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에게 스며든 사람의 삶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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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신 /
병실의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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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 커튼이 사면을 에워싸고
의사와 간호사의 목소리가 급히 새어 나올 때
병실에 도착한 내 귀에 얼굴을 붙이고
아버지가 귓속말을 했다
―저 사람 방금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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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 장맛비가 창문을 내리긋고
자판기에서 빼온 커피잔이 출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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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천을 덮은 병상이 나가고
가족 방문단이 일상처럼 이루어지는 동안
죽음에 관한 소문들 앞에서
칸칸이 잘라 나눠 먹는 수박의 푸른 줄이
링거 줄처럼 엉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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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땐 이생의 지문인 양
검은 씨를 뱉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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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그늘의 말들을 미음처럼 마시고
손바닥을 펴서 낮잠 자던,
유리병 속의 몇 줄기 고구마 순
궁금한 듯 고개를 침상으로 틀며
연한 초록 잎을 내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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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베개와 시트가 아무 일 없듯 다시 깔리며
병실의 기분은 새로 완성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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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소란’에는 딱히 경중(輕重)이라는 것이 없다. 이는 어찌 보면 상대적이다. 그것이 일어난 장소가 위 시에서처럼 병실이든, 아니면 그 어디든 간ㅇ에 잠잠했던 이전의 공기가 어떤 계기로 인해 파동 되는 순간이 바로 ‘소란’인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때 일어난 파동을 얼마나 예민하게 받아들이는가에 있다. 파동을 느끼지 못한 누군가는 자기 주변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이는 ‘냉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위 시에서 화자의 ‘기분’은 다르다. “방문단이 일상처럼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장맛비”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라든가, “자판기에서 빼온 커피잔이 출렁”거리는 사소한 파동을 느끼는 화자는 그 누구보다 예민하다.
그럼 우리도 화자처럼 예민하게 위 시의 장면을 다시 보자. “파란색 커튼”에 가려져 다급한 목소리들이 새어 나오고 결국 한 생명의 불씨가 꺼지는 순간, “저 사람, 방금 죽었어”라는 “귓속말”이 어떻게 들리는가. ‘저 사람’이라는 익명성은 귓속말에서만 있었을까. 병원 내에서 이름 대신 환자로만 호명되고, 복잡한 의학 용어들이 가득 찬 차트(chart) 어디에도 ‘저 사람’의 이름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죽은 이의 “병상이 나가고” 다시 그 자리에 똑같은 “흰 베개와 시트”가 “아무 일 없듯 다시 깔리”는 병실의 환기(“기분”)는 그곳 공기를 완벽하게 표백시켜 버린다.
―정재훈(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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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감상
「병실의 기분」은 ‘타인의 삶이 자신에게 파고든 위기의식과 일으킨 감정과 이로 인한 자신의 대처 방식’을 매우 보편적인 시각으로 섬세하게 쓴 시이다. 그런데 더 섬세하게 보면 이 시는 시인이 살려내고자 하는 ‘삶’의 색깔을 매우 고도의 표현장치를 통해 형상화했음을 유추하게 한다. 시인은 이 시에 ‘죽음’이 아니라 “삶”의 색깔의 형상화에 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시간은 ‘죽음’이 아니라 ‘삶=살아감’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파란색 커튼이 사면을 에워싸고”가 “칸칸이 잘라 나눠 먹는 수박의 푸른 줄이/링거 줄처럼 엉켜있었다”, “몇 줄기 고구마 순 ∼ 고개를 침상으로 틀며 연한 초록 잎을 내릴 때”로 색깔의 변화함으로써 “병실의 기분”을 선명하게 색깔 이미지로 남긴다. 나에겐 ‘이 표현들이 이 시의 고도의 표현장치이다.’라고 판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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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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