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사진들은 대부분 공주시가 1996년에 발행한 <<공주 옛모습>>이라는 사진첩에 실려 있는 사진들입니다. 시기를 달리하며 약간씩 변하는 모습을 볼수 있으나, 1918년 시가지 정비사업 이후 공주의 주산인 봉황산 밑 산록을 중심으로 발달한 직선격자형의 도시 구조는 큰 차이가 없었던듯 합니다.
공주를 잘 아시는 분들은 자세히 사진을 들어다보면 도시개발사와 관련한 중요한 변화를 많이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곡선형의 전통 도시가 이미 직선의 근대도시로 변화되었다는 점이 그 하나입니다. 공주는 1918년 일제의 시가지 정비사업으로 말미암아 직선 격자형의 도로망을 갖춘, 그리고 기능에 따라 구획된 공간을 가진 근대도시로 변모했습니다.
공주 시가지를 가로질러 남북 방향으로 흐르는 제민천을 따라 곧게 뻗어 있는 두개의 큰 도로(특히 공주고등학교와 금강교를 잇는 공주대로), 그리고 제민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들, 이같은 도시구조는 1918년 시가지 정비계획 이후에 형성된 것입니다. 조선왕조시기 공주읍내의 도로는 좁고 구불구불했더랬습니다.
시내의 빼곡히 들어찬 초가집들 사이에 듬성듬성 보이는 뭔가 범상치 않은 건물들, 대부분이 관청이거나, 학교이거나, 은행 건물이라 보시면 됩니다. 사진 오른편쪽에 멀리 보이는 산이 바로 곰나루 전설 속에 나오는 ‘곰굴’이 있는 연미산입니다.
총독부 기관지인 每日申報(1919. 11. 9 ~ 11. 12)에는 富春山人이 쓴 「公州一瞥記」가 4회에 걸쳐 연재되어 있습니다. 富春山人이 공주를 방문한 때는 1918년 ‘시가지 정비계획’을 끝낸 바로 직후였는데, 그는 경성에서 기차를 타고 조치원까지 온 뒤, 다시 공주~조치원간을 오가는 승합차를 타고 공주갑부 金甲淳이 사비를 들여 가설한 錦江上의 山城橋(배다리)를 건너 공주 읍내로 진입한 듯 합니다. 당시 배다리를 건너 읍내로 진입하는 길(현재 공산성 서문 앞길)은 벚나무가 즐비하게 서 있는 매우 정취있는 길이었던 모양입니다. 1919년 가을에 그가 본 공주는 한마디로, “도청소재지로서 그리 넓다고 못하겠으나 정결하고 정답기로는 유수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당시 공주 읍내 풍경은 어떠했을까요? 富春山人의 묘사에 따르면 그것도 공주성 서문 언저리에서 그가 느꼈던 첫인상과 그리 다르지 않았던 듯합니다. 그의 묘사에 따르면 공주“市街는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 짧으며, 반수(半數) 이상이 초가”였답니다. 이는 나이드신 어른들의 회고와도 일치하는 바, 회고에 따르면 아침 저녁으로 밥을 지을 때 쯤이면 공주 시가지 전체가 연기로 가득찼다고 합니다.
하지만 충청감영과 공주목을 잇는 ‘관아대로(官衙大路)’ 풍경은 공주가 도청소재지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기에 충분할 만큼 번창한 분위기였던 듯 합니다. 당시 도청 정문인 “금남루(예전의 포정사) 앞에는 식산은행(현재 국민도서)의 지점과 상대하여 약 2丁(요즈음의 2차선) 가량의 도로(官衙大路 --필자)가 동서로 뻗”어 있었으며, 도로 양측으로는 공주읍내에서 제일 번화한 시가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흔히 ‘관아대로’로 불리운 이 거리는 1918년 ‘시가정비’ 이전 시기에는 사인교(四人轎)가 간신히 다닐 정도의 좁은 길이었으나 공주 제일 자선가로 칭송되던 김윤환씨의 기부로 석교(石橋)가 완성되면서 공주 시가지의 중심도로 역할을 담당하였답니다.
특히 제민천에 대한 정교한 묘사들은 당시 공주가 얼마나 깨끗하고 운치있는 도시였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그림같은 묘사에 따르면, “공주에 와서 제일 부러운 것은 맑은 냇물”, 즉 제민천이었는데, 당시 제민천의 “하상(河床)에는 반석을 깐 중앙으로 유유히 한줄기 맑은 물이 밤낮없이 북류(北流)”하여 그 정결함이 “산간의 냇물보다 못할 것”이 없었답니다. “이른 아침 안개낄 때에 물고기 한떼가 꼬리를 저어가며 헤엄치는 모양과 한적한 한낮 물소리를 듣는 취미는 일종의 시(詩)”였다는 것입니다. 요즘 조금만 가물어도 물이 말라 선거철마다, 복개하여 주차장이나 만들자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박대받고 있으나 그 시절 제민천은 공주사람들의 삶터이자 놀이터였던 듯싶습니다.
부춘선인에 따르면 당시 공주의 명물은 네가지가 있었는데, 그 “첫째는 쌍수산성의 승경(勝景)이요, 둘째는 부호 김갑순이요, 셋째는 버들 세공품이요, 넷째는 감”이었다는 겁니다. 특별히 그는 김갑순을 공주의 ‘4대 명물’로 손꼽으며 그의 이재능력을 극찬하였는데, 이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충남 부호 중에 김씨의 뒤를 따를 자가 몇이나 되는지, 대개는 귀중한 금전을 사장(死藏)하여 두고 황금관이나 하여 갈 것처럼 하고, 활동이나 하면 亡家의 본(本)으로 알며, 식리(息利)하는 수단은 피를 빨아먹는 고리대금 외에 다른 것이 없는 줄로 아는 어두귀면(魚頭鬼面)의 무리가 있을 뿐이라, 과연 군계일학의 김씨가 그처럼 이름 날리는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니며, 빈천한 중에도 기신(起身)한 김씨가 지금의 부력과 명성을 얻음도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조선왕조 시기 공주는 충남권의 중심도시였던 까닭에 다른 읍치 지역에 비해 인구밀도가 비교적 높은 편이었습니다. 물론 철도로 말미암아 인근 도시들이 커지면서 대전에 밀리기는 했으나, 1923년 공주 시가지 인구가 8,304명이었을 때 대전 시가지 인구는 6,728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1925년 1만여명 남짓했던 시가지 인구수는 1930년에 이르면 13,116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게다가 공주에는 외지 학생들이나 관리들과 같은 유동인구가 많아 실제의 시가지 인구는 위의 숫자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1930년 국세조사의 직업별 인구(377가지 소분류) 통계를 근거로 당시 공주 거주자들의 직업 분포를 살피면, 학생, 지주, 식모, 관공리, 노점상, 지게꾼, 기생 등이 많았음을 알수 있습니다. 1930년 현재 공주군에 거주하던 ① 학생은 4,471명(남 3,592명, 879명) ② 소작료 생활자, 즉 순지주는 210명(남 119명, 여 91명) ③ 주인집에서 기식하는 가사 사용인은 837명(남 181명, 여 656명) ④ 관공리 및 고용인은 584명(관리 375명, 공리 99명, 고용인 110명) ⑤ 노점상 및 행상인은 662명(노점상 441명, 행상인 221명) ⑥ 기생은 36명 등이었습니다.
이상의 수치는 1930년 현재 공주가 행정도시이자 교육도시이자 소비도시였음을 잘 말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1930년 현재 공주군내에는, 정미제분소 8곳, 양조장 17곳, 과자점 6곳, 푸줏간 39곳, 쌀가게 65곳, 전당포 14곳, 여관 및 하숙 63곳, 요리점 및 찻집 244곳(藝妓 = 妓生 36명), 이발소 43곳, 양복점 8곳, 표구사 17곳이 성업중이었습니다.







첫댓글 멋진 사진입니다. 풍광이 드러나는 나지막한 건물들과 어울려...
오늘 봉화대에 처음으로 올랐습니다.
여러 방향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오는 멋진 곳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