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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
각본 , 감독 : 샘 멘데스 (Sam Mendes) 1999년 제작
줄거리
레스터 버냄은 전형적인 미국의 중산층 남자이다.
나이는 42세이고 14년째 광고 회사에 다니고 있는 중견 간부이다.
그의 아내 캐롤린은 공인중개사로 일하고 있고 외동딸 제인은 고등학교 3학년이다.
이들은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2층집에 살며 벤츠와 도요다 두 대의 차를 가지고
있다.
어느 날 레스터는 새로 부임한 손아래 상사로부터 새로운 업무계획서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레스터는 전에는 없었던 이런 요구가 자신을 정리해고하려는 구실을 찾기 위해서 주어지는 일임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업무계획서작성은 카피라이터인 레스터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업무였기 때문이다.
아내와 딸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무능한 가장으로 취급당하는 그로서는 매우
당혹스런 일이었다.
그날 저녁 제인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농구경기에 구경 간 레스터는 치어걸로 나온 제인의 친구 안젤라의 모습에 반한다.
그 후 레스터는 안젤라와의 사랑을 나누는 염치없는 상상을 하며 오랜만에 자신의 욕망에 눈뜨게 된다.
이런 욕망에 더욱 더 거센 불을 붙인 것은 이웃집에 사는 청년 리키이다.
캐롤린을 따라 마지못해 부동산 중개인들의 파티에 간 레스터는 그곳에서 웨이터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리키를 만나다.
리키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겨워하는 레스터를 주방 뒷문 밖으로 데리고 나가 대마초를 권한다.
리키와 대마초를 피우는 동안 레스터는 잊었던 젊은 시절의 자유분방함과 의욕을 다시 느낀다.
때마침 이들을 발견한 지배인이 리키에게 일을 게을리 하면 해고하겠다고 말한다.
이 때 리키는 그만두겠으니 상관 말라고 말한다.
일자리에 연연해하지 않는 리키의 용기 있는 모급을 본 레스터는 리키를 자신의
개인작 영웅으로 삼는다.
그 날 이 후 레스터는 180도 변했다.
이제 그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살기로 다짐한다.
쥐어 살던 캐롤린에게 할 말을 다하고 따지는가 하면 안젤라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조깅과 몸만들기 운동을 하고 리키에게 대마초를 사서 피운다.
계속 업무계획서를 제출하라는 상사에게 대들고 심지어 회사의 비리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하여 1년치 연봉을 더 받는 조건으로 회사를 그만둔 다음 동네 햄버거 가게에 말단 종업원으로 취직한다.
위기에 몰린 중년의 대 반항이다.
한편 캐롤린은 이런 레스터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직장을 그만둔 남편은 무능하고 무책임한 실패자로 비춰질 뿐이다.
남편에게 만족은 얻지 못한 캐롤린은 성공한 부동산중개인 버드 캐인과 불륜에
빠진다.
우연히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된 레스터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혼이나 기타 다른 형태로 추궁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자신의 불륜을 들켰기에 자칫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자신은 결코 인생의 패배자가 되지 않겠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캐롤린은 레스터를 죽일 마음까지 먹는다.
그러나 그 시각 레스터는 건너편 집에 사는 리키의 아버지 프랭크의 총에 맞아
죽는다.
황금의 손, 미다스 : 황금이 행복을 주지 않는다.
소아사아 내륙지방 프리키아 왕국에 미다스라는 왕이 살고 있었다.
그는 대지의 여신 키벨레와 고르디아스 사이에 태어난 반신반인의 영웅이다.
그의 아버지 고르디아스는 알렉산더대왕이 한칼에 베어버렸다는 ‘고르디아스 매듭’을 고안해낸 영웅으로 유명하다.
미다스는 여신의 아들답게 매우 총명한데다가 아주 부자였다.
한 번은 마을 사람들이 디오니소스의 시종인 실레노스가 자주 와서 물을 마시는 샘에 포도주를 풀어놓았다.
그 샘물을 마신 실레노스는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마을 주민들이 잠든 실레노스를 잡아 왕에게 끌고 갔다.
그러나 이를 본 미다스는 황급히 실레노스를 풀어주게 하고는 귀한 손님이 왔으니
큰 상을 차리라고 하여 열흘 동안이나 잔치를 베풀고 열 하루째 되는 날에야 그를 산으로 되돌려 보냈다.
이런 미다스의 행동을 아름답게 여긴 디오니소스신은 그에게 무엇이든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줄테니 말하라고 했다.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더 부자가 되고 싶었던 미다스는 신에게 자신이 만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바뀌게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꽃이고 나무고 책상이고 침대대고 그가 만지기만 하면 황금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그가 손을 씻은 뒤 손가락사이로 떨어지는 물방울까지 황금구슬이 되어
떨어졌다.
꿈과 같은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행운의 시작이 아니라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가 식탁에 앉아 빵에 손을 대자마자 빵은 황금이 되어 먹을 수가 없었다.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포도주를 먹으려고 들면 포도주도 황금물이 되어 금속 맛이 났다.
마침 사랑하는 딸이 그를 반기며 달려오자 미다스도 반가워서 그녀를 손으로 번쩍안았다.
그러나 그 순간 딸아이도 황금조각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제야 미다스는 자신이 빈 소원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깨달았다.
그는 다시 디오니소스신께 자신의 탐욕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신의 용서를 받은 미다스는 신이 일러 준대로 어느 샘에 가서 몸을 씻은 뒤에 다시 예전의 그로 돌아 왔다.
그가 다시 정상적인 몸이 되었을 때 그가 만져 황금이 되었던 모든 것들도 옛 모습으로 돌아왔다.
미다스의 전설은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 것인가를 일깨워준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고 재산을 많이 쌓으면 저절로 행복해 질 것이라고 생각
한다.
그래서 눈앞의 평안함과 즐거움을 모두 희생하고 더 많이 벌고 더 높이 출세하려고 애쓴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에서 레스터의 가정은 물질적으로 풍요한 중산층에 속한다.
그들은 넓은 정원에 그림 같은 2층집에 살며 두 대의 고급승용차 벤츠와 도요다를 가지고 있다.
또 집안의 가구들도 모두 비싼 것으로 채웠다.
그러나 레스터 가족은 그 정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그들보다 더 잘살고 더
출세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자신들도 더 성공해서 상류사회에 진입하기를 열망
한다.
따라서 그들은 충분한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도 항상 불만에 쌓여있고 그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낀다.
주인공 레스터는 광고회사의 간부사원임에도 그의 부인 캐롤린으로 부터 출세하지 못한 무능한 남편으로 무시당하고 심지어 잠자리 마져 거부 당 한 채 굴욕적으로 살아간다.
설상가상으로 레스터는 회사에서 정리해고위협까지 받는다.
그러나 레스터는 그것을 알게 될 경우 펄쩍 뛸 아내 캐롤린 때문에 자신의 고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다.
이렇게 한없이 위축되어가는 위기의 중년남자 레스터에게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난다.
딸의 친구 안젤라를 보는 순간 레스터는 그녀에게 흠뻑 빠져 그녀와 함께 사랑을 나누는 파렴치한 백일몽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부끄러운 꿈은 그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의욕을 느끼게 해주었다.
곧 이어서 또 다른 사건이 레스터의 인생을 밑바닥부터 바꾸어 놓는다.
바로 리키와의 만남이다.
일하는 도중에 뒷문으로 빠져나가 대마초를 피우고 이를 나무라는 클럽지배인에게 일을 그만 둘 테니 잔소리하지 말라고 당당하게 큰소리치는 리키를 보며 레스터는 자신이 무엇을 잃고 살아왔는지를 깨닫는다.
그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충실하기위해 더 많은 연봉을 받고 더 높은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욕망과 만족을 포기하고 노예처럼 일한 댓가는 철저한 자기상실이었다.
14년 동안 그는 가족과 직장을 위해서 모든 젊음을 바쳤지만 남은 것은 비굴하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과 무능하다는 경멸뿐이었다.
게다가 자신보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성공한 아내는 바람까지 피워 댄다.
바빠서 함께 시간은 보낼 수 없었던 딸 제인은 아버지를 오직 돈벌어오는 데에만 소용되는 형편없는 존재로 여긴다.
전형적인 현대 중산층 남자의 비애이다.
이를 깨달은 레스터는 더 이상 남들의 눈이나 사회의 평가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더 이상 잃을 것이나 기대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 될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홀가분한 자유를 느끼고 용감해진다.
레스터는 회사의 비리를 들먹여 1년치 연봉을 더 받고 회사를 그만 두고는 햄버거가게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말단 자리 하나를 얻는다.
그리고 자신이 평소에 원했던 차를 사고 자신의 몸매를 가꾸는 운동을 열심히
하는 등 철저하게 자기만을 위해서 산다.
레스터의 이런 행동은 겉보기에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저버린 이기적이며 부도덕한 행위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레스터는 가장으로서의 행복을 저버린 것은 아니다.
다만 물질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한 것뿐이다.
그는 물질적 풍요와 출세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이님을 깨달은 것이다.
오히려 조금 가난하고 덜 출세하더라도 사회적 기준이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영혼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더 행복한 삶임을 깨달은 것이다.
뒤늦게 미다스왕의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드디어 안젤라와 단둘이 있게 되어 그가 그렇게 바라던 욕망을 채우려던 순간 안젤라가 그동안 허풍을 떤 것뿐이지 아직은 순진한 처녀라고 고백하자 레스터는 자신의 욕망이 얼마나 추하고 동물적인 것이었는가를 발견하고 이를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그리고 다시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가 그녀를 따뜻하게 감싼다.
안젤라 역시 자신의 딸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지켜주어야 할 고귀한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을 통해서 행복이 이기적 욕망을 채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이웃,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에 있음을 새삼 확인했다.
그리고 그는 딸 제인이 갓난 아이 일 때의 사진을 보며 행복했던 옛 시절을 떠올리며 “내가 미쳤지. 이런 가족을 두고... ” 라고 중얼거린다.
레스터가 이런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게 되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는
듯한 그 순간에 레스터는 프랭크의 총에 맞아 쓰러진다.
그는 죽어가면서 자신의 한 평생 동안 행복했던 순간들을 기억해 낸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독백한다.
“ 제인, 나의 공주, 그리고 캐롤린! 살다보면 화나는 일도 많지만 분노를 품어서는 안된다. 세상에는 아름다움이 넘치니까.....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 가슴이 벅찰
때가 있다.
터질듯이 부푼 풍선처럼....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면 희열이 몸 안에 빗물처럼 흘러 오직 감사한 마음만 생긴다.
소박하게 살아온 내 인생의 모든 순간에 대하여.....
여러분, 무슨 뜻인지 어렵나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언젠가 당신도 알게 될테니... “
물질만능주의자, 캐롤린 : 황금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
레스터의 아내 캐롤린은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있다.
그녀는 성공과 출세만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기에 오로지 성공과 출세, 부자가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다른 아무것도 그녀에게 의미는 없다.
그녀는 자신이 원한만큼 성공하지 못한 남편을 패배자라고 경멸하고 잠자리마저
거부한다.
딸 제인에게도 물질의 풍요를 가져다 준 것에 대해서 자신에게 고마워해야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성공ㄱ과 부자가 되려는 그녀의 조바심은 강박관념이 되었다.
남편이 못한다면 자신아도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해 보려고 부동산 중개사자격증을 따고 직접 부동산업을 하지만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아 속상해 한다.
부동산을 팔지 못해 절망하여 우는가하면 어떻게 해서든 성공해 보기위해서 싫다는 남편을 억지로 끌고 부동산업자들의 모임에 참석한다.
남편을 데려가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다.
그녀가 딸 학교의 행사에 참석하는 것도 장사속이다.
그녀는 성공하기 위해서는 성공한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생각에 그 지역에서 가장 성공한 부동산 업자인 버드를 따라다니며 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경청하고 따라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정도가 도를 넘어 끝내는 그와 불륜에까지 빠진다.
그녀에게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정당화 된다.
그녀가 처음부터 이런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속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도 한 때 시위대를 진압하려고 하는 경찰 헬리쿱터에 젖가슴을 드러내고 놀릴 정도로 열정적이고 순수한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서 모처럼 남편에게 예전과 같은 사랑을 느껴 서로 껴안는 순간조차도 비싼 소파에 맥주를 흘릴까 하는 걱정 때문에 분위기를 깰 정도로 그녀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있었다.
그런 그녀이기에 남편이 자신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갑작스레 회사를 그만 두었을때 분노를 느낀다. 남편이 회사를 그만 둔것이 자신에게 모든 경제적 부담을 떠넘기는 무책임한 일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그런 무책임한 패배자는 대우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공한 남자 버드와의 불륜을 덩 정당화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캐롤린은 버드와의 부정을 우연찮게 남편에게 들키자 자신이 수세에 몰리게 된 것에 크게 낭패를 느낀다.
캐롤린에게 두려운 것은 성공의 대열에서 낙오하는 일이다.
이것만 피할 수 있다면 그녀는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있다.
무책임하고 무능한 남편에게 약점을 잡힌 것을 그냥 두어 실패하느니 차라리 남편을 제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약하고 패배한 자들만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인생의 희생자가 된다는 궤변을 내세워 남편을 죽일 마음까지 먹는다.
영원한 갈증과 기아에 시달리는 영웅, 탄탈로스 : 풍요속의 빈곤
소아시아의 풍요로운 땅 리디아의 왕 탄탈로스는 제우스의 사랑을 받아 아주 부자였고 힘도 장사였다.
제우는 그를 극진히 아껴 친구로 대해 주었고 신들의 식탁에 초대하여 불사의 음식인 암브로시아와 불로의 음료인 넥타르를 함께 마시는 것까지 허락했다.
이런 특혜를 누리는 데도 탄탈로스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어느 날 그는 신들의 호의에 보답한다고 신들을 자신의 궁전에 초대했다.
그리고 신들을 시험하기 위해서자신의 아들 펠롭스를 죽여 그 고기를 대접했다.
신들은 그가 저지른 가증할 죄악에 분노하여 그를 지옥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를 연못 한가운데 말뚝에 묶어놓았다.
물은 탄탈로스의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그가 물을 마시기 위해서 고개를 숙이면 똑같은 거리를 유지한 채 물러서서 그 물을 마실 수 없었다.
또 그의 코끝에는 풍성한 과일이 열린 나무가 축 늘어져 있었지만 그가 과일을
먹기 위해서 고개를 뽑으면 그 거리만큼 멀어져 먹을 수 없었다.
탄탈로스는 풍성한 물과 먹을거리를 눈앞에 두고도 영원히 갈증과 기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감질나게하다’ ‘애먹이다’ 라는 뜻의 영어낱말 ‘tantalize'(탄탈리즈)는 그의 이름 ’Tantalus'(탄탈루스)에 그 어원이 있다.
자본주의의 횡포: 자본은 자신을 섬기는 자에게만 부를 안겨준다.
캐롤린의 행동에서우리는 현대 물질만능주의의 위험을 본다.
본래 축재와 출세는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은 수록 남들보다 더 행복해질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재화의 풍요는 우선 인간으로 하여금 굶주림과 헐벗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또 높은 지위는 남에게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수모를 피하게 해준다.
그러나 그뿐이다.
재화와 지위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부귀영화는 행복의 조그만 전제조건이자 수단이지 행복 그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것을 얻음으로서 더 행복해 진다는 것이 확실할 때에만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일이 의미가 있다.
만약부귀영화를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불행해 질 수밖에 없다면 그런 시도는 하지 말아야 한다.
목적과 수단을 바꿀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실에서는 흔히 수단과 목적이 바뀌어 돈을 벌고 출세하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거나 무시하는 일이 다반사다.
특히 산업자본주의시대에 들어와서는 이것이 오히려 더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인간만이 미래의 더 큰 물질적 풍요를 위해서 당장의 고통을 감수하고 노동을
한다.
언뜻 보기에는 개미와 꿀벌도 노동을 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개미나 벌은 개체보존과 종족보존이라는 자연의 필요에 따라 음식물을 저장하는 것이지 결코 내일의 더 많은 물질적 보상을 바라고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기술이나 부의 축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개미가 지금과 같이 진화 한 것이 1억5000년 전의 일이지만 그 오랜 세월동안
개미사회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오직 인간만이 내일을 생각하고 지금 당장의 고통을 참을 줄 안다.
그 결과로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에게서는 찾아 볼 수없는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노동은 동시에 인간으로 하여금 욕망을 가지도록 부추겼다.
노동을 통해서 더 많은 재화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인간은 자신이 가진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계속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되었다.
더구나 산업시대에 들어와 자본이라는 개념이 생긴 이후로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 증식을 위해서 일을 하는 전도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본은 증식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재화는 단순히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수단이 아니라
증식을 위해서 더 많은 생산을 위한 생산재로 개념이 바뀌었다.
자본증식이 목적이 되고 인간은 자본증식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된다.
이제 인간은 노동의 본래목적이었던 자신의 풍요로운 소비를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본의 증식을 위해서 일을 한다.
이런 체제아래에서 인간들은 더 많은 이윤을 내기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능률과 수익률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무시된다.
자본은 어느 사이에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 잔혹하고 혹독한 주인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이제 자본은 자신을 위해서 봉사하는 자들만 남기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제거한다.
그리고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 한시도 쉬지도 않고 일하는 자들에게만 성공을 보장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오직 승리와 성공만을 위해서 행동해야 한다.
무한경쟁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욕망을 최대한 키워야 한다.
아무리 성공했다고 해도 또 아무리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해도 만족해서는 안된다.
더 큰 성공을 위해서 더 많은 돈을 벌기위해서 계속 일해야 한다.
아니 챨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공 스크루우지처럼 일하는 자체가 즐거움이고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 빠지면 헤어날 길이 없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악순환에 빠진 인간은 궁극적으로 세상의 모든 돈을 다 벌 때까지 만족할 줄 모른다.
그리고 만약 그 불가능한 것을 이루었다 해도 만족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더 이상 목표가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에 권태를 느끼고 좌절할 것이 분명하다.
많은 재화를 가지고서 즐기지 못하고 계속 갈등과 탐욕에 시달리는 이런 상황은
그리스신화의 탄탈로스가 당하는 고통과 같다.
풍요로운 가운데 빈곤이라는 신화는 탄탈로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탐욕에 빠진 부자아빠들에게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레스터가 겪는 악몽은 현대 우리사회의 아버지들이 겪는 악몽이다.
젊은 시절 사회의 부조리와 맞서 싸우던 사람이 사회에 나와 생존경쟁에 살아 남기위해서 정신없이 현실에 적응하다보면 어느 틈엔가 도덕적으로 타락 할 대로 타락한데다가 무기력하고 몰염치한 중년의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 햇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게 낙오자의 대열에 끼어 온갖
수모와 경멸의 대상이 된다.
자본주의사회는 이렇게 실패한 이들에게 아무런 동정이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상심에 빠진 가장에게 아내는 위로의 말을 하기보다는 영화 속의 캐롤린처럼 드러내놓고 원과 적대감을 표시한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에서 레스터는 욕망과 자기희생을 통한 조그만 성공, 그리고 더 높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욕망키우기와 그에 따른 희생... 이런 악순환의 덧없음과 허무함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의 모든 욕망을 버린다.
오늘날 미국사회에서 욕망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실패와 낙오를 의미한다.
그는 또 비인간적이고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가 그런 자신을 경멸하고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레스터는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욕망과 성취, 더 큰 욕망과 쳇바퀴 돌듯이 반복되는 피곤한 일상생활의 악순환에서 벗어난 자신이 대견하고 자랑스럽기만 하다.
이런 레스터의 태도는 물신(物神)숭배에 빠진 캐롤린에게는 더 이상 가망 없는
패배자로 비추어진다.
그런 캐롤린은 레스터는 속물이라고 비웃는다.
이와 같은 부부사이의 가치관과 철학의 차이는 결국 아내의 불륜과 남편의 비명횡사라는 최악의 비극으로 끝난다.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사회의 아이들
이와 같이 경쟁만이 남은 사회, 성공과 물질적 풍요만을 유일한 가치로 삼는 사회 교환적(상품적)가치이외에는 아무것도 인정되지 않는 사회 인간의 능력마져도 생산성으로 만으로 평가되어 연봉으로 사람의 가치를 가늠하는 사회, 사랑이 없는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불행하다.
이런 환경은 아이들마져 삭막하게 만든다.
영화에서 제인은 끊임없는 부부싸움을 하는 부모에게 환멸을 느끼는 10대 소녀이다.
그녀에게 물질적 풍요는 저절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부모가 지금정도의 윤택함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가를 강조할 때면 궁상을 떤다고 짜증을 낸다.
그녀는 부모가 어린아이들보다도 유치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들의 욕망만을 위해서 살아가면서도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했다고 내세우는 위선에 신물을 낸다.
그녀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정서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의젓한 모습의 번듯한 부모이다.
그녀는 부모의 천박한 속물근성이 자신을 정서적으로 망쳐놓고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아버지를 청부살인하고 싶다는 충동까지 느낀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래서 그녀는 ‘난 착한 아이가 아니가봐“하고 말한다.
그녀 역시 악한 사람은 아니다.
다만 상황의 희생자일 뿐이다.
리키는 조숙한 아이이다. 이미 중학교 3학년 때에 마약을 피우는 등 어려서는 엄한 아버지에게 대드는 조숙한 반항아였지만 퇴학과 정신병원입원등으로 일찍이 인생의 쓴맛을 경험한 아이였다.
기설세대와의 충돌에서 리키는 어른들의 세계가 온갖 부조리와 위선으로 가득 차
있음을 일찍 알게 되었다.
또 어른들이 내세우는 권위가 실제로는 허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꿰뚫고 있다.
어른들 세계에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음을 아는 리키는 현실과 타협한다.
정직하게 법과 규율을 지키고 살아본들 별 볼일 없는 세상이라면 무엇 때문에
아등바등 애쓰며 살아야 하는가?
적당히 편하게 살면 된다.
어른들이 속인다면 속아 주는 척하고 자신도 그들을 속이면 그만이다.
현실은 어차피 진실을 밝히려 들지 않는다.
적당히 순종하는 시늉만하면 만사가 편하다.
그래서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소변검사를 온순하게 꼬박꼬박 받지만 다른사람의 오줌으로 아버지를 속인다.
또 실은 마약을 팔아 번 돈으로 자신이 원하는 음반이나 비디오카메라를 사면서 아버지에게 접시닦이를 하여 벌었다고 둘러댄다.
접시닦이로는 그만한 돈을 벌수 없음을 아는 아버지도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준다.
그의 말대로 ‘현실을 부정하면 속이 편하기 ’ 때문이다.
리키의 아버지 프랭키는 해병대 대령이다.
그는 월남전에서 실패한 미국의 구세대를 상징한다.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르고 질서와 규율을 강조하는 권위적 인물이다.
그리고 위선적이다. 아들에게는 식구끼리니까 방문을 잠그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의 서재는 꼭꼭 걸어 잠근다. 누구보다도 보수적 도덕성과 남자다움을 강조
하지만 자신은 게이이다.
그의 권위는 초라한 약자의 허세일 뿐이다.
게다가 연금으로 살아가는 그는 그보다 어린세대의 사람들보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가나한 아빠이다.
열등감과 지난날에 대한 자존심만을 가지고 사는 그는 레스터에게 애절한 구애를 하지만 거절당하자 좌절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살인을 저지른다.
그는 월남전에서만이 아니라 생활인으로서도 실패한 처절한 패배자이다.
레스터의 가슴을 설레이게 한 제인의 친구 안젤라는 ‘세븐틴’이라는 10대들의 인기잡지에 모델로 나온 아름다운 아가씨이다.
그녀는 성에 대해서 개방적이고 자기나이또래들보다 성숙한 척하지만 실은 순진하기 그지없다.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평범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의 아버지가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자 이에 응한다.
그러나 정작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자 자기가 처녀임을 고백한다. 무엇이 어린소녀로 하여금 그런 허세를 부리게 했을까?
그것은 패배자가 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로 이름 지어진 성공지상주의의 논리 때문이다.
이 논리가 바로 캐롤린으로 하여금 레스터를 죽일 생각을 하도록 만든 논리이다.
이 논리에는 사랑이 없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만을 강조한다.
악마의 고리이다.
평생가족과 회사를 위해서 일한 레스터를 더 이상 생산성이 없다고 길거리로 내 쫓은 논리도 이 경쟁의 논리였다.
리키가 모든 양심과 사회규범을 적당히 지키는 척하면서 마약을 팔아 돈을 벌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도 이기면 된다는 이 단순한 논리를 믿기 때문이다. 프랭크대령으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느끼게 하는 논리도 바로 이 논리이다.
신화와 꿈을 잃은 사람들의 비극
근대 서양철학에서 인간을 이성적존재로 정의한 이래 신화가 설 땅은 사라졌다.
이성적으로 참과 거짓을 판단 할 수 없는 모든 것은 미신이나 믿을 수 없는 황당한 것으로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성주의 철학은 합리주의를 발전시켜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놀라운 기여를 했다.
이성에 바탕을 둔 합리주의와 과학 지상주의가 지난 3000여년을 지배해오는 동안 근대 산업사회가 이룬 인류의 물질적 풍요는 유사 이래 전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그 결과 몇몇 선진 국가에서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기술과 과학을 발전시킨 이성주의는 동시에 우리에게서 꿈과 신화를
빼앗았다.
이에 따라 신앙심 역시 약해졌다.
합리주의로 무장한 학교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거나 이해할 수없는 일은 외면하라고 가르쳤다.
백일몽을 꾼다거나 허황된 상상을 하는 일은 금기시했다.
산업사회가 발전하면서 생존경쟁은 치열해져간다.
그 결과 만인의 만인에 대한 무한경쟁시대가 왔고 아버지까지도 ‘부자아빠’와 ‘가난한 아빠’ 로 나누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공한 사람은 더 큰 성공을 위해서 더 많은 욕망을 키우고 낙오한 자들은 자포자기에 빠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과 믿음을 잃어버렸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삶 모두가 불행하다.
끝없는 욕망만이 춤추고 베풂과 순수함은 비웃음의 대상이다.
현대인들의 저인적위기는 심각하다.
영화‘아메리칸 뷰티’ 속의 인물들은 온갖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그들 가운데 누구하나 고해성사라도 했다면 그런 비극을 피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그러려고 하지 않는다. 꿈도 믿음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영화에서 가장 종교적인 인물인 리키는 얼어 죽은 여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담담하게 말할 뿐이다.
“아줌마가 거리에서 동사한 것을 보았지. 슬픈 얼굴이었어. 비디오에 찍어놓았어. 놀라운 장면이라서... 그런 장면을 보고 있으면 하나님이 날 보는 듯해. 자세히 보면 신도 보이고...”
얼어 죽은 사람은 아무양심의 가책 없이 지나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이 시대의
비정함을 본다.
이 비정함은 그대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처해도 남들은 그것이 패배자에게 당연한 몫이라며 아무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웃이 헐벗고 굶주릴 때 모른척하는 것은 죄악이다.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45절)
인간은 결코 이성적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욕망의 주체일 뿐이다.
인간의 욕망을 다스리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한없이 커지기만 한다.
그런 인간의 욕망을 다 채울 수는 없다.
우리가 행복해 지는 길은 욕망을 줄이고 조그만 것에서도 만족하는 지혜와 작은 것이라도 남과 함께 나누는 따뜻한 마음을 되찾는 것뿐이다.
‘아메리칸 뷰티로’부터 물질에 대한 욕망 때문에 사랑도 믿음도 신화도 꿈도 잃는 불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나라도 점점 그런 사회를 향해 변해가고 있어서 심히 고통을 느끼며...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좀 더 심각한 인간성의 상실과 아픔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이런 슬픔과 고통을 나는 안 당하리라는 환상 속에 살고 있는듯하지만 결국 대중 속에서의 고독을 더욱 절감하는 시대에 우리는 깊이 묻혀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타인과 더블어 살아야하는 인간의 숙명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항거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것인가?
점점 고민스러운 모습이 나 자신의 심정을 계속 때리고 있다.
함께 나가는 운명의 공동체 안에서 나는 오늘 무엇을 향해 열심히 살았는가? 자문하면서 2차 대전 중 독일의 목사 마르틴 니밀러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 독일에서 나치는 먼저 공산주의자를 핍박 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용기 있게 항변하지 못했다. 그 다음에 나치는 유대인들을 핍박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역시 나서지 않았다. 그 다음에 나치는 노동조합을 핍박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침묵을 지켰다. 그 다음에 나치는 가톨릭교회를 공격했다. 나는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과감하게 맞서지 않았다. 마침내 그들은 나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제는 나를 위해서 나서 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함께 생각해보기 : *우리에게 이웃은 누구인가?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가 나를 이웃이라고 애기해 준적이 있는가?
*소외되는 자신의 자아에 대한 고민은 무엇이고 이를 위해 지금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내 가정은 건강하고 구성원은 건강한 자아를 지니고 있는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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