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길장편소설
야망의 계절 제 4 부 '악마의 불춤' 5 편
경은이 화재 다음 날부터 결코 젊은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바지에 간단한 파카차림으로 복구 작업을 도왔다. 복장이 우습고 대견해 놀린답시고 웬 그런 바지냐는 성수의 물음에 경은은 키득키득 웃으며 자신의 어머니 것을 몰래 가져왔다고 했던 옷이다.
“뭐, 별일 아냐.”
“무슨 대답이 그래?”
경은이 한 쪽 고무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난 또 화재 추궁을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이런저런 얘기가 있었지만 요점은 수익을 예전과 같이 반반씩 한다는 거지.”
“추궁은 무슨 추궁이야, 죽기 살기로 대드는 사람을 어찌 감당하라구. 근데 오빠, 사장 사모님이라는 사람, 좀 영악해 보이지 않어?”
“영악하다니?”
차량 문은 잠그려다 말고 되돌아본다.
“생각해 봐, 사장 입장에서는 오빠가 구세주지. 기력이 딸려 도무지 서울과 부산을 오갈 수 없었던 상황에서 믿음가지, 몸 안 아끼지, 일 잘하지, 머리 팍팍 돌아가지, 붙임성 좋지, 착하지, 아이구 손가락이 모자라네.”
경은이 고무장갑의 검지로 벗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 하다가 ‘착하지’에서 손을 내리고 다시 말을 잇는다.
“여기를 처분하기도 그렇고, 오빠 같은 사람에게 맡기는 것으로 가만 앉아서 매달 돈을 세잖아, 안 그래? 난 이런 꿍꿍이가 사모님인가 하는 사람 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해. 조용하면서도 차근한 성격으로 볼 때 말야. 하긴 뭐, 서로 좋은 거니 탓할 순 없지만.”
경은이 말을 끝내고 조금은 찔렸다. 영악하다면 사장 쪽 보다 오히려 자신이었으니까.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주인이 챙긴다고, 주인이 ’곰‘이라는 동물을 투자했으니 ’돈‘을 챙기는 것은 당연하다. 사장이 ’오빠와 자리‘이라는 ’곰‘을 투자했고 ’오빠와 자리‘는 재주를 부려 ’돈‘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보면, ’나’라는 주인은 ’자신의 전부‘라는 삶을 투자했고 ’오빠‘는 ’열정‘이라는 재주로 ’서로의 야망‘을 생산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맞아도 어쩌면 이렇게 징그럽게 딱 들어맞을 수 있을까. 아니, 아니지. 조금은 틀려야 한다. 나도 ’곰‘이다. 사장의 ’곰‘ 말이다. 오빠와 나는 한 통속이니까. 그러고 보면 사장 사모님이라는 사람의 영악과 나의 영악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닌가. 최근에 스멀스멀 피는 사랑이라는 감정만 제외하면 말이다.’
경은이 딱 들어맞지 않다고 부정하면서 나 과장의 학습효과로 괜한 말을 한 것이라고 후회한다.
“무슨 생각?”
“으응, 좀 지나쳤나? 뭐,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상인이라면 누구나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으니까.”
서둘러 발을 뺀다.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네.”
뜨끔했던 경은이 안도했다.
고무장갑을 다시 낀 경은이 이번엔 원룸을 묻는다. 틈만 나면 수원에서 출퇴근하기가 여간 아니었는데 이번 기회에 구하겠다는 성수의 말을 기억하고서다.
“어제 구했어.”
“구했다구?”
경은이 토끼 눈처럼 눈알이 굵어졌다.
기다리고 있었는데, 물어 보면 언제쯤 같이 구해보자는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경은이 야속한 시선을 쏘아 붙였다. 눈물이 핑 돌 지경이다.
“미안, 그럴 일이 좀 있었어.”
“몰라!”
“어머니께서 구해 놓고 갑자기 연락한 거야. 너랑 같이 갈까 하다가 그만뒀어. 알잖아, 잡아먹을 듯 벼르는....”
“그럼, 형숙이라는 여자도 있었겠네?”
잠깐 생각한 경은이 심한 질투를 드러냈다.
“그게 뭐가 중요해?”
“그럼, 중요하지 않아? 오빤 몰라도 난 중요해. 암 중요하구 말구. 왜냐구? 단순히 질투 때문만은 아니냐. 이건 순전히 오빠 문제야.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오빠의 태도 말이야. 기색만 보여선 안 돼, 딱 부러져야 한다구. 아무리 어머니의 지원을 받는다고 하지만 난 네가 싫으니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이렇게 말이야. 왜 말 못 하느냐구?”
투정의 경은이 결국 울음을 터트리며 쪼그려 앉았다. 무릎에 양팔을 역어 올린 자리에 고개를 묻은 경은이 어깨를 들썩거린다. 당황한 성수는 경은을 일으켜 세워 자신의 차로 데려갔다. 차가운 기운을 이긴 겨울햇살이 차량 전면유리에 매달려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말해봐, 왜 말 못하느냐구?”
경은을 앉히고 돌아서 운전석 오른 성수를 재촉했다.
"그럼, 경은이가 말해 봐. 내가 여태 너에게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말 한 적 있었어?“
“무슨 뜻?”
경은이 눈이 부신 듯 햇빛가리개를 접으며 말했다. 성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가리개를 내리며 뜻을 물었던 경은이 손을 내리기까지 짧은 시간, 마지막 부분에서 뜻을 이해했다. 마치 형광등 스위치 버튼을 누르고 방이 환해질 때까지라고 할까.
“아, 그런가?”
먼저 말을 뱉고 다음을 수습했다.
하지만 남자는 몰라. 보호받으려는 본능에 익숙한 여자의 마음을. 태도도 태도지만 사랑받는다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쯤 듣는 것으로 감격하는 게 여자거든. 만약 남자가 이런다면 좀생이 소리를 듣지만 여자는 흠이 되지 않아.
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기분을 알고, 상대는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기분을 안다는 기분을 알면 눈치로서의 서로의 믿음을 깊은 것일까, 경은이 울음을 그쳤다.
“그 여자 어때?”
“어떤?”
“좋아?”
“실망이다. 너 답지 않게 자꾸 왜 그래?”
“내가 어땠는데?”
‘답지 않게’에서 정면을 보던 경은이 얼굴을 성수 쪽으로 돌렸다. 붉은 눈자위를 결국 보이고 만다.
“부산에서 꾼 꿈 얘기해 줄까?”
“동문서답?!”
“아니야.”
“그럼?”
성수는 경은이 부모에게 끌려 수원으로 갔던 밤, 꿨던 꿈을 들려줬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졌고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어. 난, 현실인 줄 알았어. 얼마나 춥고 무서웠다고.”
“어머니와 내가 나타나 구해줬다구?”
“응.”
“그러고 바로 수원으로 왔다구?”
“응, 내가 왜 꿈 이야기를 하는 줄 알지?”
“알어.”
“그럼 됐어.”
경은이 꿈과 현실은 다르다는 것쯤은 안다. 혼동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쯤도 안다. 사람들은 꿈은 현실과 정반대로 나타난다고들 말하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그가 꿈에서 자신이 죽기 전에 경은이 도운 것을 지금 그 자신을 버리는 뉘앙스를 주는 것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실망이라면서 ‘답지 않게’를 덧붙였으니까.
그리고 ‘내가 왜 꿈 이야기를 하는 줄 알지?’와 ‘그럼 됐어.’로 어쩌면 ‘실망’이라는 말도 진심이 아니라 투정하는 자신을 가볍게 받아 넘기는 흐름에서 오는 대화의 순서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직선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상대는 알아차릴 만큼 자신을 잘 알 것이라는 믿음에서 오는 결론을 생각한 일종의 과정이랄까.
조금 전 형숙의 일로 상했던 기분이 한꺼번에 치유된 경은이 감격하여 성수의 허벅지에 얼굴을 기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