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하나가 염불을 외우듯이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자루가 앞뒤로 흔들렸다.
"여, 여보시요. 나 좀 살려주씨요. 아이고, 엄니."
강쇠 놈이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놈이 담긴 자루는 이미 허공을 날고 있는 중이었다.
어린 시절 키 크는 꿈을 꿀 때에 한없이 높은 벼랑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공포가
순간 스쳐갔다. 어렸을 때는 그런 꿈을 꾸고나면 이부자리가 젖어있기 마련이었지만,
지금은 꿈이 아니었다. 떨어져도 떨어져도 땅에 닿지 않던 어린 시절의 꿈은 분명
아니었다. 아랫도리가 뜨뜻하게 젖는 어느 순간이었다. 자루가 나무가지에
걸쳤다가 떨어지다가 땅바닥에 내려앉아 서너바퀴 구르는 느낌이 온 몸으로 번져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잔뜩 웅크린다고 했는데도 머리가 어디엔가 부딪치는 느낌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 졌다.
멀리 어디선가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잠이 없는 누렁이란 놈이 닭울음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부지런한 일꾼이 들 일 나가는 것을 보고, 참 부지런도 하시요,
하고 아는체라도 하는듯이 컹컹컹 개짖는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강쇠 놈의 뇌리에 고요가 내려 앉았다.
그 고요는 한참을 계속되었다. 어떤 소리도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시방 죽어가는갑구나. 사람이 죽을때는 이리 세상이 조용헌갑구나.
글고 보면 죽음이라는 것도 그리 무서운 것은 아니구나.'
강쇠 놈의 의식 속으로 그런 생각이 흘러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죽음같은 잠이 강쇠 놈을 꽁꽁 동여맸다. 꿈도 없는 깊고 깊은 잠이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이건 자고 싶었다. 아니, 다시는 깨어나지 않고 평화로운
잠 속에 빠져있고 싶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강쇠 놈의 잠을 깨우는 것이 있었다.
흐흐흑, 흐느껴 우는 여인네의 울음소리였다.
"이래서 어찌합니까? 저 때문에 죽는군요. 제가 당신을 죽게 만들었군요.
시어머님이 아무리 권해도 제가 싫다고 했으면, 당신의 씨를 받지 않겠다고 했으면,
정 씨받이를 시킨다면 이년이 목이라도 매겠다고 버텼다면 당신이 이런 봉변을 안 당했을 것을,
이년이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군요."
'아니요, 아니구만요. 그것이 어디 아씨 탓이겄소? 이놈의 팔자제요.
아씨를 만나 그렇게 인연을 맺고 이렇게 죽어갈 이놈의 팔자제요.
이놈은 원도 한도 없구만요.
선녀겉은 아씨를 온전히 안아본 것만해도 극락에 간 것이나 마찬가지제요.
부디 아덜얼 낳으씨요. 아덜얼 낳아 양반집의 귀허디 귀헌 도련님으로 잘 키워주씨요.
그래만 주신담사 이놈은 암시랑토 않구만요."
강쇠 놈이 중얼거릴 때였다. 자루가 열리고 어깨가 흔들렸다.
"이보시요. 이보시요. 살았소? 죽었소?"
누군가 묻고 있었다. 강쇠 놈이 눈을 번쩍떴다.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햇살이
먼저 눈을 파고 들었다. 몇 번 눈을 깜박거리자 민둥머리에 눈빛이 선하게 생긴
사내 하나가 내려다 보고 있었다.
"스님, 이놈이 시방 살아있소? 아니면 극락에라도 와 있는 것이요?"
"처사님은 자신이 죽은 것으로 믿소?"
스님이 빙긋 웃었다.
"그걸 모르겄당깨요. 분명히 이놈이 죽으라고 쩌그 벼랑에서 밑으로 내 떤져졌는디요."
"살아있으니, 안심하시요."
"내가 참말로 살아있다는 말씸이지요? 허면 아씨는 어디갔소?"
"아씨라니요?"
"아 쪼깨전에 제 품에 얼굴을 묻고 울던 대감집 아씨 말씸이요."
"허허허, 처사님이 꿈을 꾼 모양이구려. 그것도 아주 호사스런 꿈을 꾼 모양이구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경황중에도 그런 꿈을 꾸다니, 참으로 대단한 처사님이시요.
허나 꿈을 깨시오. 꿈은 꿀 때 뿐, 깨고나면 물거품처럼 허망한 것이 아니요?
일어날 수 있겠소? 허허참, 부처님께서 느닷없이 여시골을 현몽하시길래
무슨 일인가 와봤더니, 처사를 살리라는 계시였구려."
"부처님께서 참말로 그러셨소? 스님더러 이놈을 구하라고 말씸허셨소?"
강쇠 놈이 일어나 앉으려다가 온 삭신이 쑤시고 아파 그대로 드러누우며 물었다.
옆구리를 다쳤는지 숨이 컥 막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른 쪽 따리가 도끼로 찍는듯 아팠다.
"아이구구, 나 죽겄소. 몸뗑이가 사정없이 어장이 나뿌렀는갑소."
"머리를 안 다친 것이 다행이요. 뼈마디 몇 개 부러진 것이야, 시간이 가면 나을 것이고."
스님이 강쇠 놈의 옆구리를 부축하여 등에 업으며 말했다.
"이놈이 부처님 전에 시주 한번 헌 일이 없는디, 스님헌테 겁나게 큰 폐럴 끼친구만요.
몸이 나으면 절간에 장작이라도 한 늘 해드리제요."
스님의 등짝에 업힌 강쇠 놈이 인사치레를 했다.
"마침 잘 되었소. 불목하니 놈이 줄행랑을 놓아 내 손수 나무를 하고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렸는데,
처사님이 불목하니를 하겠다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지요."
스님이 돌아보며 흐 웃었다.
"허나, 오래 부려묵을 생각일랑 허지 마씨씨요.
이놈이 역마살이 있어 한 곳에서 오래 머물덜 못헌깨요. 잘해야 서너달이나 있으까요.
있는 동안에는 일얼 열심히 허제요. 헌디, 증말 부처님께서 현몽을 허셨는가요?
이놈이 거그서 죽어가고 있응깨,가서 구허라고 말씸이요."
"안 그러면 내가 무엇 때문에 거기엘 갔겠소?
사냥꾼이 놓은 올무에 고라니라도 한 마리 걸려있는가 했소."
"고라니요?"
"그렇소이다. 종종 그런 일이 있었지요.
부처님이 현몽하신 장소에 가보면 올무에 걸린 산짐승들이 있었지요."
"허허, 부처님께서 참으로 정이 많으신 분인갑소.
하찮은 산짐승들꺼정 챙기시는 것을 본깨요.
앞으로는 부처님 앞에서는 절도 디리고 그래야겄구만요."
그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두어식경 걸었을 때였다. 별로 크지 않은 아담한 절이 나타났다.
"저그가 스님이 머무시는 절인갑지요?"
"그렇소이다. 한 가지 당부할 것은 이곳 관음암은 비록 소규모이나 터가 좋아
자식 못 낳는 여인네들이 득남을 빌기위하여 많이들 찾아오는 것이요.
삼신각과 삼신각 뒤의 동굴에는 절대로 얼씬거려서는 아니될 것이요."
스님의 낯빛이 엄했다.
"하먼요. 이놈이 어찌 부정탈 짓얼 허겄습니까요? 그런 염렬랑은 당최 허시덜 마시씨요.
이놈도 그런 눈치는 있구만요." 그렇게 대꾸하며 강쇠 놈이 하늘을 향해 흐 웃었다.
머슴으로 떠돌면서 들은 소리가 있어서였다. 자식 없는 집에서 절간에 가 부처님께
자식을 점지해 달라고 비는 것은 실상 절간의 젊은 스님의 씨를 받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서방이 사내구실을 못한다든지, 설령 구실을 하드래도 씨가 시원치 못해 여편네의 뱃속에
자식을 심지 못하면 대를 잇고 싶은 욕심에 그런 방편이라도 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절간에 가서 빌어 낳은 자식들이 나중에 자란 뒤에 보면 한 때 절간에 머물렀던
젊은 스님을 닮아있기 일쑤라는 것이었다.
"시방도 그런 아낙이 머물고 있는가요? 스님."
어쩌면 절간에서 고기맛을 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강쇠 놈이 물었다.
"지금은 없지만 수일내로 올 것이요. 다시 한번 당부하지만,
삼신각과 동굴 근처에는 절대로 가면 안 됩니다."
"그러지요. 그러지요. 어채피 다리가 뿌러져 나댕기도 못헐 판인디요, 뭐."
강쇠 놈이 큰 소리로 대꾸하며 고개를 주억거릴 때였다.
막 일주문을 들어서는 스님 앞에 젊은 여자 하나가 나와 스님, 어디 댕겨오십니까? 하고 절을 했다.
"아니, 보살님. 언제 오셨습니까?"
"조금 전에 왔습니다. 스님이 안 계셔서 먼 길 출타라도 하신 줄 알고 돌아갈까 망설이고 있던 참입니다."
"허허, 그래요? 노보살님의 말씀으로는 이 달 보름께 오실 것이라고 하셔서, 그리 믿고 있었지요."
"시어머님께서 어찌나 서두르시던지요. 원래는 이레불공을 잡았는데,
스무 하루동안 드리라고 해서 오늘 새벽에 목욕재계하고 왔습니다. 헌데 업고 계신 분은?"
아낙이 강쇠 놈을 가만히 올려다 보며 물었다. 갸름한 얼굴에 눈썹이 유난히 짙은 여자였다.
어제 저녁의 여자만은 못해도 양반가의 정숙한 여인네가 분명해 보였다.
"아, 예.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여시골 벼랑에 떨어져 있는 것을 부처님의 현몽으로
구해오는 중이지요. 요사채에 가 계십시요. 이 처사를 내려놓고 가겠습니다."
"예, 스님. 하오면 저는 부처님께 올릴 공양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낙이 다시 한번 강쇠 놈과 눈을 맞추고는 돌아서서 공양간으로 들어갔다.
치마 밖으로 드러난 불룩한 엉덩이가 양쪽으로 흔들리는 모습에 강쇠 놈이 입맛을 쩝 다셨다.
허리가 욱신거리고, 오른 쪽 무릎 아랫 뼈가 송곳으로 쑤시는 듯 아픈데도 사타구니 사이의
거시기 놈이 슬며시 기척을 냈다.
'히히, 내가 참말로 못 말릴 잡놈임언 분명허구나.
다리뼈가 뿌러져 꼼짝을 못헌디도 이놈이 지잘방정얼 떠는 것얼 본깨.'
강쇠 놈이 중얼거리는데 스님이 등짝에 이상한 기운을 느낀 것일까?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흘끔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