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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을 앉아 있는
그녀의 목덜미가 하도 눈부시게 희어서
귀뚜라미가 사는 것 같아서
달빛들이 사는 것 같아서
손톱들이 우는 것 같아서
그녀의 등 뒤로
살그머니 돌아가서
오목 목덜미에
단 한번의
서늘한 키스를 하고
아 그 밤으로
그대로 달아난 나여.
―신현정, 「달빛 소나타」
극도로 말과 감정을 아끼는 시인의 시입니다. 한 행을 한 연으로 처리하는 기법도 놀라운 절제력의 반영입니다. 이 기법은 마치 글자를 돌로 쪼아 새긴 듯한 인상을 줍니다. 한 행, 한 행 건너갈 때마다 더듬거리는 말소리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독자는 시어 하나하나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이 시에서 그리고 있는 연모의 자세는 시의 형식을 꼭 빼닮아 있습니다.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보는 눈은 천진하고, 그녀에게 다가가는 모습은 아슬아슬합니다. 사랑과 이별에도 속도의 뻔뻔함이 따라붙는 이 시대에 이런 순정파는 이제 어디 가서 찾을까요? <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문학집배원 안도현의 시배달(안도현, 창비, 2008)’에서 옮겨 적음. (2023. 4. 8. 화룡이) >
토란 잎 우산/신현정-
갑작스런 빗발에 근처 밭두렁가에 뛰어들어가
토란 잎 꺾어 우산을 했다
날벌레 몇 마리 들어온다
천장에 달팽이가 붙어 있다
그랬었구나 어딜 가는 중인지는 몰라도 내가 대신 걸어주마
토란 잎 우산을 빙그르 돌리며 간다.
<감상>
여름날에는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만날 때가 있다. 어느 구름 속에 빗방울의 물주머니가 들어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계절이 여
름이다. 후드득 후드득 듣는 소나기를 만난 시인은 토란 밭에 들어가 우산을 하나 빌려온다. 푸른 토란 잎 우산을 받쳐 든다. 펼쳐진 토
란 잎 우산 안쪽으로 날벌레들도 비를 피해 들어오고, 또 토란 잎 우산의 천장에는 달팽이가 붙어살고 있다. 시인은 날벌레들과 달팽이
와 동행을 해서 길을 간다. 기분도 썩 좋아서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며 걸어간다. 참 싱그러운 풍경이다. 유머도 있어서 웃음이 절로 나
게 한다.
나는 언젠가 신현정 시인의 시에 대해 “명랑하고, 천진하고, 또 부럽기까지 한 장난기도 섞이어 있다. 순응과 긍정과 운치와 웃음과
신명과 상승은 그의 시 특유의 소유이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 이 시도 이러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문태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