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열반 10주년 특별기획] ② 선두리 소년 ‘박재철’
사색 좋아했던 바닷가 아이 ‘어린 왕자’를 꿈꾸다
4살에 아버지 여의고
할머니 품에서 유년생활
사색 좋아한 총명한 소년
암울한 일제강점기 아래서
일본어 교육 거부하다 고초
새벽이면 일어나 촛불 켜고
책 읽거나 공부한 모범생
법정스님이 유년시절을 보내며 다녔던 우수영 선두리 마을의 우수영 초등학교로 지금은 폐교가 됐다.
선두리 마을에서 만난 임준문 씨. 우리나이로 84살인 그는 법정스님보다 6살 어렸다. 어린시절 같은 마을에서 살기도 했지만 함께 법정스님 집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그의 기억은 생생했다. “먼 걸음 하셨네요. 우리 마을의 자랑인 법정스님에 대해서는 제가 가장 많이 알고 있다고 보면 돼요.”
임 씨는 텅 빈 법정스님 생가터 앞에 서서 과거 있었던 집구조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지금처럼 넓은 공간은 아니었어요. 훨씬 작은 규모였다고 보시면 돼요. 위치는 삼거리 정 중앙이 맞아요. 스님의 생가는 디긋자(ㄷ)식으로 되어 있었어요. 앞에서 보기에 왼쪽의 방이 작은 아버지(박인배씨) 가족의 방이었고, 중앙이 법정스님 할머니 방, 우측 방이 배표를 파는 가게였어요.”
법정스님의 어린시절 모습.
임 씨가 기억하는 법정스님의 유년시절은 ‘아주 똑똑한 동네 형님’이었다. 나이가 많기도 했지만 다른 동네 형보다 사색을 즐기는 평범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스님의 작은 아버지 역시 조카인 ‘소년 재철’에 대한 보살핌이 각별했다. 임준문 씨의 기억을 더 살펴보자.
“스님의 작은 아버지는 동네의 유지였어요. 선두리를 오고 가는 배편이 7척이나 있었고, 배표를 파는 대리점 역할을 해서 수입도 적잖았어요. 배표를 파는 옆에 제가 조그마한 가게도 열었는데 제가 점원으로 일했어요. 할머니는 장손인 재철이 형님에 대해 더욱 신경을 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어요. 육상교통이 없었던 시절이라 배들이 드나드는 선두리는 해상교통의 요지였어요. 당시는 배를 접안할 곳이 없어 종선(從船, 큰 배에 딸려 있는 작은 배)으로 손님을 실어 날랐어요. 명절 때는 일이 바빠 재철이 형님도 허드렛일을 돕곤 했어요.”
일찍 아버지(박근배)를 여의고 자란 ‘선두리 소년 박재철’은 할머니의 손에 의해 자랐다.
여느 시골 소년들이 다 그러했듯이 바다를 옆에 끼고 살아서 수영도 자연스럽게 배우기도 했다. 산으로 바다로 다니며 뛰놀던 아이였다. 법정스님의 사촌 동생인 박성직(80)씨(서울 성북구 정릉 거주. 임준문 씨를 통해 만날 수 있었다)에 따르면 이런 일도 있었다.
“저는 어린시절이라 현장에 있지는 않았는데 선두리 마을 앞바다에서 ‘재철이 형님’이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가 물살에 휩쓸려 사경을 헤맨 적도 있었다고 해요. 물에서 건져냈을 때는 숨을 쉬고 있지 않아서 죽을 줄 알고 거적을 덮어 놓았는데, 갑자기 막혔던 기도가 뚫려 숨을 쉬면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했어요.”
박성직 씨는 법정스님의 편지글을 엮은 책 <마음하는 아우야!> 라는 책에서 어린 시절의 삶을 회고하고 있다. “형님, 우수영 양도 앞바다에 떠 있는 ‘양도섬’의 청송(靑松) 기억하시지요. 만선을 한 돛단배가 섬 앞을 지나 포구로 돌아올 때면 푸른 바다와 노을진 하늘이 함께 어우러져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지요.”
법정스님의 아버지인 고(故) 박근배 씨.
법정스님의 할머니인 고(故) 김금옥 여사.
박 씨도 임준문 씨와 같은 기억을 하고 있었다. “저는 할머니 방에서 재철이 형님(법정스님)과 할머니랑 방을 같이 썼어요. 어릴 때부터 중학교 때 스님이 출가하기 전까지 같이 생활했어요.”
박 씨는 법정스님이 어릴 때부터 책을 가까이했다고 회고했다.
“제가 어릴 때 할머니와 스님,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서 한 방을 사용했습니다. 그때 스님은 새벽이면 일어나 촛불을 켜고 책을 읽거나 공부를 했지요. 책을 손에 달고 다닐 정도로 좋아했고 어쩌다 용돈이라도 생기면 꼭 책을 사서 보셨습니다.”
법정스님에게서 어머니(김인엽)는 참으로 마음 아픈 존재였다. 유년시절 스님의 어머니는 남편을 잃고 집을 떠나 살았다. 할머니를 어머니보다 더 따른 것은 이러한 환경에 기인한다.
‘소년 박재철’의 마음은 언제나 ‘텅 빈 공’처럼 공허했을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아닌 할머니 품에 컸던 환경의 영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럴수록 할머니는 ‘장손’인 스님에 대한 보살핌이 각별했을 것으로 보였다. 사촌동생 박성직 씨의 회고를 더 들어보자.
“할머니의 후덕한 성품 덕에 우리 집은 늘 사람들이 북적거리곤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누구보다 스님께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는데 어릴 때 일찍 아버지를 여읜 스님을 안쓰러워하셨어요.”
할머니와 작은 아버지의 ‘각별함’은 스님을 목포에 유학까지 시켜준 교육에서도 엿보인다. 물론 작은 아버지의 살림살이가 부족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조카를 선뜻 도시로 공부시키러 보내는 일은 선두리 마을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선두리 마을에서 목포로 유학을 떠난 학생은 법정스님이 유일했던 것을 파악된다. 여기에는 소년 재철의 비범한 공부재능도 있었고, 여기에 작은 아버지와 할머니의 적극적인 배려가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소년 재철’은 똑똑하면서도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어린시절부터 책을 가까이 하며 마을에서는 우등생으로 손꼽혔다. 할머니와 작은 아버지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장차 박씨 집안의 기둥’이 될 것임을 예감하고 과감하게 대처로 보내 유학까지 시키겠다는 마음을 낸 것으로 보인다. 1989년에 출간한 <텅빈충만>에서 법정스님은 다음과 같이 어린시절을 회고한다.
“생일 축하 카드 속에 든 할머니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 유년시절 일이 문득 떠올랐다. 나도 육친 중에서 가장 가까운 분이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팔베개를 베고 옛날 옛적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유년시절의 꿈을 키워갔었다. 그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무서움 때문에 밤의 변소길에는 반드시 할머니를 뒤따르게 했었다. 예전 시골집은 변소와 사돈네 집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 생일날이면 할머니께서 몸소 방 윗목에 정갈한 짚을 깔아 그 위에 정화수와 음식을 담은 상을 차려놓고 손을 싹싹 비비면서 축원을 하셨다. ‘몇 살 난 어디 성씨 우리 아무개 남의 눈에 잎이 되고 꽃이 되어 무병장수하고···, 일당백으로 총명하고 영특해서···’ 아직도 내 기억에 남은 축원의 낱말들이다.”
진도대교 아래서 바라본 선두리 마을 전경.
선두리에 위치한 우수영 초등학교(현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할머니를 따라 상회에 들어가 경품으로 원고지를 뽑은 기억도 회상하고 있다.
“어느 해 생일날(국민학교에 들어가던 해로 기억된다) 무슨 상회인가 하는 옷가게로 내가 입을 옷을 사러 할머니를 따라갔었다. 그 가게에서는 물건을 사면 경품을 뽑게 하여 사는 물건 외에 무엇인가를 곁들여 주었다. 할머니는 나더러 경품을 뽑게 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뽑는 경품이었다. 경품의 내용은 지금 책상 위에서 빈칸을 메우고 있는 이런 원고지 한 권이었다. 최초로 뽑은 경품이 원고지였다니. 내 생애와 원고지가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인지 그때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요즘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일이 어떤 암시처럼 여겨진다.” (저서 <텅빈충만> 중에서)
바닷가 소년의 깊은 사색에는 암울한 시대적 배경도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 일제강점기였던 유년시절은 나라 잃은 백성이 설움을 안고 살아가던 시대였다. 소설가 정찬주 씨는 그의 소설 <무소유>와 <법정스님의 뒷모습> 등에서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목포에서 온 담임선생이 일본말을 하고 학생들에게 일본말을 강요한 일로 무지몽매한 폭행을 당한 일을 쓰기도 했다.
어린시절 등대지기가 되고 싶어 했던 ‘소년 박재철’은 늘 새로운 세상을 동경했다. 선두리 마을 건너 양도를 오가며, 그 너머의 진도 울돌목의 세찬 바다로 보며 외부세상에 나가고 싶었다. 어린왕자가 지구별에 왔듯이 현실의 암울함을 떠난 ‘피안의 평화로운 세계’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상상의 나래를 부지기수로 펼쳤다.
‘소년 박재철’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어릴 때는 뒷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배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곧 배를 타고 선두리를 떠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자신의 생각깊이를 더하기 위해 책을 가까이 한 것으로 보인다. 출가 후 경전을 독파하고, 곧바로 경전을 역경하는 스님의 일련 활동을 보면 출가 전에도 출가 후에도 방대한 독서량은 언제나 일관돼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왜구를 격침시켰던 명량바다의 거칠은 물살을 바라보며 ‘소년 박재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린시절 등대지기를 꿈꿨던 그가 스님이 되리라는 생각을 한번이라도 했을까. 어린시절 등대지기의 꿈은 우주 어느 별나라에서 온 ‘어린왕자’가 아니었을까.
법정스님의 집에서 함께 살았던 선두리 마을 임준문 씨.
해남=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 취재협조=(사)맑고향기롭게
[불교신문3486호/2019년5월8일자]
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