숭상하여 일찍이 부군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 조완벽이 그 뒤에 귀국하여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이와 같이 자세히 말해 주었다.
임자년(1612, 광해군4) 5월에 사행에서 돌아오시자, 가의대부(嘉議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가을에 대사성 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대사간, 병조 참판(兵曹參判), 대사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겨울에 부제학에 임명되셨다.
광해군(光海君)이 “경도(京都)는 기운이 쇠하였고, 교하(交河)는 형세가 좋으니, 마땅히 터를 살펴서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는 술사(術士) 이의신(李懿信)의 말에 따라, 갑자기 재신들을 소집하여 의논하게 하니, 인정(人情)이 당황하고 의혹스러워하였다. 부군께서 여러 동료들을 이끌고 차자를 올리셨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풍수지리설은 경전에 보이지 않는데, 후세에 좋지 못한 선례(先例)를 만들었습니다. 그 말은 애매하여 징험할 수 없고 그 술법은 황당하여 근거가 없으니, 이것은 진실로 이치를 아는 군자가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들은 처음에 예조(禮曹)에 의계(議啓)하라는 비답을 내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속으로 전하께서 풍수지리설을 절대 따르고 믿을 이치가 없으므로 반드시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먼저 시비를 의논하게 하고, 뒤에 망언(妄言)한 죄를 의논하실 것이니, 이는 그만둘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서 회의(會議)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는 그의 망언을 처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장차 그 말을 수용하여 정사(政事)에 시행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른바 회의라는 것은 어떤 이는 편리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그렇지 않다고 할 경우에 절충하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의신(李懿信)이 소장에서 한 말은 나라 안의 사람들이 모두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도읍을 옮기는 일은 나라 안의 사람들이 모두 편리하지 않다고 여기니, 편리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논의의 결과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이 수도를 정해줄 때 우리나라에서 으뜸인 곳으로 하였으니, 형세의 빼어남은 진실로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백여 년 동안 인재가 많이 나왔고 민물(民物)까지 풍성하여, 다스림은 융성하고 나라는 태평하였습니다. 만약 술사의 말이 믿을 만하고 징험할 수 있다면, 그들이 말하는 복지(福地)라는 것은 마땅히 이보다 나은 곳이 없을 것입니다. 성스럽고 신령하신 우리 태조께서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대의 임금들에게 전하셨으니, 만대토록 공고(鞏固)하고 빼앗을 수 없는 터전입니다. 종사(宗社)가 여기에 있고 신민(臣民)이 여기에 있는데, 하루아침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리에 어긋나고 망녕된 소견을 따라 가벼이 구업(舊業)을 버리고 떠나간다면, 하늘에 계신 조상의 혼령께서 기꺼이 ‘내게 후손이 있다.’라고 하시겠습니까.
국가가 변고를 겪은 이래 상처가 겨우 아물었고, 종묘와 대궐을 건축하고 수리하느라 백성들도 지쳐서 눈을 흘기며 서로 비방하는 말을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시세(時勢)를 헤아리지 못하고 인심을 거스르면서 황야(荒野) 가운데로 몰아넣어 백성들에게 궁궐 쌓는 수고를 감당하게 한다면, 형세로 볼 때 물고기처럼 놀라고 새처럼 흩어지는 상황이 반드시 닥쳐올 것입니다. 민심은 들끓고 국사는 갈가리 찢길 것이니, 발생할 변고가 장차 말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를까 두렵습니다.”
이처럼 반복하여 수백 글자로 개진하셨는데, 비록 임금께서 곧바로 따르시지는 않았으나 일이 마침내 중단되었다.
당시에 광해군의 생모 김씨(金氏)를 추숭하여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삼고, 중국 조정에 사신을 보내 책명(冊命)을 청하게 하였다. 부군께서 또 차자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집에는 두 존자(尊者)가 없고, 예에는 두 적처(嫡妻)가 없으니, 대경대법(大經大法)이 지극히 엄격하고 지극히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노(魯)나라 은공(隱公)이 중자(仲子)에게 한 일과 희공(僖公)이 성풍(成風)에게 한 일에 대하여 《춘추(春秋)》에서 깊이 비판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선유(先儒)들의 정론(定論)입니다. 노나라의 두 임금이 추후에 천자에게 책명을 요청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그것은 어쩌면 예를 지키고 의를 두려워하여 감히 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사람의 이른바 ‘국중(國中)에서 사칭(私稱)하는 것은 국경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라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세상의 선비들 중에 조금이라도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의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물며 중국 조정에는 정도(正道)를 지키고 예를 아는 군자들이 반드시 많을 것인데, 만약 경의(經義)를 인용하여 엄한 말로 지척(指斥)한다면 손해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니, 장차 되돌릴 수 없는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
당시 광해군이 혼란한 정사를 일삼아 곧은 말 듣기를 싫어하였기 때문에, 대각(臺閣)에 있는 신하들이 주저하며 관망만 할 뿐, 조정의 중대한 의론(議論)을 만나도 먼저 나서서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부군께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반드시 앞장서셨으니, 사림(士林)들이 부군을 정도를 지키는 사람으로 여겼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두 번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숙배(肅拜)하지 않았고,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셨다. 당시에 이이첨(李爾瞻) 등이 사형수(死刑囚)를 사주하여 큰 옥사를 일으키고 광해군을 부추겨 재앙을 키워서, 영창대군(永昌大君)과 국구(國舅)를 죽이고 선왕조(先王朝)의 원로대신들을 내쫓으니, 조정이 텅 비게 되었다. 또 국모를 서궁(西宮)에 유폐하고 장차 존호를 폄하하려고 모의하였다. 부군께서는 의리상 그런 일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으므로,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후 사직하여 체직되셨다. 이후 4년간 산질(散秩)에 있으면서 뜻을 기르는 일에만 충실하셨다. 다만 갑인년(1614, 광해군6) 가을에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하게 되자, 마지못해 조정에 나아가 한 번 사은(謝恩)하셨을 따름이었다.
병진년(1616) 8월에 순천 부사(順天府使)로 나가게 되니, 온갖 덫이 설치되어 있는 것과 같은 조정에서 벗어나 종적을 감추고 은거하듯이 생활하셨다. 현옹(玄翁) 신공(申公)은 당시 추방되어 강외(江外)에 있었는데, 서로 바라보며 탄식하고 비통해하면서 밤새도록 강개한 회포를 나눈 뒤에 길을 떠나셨다. 부임해서는 스스로 솔선수범으로 백성들을 이끌어 일찍이 백성들에게 함부로 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기뻐하여 교화에 따르고 세금을 기한 내에 냈으므로 형벌을 가할 필요가 없었다. 부군 또한 그들의 풍속이 순박하여 쉽게 다스릴 수 있는 것을 기뻐하셨다. 3년이 다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읍사(邑事)를 경영하였는데, 학교와 마을의 일로부터 어염(魚鹽)이나 땔감과 같은 자잘한 일에 이르기까지 처리하고 계획하는 것이 방법이 있었으니, 그것을 글로 써서 영원한 법식(法式)으로 삼았다.
기미년(1619, 광해군11) 봄에 임기가 다하였는데, 고을 사람들이 더 계시기를 바랐지만 그럴 수 없게 되자 커다란 비석을 세워 그리워하는 마음을 부쳤다. 그 뒤 부군의 부고가 이르자 모두 흐느껴 울면서 친상(親喪)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였다고 한다. 돌아온 뒤로는 수원의 시골집에서 지내셨다. 시사(時事)가 날로 더욱 변하여 사나운 재앙의 불꽃이 더욱 성하게 일어났으니, 대상을 지적하여 물색하면 어떤 사람도 벗어날 수 없었다. 부군께서는 근기(近畿)에서 지내면서 멍에 풀고 쉴 곳이 없었으므로, 방안에서 조용히 지내며 한 여름에도 문을 열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집안사람들이 부군의 기침소리만 들었을 뿐 얼굴 뵐 기회가 드물었다. 전후(前後)로 부호군(副護軍), 대사성, 분병조 참판(分兵曹參判), 동지중추부사, 조사영위사(詔使迎慰使)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나가지 않으셨다.
11월이 되자, 광해군이 부군과 최관(崔瓘) 공, 정엽(鄭曄) 공을 거명(擧名)하여 비국(備局)에 하교하기를 “이들은 모두 품계가 높은 재신(宰臣)의 위치에서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다. 그런데 지금 임금이 곤욕을 치르고 있는 때에 신하가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고 교외에서 빈둥거리면서 국가를 위하여 힘쓸 마음이 없으니, 신하의 도리가 과연 이와 같을 수 있는 것인가. 또 대신(大臣)과 대간(臺諫)이 이에 대하여 한마디의 언급도 없으니 대단히 괴이하다. 그들을 무겁게 추고하라.”라고 하였다. 사면되자, 부군께서 소장을 올려 사례하고 병들어 직무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진달하셨다.
임술년(1622, 광해군14) 2월에 또 하교하기를 “정엽과 이수광처럼 품계가 높은 재신들이 일체 출사하지 않으니,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모두 불러들여라.”라고 하였다. 비국에서 계(啓)를 올려 말하기를 “신하가 출사하지 않는 것이 어찌 그들의 본심이겠습니까. 혹은 부모님이 연로하여 집으로 돌아가 봉양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자신이 병들어 물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시의(時議)에 맞지 않아 감히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마땅히 대언(代言)으로 하여금 간절하게 타일러 불러 오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관찰사가 거듭 공문을 보내와 수레를 타고 서울로 가도록 권하니, 그 형세가 매우 급박하여 장차 닥쳐올 재앙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부군의 확고부동한 마음은 더욱 견고해져, 잠시 서울에 갔다가 즉시 돌아오셨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 3월에 금상(今上 인조(仁祖))께서 거의(擧義)하여 반정(反正)하자마자, 곧바로 부군을 도승지로 임명하여 불러들이셨고, 얼마 후에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겸직하셨다. 여름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체직되셨다. 7월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임명되었고, 겨울에 체직되어 공조(工曹)에 임명되셨다.
갑자년(1624) 봄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임금께서 남쪽으로 몽진(蒙塵)하시니, 부군께서 병든 몸을 이끌고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셨다. 환도(還都)한 뒤에 대사간으로 옮기고, 대가를 호종한 공로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임명되셨다. 가을에 대사헌 겸 지춘추관사(大司憲兼知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가, 우참찬(右參贊)으로 옮기셨다. 10월에 왕대비의 옥책문(玉冊文)을 지으셨는데, 특명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고 대사헌에 임명되셨다. 12월에 체직되어 좌참찬 겸 동지경연(左參贊兼同知經筵)에 임명되셨다.
을축년(1625, 인조3)에 대사헌,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셨다. 겨울에 재이(災異)가 발생하자, 임금께서 하교(下敎)하여 해결 방안을 구하셨다. 부군께서 마침 대사헌에 임명되셨는데, 임금께서 등극(登極)하신 지 3년 동안 화란(禍亂)이 거듭 이르는 것은 군신(君臣)과 상하(上下)의 사람들이 한가롭게 지내는 것이 거의 습관이 되어,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잘못되자 천변(天變)이 위에서 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셨다. 이에 차자를 올려 문제의 근원을 지적하셨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사를 형체라고 한다면 천변은 그림자와 같습니다. 하늘에 있는 그림자는 아득하여 징험하기 어렵지만, 사람에게 있는 형체는 분명하여 보기 쉽습니다. 만약 인사의 미진(未盡)한 것으로 말한다면, 정신을 가다듬고 다스림을 도모할 때 전하의 뜻이 간절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행하고 조처하는 사이에 실질적인 조치를 다하지 못하는 점이 있습니다. 직책에 따라 공무를 받들 때에 여러 신하들의 뜻이 정성스럽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받들어 행하는 즈음에 실질적인 정성을 기울이지 못하는 점이 많습니다. 전하와 신하들의 이러한 문제로 인해 공적(功績)도 이루지 못하고 다스림의 효과도 드러나지 않아, 국사(國事)는 날로 흐지부지하게 되고 조정의 기강은 날로 문란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실질적이지 못하다는 한 가지 문제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천하의 사무(事務)가 지극히 광범위하지만 그것을 조종하는 것은 성(誠)이니, 성은 바로 진실입니다. 만약 진실에 힘쓰지 않고 다만 겉치레로 다스리는 공(功)을 억지로 이루려 한다면, 온갖 일들이 모두 허투(虛套)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그림의 떡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뱃전에 새겼다가 칼을 찾는 것과 같으니, 마침내 모색해서 손댈 곳이 없게 됩니다. 진실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위에서 성심을 다하시고 아래의 신하들에게 실질에 힘쓰도록 권면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진실한 정사를 행하고 진실한 일로 진실한 효과를 거두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생각마다 모두 진실하고 일마다 모두 진실되게 하신다면, 정사를 시행하여 거행되지 않는 정사가 없고 다스림을 펼쳐서 이루어지지 않는 다스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감히 ‘무실(懋實)’ 두 글자로 말씀 올립니다.”
그러면서 차례로 12조목을 거론하셨으니, 첫째, 부지런히 배우는 실제, 둘째, 마음을 바르게 하는 실제, 셋째, 하늘을 공경하는 실제, 넷째, 백성을 구휼하는 실제, 다섯째, 간쟁을 받아들이는 실제, 여섯째, 기강을 진작하는 실제, 일곱째, 대신을 임용하는 실제, 여덟째,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 실제, 아홉째, 붕당을 없애는 실제, 열째, 군비를 갖추는 실제, 열한째, 풍속을 돈후하게 하는 실제, 열두째, 법제를 밝히는 실제이다. 그 내용이 무려 만여 글자에 달하였는데, 그 말이 명쾌하고 통절(痛切)하였으며 남김없이 다 드러내어 마치 의원이 증세에 맞게 약을 쓰는 것과 같았으니, 모두 실용에 적합하였다. 학식 있는 사람들이 중흥 이후에 가장 뛰어난 봉사(封事)라고 하였다. 한편 임금께서 후한 비답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차자를 살펴보니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경의 정성이 가상하오. 누누이 진달한 내용들은 지극한 말과 바른 의론이 아닌 것이 없는데, 차자의 요지는 오로지 무실(懋實)에 있으니, 요체를 아는 의론이라 이를 만하오. 내가 감히 잘 새기고 힘써 실행하여 경의 뜻에 부응하지 않을 수 있겠소.”
병인년(1626, 인조4)에 좌참찬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또 동지경연(同知經筵)을 겸하였는데, 강력히 사직을 청하여 면직되셨다.
정묘년(1627) 정월에 노적(奴賊 후금(後金))이 갑자기 변방의 성을 함락시키고 방비가 허술한 곳을 통해 깊숙이 쳐들어오니, 삼궁(三宮)이 강화도로 옮겨갔다. 섬은 협소하고 곡식과 물을 융통할 수 없었는데, 흉적의 예봉(銳鋒)이 날로 압박을 가해오므로 상황이 매우 위태롭고 급박하였다. 왕세자는 분조(分朝)를 맡아서 남하하였다. 임금께서 연로하고 병든 조신(朝臣)들은 각자 편의대로 갈 곳을 골라 피난하고, 반드시 대가를 따를 필요는 없다고 명하셨다. 당시 부군께서는 겨우내 병을 심하게 앓으셔서 기력이 쇠약한 상태였다. 불초(不肖) 성구(聖求)는 마침 정관(政官)으로서 이름이 분조에 포함되어 있었고, 나 민구(敏求)는 임천 군수(林川郡守)로 재직하고 있었다. 친지들이 대부분 부군에게 위태로운 곳에 있지 말고 우선 동조(東朝 분조)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부군께서는 즉시 의연히 말씀하기를 “임금께서 어진 마음으로 신하들이 편의대로 피난하는 것을 허락하셨는데, 한 가닥 숨이라도 붙어 있는 신하가 어찌 감히 병을 핑계하겠는가.”라고 하시고, 마침내 대조(大朝 인조가 있는 곳)로 달려가셨다. 전에 맡고 있던 홍문관 제학을 여러 차례 사직하였지만 허락받지 못했었는데, 이때에 와서 비로소 병으로 체직되셨다.
3월에 대사헌에 임명되셨다. 구적(寇賊)이 막 물러간 상황이라 온갖 법도가 바뀌었다. 게다가 후진(後進)들이 자못 날카롭고 사나워 탄핵의 논의를 힘쓰니, 처벌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부군께서 항상 관대하고 용서하는 자세를 견지하여 공평한 법을 펼치셨으므로 인심이 안정되었다. 대책(對策)을 올려 정사를 논함에 이르러서는 국가의 이로움과 병폐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매우 많았는데, 이미 끝난 뒤에는 외부에 누설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부군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천하에는 본래 아무 일도 없는 것이니, 선왕(先王)의 법도를 따라 행하고서 잘못된 경우는 아직까지 있지 않았다. 지금 여러 차례 상란(喪亂)을 겪은 터라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마치 큰 병을 앓은 뒤에 죽을 먹으며 보양(補養)하는 것조차도 오히려 제대로 못할까 두려운 것과 같다. 그러나 국가가 능히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때때로 어지러이 변경하기를 좋아하니, 이것이 바로 폐단이다.”라고 하셨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 백성들 가운데 떠돌며 게으름을 피우는 자들이 많은데, 이들이 호적과 부역에 속하지 않아 군사의 수가 비고 양민(良民)의 피해가 크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호적에 기록하고 호패를 만들 것을 명하니, 조정의 대소 신료들 가운데 사리를 잘 안다고 이름난 자들이 다투어 그 편리함을 말하였다. 그러나 부군만은 백성들을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되니, 장차 그 폐단의 부담을 떠안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이때에 이르러 호적이 완성되었지만 사람들이 대부분 좋아하지 않아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4월에 환도하여 다시 대사헌, 지중추부사, 좌참찬, 우참찬에 임명되셨다.
무진년(1628, 인조6) 6월에 참찬(參贊), 지중추(知中樞)에서 체직되어 다시 홍문관 제학을 맡으셨다. 7월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셨다. 병인년(1626) 이후로 총재(冢宰 이조 판서) 자리가 비어 있을 때마다 부군께서 반드시 유력한 후보자로 거론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비로소 발탁되셨다.
부군은 평소 성품이 물러나기를 좋아하여 지위가 높아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조정에 출사한 44년 동안 역임한 관직이 성대한 지위가 아닌 것이 없었는데, 고심하고 겸양하는 태도가 진실한 마음에서 나와, 머뭇거리며 피하기를 마치 겁쟁이가 함정을 만난 것처럼 하셨다. 그러므로 임명장이 내려올 때마다 서너 차례 면직을 청하지 아니하고 곧바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없었으며, 임명되더라도 오래 재직하려고 하지 않아 번번이 얼마 못가서 물러나셨다. 또한 불초한 우리 형제가 요행히 조적(朝籍)에 이름을 올려 함께 높은 벼슬에 오르자, 복록(福祿)이 넘쳐나는 것을 매우 염려하여 여러 차례 나이를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려 하였으나, 또한 감히 뜻대로 하지 못하셨다.
이 자리에 임명됨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하게 자세를 낮춰 세 번씩이나 사양해도 허락을 받지 못하자, 조정에 나아가 해직을 청하여 소장을 올리신 것이 또한 다섯 차례였다. 그러나 임금께서는 특별히 후하게 부군을 아끼셨다. 그러자 부군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죽을힘을 다하여 이 직책을 수행하겠다.”라고 하셨다. 이에 품평(品評)를 맑게 하고 임용 순서를 분명히 하여, 요행으로 벼슬에 오르려는 사람을 억제하고 혐의 있는 사람을 멀리하셨다. 뇌물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집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였으며, 청탁하는 말이 인사를 결정하는 자리에서 오가지 못하게 하셨다. 한 가지라도 잘한 점이 있고 작은 노고라도 드러난 사람을 반드시 먼저 추천하고, 친구나 친척들에 대해 전혀 사심을 두지 않으셨다. 사람들도 또한 추호(秋毫)라도 사리에 맞지 않는 일로 부군에게 누를 끼치는 자가 없었다.
부군께서는 한 관직에 오래 근무한 관리들이 고생하며 이제나저제나 조용(調用)되기만을 기다리는데, 적신(積薪)의 기롱은 조정으로 몰린다고 일찍이 생각하셨다. 그러므로 제위(諸衛)와 산지(散地)에 머물러 있던 무사(武士)들과 대감(臺監)과 주부(注簿)에 오래 머물러 있던 음관(蔭官)들을 모두 취하여 차례대로 옮겨 임용하니, 인사행정을 담당한 수개월 만에 조용의 효과가 두루두루 미쳤다. 지방관을 선임하는 데는 더욱 신중을 기하여, 그 사람의 능력과 전임(前任) 당시의 평판과 치적(治績)이 어떠했는가를 반드시 살피셨다.
어느 날 병 때문에 인사행정을 논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셨는데, 동료들이 전례에 따라 부군을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에 임명하였으니, 부군을 의원과 약재 가까이에 두려는 것이었다. 부군께서는 “이조의 장관 자리에 있으면서 어떻게 스스로 편한 관서(官署)를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요지로 두 번 차자를 올려 사직하셨다. 임금께서 부군의 정성스러운 뜻을 살펴 아시고 특별히 윤허하셨다. 그러자 말하는 사람들이 “이 한 가지 일은 또한 쇠퇴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재상의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오랫동안 후보자를 정하라는 명령이 없었으므로,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여 기다렸으나, 부군께서 갑자기 중풍에 걸리셨다. 불초 성구는 당시 호남 감사(湖南監司)로 있었는데, 법률상 돌아와 부군을 뵐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 민구가 죽음을 무릅쓰고 형님을 체직시켜 달라고 아뢰어, 혹시라도 기다려 눈을 감으시게 해 달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안타깝게 여겨 허락하시고, 선전관(宣傳官)을 보내 후임자를 기다리지 말고 서둘러 돌아오라고 하셨다. 이어서 어의(御醫)를 보내 사제(私第)에 가서 밤낮으로 치료하게 하였으며, 필요한 약물을 모두 내국(內局)에서 내주셨다. 대신(大臣) 이외의 사람 가운데 임금의 이러한 은혜를 받는 것은 특별한 예우(禮遇)였다.
부군께서 병이 심해지자 정신이 혼미하여 말씀을 하실 수 없었다. 그럼에도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데 곧바로 그만두지 못하는 것을 괴롭게 여겨 애타는 마음 그지없으셨다. 그리고 일찍이 제조(提調)로 계시던 장악원(掌樂院)에서 응납(應納)하는 하인들의 고치(雇直 인부에게 지급하는 품삯)를 집안사람들에게 받지 말라고 당부하셨으니, 그 뜻이 매우 슬펐다. 그러나 맑은 흉금과 깨끗한 지조는 애당초 병이 심해도 혼란해지지 않으셨다. 불초한 우리 형제가 또 소장을 올려 부군의 뜻을 아뢰니, 지중추부사로 체직되셨다.
12월 26일 임자(壬子)에 부군께서 마침내 운명하셨다. 부음이 전해지자 임금께서 조회를 하지 않으시고, 조문과 부의(賻儀)와 치제(致祭)를 모두 상례(常例)보다 더하게 하셨다. 마침 불초한 우리 형제가 나란히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었으므로, 마침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에 추증되셨다.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를 의논하여, 학문에 부지런히 힘쓰고 묻기를 좋아한다는 의미의 문(文)과 한결같은 덕으로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간(簡)을 취하여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뒷날 임금께서 조정에 나와 인사행정의 정도(正道)를 논할 때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근년에 오직 이수광 만이 이조 판서로서 능히 관리의 고과(考課)에 따라 사람을 등용했었는데, 이것을 이어나가기가 어렵겠구나.”라고 하셨다. 부군께서 조정에 출사한 뒤로 시종의 경력, 그리고 살아서의 영예와 돌아가신 뒤에 받은 애도(哀悼)가 여기에 이르러 다 갖추어졌다.
부군께서는 어려서 부친을 잃고 스승에게 배운 적이 없었으나, 타고난 자질이 매우 빼어나고 청명함이 월등하였다. 성균관 유생이 된 뒤로 뜻을 세움이 구차하지 않았고, 경서의 뜻을 상고하여 이미 향상(向上)의 학문을 알고 계셨다. 지행(知行)의 방법에 있어서는 체인(體認)한 것이 더욱 간절하였고, 극치(克治)에 노력하여 한결같이 경(敬)을 위주로 하셨다. 그러나 장중(莊重)하고 간묵(簡默)하여 규각(圭角)을 드러내지 않으셨으므로, 사람들은 부군의 조예(造詣)를 알지 못하였다. 평소 독서를 좋아하여 자사 백가(子史百家)를 즐기지 않는 것이 없었으나, 만년에는 모두 다 물리치고 오직 성리서(性理書)만 남기셨는데, 그것도 고작 서너 권만을 남기시며 말씀하기를 “‘간약으로써 번다함을 제어하고, 고요함으로써 움직임을 제어한다.[簡以制煩, 靜以制動.]’라는 여덟 글자를 내가 평생 가슴에 새겼으나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라고 하셨다.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이단(異端)의 학설에 대해 귀결되는 취지(趣旨)를 터득한 뒤에 잠깐은 그 학설이 고원하고 원대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반복하여 완미하고 탐구한 뒤에는 끝내 유교(儒敎)의 정밀하고 핵심적인 것이 극치에 이르러 지극히 간략하고 지극히 합당한 것만 같지 못했다. 이것을 두고서 이단의 서적으로 가겠는가. 생각건대 역대의 여러 유자들이 학설을 개진하고 몽매함을 일깨운 것과 우리나라 제현(諸賢)들이 각각 드러내 밝힌 것은 진실로 흠잡을 것이 없으니, 예컨대 회재(晦齋) 이 선생(李先生)은 식견이 고매하니, 그 분이 자득(自得)한 뜻을 후학들이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일찍이 〈학계(學戒)〉를 지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15세부터 지향해야 할 것을 대강 듣고 ‘풀어진 마음을 거두어들인다.[收放心]’라는 한 구절에 종사하였는데, 문자(文字)에 잘못 빠져 반평생을 헛되이 보냈다. 그러다가 나이 오십에 흠칫 놀라 깨닫고서 구습(舊習)을 씻어버리고, 그 사이에 성현의 말씀에 나아가 반복하여 탐구하고 음미하여 도체(道體)의 소재를 구하려고 하였는데, 가만히 마음으로 이해하여 터득한 바가 있는 것 같았다. 노자(老子)와 석가(釋迦)의 학설에 이르러서는, 그 동이(同異)와 득실(得失)을 또한 제법 파악하여 거기에 빠질 것이 못됨을 분명히 알았다. 그렇게 된 뒤에야 비로소 학문상에 있어서 믿어 의심하지 않고 즐겨 싫증나지 않았으니, 천하의 어떤 즐거움도 이것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병으로 정신이 혼미하고 게을러져서 전념하여 노력을 기울이지 못하고, 게다가 사우(師友)들이 강명(講明)해 주는 도움도 받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노쇠한 몸으로 처음 배우는 선비의 길을 가려고 하니, 비유하자면 날은 저물고 길은 먼 것과 같다. 성취를 바랄 수 없으니 우습구나.
세상 사람들도 나를 낮추어 보고서 고투(故套)를 따라 으레 사인(詞人) 묵객(墨客)으로 지목하니,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문득 부끄러워 편치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여기에서 군자가 진덕수업(進德修業)을 모름지기 젊은 시절에 해야 하고, 사람이 학술을 선택하는 것 또한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번 품평을 받은 뒤로 평생 그 평가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개탄스럽다. 비록 그렇지만, 세상에서 유자(儒者)라고 부르는 자들 중에 간혹 학문에 어두우면서도 헛된 명성을 차지하여,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남도 속이는 자가 있으니, 그 불행함이 또한 어떠한가. 뒷날의 군자들은 마땅히 경계할 줄을 알아야 한다.”
무진년(1628, 인조6) 정월 초하루에 〈자신잠(自新箴)〉을 지어 스스로 일깨우고 성찰하셨는데, 그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나이는 다시 젊어질 수 없어도 / 年不再新
덕이야 다시 새로울 수 있다네 / 德則更新
사람이 참으로 새로워진다면 / 人苟得新
비록 늙었어도 새로워질 수 있으니 / 雖老猶新
늙은이가 어떻게 새로워질까 / 老何由新
오직 배워야만 새로워진다네 / 惟學能新
허물을 고치면 새로워지고 / 改過則新
착한 데로 옮기면 새로워지나니 / 遷善則新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나아감 / 舍舊就新
이것을 일러 일신이라 하지 / 是謂一新
성현의 도는 진정 새로우니 / 聖賢道新
만고에 길이 새롭다네 / 亘古長新
마침내 이 해에 세상을 떠나시니, 부군께서 평소에 성찰하고 단속하는 일을 일찍이 조금도 그만두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비로소 알았다. 부군께서 “병으로 정신이 혼미하고 게을러져서 전념하여 노력을 기울이지도 못하였다.”라고 하신 것은 다만 겸손한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보이신 것이고, 삶과 죽음이 오가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다.
부군께서는 실천이 독실하여 거짓으로 꾸미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법도가 매우 엄격하여 일찍이 털끝만큼도 어김이 없으셨다. 겸허(謙虛)하고 퇴양(退讓)하는 자세를 견지하여 옷의 무게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지만, 의리와 명분에 이르러서는 날카로운 자세로 분명하게 결단하여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으셨으니, 온 세상이 흉흉(恟恟)할 때도 부군의 지키는 바는 더욱 확고하였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 화려한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권세가의 집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고 편당의 지목을 받게끔 처신하지도 않으셨으니, 항상 여대방(呂大防)과 범조우(范祖禹)를 기준으로 삼았다.
중간에 어둡고 막힌 시대를 만나 간사한 무리들이 정직한 사람을 시기하였으나, 부군에 대해서는 감히 경솔하게 헐뜯거나 배척하지 못하였으니, 초연히 스스로 법망(法網)에서 멀리 벗어나셨다. 지난 수십 년간 사대부들이 점차 바른 절조(節操)를 잃어 출세를 위한 지름길에 달라붙었으니, 요행의 문이 크게 열렸다. 상공(相公) 심희수(沈喜壽)가 일찍이 일컫기를 “맑은 절조를 온전히 보존하여 궁액(宮掖)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은 오직 지봉(芝峯) 한 사람 뿐이다.”라고 하였다. 연흥(延興) 김공(金公)이 국구(國舅)로 한가로이 지내며 경치 좋은 곳에 명사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면서, 아울러 부군을 맞이하려는 뜻이 매우 두터웠고 이웃에 살았기 때문에 서너 번이나 초대했지만, 부군께서는 자신의 신조를 견지하여 참석하지 않으셨다. 그 뒤 재앙이 일어나자 김공의 초대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에게 대부분 여파가 미쳤으니, 몸가짐과 행실을 삼가면서 높은 식견으로 멀리 내다보시는 것이 매번 이와 같았다.
평소 옷깃을 단정히 여미고 앉아 종일토록 조용히 사색하였고 비속한 말을 입에 담지 않으셨으며 거만하고 게으른 기운을 몸에 나타내지 않으셨으니, 비록 병을 앓아 몹시 고달플 때에도 일찍이 기대어 눕거나 느른하게 하품하신 적이 없었다. 집안사람과 어린아이조차 일찍이 부군께서 관을 벗은 모습을 보지 못하였고, 종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도 일찍이 업신여기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일을 처리할 때에는 반드시 장중한 자세로 임하셨고 글자를 쓸 때에는 반드시 반듯하게 쓰셨으니, 비록 서간(書簡)이나 재미삼아 쓰는 글이라도 단정하여 거칠지 않았다.
과부가 된 누님을 정성으로 대하여 함께 살면서 봉양하고, 생질(甥姪) 셋을 정성껏 가르치고 혼인시키셨다. 기타 궁핍한 친족들 가운데 불행한 일이 있어도 의지할 데가 없는 자가 있으면 뒷바라지하여 일어설 수 있게 하셨으니, 은혜로운 마음이 지극하셨다. 사람을 대할 때는 온화하고 공손하여 처음부터 격의 없게 하였지만, 몸가짐을 엄격하고 바르게 하여 친소(親疎)에 따라 달라지지 않으셨으니, 혹 사사롭게 청탁을 하려다가도 끝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손님은 귀천(貴賤)과 노소(老少)를 막론하고 반드시 당(堂) 아래로 내려가 인사를 나누고, 봄기운처럼 따뜻하게 대하며 잘 이끌어 주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부군께서 세상을 떠나신 날 와서 곡하는 사람들이 모두 대단히 슬퍼하였다.
일찍이 말씀하기를 “사람이 세상을 살다 보면 다소의 역경이 있기 마련인데, 진실로 역경에 동요된다면 그 고통을 견뎌낼 수 없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외물이 이르면 알맞게 처리하여 순응하고, 권세와 이익의 길에서는 놀란 것처럼 몸을 단속하셨다. 오직 문을 닫아걸고 고요함을 지켜 집안의 마당조차도 나오지 않은 채, 성명(性命)의 본원(本源)을 탐구하고 함양하는 바탕에 전념하여, 먼지로 가득한 방에서 사람이 없는 것처럼 조용히 지내셨다. 그러나 마음만은 환하게 밝은 상태로 작은 물결조차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병이 날로 고질화 되어도 정신은 더욱 맑았고 외물에 대한 사려(思慮)가 마음에 들어오지 않아 꿈자리도 번잡하지 않아서, 꿈에서 얻은 시문(詩文)을 깨어난 뒤에 분명히 기억하셨다. 성품이 또 분명하게 살피고 감식(鑑識)이 정밀하여 일의 성패를 논하면 꼭 들어맞아 어긋나지 않았고, 시비를 분석하고 가부(可否)를 변별하여 흑백(黑白)처럼 쉽게 볼 수 있도록 하셨으니, 친척들이 부군에게 와서 묻고 결정하였다.
선조(先祖)들께서 청렴결백하기로 명성이 자자하여 집안 살림이 본래 빈한(貧寒)하였는데, 부군께서는 주고받기를 더욱 삼가 조금도 구차스럽게 한 적이 없으셨다. 내직(內職)과 외직(外職)을 출입하면서 자신을 청렴하고 각박하게 단속하고, 깨끗한 손으로 공무를 받들어 사사로운 만남을 물리쳐 멀리하셨다. 녹봉 이외에는 재산을 조금도 늘리지 않았고, 전원(田園)과 노비들에 대하여 전혀 상관하시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께서 하세(下世)하신 뒤로는 살림이 더욱 어려워져 아침저녁 끼니조차 꾸어다 먹었고, 쌀독이 자주 비어도 또한 걱정하지 않으셨다.
검소함을 실천하는 덕은 천성적으로 타고나서 음악과 여색, 분잡(紛雜)하고 화려한 것 등, 외부에서 유혹하여 부러워할 만한 것에 대해 담박하게 전혀 욕심내지 않으셨다. 향을 피우지도 않았고 촛불을 밝히지도 않았으며, 연회도 베풀지 않았고 음악도 듣지 않으셨다. 진지를 잡수실 때 두 가지의 맛있는 반찬을 놓지 않았으며 앉으실 때 온전한 방석도 없었다. 겨울에는 갖옷 하나로 지내셨는데 15년 동안 바꾸지 않았고, 상탑(床榻)이 초라했지만 매우 편안하게 거처하셨다. 스스로 포의(布衣)를 입고 한사(寒士)처럼 생활하고, 옷과 이불이 해지고 터져서 묵은 솜이 드러나 보이기도 하였다. 입거나 사용하는 물건들 중에 아로새긴 무늬를 넣었거나 단칠(丹漆)한 것은 가까이하지 않으셨다. 집안사람이 비단으로 겉옷을 지으려고 하면 정색하며 허락하지 않으셨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실망한 표정으로 좋아하지 않으셨으니, 그 사람도 부군과 마주치면 또한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일찍이 예설(禮說)에 근거하여 심의(深衣)와 건대(巾帶)를 지으셨는데, 완성하고 나서 병석에 누우셨다. 임종(臨終)하신 후에 친척과 빈객들이 그것을 가지고 염습(斂襲)하며 말하기를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혀 우리 공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 단지 흰 명주옷만 사용하였는데, 부군께서 좋아하시던 것을 따른 것이다.
부군의 문장은 육경(六經)에 뿌리를 두어 그 문체가 전아(典雅)하였고, 제가(諸家)의 험벽(險僻)한 표현들은 숭상하지 않으셨다. 시율(詩律)은 초당(初唐)과 성당(盛唐)의 것을 좋아하여, 말씀하기를 “이 시기 이전의 시는 체재와 기상이 불완전하고, 이 시대 이후의 시는 연약해서 힘이 없다. 오언고시(五言古詩)는 한(漢)나라와 위(魏)나라의 악부(樂府)가 진선(盡善)하다고 하겠다.”라고 하셨다. 부군께서 지으신 글의 수준은 그 글이 가집(家集)에 갖추어져 있으니, 오직 말을 아는 세상의 군자를 기다릴 뿐, 감히 불초(不肖)한 우리 형제의 사사로이 기리는 말이 끼어들 수 없다. 만일 주제넘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누가 기꺼이 불초한 우리 형제들의 말을 따르겠는가. 그러나 생각건대 신 문정공(申文貞公)은 부군과 평생 도의(道義)로 사귀신 분인데, 부군의 시에 대해 신묘하고 자연스러웠다고까지 말씀하였으니, 확실하게 정견(定見)이 있지 않다면 반드시 이와 같은 말로 경솔하게 인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이(簡易) 최립(崔岦)도 말씀하기를 “사문(斯文)이 의탁할 곳이 여기에 있다.”라고 하였다.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도 모두 부군의 시문을 지극히 높여 “품격이 높고 말이 아름다우며 구(句)가 원만하고 뜻이 활발하니, 넉넉하게 성당(盛唐)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하였다. 혹자는 “한담(閑淡)하고 온아(溫雅)하여 정인(正人), 군자(君子)의 기상이 있으니, 참으로 성정(性情)이 바르다.”라고 하였다. 이 세 분은 세상에서 문사(文辭)에 능하여 남에게 기꺼이 뒤지지 않는다고 일컬어지니, 거의 이 분들의 말씀을 통해 당세의 평가를 볼 수 있다.
부군은 저술이 매우 많았지만, 문예(文藝)에 전념한 사람으로 평가되기를 바라지 않으셨기 때문에 산삭(刪削)한 것이 거의 반이나 된다. 《견록시문(見錄詩文)》 23권, 《채신잡록(采薪雜錄)》 1권, 《독서해(讀書解)》 1권, 《제사(題辭)》 1권, 《병촉잡기(秉燭雜記)》 2권, 《경어잡편(警語雜編)》 1권, 《잉설여편(剩說餘編)》 2권, 《지봉유설(芝峯類說)》 20권, 《승평지(昇平志)》 2권, 그리고 여러 서적들을 찬록(纂錄)한 5부(五部) 25권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부군께서 돌아가실 때 향년 66세였다. 이듬해 기사년(1629, 인조7) 2월 11일 정유(丁酉)에 양주(楊州) 서산(西山)의 장흥리(長興里)에 있는 선조의 묘역에 안장하였다. 어머니께서 을묘년(1615, 광해군7)에 세상을 떠나셨을 때 부군께서 지문(誌文)을 쓰셨는데, 이때에 이르러 합장하였다.
두 아들은 성구와 민구이고, 딸은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 권경(權儆)에게 시집갔으나 먼저 세상을 떠났다. 성구는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권흔(權昕)의 딸과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상규(尙揆)와 동규(同揆)이다. 딸은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 이일상(李一相)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민구는 성주 목사(星州牧使) 윤휘(尹暉)의 딸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원규(元揆)는 부평 부사(富平府使) 오준(吳竣)의 딸과 결혼하였고, 중규(重揆)는 전창군(全昌君) 유정량(柳廷亮)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딸은 사인(士人) 신변(申昪)에게 시집갔다. 권경(權儆)의 세 아들은 제(躋), 적(蹟), 지(趾)이고, 네 딸은 각각 윤원거(尹元擧), 김정곤(金挺坤), 한후기(韓後琦), 이선징(李善徵)에게 시집갔다. 증손자와 증손녀 여섯은 모두 어리다.
아아, 부군의 평소의 행적은 사람들의 눈과 귀에 분명하게 남아 있어서 대개 그 크고 작은 일들을 기억하고 있으니, 속일 수도 없고 과장하여 넘치게도 할 수 없다. 불초(不肖)한 우리 형제가 가슴이 아프고 경황이 없어서 글에 순서가 없으니, 선인(先人)의 아름다운 덕을 만분의 일이라도 말로 드러낼 수가 없다. 만약 선부군(先府君)의 일에 대해 한마디 말의 글을 지어서 공정하게 후세에 보여 준다면, 실로 불초한 우리 형제에게 다행한 일이다. 고애자(孤哀子) 이성구와 이민구는 눈물을 흘리며 삼가 기록한다.
[주-D001] 이희검(李希儉) : 1516~1579.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의 아버지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질(景質), 호는 동고(東皐)ㆍ국재(菊齋)이다. 《象村稿 卷26 贈大匡輔國崇祿大夫……李公神道碑銘 幷序》[주-D002] 문화 유씨(文化柳氏) : 이수광의 어머니는 유오(柳塢)의 딸이다.[주-D003] 판서공(判書公)께서 …… 좌천되셨다 : 이희검은 이량(李樑, 1519~1582)을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장단 부사(長湍府使)로 좌천되었다.[주-D004] 사씨(謝氏) : 진(晉)나라 사안(謝安)을 가리킨다. 그의 자질(子姪)들이 시를 잘하였는데, 사안이 눈 오는 날 자질들과 함께 연구(聯句)를 지으면서 눈 내리는 모양이 무엇과 비슷한지 물어보았다. 조카 사랑(謝朗)이 “공중에서 소금을 뿌리는 것에 비길 만합니다.[撒鹽空中差可擬]”라고 하니, 질녀(姪女) 사도온(謝道韞)이 “버들개지가 바람에 일어난다고 하는 것보다는 못합니다.[未若柳絮因風起]”라고 하여, 사안이 크게 기뻐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言語》[주-D005]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 정훈(庭訓)은 뜰에서 내린 교훈이란 뜻으로, 아버지가 자식에게 내리는 교훈을 말하니, 실정훈(失庭訓)은 아버지를 여의었다는 의미이다. 공자(孔子)의 제자 진강(陳亢)이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에게 “그대는 특이한 들음이 있는가.[子亦有異聞乎]”라고 묻자, 백어가 “없었다. 일찍이 홀로 서 계실 때, 내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는데 ‘시를 배웠느냐.’고 물으시기에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더니,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 하시기에 내가 물러나와 시를 배웠다.[未也, 嘗獨立,鯉趨而過庭, 曰學詩乎, 對曰未也. 不學詩, 無以言, 鯉退而學詩.]”라고 대답했다는 말을 원용하였다. 《論語 季氏》 이수광은 17세에 부친상을 당했다.[주-D006] 이율곡(李栗谷) : 이이(李珥, 1536~1584)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이다. 《栗谷全書 卷36 諡狀》[주-D007]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 : 기축옥사(己丑獄死)를 말한다. 1589년(선조22) 10월에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변을 계기로, 동인(東人)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고 서인(西人) 정철(鄭澈)이 옥사를 엄하게 다스려 이발(李潑), 이길(李洁), 최영경(崔永慶) 등이 처형되고, 정언신(鄭彦信), 정개청(鄭介淸) 등이 유배되었다.[주-D008] 광국 …… 책록(策錄)되셨다 : 광국 공신(光國功臣)은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을 해결한 공로를 표창하기 위해 1590년(선조23) 윤근수(尹根壽) 등 19인에게 내린 공신 훈호(勳號)이다. 종계변무는 명나라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기록되자, 여러 차례에 걸쳐 사절을 파견하여 종계의 개정에 성공한 사실을 말한다. 평난 공신(平難功臣)은 토역(討逆)한 공인데, 1589년에 정여립의 난을 평정하고 나서 박충간(朴忠侃) 등 22인에게 내린 공신 훈호이다. 원종공신(原從功臣)은 각 등급에 해당되는 정식의 공신 이외에 작은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등외(等外)의 공신을 말하는데, 원종공신(元從功臣)이라고도 한다.[주-D009] 백사(白沙) 이공(李公) : 이항복(李恒福, 1556~1618)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이다. 《月沙集 卷49 鼇城府院君白沙李公墓表》[주-D010] 서반직(西班職) : 당시에 벼슬하는 사람이 사직하면 군직이나 중추부(中樞府) 벼슬을 주는 것을 서반(西班)이라 하였으니, 대개 문관은 동반(東班), 무관은 서반이다. 그러나 문관도 서반을 할 수 있다. 또 벼슬하는 사람이 죄가 없는 한 벼슬을 아주 없애는 것이 아니고 녹이 끊어지지 않게 하니, 서반을 주는 것은 휴직봉(休職俸)을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주-D011] 조경(趙儆) : 1541~1609.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사척(士惕)이다. 1592년(선조25) 4월에 영남 우도 방어사(嶺南右道防禦使)가 되었다. 《浦渚集 卷31 豐壤君趙公神道碑銘 幷序》[주-D012] 김산(金山) : 경상북도 금릉군의 옛 이름으로, 현재의 김천시 일대이다.[주-D013] 이일(李鎰) : 1538~1601.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중경(重卿)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순변사가 되어 북상하는 왜적을 상주에서 맞아 싸우다가 크게 패배하고 충주로 후퇴하였다. 충주에서 도순변사 신립(申砬, 1546~1592)의 진영에 들어가 재차 왜적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損窩遺稿 卷13 巡邊使武勇大將李公諡狀》[주-D014] 두 왕자 …… 구속하였으며 :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가 회령부(會寧府)에 있었는데, 왜적이 회령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회령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임해군과 순화군, 좌의정 김귀영(金貴榮)과 판중추부사 황정욱(黃廷彧) 부자(父子) 및 남ㆍ북도 병사(兵使) 몇 명을 사로잡아 왜적에게 항복하였다. 이 반란을 주도한 인물은 그 지역 토관 진무(土官鎭撫)였던 국경인(鞠景仁)이다. 이 사건은 1592년 7월 1일을 전후하여 일어났으며, 회령지변(會寧之變)이라고 한다.[주-D015] 송유진(宋儒眞) : ?~1594. 조선 중기의 민란 주도자로, 본관은 홍산(鴻山)이다. 임진왜란 중의 혼란과 1593년(선조26)의 대기근으로 굶주리는 백성 및 병졸을 모아 천안, 직산 등지를 근거지로 하여 지리산, 계룡산 일대까지 세력을 폈으며, 무리는 2000여 명에 달하였다. 당시 서울의 수비가 허술함을 보고 습격할 계획을 세워 스스로 의병대장이라 칭하였으며, 오원종(吳元宗), 홍근(洪瑾) 등과 함께 아산, 평택의 병기를 약탈하여 1594년 정월 보름날 한성에 진군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이 해 정월 직산에서 충청 병사 변양준(邊良俊)에 의해 체포되어 왕의 친국(親鞫)을 받고 사형 당하였다. 《孤臺日錄 人名錄》[주-D016] 부신(附身) …… 다하여 : 부신은 빈렴(殯斂)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단궁(檀弓)〉에 “자사가 말하기를 ‘상을 당하면 3일 만에 빈을 한다. 무릇 시신에 사용하는 것은 반드시 성과 신으로써 하여 뒷날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子思曰, 喪三日而殯. 凡附於身者, 必誠必信, 勿之有悔焉.]”라고 하였다.[주-D017] 어려운 …… 하셨다 : 시굴(時屈)은 시굴거영(時屈擧贏)의 준말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사치스러운 일을 벌이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어려운 상황을 이유로 상례(喪禮)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쓰였다. 《사기(史記)》 권45 〈한세가(韓世家)〉에 “지난해에 진나라에게 의양을 빼앗기고 금년에는 가뭄이 들었는데, 소후가 이러한 시기에 백성을 구휼하는 것을 급하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더욱 사치하니, 이것이 시굴거영이다.[往年秦拔宜陽, 今年旱, 昭侯不以此時卹民之急, 而顧益奢, 此謂時絀舉嬴.]”라고 하였다.[주-D018] 서애(西厓) 유 상공(柳相公) : 유성룡(柳成龍, 1542~1607)으로,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이다. 《西厓集 年譜 卷3 有明朝鮮國輸忠翼謨光國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豐原府院君西厓柳先生行狀》[주-D019] 완평(完平) 이공(李公) : 이원익(李元翼, 1547~1634)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이다. 1604년(선조37)에 호성 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었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梧里集 附錄 卷2 諡狀》[주-D020] 이이첨(李爾瞻) : 1560~1623.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 또는 쌍리(雙里)이다.[주-D021] 길운절(吉云節) : ?~1601. 1601년(선조34)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된 소덕유(蘇德兪)를 찾아가 역모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소덕유의 처에게 알려지자, 그 자신이 먼저 관에 나아가 고변하였다. 이후 국가로부터 포상을 받지 못함을 원망하다가 체포되어 참형에 처해졌다. 《孤臺日錄 人名錄》[주-D022] 계비(繼妃) :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로,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이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생모이다.[주-D023] 혼례는 …… 일입니다 : 《예기》 〈혼의(昏義)〉에 “혼례란 장차 두 성씨의 좋음을 합하여 위로는 종묘를 섬기고 아래로는 후세를 잇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가 중히 여긴다.[昏禮者, 將合二姓之好, 上以事宗廟, 而下以繼後世也. 故君子重之.]”라고 하였다.[주-D024] 옛사람은 …… 여겼으니 : 송(宋)나라 정이(程頤)의 글에 “딸이 시집갔을 때 부모가 사람을 보내어 위안하는 것을 치녀라고 한다. 옛날에 석 달이 되어야 사당에 알현하여 비로소 부도가 이루어졌다.[女旣嫁, 父母使人安之, 謂之致女. 古者, 三月而廟見, 始成婦也.]”라고 하였다. 《程氏經說 卷5 春秋》[주-D025] 회전(會典) :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가리킨다. 1497년에 명나라 효종(孝宗)이 《대명회전》의 찬수를 명하여 1502년에 완성하였고, 1549년에 중수(重修)하여 1576년에 간행 반포하였다.[주-D026] 호성 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 원래 호성 공신(扈聖功臣)은 임진왜란 때 서울에서 의주(義州)까지 어가(御駕)를 호종한 사람들에게 내린 공신 훈호(勳號)이며, 1604년(선조37)에 86명을 3등으로 나누어 녹훈(錄勳)하였다. 원종공신(原從功臣)은 각 등급에 해당되는 정식의 공신 이외에 작은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등외(等外)의 공신을 말한다.[주-D027] 선묘(宣廟)께서 …… 상청(上請)하였는데 : 1604년(선조37) 10월에 신하들이 임금에게 존호(尊號)를 올렸는데, 처음에 임금이 사양하였다. 그 후 조정과 종실(宗室)ㆍ삼사(三司)ㆍ정원(政院)ㆍ예문관(藝文館)이 매일 세 번씩 청하였는데, 한 달이 지난 뒤에 임금이 허락하여 지성대의 격천희운(至誠大義格天熙運)이라고 존호를 올렸다. 《國朝寶鑑 卷33 宣祖朝10》[주-D028]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 1517~1584.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ㆍ해객(海客)이다. 《龍洲遺稿 卷15 府使蓬萊楊公墓碣銘 幷序》[주-D029] 신 감사(申監司) : 신식(申湜, 1551~1623)으로,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숙지(叔止), 호는 졸재(拙齋)이다. 1608년(선조41) 가을에 호서 관찰사(湖西觀察使)로 부임하여 1609년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葛庵集 別集 卷6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拙齋先生申公諡狀》[주-D030] 부례(祔禮) : 삼년상을 마치고 신주를 사당으로 옮겨 모시는 부묘(祔廟)의 예를 말한다.[주-D031] 청백(淸白) : 빙벽(氷蘗)은 맑은 얼음물을 마시고 쓰디쓴 소태나무를 씹는다는 뜻으로, 굳게 절조를 지키면서 청백하게 사는 것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당(唐)나라 백거이(白居易)의 “3년 동안 자사로 있으면서, 맑은 얼음물을 마시고 쓰디쓴 소태를 씹었노라.[三年爲刺史, 飮氷復食蘗.]”라는 시구에서 유래하였다. 《白樂天詩集 卷1 三年爲刺史》[주-D032] 주리(侏離)와 조언(鳥言) : 주리는 방언(方言)으로, 소수 민족 혹은 외국의 언어나 문자를 말한다. 조언은 새소리라는 말이니, 연경에서 만난 안남, 유구, 섬라의 사신들이 쓰는 언어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주-D033] 공벽(拱璧)을 …… 없었다 : 연경에서 만난 안남, 유구, 섬라의 사신들이 이수광의 시문을 진귀한 보배처럼 소중하게 간직하여 가지고 갔다는 말이다. 십습(什襲)은 열 겹으로 싼다는 뜻으로, 매우 소중히 간직함을 의미한다. 공벽은 두 손으로 감싸 잡을 만큼 큰 벽옥(璧玉)으로, 더없이 진귀한 보배를 뜻한다.[주-D034] 조완벽(趙完璧) : 생애는 미상이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35 〈지봉시파원국(芝峯詩播遠國)〉에 “조완벽은 진주 사람이다. 정유년에 포로가 되어 왜에 들어갔다가 상선을 따라 세 차례 안남에 들어갔다.[趙完璧晉州人也. 丁酉被虜入倭, 隨商舶入安南凡三度.]”라고 하였다.[주-D035] 교하(交河) : 경기도 파주시의 옛 지명이다.[주-D036] 후세에 …… 만들었습니다 : 작용(作俑)의 용(俑)은 장사(葬事)에 쓰는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인데, 이는 좋지 못한 선례(先例)를 뜻한다.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중니께서 말씀하시기를 ‘처음으로 용을 만든 자는 아마 후손이 없을 것이다.’ 하셨으니, 이는 사람을 형상하여 장례에 사용하였기 때문이다.[仲尼曰, 始作俑者, 其無後乎, 爲其象人而用之也.]”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주-D037] 내게 후손이 있다 : 《서경》 〈대고(大誥)〉에 “그 아버지가 밭을 일구었거늘, 그 자식이 기꺼이 파종도 하려고 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수확하려 하겠는가. 부로가 공경히 섬기는 자들이 기꺼이 ‘내 후손이 있으니 기업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겠는가.[厥父菑, 厥子乃弗肯播, 矧肯穫. 厥考翼, 其肯曰, 予有後, 弗棄基.]”라고 한 데서 원용하였다.[주-D038] 예에는 …… 없으니 : 《통전(通典)》 권68 〈이적처의(二嫡妻議)〉와 《회암집(晦庵集)》 권51 〈답만정순(答萬正淳)〉에 “예에 의하면 적처는 둘을 둘 수 없다.[禮無二嫡]”라는 말이 나오는데, 대개 제후(諸侯)는 정비(正妃)를 한 사람만 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잉첩(媵妾)들로서 정비보다 등급이 낮은 지위를 부여하며, 죽은 뒤에도 정비만 부묘(祔廟)할 수 있다는 뜻이다.[주-D039] 은공(隱公)이 …… 일 : 《춘추(春秋)》 은공 5년 기사에 “9월에 중자의 궁을 완성하고, 처음으로 육우의 춤을 바쳤다.[九月, 考仲子之宮, 初獻六羽.]”라고 하였고, 문공(文公) 9년 기사에 “진나라 사람이 와서 희공과 성풍에게 드리는 수의를 바쳤다.[秦人來, 歸僖公成風之襚.]”라고 하였다. 중자와 성풍은 각각 은공과 희공의 생모로, 모두 부왕의 측실이었다.[주-D040] 국중(國中)에서 …… 된다 : 《통전(通典)》 권72 〈제후숭소생모의(諸侯崇所生母議)〉에 “곡량이 이르기를 ‘진나라 사람이 와서 성풍에게 수의를 바치면서 부인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밖에 나가서는 부인이라고 할 수 없어서이니, 여기에서 정도를 볼 수 있다. 무릇 자신은 임금이고 어머니는 첩인 경우에 서자와 서손이 차마 신하로 삼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편안하지 못해서이다. 그러므로 나라 안에서는 사사로이 부인이라 칭하지만, 나라 밖에서는 부인이라 칭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식의 정이니, 국인이 사사로이 하는 것으로 예법의 정도에 그쳐야 한다. 가령 서자 여럿이 함께 삼공이 되어 각각 그 어머니를 높이고자 한다면, 장차 어떻게 제지하겠는가. 성인을 비방하는 것은 법도를 무시하는 것이니, 이는 큰 환란을 부르는 길이다.’ 하였다.[糓梁云, 秦人來歸成風之襚, 秦不云夫人也, 就外不云夫人而見正焉. 夫身爲國君而母爲妾, 庶子孫所不忍臣下, 所不安. 故私稱於國中, 不加境外. 此人子之情, 國人之私而止於禮法之正也. 假有庶子數人竝爲三公, 欲各尊其母, 將何以止之. 非聖人無法, 此大亂之道也.]”라고 한 말을 원용하였다.[주-D041] 이이첨(李爾瞻) …… 모의하였다 : 이이첨(1560~1623)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ㆍ쌍리(雙里)이다. 선조(宣祖)의 노여움을 사서 갑산에 유배되었으나,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예조 판서에 올랐고, 이어 대제학을 겸임하고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에 봉해졌다. 1613년(광해군5) 강도죄로 잡힌 박응서(朴應犀) 등에게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고 무고하도록 사주하여,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등하고 강화에 안치시켰으며,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 등을 사사시켰다. 1614년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을 발의하여, 1618년 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게 하였다.[주-D042] 현옹(玄翁) …… 있었는데 : 현옹 신공(申公)은 신흠(申欽, 1566~1628)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ㆍ상촌(象村)이다. 1616년(광해군8) 인목대비의 폐비 및 이와 관련된 김제남의 가죄(加罪)와 함께 다시 논죄된 뒤 춘천(春川)에 유배되었으며, 1621년에 사면되었다. 이보다 앞서 신흠은 삭직되어 김포(金浦)의 선영(先塋) 부근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수광이 순천으로 떠날 때 김포에서 신흠을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月沙集 卷44 領議政贈諡文貞申公神道碑銘 幷序》[주-D043] 최관(崔瓘) : 1563~1630. 본관은 강화(江華), 자는 영중(瑩仲), 호는 미옹(迷翁)이다. 《順菴集 卷27 資憲大夫戶曹判書迷翁崔公行狀》[주-D044] 정엽(鄭曄) : 1563~1625.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이다. 《月沙集 卷44 左參贊贈右議政諡文肅鄭公神道碑銘 幷序》[주-D045] 이들은 …… 추고하라 : 이것은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11년 11월 22일 기사에 수록된 내용이다. 종중추고(從重推考)는 벼슬아치에게 과실이 있을 때 죄과를 따져서 그중 중한 벌에 따라 징계하는 것을 말한다.[주-D046] 확고부동한 마음 : 개석(介石)은 자신의 신념과 어긋날 때에는 지조를 돌처럼 굳게 지키는 확고부동한 마음을 말한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군자는 기미를 보고 일어나 하루가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역에 이르기를 ‘돌처럼 절개가 굳은지라 하루를 마치지 않으니, 정하고 길하다.’ 하였다. 절개가 돌과 같으니, 어찌 하루를 마치겠는가. 결단함을 알 수 있다.[君子見幾而作, 不俟終日. 易曰, 介于石, 不終日, 貞吉. 介如石焉, 寧用終日, 斷可識矣.]”라고 하였다.[주-D047] 그림의 …… 같으니 : 아무 소용이 없는 어리석은 행위라는 말이다. 계주멱검(契舟覓劍)은 각주구검(刻舟求劍)과 같은 말이다. 초(楚)나라의 어떤 사람이 강을 건너다가 칼을 빠뜨렸는데, 서둘러 뱃전에 표시하고 말하기를 “여기는 내 칼이 빠진 곳이다.[是吾劒之所從墜]” 하였다. 배가 멈추자 표시한 지점에서 물속으로 들어가 칼을 찾았지만, 배는 가고 칼은 그대로 있었으므로 찾지 못했다고 한다. 《呂氏春秋 卷15 察今》[주-D048] 삼궁(三宮) : 원래 왕과 대비(大妃)와 왕비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인조(仁祖), 인목대비(仁穆大妃), 인열왕후(仁烈王后)를 말한다.[주-D049] 왕세자는 …… 남하하였다 : 1625년(인조3) 세자로 책봉된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분조를 이끌고 전주(全州)로 내려가서 민심을 수습했다.[주-D050] 성구(聖求)는 …… 있었고 : 이민구의 형 이성구(李聖求, 1584~1644)의 자는 자이(子異), 호는 분사(汾沙),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정관(政官)은 인사행정을 맡은 관직이다. 이성구는 1627년(인조5)에 이조 참의(吏曹參議)로서 분조를 호종하여 남하하였다. 《東州集 文集 卷7 伯氏領議政分沙李公神道碑銘 幷序》[주-D051] 적신(積薪)의 기롱 : 땔나무를 쌓아둘 때 먼저 쌓은 나무는 아래에 있고, 뒤에 쌓은 나무는 위에 있게 되는 것처럼, 조정에서 인사를 행할 때 신진 인사들을 먼저 선발하여 먼저 출사한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있게 만드는 것에 대한 기롱을 말한다. 한 무제(漢武帝)가 사람을 쓰는데, 먼저 벼슬한 사람보다 뒤에 벼슬한 사람을 높여서 쓰니, 급암(汲黯)이 “폐하께서 신하를 등용하는 것은 장작을 쌓는 것과 같아서, 뒤에 온 자가 위에 올라갑니다.[陛下用群臣, 如積薪耳, 後來者居上.]”라고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20 汲黯列傳》[주-D052] 제조(提調) : 제조는 잡무와 기술 계통 기관에 겸직으로 임명되었던 고위 관직이다. 각 사와 원에 관제상 우두머리가 아닌 종1품, 또는 2품의 품계를 가진 사람이 겸직으로 임명되어, 그 관청의 일을 지휘하고 감독한 관직이다. 제조의 제(提)는 거(擧)의 뜻이고 조(調)는 화(和)의 뜻이니, 제조는 한 관사의 사무를 조화롭게 처리한다는 뜻이다.[주-D053] 살아서의 …… 애도(哀悼) : 존몰애영(存歿哀榮)은 생영사애(生榮死哀)와 같은 말로, 생전이나 사후에 모두 영예스럽게 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자장(子張)〉의 “살아 계시면 영광스럽게 여기고, 죽으면 슬퍼한다.[其生也榮, 其死也哀.]”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주-D054] 흠잡을 것이 없으니 : 《논어》 〈태백(太白)〉에 “우 임금은 내가 흠잡을 것이 없다.[禹吾無間然矣]”라는 공자(孔子)의 말씀이 있다.[주-D055] 회재(晦齋) 이 선생(李先生) : 이언적(李彦迪, 1491~1553)으로,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이다. 《乙巳傳聞錄 晦齋李先生傳》[주-D056] 학계(學戒) : 이수광의 《지봉집(芝峯集)》 권20에 수록되어 있다.[주-D057] 풀어진 마음을 거두어들인다 : 수방심(收放心)은 《서경》 〈필명(畢命)〉의 “비록 그 풀어진 마음을 거두었으나 막기가 어렵다.[雖收放心, 閑之惟艱.]”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도 “학문하는 방도는 다른 것이 없다. 그 풀어진 마음을 찾을 뿐이다.[學問之道無他, 求其放心而已矣.]”라고 하였다.[주-D058] 나이 오십 : 지비(知非)는 50세가 되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大夫) 거백옥(蘧伯玉)이 “나이 50세에 49년 동안의 잘못을 알았다.[年五十而知四十九年非]”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淮南子 原道訓》[주-D059] 진덕수업(進德修業) : 덕을 진전시키고 학업을 닦는다는 뜻이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군자는 덕을 진전시키고 학업을 닦나니, 충과 신이 덕을 진전시키는 것이고, 말을 함에 그 성실함을 세움이 학업을 닦는 것이다.[君子進德修業, 忠信, 所以進德也, 修辭立其誠, 所以居業也.]”라고 하였다.[주-D060] 자신잠(自新箴) : 이수광의 《지봉집(芝峯集)》 권20에 수록되어 있으나, 이 글과는 약간의 출입이 있다.[주-D061] 겸허(謙虛)하고 …… 같았지만 : 평소 이수광이 겸손한 태도를 견지했다는 말이다. 약불승의(若不勝衣)는 공손한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주공(周公)이 부친 문왕(文王)을 섬길 때에 너무도 공손하여 “몸은 옷을 가누지 못할 듯하고, 말은 입 밖에 나오지 못할 듯했다.[身若不勝衣, 言若不出口.]”라고 하였다. 《淮南子 氾論訓》[주-D062] 여대방(呂大防) : 송(宋)나라 남전(藍田) 사람으로, 자는 휘중(徽仲),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유학의 실천을 중시하였고 향촌의 질서 유지와 상호 부조를 목적으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조직하였다. 여대방은 성품이 박후(朴厚)하고 강직하여 붕당을 만들지 않고 왕실을 도왔다. 조정에 우뚝 서서 공평무사하게 백관을 진퇴(進退)시켰는데, 8년 동안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다고 한다. 《宋史 卷340 呂大防列傳》[주-D063] 범조우(范祖禹) : 1041~1098. 송(宋)나라 화양(華陽) 사람으로, 자는 순부(淳夫)이다. 그는 진강할 때에 고의(古義)를 열거하고 시사(時事)를 곁들여 말하였는데, 그 말이 간략하면서도 합당하여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었으므로, 소식(蘇軾)이 그를 강관(講官) 중에 제일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宋史 卷337 范祖禹列傳》[주-D064] 사대부들이 …… 열렸다 : 사대부들이 스스로의 지조를 지키지 않고 출세를 위해 아부와 아첨을 일삼았기 때문에 자격도 없는 사람이 요행히 관직에 나가는 경우가 생겨났다는 말이다. 염우(廉隅)는 행실이 단정하고 의지가 견고한 것을 말하며, 사람이 지켜야 할 지조를 뜻하기도 한다. 《예기》 〈유행(儒行)〉에 “예절을 가까이 하여 강구하고, 염우를 갈고 닦는다.[近文章, 砥礪廉隅.]”라고 하였다. 반부(攀附)는 반룡부봉(攀龍附鳳)의 준말로, 제왕 혹은 명사(名士)에게 몸을 의탁하여 이름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이 지은 《법언(法言)》 〈연건(淵騫)〉에 “용의 비늘을 끌어 잡고 봉의 날개에 붙는다.[攀龍鱗附鳳翼]”라고 하였다. 행문(倖門)은 요행을 바라는 소인이 진출할 수 있는 권문(權門)을 이른다.[주-D065] 심희수(沈喜壽) : 1548~1622.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606년(선조39)에 좌의정이 되었다. 《樊巖集 卷46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諡文貞公一松沈公神道碑銘》[주-D066] 연흥(延興) 김공(金公) : 김제남(金悌男, 1562~1613)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언(恭彦)이다. 1602년(선조35) 둘째 딸이 선조의 계비가 되자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고, 왕비로 책봉되자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에 봉해졌다. 《象村稿 卷24 延興府院君墓誌銘》[주-D067] 재앙이 일어나자 : 1613년(광해군5)에 일어난 계축화옥(癸丑禍獄)을 말한다. 1608년에 대북파(大北派)의 정인홍ㆍ이이첨 등이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이유로, 소북(小北)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소북을 모조리 몰아낸 일이 있었다. 그 뒤 계축년(1613)에 다시 역모사건을 꾸며 영창대군의 외조부이며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을 사사하게 하고,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켜 강화도에 수금(囚禁)했다가 살해하였으며, 기타 당대의 명류(名流)들까지 제거한 사건이다.[주-D068] 서간(書簡) : 혁제(赫蹏)는 옛날에 글씨 쓰는 데 썼던 폭이 좁은 비단을 말하는데, 종이를 칭하는 말로 전용되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작은 종이에 써서 타인에게 보내는 서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주-D069] 잘 이끌어 주기를 : 안연(顔淵)이 크게 탄식하며 “부자께서는 차근차근히 사람을 잘 이끄시어, 문으로써 나의 지식을 넓혀 주시고 예로써 나의 행동을 요약하게 해 주셨다.[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라고 한 말이 있는데, 이를 원용하였다. 《論語 子罕》[주-D070] 문을 …… 지켜 : 세상에 나서지 않고 마음을 편히 가진다는 말이다. 정수(靜守)는 습정수졸(習靜守拙)의 준말로, 습정은 마음을 항상 고요하고 맑게 가지는 것이고, 수졸은 세상과 어울리기 위해 교사(巧詐)한 짓을 하지 않고 분수를 지켜 나가는 것이다.[주-D071] 심의(深衣) : 선비가 입던 웃옷이다. 대개 흰 베로 두루마기 모양으로 만드는데, 소매를 넓게 하고 검은 비단으로 가를 두른다. 허리 위는 네 폭, 허리 밑은 열두 폭으로 만들어서 춘하추동 사시와 1년 열두 달을 상징하였다.[주-D072] 임종(臨終) : 속광(屬纊)은 임종 때 솜을 코 밑에 대어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임종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주-D073] 신 문정공(申文貞公) : 신흠(申欽, 1566~1628)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ㆍ상촌(象村), 시호는 문정이다. 《月沙集 卷44 領議政贈諡文貞申公神道碑銘 幷序》[주-D074] 간이(簡易) 최립(崔岦) : 1539~1612.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ㆍ동고(東皐)이다. 《記言 卷18 簡易堂墓誌》[주-D075]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 1556~1615.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이다. 《五山集 續集 卷4 行狀》[주-D076]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 : 1542~1621.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여경(餘慶), 호는 남창이다. 《谿谷集 卷7 南窓雜稿序》[주-D077] 권경(權儆) : 1582~161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오(警吾)이다.[주-D078] 이일상(李一相) : 1612~1666.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함경(咸卿), 호는 청호(靑湖)이다. 이정귀(李廷龜)의 손자이며, 이명한(李明漢)의 아들이다. 《芝村集 卷23 伯父靑湖府君墓誌》[주-D079] 윤휘(尹暉) : 1571~1644.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정춘(靜春), 호는 장주(長洲), 시호는 장익(章翼)이다. 《東州集 文集 卷10 刑曹判書長洲尹公墓碣銘 幷序》[주-D080] 오준(吳竣) : 1587~1666.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여완(汝完), 호는 죽남(竹南)이다. 《藥山漫稿 卷18 高祖輔國崇祿大夫……世子左賓客府君墓誌銘》[주-D081] 유정량(柳廷亮) : 1591~1663.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룡(子龍), 호는 소한당(素閒堂)이다. 1604년(선조37) 선조(宣祖)의 딸 정휘옹주(貞徽翁主)와 혼인하여 전창위(全昌尉)에 봉해졌다. 1612년(광해군4) 할아버지 유영경(柳永慶)의 사건으로 일가가 멸족될 때 전라도 고부에 유배되었다가, 1619년에 경상도 기장(機張)으로 이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작위가 회복되어 숭덕대부(崇德大夫)에 승품되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성록대부(成祿大夫)에 이르러 세훈(世勳)을 물려받고 군(君)에 봉해졌다. 《東州集 卷10 全昌君柳公墓碣銘 幷序》[주-D082] 신변(申昪) : 1610~1664.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중열(仲悅), 호는 춘주산인(春州散人)이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의 아들이다. 《歸溪遺稿 卷下 故秉節校尉翊衛司洗馬申公墓誌銘》[주-D083] 권제(權躋) : 1604~1657. 1657년(효종8) 2월에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부임하여 8월에 임지에서 사망하였다.[주-D084] 권적(權蹟) : 161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유(聖由)이다.[주-D085] 권지(權趾) : 1613~? 본관은 안동, 자는 성초(聖初)이다.[주-D086] 윤원거(尹元擧) : 1601~1672.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백분(伯奮), 호는 용서(龍西)이다. 《龍西集 附錄下 龍西先生行狀》[주-D087] 김정곤(金挺坤) : 1601~?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예달(禮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