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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회화는 크게 직업화가가 그린 그림(원체화)과 문인화의 두 계열로 나눈다. 한편으로는 채색화와 수묵화로도 나눈다. 이사훈-이소도는 청록산수의 화가로서 수묵화의 반대편에 선 화가이다.
수나라 때 전자건이 그린 유춘도로서 청록산수로 그렸다. 이 그림은 중국 미술사에서 고개지의 그림에서 발전한 양상을 보여준다. 이 양식의 그림을 이사훈-이소도가 이었다.
명황행촉도--이소도 그림이라고도 한다. 이 그림은 송나라 때의 모사이다. 당 현종이 촉으로 피난을 가는 내용이다.
전자건이나 이사훈의 그림은 전칭이거나, 모사본이다. 이 그림은 의덕태자의 벽화이다.(705) 이사훈이 살았던 시대에 만든 벽화이므로 그때 사람이 그린 실제의 그림이다. 배경에 산수화가 보인다.
이사훈(李思訓)과 이소도(李昭道)
중국 산수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둔황의 벽화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측천무후 시대에 굴착한 둔황 석굴에는 여러 개가 있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정치적 뜻을 펴기 위해서 불교에 많이 의존하였다. 대운사라는 절을 전국에 세우고 자신이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선전하였다. 둔황의 321굴은 무후가 자신을 선전하기 위해서 뚫은 굴로서 보우경변의 벽화를 그렸다. 이 벽화는 무후의 정치적 의도 이외에도 산수화의 발전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중첩되는 녹색의 산봉우리는 화면을 작은 공간으로 무수히 나누었다. 각 공간마다 활기차게 움직이는 장면을 다양하게 그렸다. 북위의 석관에 새겨진 그림이나 낙신부도에서 나무는 단순히 화면을 구분 짓는 역할만 한다. 둔황 벽화에서는 산수의 여러 요소들은 거대한 한폭의 산수화로 통일시키는 역할을 한다.
둔황 323 굴에도 불교 벽화가 있다. 배경은 산수의 그림이다. 산수는 멀리 뒤쪽으로 이어지면서 경물과 인물을 점점 작아지게 그렸다. 원근법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323굴의 산수화는 윤곽선을 그리지 않았다. 몰골법으로 채색하여 그린 청록산수이다. 이사훈과 이소도가 윤곽선을 그리고 채색을 한 구륵 산수화와는 다르다.
유춘도(遊春圖)는 구륵을 그리고 채색을 한 구륵 산수화이다. 수나라 때의 전자건이 그렸다고 하나 당초의 작품을 송나라 때 모사한 작품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산의 봉우리와 넓게 펼쳐진 물가의 정경과 산길을 걷는 나그네를 그린 것은 둔황의 벽화에 그려진 산수화를 많이 닮았다. 세밀한 필법으로 그렸고, 윤곽선을 정교하게 그린 것은 청록산수화의 계보를 생각하게 해준다.
중국화화사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사훈과 이소도가 구륵 청록산수 양식을 창안하였다고 말한다. 측천무후가 재위한 이후에 널리 유행한 이 양식은 수와 당의 초기 시대가 끝날 즈음에 나타난 궁정회화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사훈(653-718)은 측천무후가 통치하던 시절에 청장년기를 보냈다. 이효빈은 당 고조의 사촌인 장평왕(長平王) 이숙량의 아들이었다. 이사훈은 당 황실의 이효빈의 아들이었으므로 무후의 눈을 피해 숨어 지냈다. 무후는 당 황실에 대해서는 잠시도 감시의 눈을 늦추지 않ㄷ았다. 이상한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가차 없이 목숨을 앗아갔다. 704년에 무후가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고(705) 나서야 궁으로 돌아와서 중정경(中正卿) 벼슬을 하였다. 이때는 나이가 50이 넘었으므로 이전에도 그림을 그렸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남아 있는 그림이 한 점도 없을뿐더러 기록조차도 없다. 이후로 익주장사, 좌우위대장군, 팽국군의 높은 벼슬을 하였다.
이사훈 집안은 화가를 많이 배출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동생 이사회(李思誨)는 통정대부 양주참군을 하였다. 죽은 후에는 예부상서로 추증되었다. 이사회의 아들인 이임보가 당 현종 때 오래 동안(736-752) 재상을 역임하였다. 이임보는 가문의 청록산수를 이어받아 그림을 잘 그렸다. 이사훈이 죽은 후에는 서예가 이옹(李邕-해서와 행서를 잘 썼다. 이임보의 음해로 장살 당하였다.)이 쓴 비문이 묘지에 있다.
아들인 이소도의 생몰 년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활동 시기는 현종 때로 본다. 벼슬이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에 이르렀다.
구륵 청록산수는 이사훈과 아들 이소도가 양식을 완성하였다고 전해 온다. 청록산수는 무후가 집권한 이후에 널리 유행하여 하나의 양식으로 자리를 잡았으므로 창안자라기 보다는 청록산수를 잘 그린 화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시기는 나라가 안정되고 번영하였던 때이다.
당 왕조가 중국을 통일하여 다스린지도 일 세기 쯤 되었다. 건국 초기의 국가는 엄숙한 정치적 회화양식을 요구한다. 국가가 안정되면 국가의 통제는 느슨해진다. 예술에서도 표현의 자유를 허용한다. 왕실과 귀족도 풍요로운 생활에 젖어 유미주의로 흐르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화려해지고, 장식적인 경향을 띈다. 이사훈과 이소도가 활동하였던 현종 년간이 바로 이와같은 시기였다. 궁중화가들은 궁실의 취향에 맞추어서 주제보다는 시각적 효과에 힘을 쏟았다.
이사훈과 이소도는 황족이었고 벼슬도 높았다. 당대의 화가들에게 미치는 영향력도 막강하였다. 많은 화가들이 청록 화풍을 추종하면서 이들 부자를 청록산수의 창안자로 추켜 세웠다. 수나라 때 전자건이 그린 유춘도는 이미 구륵 청록산수화 양식을 잘 보여준다. 이사훈-이소도 부자 이전에 그려진 둔황 막고굴의 벽화에도 청록산수화 양식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사훈 일가가 그린 청록산수는 새로운 풍격을 가진 창작 회화였다. 당시의 화가들이 이사훈 부자의 양식을 많이 따랐다.
이사훈 산수화의 특징을 꼽으면, 첫째 그림의 제재를 역사적 사실에 취하였다. 인물도 함께 그렸다. 둘째는 회화의 구도가 한 부분을 그린 것이 아니고 전체적인 경관을 그렸다. 하늘에서 산속의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전부를 그렸다. 한 화면에 산속의 나무에서 물가의 풍경까지 모두를 담았다. 셋째는 붓의 사용에서 일정한 변화를 주었다.
아들 이소도는 아버지의 청록산수를 그대로 이어받아서 그렸다. 그러나 아버지보다 솜씨가 더 뛰어나서 훨씬 더 정밀하고 세밀하게 그렸다. 이사훈-이소도는 중국회화사에서 청록산수를 창시하였다고 말하나 양식을 완성하였다고 옳은 말이다. 청록산수는 문인화를 논할 때 가장 흔히 대비되는 회화이므로 회화사에서 많이 거론하는 회화양식인지도 모른다. 이름은 많이 알려져 있으나 남아 있는 작품은 거의 없다. 높은 벼슬을 하면서 그림을 그릴 시간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청록산수화는 그림을 그리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므로 많은 작품을 그리지 못 하였을 수도 있다.
당조명화록(唐朝名畵錄)에 이런 일화를 기록하였다. 당 현종이 오도자와 이사훈에 명하여 촉의 산수를 그려오라고 하였다. 오도자는 하루 만에 그려 왔으나 이사훈은 여러 달이 걸려서야 그림을 완성하였다. 현종은 두 그림이 모두 뻬어나다는 평을 하였다. 그러나 평의 내용을 꼼꼼이 보면 오도자에게 무게가 더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미술의 흐름에서 청록산수 화풍이 멀지 않아서 퇴조하고 오도자의 화풍이 유행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씨 부자의 활동 년대가 약간은 모호하였으나 이 일화가 이들의 활동 년대를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이사훈의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송의 왕실이 회화를 좋아하여 수장하면서 남긴 기록에 이사훈의 작품이 십 여 점 포함되어 있다. 송나라 때는 착색 산수화가 유행하였다. 송대의 화가들은 착색 산수화의 뿌리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많은 기록도 남겼으나 유래가 너무 다양하여 누가 창안하였는지를 알아내지 못 하였다. 오히려 헷갈리게 하였다. 어쨌거나 당나라 이사훈 부자에게서 연원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사훈은 인물, 누각, 청록산수를 아주 화려하고 세밀하게 그렸다. 금벽(金碧-노랑과 푸른 빛=곱다는 뜻이다.) 산수화의 창시자라고 불린다. 대만의 고궁 박물관에 소장된 강범누각도(江帆樓閣圖)는 이사훈의 작품과 많이 닮았다. 원작을 그대로 모방한 전세(傳世) 작품이라고 말할 뿐 아니라 당나라 초기의 산수화를 잘 반영하였다고 평한다. 앞에서 열거한 이사훈 산수화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말한다. 누대 위에서 강과 강 주변의 산록을 내려다 본 풍경을 그렸다. 그림의 윗 부분은 강물과 떠 있는 배, 그리고 인물을 그렸다.아래 부분은 산자락에 빽빽하게 들어선 수목을 그렸다. 바위와 꽃 사이에 누대가 있다. 오른쪽에는 강무이 굽이친다. 말을 탄 사람과 걸어가는 사람을 점점이 그렸다. 가운데는 산이 높이 솟아있고 나무들이 울울하게 들어찼다. 산속 깊숙한 곳에 집이 있는 정경이 무척 고요롭다. 그림은 전반적으로 세필로 그렸다.
대북의 고궁박물관에는 같은 작품을 모작한 두 점의 회화가 있다. 명황행촉도(明皇行蜀圖)와 춘산행려도(春山行旅圖)이다. 안록산 난 때 당의 현종이 촉으로 피난 가는 것을 소재로 하였다. 지금은 이사훈의 명황행촉도라고 하는 작품이 여러 본(本) 전해 온다. 현종이 촉으로 피난을 갈 때는 이미 이사훈은 죽은 후이다. 이사훈이 그렸을 리 없다. 그러나 그림의 양식은 성당 시절의 그림으로서 이사훈 화풍을 따랐는 것은 맞다. 후대에 그린 이사훈의 모작품이 수없이 많다 하더라도 이사훈의 화풍을 따라서 그린 것은 틀림 없다. 두 건의 모작 중에 옆으로 펼치도록 그린 그림이 대표성이 있다고 한다.
이 작품을 이사훈이 아닌 이소도의 작품이라는 주장이 더 많은 지지를 받는다. 이소도는 태자를 모시는 중사인(中舍人)이라는 벼슬 즉 태자의 시종으로서 황제와 함께 촉으로 갔을 가능성이 많다. 당 현종이 피난 가는 정경을 그는 그릴 수 있었다.
당나라 회화사에서 이소도에게는 또 하나의 명예를 부여 하였다. 바다 그림(海圖)의 창시자라고 한다. 작품으로 해안도(海岸圖), 해천낙조도(海天落照圖)가 있다. 원나라 때는 이소도의 필묵은 모두 전자건의 그림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평했다. 명나라의 두목견은 해천낙조도를 당나라 최고의 그림이라고 칭찬하였다. 요령 박물관에는 구영이 모사한 그림이 소장되어 있다. 이사훈 부자는 인물과사화를 그리면서 산수화가 위주이고 인물은 보조적으로 그리는 양식을 만들므로 산수화 발전에 공헌이 많다.
당나라 산수화를 말할 때 오도자가 시작하여 이사훈이 완성하였다고 말한다. 오도자는 필법으로 산수화를 그렸다. 즉 선묘 위주의 그림을 그렸다. 이사훈 부자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그린 산수화에 채색을 하여 당나라 양식을 만들었다.
수에서 당나라 초기까지에 회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이때는 사실적 묘사를 선호하였다. 산수화에서 사실적인 묘사는 다른 장르의 회화에 비하여 어려웠다. 오도자는 필선으로 정밀하게 묘사하면서 변화를 꾀하였다. 이사훈 부자는 필법의 기초 위에 총체적인 분위기를 나타내는 전경반조감식(全景半鳥瞰式)이라는 양식을 만들었다. 그림의 분위기를 시각적 효과와 장식성을 중요시 하였다. 이것은 당나라 산수화의 한 양식일 뿐아니라 후세에 나타나는, 화려하고 장식성이 강한 청록산수의 뿌리가 되었다.
청록산수의 뿌리를 따진다면 수의 화가 전자건의 유춘도를 빼 놓을 수 없다. 일부 학자는 이사훈 부자를 전자건 무리라고 평가하였다. 유춘도는 송의 휘종이 좋게 평가함으로 유명해졌다. 이로서 유춘도는 중국의 초기 산수화의 대표작이 되었다.
유춘도는 대북의 고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견본설색(絹本設色)의 청록산수화이다. 전경(全景) 방식이고 횡폭으로 그리므로 광활하게 펼쳐진 정경을 보여준다. 화면은 산수가 위주이고 말과 사람은 작게 그렸다. 유춘도는 중국 초기 산수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평한다. 색채는 청록이고 용필에서는 아직 준법은 보이지 않는다. 유춘도도 송대에 모사한 모본으로 본다. 모본에는 원본의 부분이 많이 바뀐 부분도 있으리라고 한다.
위진남북조에서 초당 시기에는 중국의 산수화가 걸음마 수준에서 점차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산수화에도 사회문화적이 요소들이 표현되었다. 성현의 가르침을 형상화 함으로 도덕적인 주제를 나타냈다. 산수화의 제재가 산과 물과 구름의 자연 풍광을 담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구름을 통하여 행운유수(行雲流水)의 사유를 나타냄으로 은둔의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중국 초기의 산수화에도 특징이 있다. 수목을 그리면서 잎의 표현은 손을 펼친 듯이 하였다. 사람이 산보다 더 크다. 물은 배가 뜰 수 없는 정경으로 그렸다. 이러한 표현이 수-당 대에 이르면 새로운 표현 기법이 나타났다. 먼저 산수의 정경을 부분 부분으로 나누지 않고 한 화면의 그림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여 통일성을 지니도록 그렸다. 사물을 하나 하나 배열하는 행렬식 구도에서 서로 겹치는 구도로 바꾸었다. 반부감도적 각도에서 그리므로 화가가 신적 위치에서 관찰자가 되었다. 하나의 화폭에 원근과 대소 형상을 표현하였다. 용필에서 대상물의 특징적인 요소만 표현하였다. 윤곽선을 그리고 안은 동일색으로 채웠다. 용필과 형상 표현이 다양해지면서 고개지 회화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한 것이 전자건의 유춘도이다. 이사훈과 이소도는 유춘도의 맥을 이었다. 그러나 유춘도도, 이사훈 부자의 그림도 진본이 아니고 모본이라고 하였다.
수-당 시대에 그린 진본은 남아 있지 않을까? 다행히 섬서성 건현에 있는 의덕태자 이중현의 묘에 산수를 그린 벽화가 남아 있다. 묘의 벽화를 그린 시기가 유춘도와 이사훈의 그림의 중간 시기 쯤 된다. 의덕태자 묘의 벽화와 이사훈의 그림을 서로 연결시킬 수 있는 자료도 발견된다.
의 덕태자 이중윤(682-701)은 중종의 장자이다. 701년에 동생 영태공주, 제매 무연기와 함께 궁궐 복도에서 할머니인 무후를 비난하다고 사약을 받았다. 무후가 퇴위한 후에 다시 태자의 직위를 되찾았다. 705년에 태자의 예를 갖추어 조성한 무덤이 의덕태자 묘이다. 의덕태자의 묘를 능묘로 새롭게 만든 것은 이씨 황족의 권위를 되찾는다는 정치적 의미를 담았으므로 화려하게 축조하였다. 의덕태자 능묘 축조에 이사훈이 관여하였다는 자료가 있다. 왕실의 업무를 관장하는 중정경의 직위는 의덕태자의 장례도 담당하였을 것이다.
능묘의 전실 천정에 양변이라는 화가가 쓴 제기가 있다. 장언원은 역대명화기에서 양변을 ‘이장군 양식의 산수화에 능했다.’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능묘의 천정에 명기된 양변과 동일인이라면 이장군(이사훈) 양식의 산수화(청록산수)에 능했다는 기록이다. 경사가 진 묘도의 벽에는 길이가 26m나 되는 거대한 벽화가 있다. 산맥을 표현한 그림도 있다. 산위에는 바위가 층층이 쌓여 있다. 깊은 협곡이 여기저기 펼쳐지고 산 사이에는 수목도 그렸다.
이 벽화는 색채가 다양하다. 입체감을 강조하기 위해서 색채에 변화를 주었다. 농담으로 표현하였다. 윤곽선을 따라 석록의 채색을 한 것은 청록산수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위덕태자의 능묘 벽화는 명황행촉도의 선과 색의 배합과 바위 형상에서 서로 닮았다. 이로서 명황행촉도가 비록 모본이더라도 원래의 바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림의 양식은 비슷하지만 명황행촉도의 구도와 색상은 훨신 더 복잡하다. 따라서 명황행촉도를 의덕태자 능묘의 벽화보다는 후대의 작품으로 본다.
중국 회화가 문인화 중심으로 편성되면서 청록산수를 그린 이사훈 부자를 평가 절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회화사의 입장에서 보면 절대로 빠뜨려서는 안 되는 화가이다.
첫댓글 관심이 많습니다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