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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성의 패역 1
(창 19: 1-11)
(요약)
소돔성의 패역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악한 심성을 본다.
어둠에 짙은 소돔성에 천사가 찾아오듯 성령께서는 완악한 죄인일수록 더 큰 은혜로 다가와 죄악을 소멸하시고 세속에서 구원코자 하신다.
그러나 롯이 간청할 때 비로소 들어왔듯 성령 충만을 위해서는 충성된 믿음생활이 필요하다.
조심해야 할 것은 소돔성 사람들이 천사를 육정으로 취하려 했듯이 육신의 욕망을 위해 하나님의 은사와 복을 취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선물은 첫째가 믿음 완성을 위해서 주시는 것임을 명심하자.
(강해)
본문은 소돔 성 거민들의 음란상과 폭력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롯의 집을 방문한 두 천사를 집단적으로 성폭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래도 도움을 받을 사회적인 제도장치가 없는 죄악이 일상 보편화되어 있는 소돔이었습니다. 사1:10에 소돔의 관원들을 꾸짖는 것으로 보아 관원들부터 죄악에 앞장섰고, 사3:9에 “그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아니함이 소돔과 같”다 한 말씀이 그 증거입니다. 타락하고 패역한 소돔성 이것이 본문의 문자적 이해입니다.
그런데 소돔은 세상의 상징입니다. 세상이란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결국 타락한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타락했다란 사람들이 타락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소돔 성의 이 패역이 숨어 있는 인간의 욕망이 사회적으로 표출되었다는 점을 주시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법이나 윤리 등으로 규제를 받기에 거룩한 듯 보이지 다 벗겨놓고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건에서 우리 인간의 죄악의 속성이 어떤 것인가를 적나라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본문을 통해 잊지 말 것은 패역한 소돔에 두 천사가 찾아오듯 오늘도 죄악으로 얼룩진 인간에게 성령께서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소돔을 찾아온 두 천사와 같이 지금 우리 인간의 악한 심성에도 성령께서 찾아오십니다. 영적인 원리는 같습니다. 그러므로 소돔 사건을 비유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성령의 역사란 어떤 것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성령의 외적인 역사는 진리가 어둘 때 도움으로 임하십니다.
1-2절에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찌기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했습니다.
두 천사가 소돔에 도착한 때가 날이 저물 때였습니다. 성경이 왜 때까지 이렇게 자세히 기록했는가? 무언가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랬는데 이처럼 성령의 은사는 진리에 어둡거나 완악할 때 더욱 임할 필요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경험하면서 보지만 말씀이 풍성하거나 마음이 유순한 사람들에게는 은사는 그렇게 풍성하게 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만 가지고도 대부분 충분한 영적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사가 필요 없을 만큼 온전한 사람은 없기에 나는 필요 없다 교만하지 말고 은사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은사가 지나칠 만큼 주어지는 사람들 보면 대부분 진리에 대해서 지나치게 무식하거나 완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완악한 사람은 잠시 죽여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 그래서만은 아닙니다. 처해 있는 환경이 심히 악할 때도 상상할 수 없는 도움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혹은 임종으로 앞에 두고 있는 경우에도 소망을 잃지 않도록 나타내 주십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장성하여 성령 충만하면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은사라고 함부로 비하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 외적인 은사는 영적으로 어두울 때에 즉 무식하거나 완악하거나 환경이 악할 때 우리를 도우시는 손길로 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귀한 은혜입니다.
2. 성령의 역사는 간절히 간구해야 임합니다.
3절에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그랬습니다.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을 때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롯이 두 천사를 처음 보았을 때는 천사인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롯은 다가가 땅에 엎드리어 절하며 하룻밤 집에 머물다 가기를 청합니다. 이것은 결코 마음에도 없는 간청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롯이 성문에 앉았던 것은 성문이란 정치 입법 사법 행정 만남 등 모든 삶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거기 찾아오는 누군가 도울 자를 찾아서 기다림이었습니다. 저물었다고 한 것을 보니까 아마도 종일토록 도울 자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그랬기에 기다렸던 것이고 중심에서 원하던 것이었고 영접하는 그 자세를 보아 겸손하게 중심에서 하는 간청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얼마나 이상한 대답입니까? 그들은 분명 롯을 위해서 소돔에 왔지만 롯이 아주 간절히 청하기 전에는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사건일까요? 성령의 역사하심의 특성이 꼭 그렇다는 것입니다. 분명 성령의 역사는 우리를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우리가 거절하지 않으며 늘 원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우리 곁에까지 와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간곡히 간절히 진실로 간청하지 않으면 충만히 임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려면 매일 열심히 몸과 마음과 힘을 다해 기도하고 사모하고 힘쓰고 애써야합니다. 성령의 역사란 나도 모르게 기도 없이도 임할 때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누가 기도했더라도 기도했기 때문이며 어떤 외부적인 영향력이라도 그만한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임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도 간단히 다 설명할 수 없지만 기도와 함께 임했습니다. 행 4장에서도 사도들과 성도들이 모여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행4:30) 이렇게 부르짖을 때 모인 곳이 진동하며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무수한 은사적 표적이 나타나며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내외적인 역사는 기도를 많이 해야 임합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간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눅11:9-12에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령 역사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3. 그런데 조심할 것은 아직 변화 받지 못한 사람들은 외적인 은사에 대해서 육신 중심으로 흐르기 쉽다는 점입니다.
4-5절에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했습니다.
여기 “상관하리라”는 용어는 문자적으로는 ‘직접 보고 확인하리라’는 뜻이지만 이 용어는 당시 성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완곡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소돔 사람들의 요구는 추악하고 가증한 남색을 원한 것입니다. 남색이란 동성애를 가리키는데 소돔 사람들이 얼마나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으면 남색자를 영어로 소도마이트(Sodomite)라고 했을까요? 그들은 천사까지도 남색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즘 동성애 목사 안수 문제로 외국에서는 논란이 있는데 성경이 그것을 비정상이라고 가르쳐줍니다. 당사자들에게는 그것이 아무리 자연스럽더라도 성경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치료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동성이 아닌 정당한 이성을 찾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외적인 역사가 많이 나타나면 우리 인간이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축복과 은사와 능력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그것마저 육체의 소욕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큰 능력 받아서 더 유명해지고 더 큰 사람이 되고 더 성공자가 되고 더 신령한 사람이 되고 더 놀라운 사람이 되고 더 놀라운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욕망입니다.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욕망 같지만 육신의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아무리 그럴듯해도 그 마음을 배척해야 합니다. 얼른 보면 얼마나 거룩하고 고상한 목적 같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육신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실재로 어떤 악한 사람들은 은사로 돈벌이까지 하는 등 변질하는 사람도 있는 것을 봅니다. 물론 그 때는 이미 은사는 떠나고 사단의 영이 주장한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역사를 주실 때는 먼저 내 신앙 하나 바로 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큰 능력을 주실 때는 내가 그만큼 무지하고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더 우쭐해서 교만하고 남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능력 받아 큰 일하는 것은 두 번째나 세 번째에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쓰실 때는 대개 큰 능력보다 최소한의 능력을 주시고 대신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니까 나는 항상 부족한 듯하지만 결과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보세요. 예수님께서 무수한 이적과 기사와 복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20:31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목적인데 제자들은 이 예수님을 이용해서 민족의 해방을 꾀하려 하거나 혹은 예수님을 왕 삼아 이스라엘의 경제문제를 해결하고자 혹은 자기 출세의 발판으로 삼고자 혹은 가룟 유다 같은 사람들은 돈 욕심에 예수까지 팔아버렸습니다.
이 말씀이 어쩌면 은사 받고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같은지 놀랍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욕망을 따라 은사 위주로 계속하다가 사단의 영에 속아 크게 낭패를 당하거나 그래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사이비 이단으로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돔과 고모라 사건 쉽게 보지 마세요. 타락한 소돔에 다가가는 두 천사와 소돔의 백성들, 이 사건은 옛날 그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오늘은 시간 관계상 오늘은 이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의 어둠에 빠진 우리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돕고자 도움의 손길로 다가오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은사의 도움을 사모하세요. 이 도움을 받아 바른 진리를 깨달으세요. 그러나 육신 욕망으로 나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신앙생활 잘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소돔성의 패역 1
(창 19: 1-11)
(요약)
소돔성의 패역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악한 심성을 본다.
어둠에 짙은 소돔성에 천사가 찾아오듯 성령께서는 완악한 죄인일수록 더 큰 은혜로 다가와 죄악을 소멸하시고 세속에서 구원코자 하신다.
그러나 롯이 간청할 때 비로소 들어왔듯 성령 충만을 위해서는 충성된 믿음생활이 필요하다.
조심해야 할 것은 소돔성 사람들이 천사를 육정으로 취하려 했듯이 육신의 욕망을 위해 하나님의 은사와 복을 취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선물은 첫째가 믿음 완성을 위해서 주시는 것임을 명심하자.
(강해)
본문은 소돔 성 거민들의 음란상과 폭력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롯의 집을 방문한 두 천사를 집단적으로 성폭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래도 도움을 받을 사회적인 제도장치가 없는 죄악이 일상 보편화되어 있는 소돔이었습니다. 사1:10에 소돔의 관원들을 꾸짖는 것으로 보아 관원들부터 죄악에 앞장섰고, 사3:9에 “그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아니함이 소돔과 같”다 한 말씀이 그 증거입니다. 타락하고 패역한 소돔성 이것이 본문의 문자적 이해입니다.
그런데 소돔은 세상의 상징입니다. 세상이란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결국 타락한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타락했다란 사람들이 타락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소돔 성의 이 패역이 숨어 있는 인간의 욕망이 사회적으로 표출되었다는 점을 주시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법이나 윤리 등으로 규제를 받기에 거룩한 듯 보이지 다 벗겨놓고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건에서 우리 인간의 죄악의 속성이 어떤 것인가를 적나라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본문을 통해 잊지 말 것은 패역한 소돔에 두 천사가 찾아오듯 오늘도 죄악으로 얼룩진 인간에게 성령께서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소돔을 찾아온 두 천사와 같이 지금 우리 인간의 악한 심성에도 성령께서 찾아오십니다. 영적인 원리는 같습니다. 그러므로 소돔 사건을 비유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성령의 역사란 어떤 것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성령의 외적인 역사는 진리가 어둘 때 도움으로 임하십니다.
1-2절에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찌기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했습니다.
두 천사가 소돔에 도착한 때가 날이 저물 때였습니다. 성경이 왜 때까지 이렇게 자세히 기록했는가? 무언가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랬는데 이처럼 성령의 은사는 진리에 어둡거나 완악할 때 더욱 임할 필요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경험하면서 보지만 말씀이 풍성하거나 마음이 유순한 사람들에게는 은사는 그렇게 풍성하게 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만 가지고도 대부분 충분한 영적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사가 필요 없을 만큼 온전한 사람은 없기에 나는 필요 없다 교만하지 말고 은사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은사가 지나칠 만큼 주어지는 사람들 보면 대부분 진리에 대해서 지나치게 무식하거나 완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완악한 사람은 잠시 죽여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 그래서만은 아닙니다. 처해 있는 환경이 심히 악할 때도 상상할 수 없는 도움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혹은 임종으로 앞에 두고 있는 경우에도 소망을 잃지 않도록 나타내 주십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장성하여 성령 충만하면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은사라고 함부로 비하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 외적인 은사는 영적으로 어두울 때에 즉 무식하거나 완악하거나 환경이 악할 때 우리를 도우시는 손길로 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귀한 은혜입니다.
2. 성령의 역사는 간절히 간구해야 임합니다.
3절에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그랬습니다.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을 때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롯이 두 천사를 처음 보았을 때는 천사인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롯은 다가가 땅에 엎드리어 절하며 하룻밤 집에 머물다 가기를 청합니다. 이것은 결코 마음에도 없는 간청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롯이 성문에 앉았던 것은 성문이란 정치 입법 사법 행정 만남 등 모든 삶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거기 찾아오는 누군가 도울 자를 찾아서 기다림이었습니다. 저물었다고 한 것을 보니까 아마도 종일토록 도울 자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그랬기에 기다렸던 것이고 중심에서 원하던 것이었고 영접하는 그 자세를 보아 겸손하게 중심에서 하는 간청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얼마나 이상한 대답입니까? 그들은 분명 롯을 위해서 소돔에 왔지만 롯이 아주 간절히 청하기 전에는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사건일까요? 성령의 역사하심의 특성이 꼭 그렇다는 것입니다. 분명 성령의 역사는 우리를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우리가 거절하지 않으며 늘 원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우리 곁에까지 와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간곡히 간절히 진실로 간청하지 않으면 충만히 임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려면 매일 열심히 몸과 마음과 힘을 다해 기도하고 사모하고 힘쓰고 애써야합니다. 성령의 역사란 나도 모르게 기도 없이도 임할 때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누가 기도했더라도 기도했기 때문이며 어떤 외부적인 영향력이라도 그만한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임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도 간단히 다 설명할 수 없지만 기도와 함께 임했습니다. 행 4장에서도 사도들과 성도들이 모여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행4:30) 이렇게 부르짖을 때 모인 곳이 진동하며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무수한 은사적 표적이 나타나며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내외적인 역사는 기도를 많이 해야 임합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간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눅11:9-12에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령 역사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3. 그런데 조심할 것은 아직 변화 받지 못한 사람들은 외적인 은사에 대해서 육신 중심으로 흐르기 쉽다는 점입니다.
4-5절에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했습니다.
여기 “상관하리라”는 용어는 문자적으로는 ‘직접 보고 확인하리라’는 뜻이지만 이 용어는 당시 성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완곡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소돔 사람들의 요구는 추악하고 가증한 남색을 원한 것입니다. 남색이란 동성애를 가리키는데 소돔 사람들이 얼마나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으면 남색자를 영어로 소도마이트(Sodomite)라고 했을까요? 그들은 천사까지도 남색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즘 동성애 목사 안수 문제로 외국에서는 논란이 있는데 성경이 그것을 비정상이라고 가르쳐줍니다. 당사자들에게는 그것이 아무리 자연스럽더라도 성경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치료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동성이 아닌 정당한 이성을 찾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외적인 역사가 많이 나타나면 우리 인간이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축복과 은사와 능력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그것마저 육체의 소욕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큰 능력 받아서 더 유명해지고 더 큰 사람이 되고 더 성공자가 되고 더 신령한 사람이 되고 더 놀라운 사람이 되고 더 놀라운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욕망입니다.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욕망 같지만 육신의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아무리 그럴듯해도 그 마음을 배척해야 합니다. 얼른 보면 얼마나 거룩하고 고상한 목적 같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육신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실재로 어떤 악한 사람들은 은사로 돈벌이까지 하는 등 변질하는 사람도 있는 것을 봅니다. 물론 그 때는 이미 은사는 떠나고 사단의 영이 주장한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역사를 주실 때는 먼저 내 신앙 하나 바로 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큰 능력을 주실 때는 내가 그만큼 무지하고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더 우쭐해서 교만하고 남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능력 받아 큰 일하는 것은 두 번째나 세 번째에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쓰실 때는 대개 큰 능력보다 최소한의 능력을 주시고 대신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니까 나는 항상 부족한 듯하지만 결과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보세요. 예수님께서 무수한 이적과 기사와 복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20:31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목적인데 제자들은 이 예수님을 이용해서 민족의 해방을 꾀하려 하거나 혹은 예수님을 왕 삼아 이스라엘의 경제문제를 해결하고자 혹은 자기 출세의 발판으로 삼고자 혹은 가룟 유다 같은 사람들은 돈 욕심에 예수까지 팔아버렸습니다.
이 말씀이 어쩌면 은사 받고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같은지 놀랍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욕망을 따라 은사 위주로 계속하다가 사단의 영에 속아 크게 낭패를 당하거나 그래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사이비 이단으로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돔과 고모라 사건 쉽게 보지 마세요. 타락한 소돔에 다가가는 두 천사와 소돔의 백성들, 이 사건은 옛날 그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오늘은 시간 관계상 오늘은 이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의 어둠에 빠진 우리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돕고자 도움의 손길로 다가오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은사의 도움을 사모하세요. 이 도움을 받아 바른 진리를 깨달으세요. 그러나 육신 욕망으로 나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신앙생활 잘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소돔에서 구원
(창 19: 12-29)
(요약)
천사의 도움으로 소돔에서 구출된 롯과 그 가족을 통해서
세상에서 구원함을 받는 진리를 보여준다.
세상에서 구원함에는 몇 가지 원리가 있으니
먼저는 주님께 속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다 처리된다는 점이다.
이 죄악의 처리는 기도 없이는 불가능하며,
이미 이루신 복음에 견고히 서야 하고,
이 거룩함을 위해서 하나님의 강력한 성화의 도구인 징계하심이 존재하며,
세상에 미련 두면 죽는다는 자각이 필요하고,
불완전한 자신에게 긍휼함도 존재함을 기억하여 용기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강해)
이 시간에는 “소돔에서의 구원”이라는 제목입니다. 이 소돔에서의 구원은 영적으로 보면 바로 세상 죄악에서 구원을 받는 법입니다. 그 증거로 예수님께서 눅17:32에 “롯의 처를 생각하라” 경고하심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성도들이 세속에 빠져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심이십니다.
이 세상에서의 구원에는 몇 가지의 원칙이 있습니다.
1. 주님께 속하지 않은 것은 처리하십니다.
12절에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내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서 주님의 생명에 속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그럴싸하더라도 다 처리되어야 합니다. 고전3:12-13에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선, 인간의 의, 인간의 자랑스러운 것, 인간에게서 나온 그 어떤 좋은 것이라도 그것이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면 처리의 대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이렇게 선한데, 혹은 나는 신앙생활에 열심인데 왜 하나님께서 나를 처리하려 하시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 내 의 내 선 내 종교성에서 나온 것이라면 처리되어야 합니다.
2. 성령의 탄식하심을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13절에 “그들에 대하여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우리로 이 곳을 멸하러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했습니다.
이것이 소돔성을 멸하신 제 2차적인 이유입니다. 제 1차적 이유는 소돔인들의 죄악이고 제 2차는 소돔성의 죄악의 원성이 여호와의 귀에 들림입니다. 신령한 의미로 본다면 성도의 마음이 세속이 침투하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탄식하십니다. 우리는 이 탄식하심을 소멸해선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기도해야 합니다. 최소한 내 신앙이 지켜질 만큼은 영적생활을 해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나에게 하루 세 시간의 기도가 없다면 그 날의 승리는 마귀에게로 돌아가리라“ 했습니다. 제 생각인데 평온할 때는 최소한 엎드려 1시간, 시험이 있거나 주의 일을 하려면 2-3시간의 기도생활이 꼭 필요합니다.
3. 복음의 말씀에 견고히 서야 합니다.
14절에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했습니다.
목숨을 건질 귀한 복음을 전했으나 롯의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이처럼 성도들도 형태는 다르나 복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현실이나 상태나 체험보다 성경 진리를 더 믿어야 합니다. 나는 경건치 않을지라도 성경이 의인이라 하시니 의인인줄 믿고, 나는 실패로 가득해도 성경이 우리를 주 안에서 영광스럽게 했다고 하시니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복음이 농담처럼 여겨진다면 큰 문제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롬4:5에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하셨습니다. 또 롬1:17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복음을 모르면 안돼요. 복음을 알아도 믿지 않으면 안돼요. 예수 보혈로 용서 받았다고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 실재 보혈을 믿고 양심을 안돈시키지 않으면 허사예요. 그리고 성경에 우리에게 세상과 율법과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하면 죽은 줄 아세요. 예수 안에서 그것과 상관이 없게 된 것을 믿고 이젠 스스로 이기려고 하지 마세요. 대신 감사하는 생활하시고 하나님 경외하는 생활하세요. 왜 복음의 말씀들을 롯의 사위들처럼 농담으로 여기고 마음에 두지 않고 생활화하지 못한지 모르겠어요.
4. 성령의 은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16절에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롯이 지체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소돔성에 있는 재물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가족들을 다 데리고 나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해서 성밖에 둡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벗어나도록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이 있습니다. 그것이 각종 은사입니다. 그 은사에는 교회를 통해서 도우시는 직분적 은사가 있고, 또 그 은사에는 성령의 9가지의 신령한 은사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강권하시는 사랑이 있으니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이 징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토록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강력한 방법입니다. 이 강한 손에 붙잡히면 죄악에서 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 다 우리 성도들을 온전케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생활 뿐 아니라 교회생활도 잘해야 합니다.
5. 세상 것에 미련 두면 죽는다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17절에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그러나 26절에 안타깝게도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했습니다. 우리 심령도 세상에 미련 두면 롯의 아내처럼 굳어버립니다. 그토록 복되고 활발하던 신령이 세상 사랑하는 순간 굳어버립니다. 돌멩이도 그런 돌멩이가 없어요. 돌맹이는 함마로 깨지만 콱콱 막혀 굳어버린 심령은 은혜가 아니고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소돔이 건설된 평지인 들판에 머물면 안 되요. 소돔을 떠난다고 성문만 나섰지 아직도 세상에 미련두고 있다면 소돔과 함께 심판받습니다. 확실히 피해야 해요. 아직도 피난처 산 되신 하나님께 온전히 피하지 못했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6. 그래도 우리 인간은 연약하기에 긍휼이 필요합니다.
18-22절에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 내가 도망하여 산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은 도망하기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로 그 곳에 도망하게 하소서 -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너의 말하는 성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 그러므로 그 성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이렇게 여호와께서는 연약한 롯을 위해서 소알성을 허락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멸하신 성은 소돔과 고모라 말고도 베라 아드마 스보임(신29:23, 호11:8)입니다. 그런데 그 멸망의 대상 중에 소알성도 포함되었는데 롯의 간청으로 멸하시지 않고 거기 피하도록 하십니다. 소알이란 “작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해도 우리 연약 때문에 죄악스런 면들이 많아요. 그 중에 무식도 있어요. 완전하지 못한 것도 있어요. 참고사항이지만 누가 천국에 가서 보니 “저 여자 예쁘다”라고만 생각해도 죄라고 하더랍니다. 그렇다면 거기 안 걸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마땅치는 않지만 긍휼로서 용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멸망해야 하나 긍휼로서 용납하시는 작은 소알이예요. 우리가 죄에 둔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예민해서 지나친 정죄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멀어지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랑하면 영혼에 고통이 옵니다. 심판의 불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세상 사랑하면 심령이 소금기둥이 됩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회개하여 이제는 복음을 믿고 기도하고 은사의 도움을 받아 세상 것에 미련 두지 말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압과 암몬
(창 19: 30-38)
(요약)
롯과의 근친상간으로 생겨난 모압과 암몬은 인간 육신의 모습을 잘 묘사한다.
가령 롯이 육신이라면 두 딸은 그 생각이다.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영혼이 중생하고 성령충만을 받아도 육신의 본능은 여전하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근신해야 한다.
그리고 육신의 본능보다 더 무서운 것이 육신의 생각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
그리고 이 욕심을 방치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
우리의 육신은 주님이 재림하시기까지는 언제나 싸워 나가야 하는 경계의 대상이다.
(설교)
이 시간에는 “모압과 암몬”에 대한 교훈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소돔성의 불 심판에서 간신히 구출 받은 롯과 그의 딸들이 근친상간을 통해서 인종을 번성해 가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큰 딸로 모압 족속이 생기고 또 작은 딸로 암몬 족속이 생깁니다. 세상에서도 보기 드믄 비윤리적인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해 줍니까?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이런 교훈이 가능합니다. 즉 롯이 술 마시고 된 일이기에 술에 대한 교훈도 되겠고, 롯의 딸들이 윤리를 범한 사건이기에 사람의 성장 배경의 중요성에 대한 교훈, 혹은 아브라함의 의와 롯의 의가 차원이 다르다는 기독교 윤리의 관점 등의 교훈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의는 성화까지 나간 의라면 롯의 의는 겨우 칭의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럼 영적 비유로 본다면 무엇을 교훈하는가?
한 마디로 롯이 육신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본문은 신앙생활에서 육신의 문제점에 대한 교훈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로서 영의 상징인 아브라함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점,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문에 롯까지도 보호해 주시고 멸하지 아니하시고(신2:8-9), 그런데도 그 자손들이 이스라엘을 저주로 이끌려고 미혹으로 빠뜨리고, 그래도 멸하시지 않으신 존재가 바로 모압과 암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신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롯의 자손인 모압과 암몬이 이스라엘의 동편에 거하는데 요단 동편은 지상생활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종교 역시 얼마나 열정적입니까? 이것이 다 세속을 사모하는 육신의 특성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나타난 두 딸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다름 아니라 육신에서 비롯된 생각들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조심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육신의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롬8:6-8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본문이 그려주는 대로 육신에 대해서 더 말씀드리면
1. 육신의 본능은 은혜를 받아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30절에 “롯이 소알에 거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 거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하였더니” 그랬습니다.
원래 멸망의 대상이었던 소알성에 거하던 롯은 아무래도 불안하여 천사가 일러준 그 산으로 피신하여 딸들과 함께 굴에 거합니다. 하나님이 피하라는 산이 무엇일까요? 산은 예수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럼 두 딸과 함께 거한 굴은 무엇일까요? 숨은 인간 본능입니다. 굴속에 숨었다가 여호수아에게 잡힌 아모리의 다섯 왕도 본능의 상징입니다. 이처럼 은혜에 피해도 우리는 육신의 본능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은혜 받아도 본능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육신을 통제할 의지가 생겨나는 것이지 식욕이나 성욕 등의 본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잘 알아야 해요. 이것 모르고 완전한 자가 된 것으로 생각했다가는 넘어집니다.
2. 육신의 본능보다 더 무서운 것은 육신의 생각입니다.
31-32절에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 그 아비와 동침하니라”
이렇게 큰 딸은 인종을 전하려고 아버지와 동침합니다. 34절에는 작은 딸이 그렇게 합니다. 이처럼 영적생활에서 육신의 본능도 문제지만 더 문제는 육신의 생각들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잘못 다스리면 술에 취하듯 타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이 세속의 술 이것이 계시록에서 진노의 포도주입니다. 이 술에 취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여기서 피할 방법은 항상 근신하여 성령으로 충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8:12-13에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으면 육신의 생각이 다스려지고 육신의 생각이 다스려지면 육신을 다스리는 것은 마음이기 때문에 비로소 거룩한 삶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강조되는 것은 은혜입니다.
3. 육신의 욕심을 방치하면 무서운 결과가 오게 됩니다.
36-38절에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
모압과 암몬이 누굽니까? 이스라엘의 원수가 아닙니까? 다윗이 그들을 정복할 때 가장 어려웠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그 원수의 나라를 정복할 때도 어려웠지만 그 시각 다윗 속에 있는 원수 보이지 않은 암몬 즉 육신의 생각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암몬과 싸우던 꼭 그 시간에 지붕을 거닐다가 결국 세상정욕의 암몬 밧세바에게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우환이 많았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약1:15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을 방치하면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거듭난 성도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육체가 온전케 될 때까지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근신하여 신앙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실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