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호우(豪雨) 대란(大亂) 3
청사 옥상에서 5시간 정도 대피하였다가, 오후 6시가 좀 넘어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탁류가 빠져나간 청사 바닥에는 흙과 쓰레기들이 많이 보였다.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몇 사람이 좀 치워본다고 했으나 곧 날이 어둡고
정전이 된 상태에서 작업을 할 수 없었다.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복구작업이 시작되었다. 청주나 대전으로 연결되는
도로들이 침수 또는 붕괴가 되어 보은은 고립되었다.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날에 내린 비가 500mm 정도의 집중 호우였고, 산간 지역인 보은군 내 곳곳
에서 산사태로 인한 피해가 심했다.
이 산사태로 인해 회인면 산골 마을에서는 주민 20여 명이 참변을 당했다는
슬픈 소식을 듣기도 하였다. 당시 수해로 인해 보은 군내에서 100명에 가까운
목숨이 희생되었다. 큰 재난이었다. 내가 근무하던 보은중계소로 진입하는
도로도 모두 끊어져 차량 통행이 불가능하였고, 걸어서 들어오는 것도 매우
불편한 실정이었다.
중단된 방송복구가 최우선이기에 본사에서 지원하는 방송송신차가 먼저 도착
했고, 청주방송국에서는 비상 발전차가 도착하여, 현재의 보은군청 진입로 우측
공터에다 이 차량들을 주차하고, 비상 방송 체제로 전환하여 29시간 만인 7월 23일
저녁 6시경부터 방송을 재개하였다.
아울러, 기존 방송시설들과 청사 경내의 수해복구를 위해, 청주방송국에서 연일
많은 직원이 찾아와 중계소 수해 복구를 위해 땀을 흘렸다. 이러한 작업이 거의
보름 정도나 이어지는 동안에 수해 복구가 많이 이루어졌다.
그 후에, 물이 빠져나간 흔적들을 살펴보니 1층 바닥에서 약 1미터 정도의 높이
까지 침수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후로도, 송신기나 발전기와 같은 방송 장비
들과, 청사 내부의 곳곳에서 진흙들이 꾸준히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내가 보은중계소를 떠난 1982년 후반기까지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옛말에 "불탄 자리보다도 물이 들어왔다 나간 자리가 더 무섭다"라는 말이
가슴에 다가오는 그런 안타까운 실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