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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답사기>
무령왕, 1500년의 침묵으로 백제를 부활시키고
김정숙(명예교수, 역사학과)
2022년 마지막 날, 나는 여름 끝자락의 숙제를 들고 앉았다. 9월에 다녀온 공주 답사기를 만들어야 한다. 한겨울에 앉아서 떠나기 싫어하던 여름과 머뭇거리던 초가을을 잡고있는 것은 마치 창밖으로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면서 수영하는 기분이다. 신선하다. 더구나 계묘년을 시작하는 문턱에서 1500년전 계묘년에 붕어하신 왕의 묘지석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이 역사의 연(緣)을 ‘어쩌면 좋을지?’ 60년을 한 주기로 하는 동양에서 그 25주기를 참은 무령왕은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그때의 답사팀은 어디서 무얼하며 올 한해를 접고 있을까?
Upgrade된 가을 답사
2022년 9월 21일 답사의 오후 코스는 공주였다. 백제의 두 번째 수도를 보는 것이다. 봄에 방문한 부여에 이은 당연한 연결이다. 공주의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은 부여의 관북리 왕궁 유적 등 4곳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그래서 공주와 부여는 매년 10월에 함께 축제를 연다. 우리는 축제 기간보다 좀 앞서 방문하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답사가 부여 때보다 여러 면에서 업그레이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원, 답사 내용이나 방법 등, 한번 답사로 모두 전문가가 된 듯-.
집행부에서 이번에도 단톡방으로 참가 신청을 받았다. 김봉식, 김준호, 남두현, 남효덕, 박정윤, 박종갑, 오창혁, 윤대식, 이석규, 이승근, 이철희, 임동준, 조무환 교수님 부부 16분과 강용호, 권종걸, 김석영, 김정숙, 김종근, 이광식, 이용기, 황평 교수님 등 34분이 출발했다. 원래 41분이 신청하셨는데, 출발 즈음에 연고가 생긴 분들이 안타깝게 불참하셨다. 어쨌든 봄답사에 28명이 떠났는데, 이번에는 34명이 되었으니, 으쓱할만하지 않는가. 부부팀이 2/3인 걸 보면 모두 사모님들의 공로라 하겠다. 공주로 향할 때 우리 기분은 한층 상기되어 있었다. 세종시에 위치한 한국콜마공장은 과학적이었고, 음식은 정갈하고, 배웅은 정성스러웠다. 게다가 우리 영남대학교 졸업생의 기업이라지 않는가?
나는 아침 버스에서부터 오늘 하루는 우리가 ‘천진한 어린이 마음’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다. 어린이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장수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고도 한다.
“산골짝에 다람쥐... 소풍을 간다”
란 동요로 시작했다. 동요는 어린 시절을 쉽게 돌려준다. 더욱이 나는 버스에서부터 ‘우정’을 얻었다. 사실 이번 버스에는 좌석의 여분이 있었는데도 조무환 교수님의 ‘짝’ 한영신 사모님이 내 옆에 앉으셨다. 그래, 하루 파트너로는 "내가 조 교수님에 버금갈지도 몰라" 라고 은근히 기대하면서 ‘일일 내 짝궁’에 행복해 했다. 한 선생님은 개신교 신자이고, 나는 구교 신자인데, 하느님부터 시작하여, 여성의 생활, 한국 문화.... 이야기가 끊일 틈이 없었다. 이렇게 하면 부부가 와도 서로 다른 사람을 사귈 수 있는 기회가 되는구나 싶다.
또 아침 집결장소에서 남효덕 교수님 부부께 인사드릴 수 있어서 종일 흐뭇했다. 남 교수님께서는 “그때 도와주어 고맙다”라고 하셨다. 지금은 그 책상들도 다 교체하고 많이 달라졌다고도 덧붙이셨다. 2003년 무렵이었다. 공과대학 교수님께서 월급으로 학생들 장학금을 주어온지가 벌써 10여년 되는데, 이번에는 대안학교를 세운다는 소식을 들었다. 교무처 일을 보면서 폐기용 책걸상이 창고에 쌓여있는 것을 알던 나는 이를 연결해 드렸다.
남 교수님은 어릴 때 교회에서 세운 중등성경구락부에서 공부를 시작해서 고입검정고시를 거쳐 계성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가정교사와 야간교사를 하면서 사범대학과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교수가 되어 월급을 떼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1996년에는 마침내 ‘재단법인 덕성장학회’를 세웠으며 2002년 학교법인 덕성학원을 세우고, 2년 후 달구벌고등학교를 개교했다. 책상, 걸상은 이때의 일이다. 남 교수님은 2019년 이 학교의 교장직을 물러나셨다.
사실 교수 중에 적지 않은 이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선생님이나 학교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공부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월급을 덜어 장학금을 주기는 쉽지 않다. 남강 교육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남 교수님은 2020년 ‘행복한 부자상’을 수상했다. 나는 대안학교를 여실 때 방문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이제 그 말씀을 다시 드릴 기회를 얻어 기뻤다.
한편, 우리는 답사코스도 upgrade시켰다. 우리는 오후 1시에 국립공주박물관 도착, 2시에는 무령왕릉을 답사하고, 3시 30분부터 공산성에서 산책했다. 시간적으로 좀 서두른 답사지만 실력있는 교수들이니까 무난했을 것이다(또 이 긴 답사기가 약간의 보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오후 5시에 ‘고마나루1999’ 라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6시 귀가길에 올랐다.
답사 내용면에서 지난번에 빠진 고분군과 박물관이 들어왔다. 무덤은 생활 주변에서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이집트의 나일강을 보면 강변에 생활지가 있고 이어 생활지가 끝나는 곳에 무덤이 있다. 사막은 사실 무덤 뒤에 있는 것이다. 동시에 무덤은 기록이 적은 고대사에서는 자료 보관소이다. 또하나 박물관은 1일 답사팀의 경우, 화창한 날씨에 어둑한 실내에 들어가 말없이 누워있는 유물에 다가가기는 사실 쉽지 않다. 그럼에도 박물관은 그날 본 유적을 종합하는 기회이다. 그리하여 공주 코스는 부여에서 놓고 온 능산리 고분군과 부여국립박물관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게다가 공산성을 걸음으로써 봄의 부소산성과 자연스레 비교할 수 있었다. 물론 역사 사건도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부부팀이 많은 이번 기회에 개별적으로 산책할 수 있는 시간을 준 것도 일층 상향된 운영이었다. 이같이 집행부에서는 하루에 다 보지 못하는 것을 다음 답사에서 보완하고 있다. 두 번 다 참여하신 강용호, 김봉식, 김정숙, 김준호, 남두현, 박정윤, 박종갑, 이석규, 조무환, 황평 교수님은 이에 찬성하시지 싶다.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다고 했던가?
공주, 역사를 품었다가 내뱉는 곳
공주는 역사를 품었다가 느닷없이 내뿜는 도시이다. 공주는 현대에 와서 고고학적으로 우리 역사에 세 번이나 큰 충격을 가했다. 먼저 1963년 앨버트 모어와 릴리 샘플 부부가 공주 석장리의 구석기 유적을 발견한 때였다.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구석기 유적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한해 전에 북한의 웅기 굴포리에서 구석기 유적이 나와서 흥분하고 있을 때였다. 이 발굴은 한반도에도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확고히 한 쾌거였다. 이후 전국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그후 10년도 채 못되어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되었다. 이 발굴을 계기로 전공을 백제사로 정한 대학원생들이 백제사는 물론 한국 고대사의 ‘새로운 문’을 열어놓을만큼 큰 사건이었다. 계명대학교에서 정년한 노중국 교수가 그 대표 주자이다. 그리고 2003년부터 2011년까지의 공산성 발굴이 백제사를 채워나가고 있다. 공주는 앞으로도 무슨 기록을 발설할지 모를만큼 역사가 쌓인 도시다.
공주는 위로는 금강이 휘감아 돌고 아래로는 부여와 논산의 넓은 평야가 펼쳐진 곳이다. 금강은 길이가 401km에 이르는 장대한 강으로 한국의 6대 강이며, 남한에서는 세 번째로 큰강이다. 강 하구가 넓고 깊어 내륙 수운이 발달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 고대에는 교통운송에 큰 역할을 했다. 참고로 금강이 부여에서 만나는 부분을 백마강이라 부른다.
공주는 삼국시대에 웅진, 통일신라시대 웅천주로 불렸고, 고려 초에서야 공주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충남 중앙에서 약간 동쪽에 위치한 공주는 북쪽으로 차령산맥의 산지, 남동쪽으로 계룡산이 펼쳐있다. 충남 행정시 중에는 가장 넓은 편인 공주는 1896년 충청남도와 북도가 분리되면서부터 1932년까지 충남도청 소재지였다. 1986년에 시로 승격되었는데, 인구 10만명 정도이며 3차 산업이 성한 곳으로 주간 인구가 더 많다.
웅진 백제시대
웅진백제 63년 동안에는 문주왕(475-477), 삼근왕(477-479), 동성왕(479-501), 무령왕(501-523)과 성왕(523-538) 등 5명의 왕이 있었다. 백제는 삼국 중에 그 발전 속도가 빨랐다. 4세기에 산동지역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때 근초고왕은 평양까지 쳐들어갔고,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했다. 이후 고구려는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왕으로 이어지며 강대해졌고, 뒤를 이은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하고 남진정책을 추진했다. 드디어 475년 장수왕이 위례성(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이 패사하고 수도마저 함락당했다. 나제동맹을 맺고 있던 신라로 원군을 청하러 갔던 문주왕은 결국 웅진에 도읍했다.
백제 왕실은 갑자기 수도를 옮겼기 때문에 왕실, 한성 귀족과 웅진 세력들의 세력균형이 불안정했고, 문주왕과 삼근왕은 각기 재위 2년만에 죽었다. 문주왕은 해구의 반란으로 죽고, 뒤를 이은 삼근왕도 진씨 세력이 해구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죽었다. 이에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 동성왕이 진씨 협력으로 즉위했다. 동성왕은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어 이찬 비지의 딸과 혼인했고, 한성귀족과 웅진귀족을 균형있게 등용하여 안정을 찾았다. 중국 남제와 교류하고 궁궐 동쪽에 임류각도 세웠다. 공산성 방문 때 이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성왕은 왕권강화를 꾀하다 백가 세력에게 암살당했다. 그럼에도 백제는 동성왕의 치적을 바탕으로 무령왕대에 국력을 되찾고 문물을 진척시킴으로써 성왕 대 기적을 일구어낼 수 있었다. 무령왕은 뒤에 보겠다. 무령왕 다음에 영민하고 비범한“ 성왕이 즉위하여 불교정책을 강화하며 문화를 발전시키고, 결국 사비로 천도했다.-
국립공주박물관, 왕릉 유물의 분위기를 잃고
국립공주박물관은 커다란 현대식 건물로 주차장도 넓고, 바로 옆에는 숙박시설인 한옥촌도 구비했다. 그러나 3년간의 '코로나19' 여파인지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념품 파는 곳 등 모든 것이 자리만 지키고 있는 형편이었다. 사실, 우리가 본 공주의 세 유적지가 전부 예전만큼 활기를 띄지 못하고 있었다.
공주박물관의 중심코너는 물론 1층에 있는 무령왕릉 출토 유물이었다. 우리의 목적지이기도 한 이 전시실 입구에는 나태주 시인의 ‘무령왕’이란 시가 적혀 있었다. 시인은 오늘날 무령왕을 느끼는 것에 감격한 듯하다. 그러나 역사 전공인 내게는 시가 너무 약했다. 무령왕의 충격은 그가 나타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는 한국고대사에 있어 ‘혁명’이었다. 마치 백제사에서 오늘날로 비유하면 ‘핵폭탄’을 발견해 낸 것 같은 위력이었다.
그런데 무령왕릉 유물관은 무덤 속의 유물이기에 답사 순서로는 무령왕릉을 먼저 보고 전시실을 보는 것이 낫다. 박물관으로 먼저 들르게 된 답사팀은 더욱 궁금해했고 나는 신나서 설명하다가 박물관 직원에게 제지당했다. 박물관 안에서는 설명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무슨 소리인지! 어쨌든 당시 나는 송산리 무령왕릉 모형관에 아직도 예전처럼 복제품 등 물건들이 전시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의 없이 설명을 멈췄다. 모형관에 대한 기대는 곧바로 공허한 확인으로 끝났지만-.
무령왕릉과 그 유물 전시관은 참 변화가 많다. 무엇보다도 공주박물관과 무령왕릉 유물 전시의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원래는 우리가 보는 박물관 이전의 공주박물관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유적이 파헤져지는 것을 보다 못한 지역 인사들이 '공주고적보존회'를 만들고 충청감사의 행정청이던 선화당 건물을 옮겨 와 전시실로 꾸몄는데, 1934년 이를 모태로 박물관으로 출범했다. 1940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공주분관으로 개관했고, 해방 후에는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1975년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승격했다.
이 사이, 1971년 공주박물관 관장이 무령왕릉을 발굴하면서 그 유물들이 공주박물관으로 오게 되었고, 이때 박물관 건물을 새로 지었다. 즉 무령왕릉 유물 덕에 승격했다고 하겠다. 박물관은 벽돌로 지었는데, 입구를 무령왕릉 벽의 등잔을 놓는 감실처럼 만드는 등 안팎의 느낌이 전체적으로 무령왕릉의 이미지를 본떴다. 1·2층 전시실에 무령왕릉 유물 108종 2096점을 가능한한 무덤 형태로 전시했었다.1) 그리고 송산리 고분군에는 무령왕릉 모형관이 있고, 그곳에 관, 신발, 유물 등을 출토 당시처럼 전시해 두었다. 왕릉과 거리는 떨어져 있었지만, 무령왕릉을 보고 공주박물관에 가서 유물을 보면서 무덤 내부까지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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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령왕릉 유물 외에 기존 박물관 유물 500여 점 더 전시되어 있었다. 중동 언덕 위에 있는 이 박물관은 현재 충남역사박물관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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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04년 5월 현재의 박물관으로 신축하여 개관하면서, 능의 내부구조는 상실되고 유물들은 각각 전시품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무령왕릉의 내부구조 안에서 유물을 보기가 점점 더 어렵게 되고 있다는 말이다. 박물관에서 설명을 멈추면서까지 기대하고 찾았던 송산리 무령왕릉 모형관은 현재 모두 영상으로 대치하여 아예 영상놀이관처럼 바뀌어 있다. 점점 유물이 허공으로 떠도는 느낌이다. 게다가 현재의 국립공주박물관에도 무령왕릉 유물 외에도 다른 시기,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종합박물관을 표방하고 있다. 박물관이 이웃하여 두 개나 있는데, 하나는 완벽하게 무령 왕릉 출토 유물로 특화할 수 없는지?
무령왕릉 정도의 유물이면 생활사, 정치사를 덧붙이면서 충분히 전용박물관을 해낼 수 있을텐데 무엇때문에 둘 다 종합박물관 역할을 하려는지 모르겠다. 한곳에서 여러 가지를 보려고 하는 ‘게으른’ 답사객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공주시의 욕심인가? 송산리 고분 공원에서 아쉬움을 풀 수 있겠지? 하며 박물관을 나왔다. 현재 일각에서 제기하는 백제의 북쪽 영토설을 지지하는 황평 교수님은 전공 책자도 사들고 나왔다. 황 교수님이 박물관 내부 유물을 좋은 사진으로 잡으셨다.
송산리 고분군과 공주의 수난
송산리 고분군에는 고분 7기가 보존되어 있다. 1호분부터 4호분까지가 서쪽에, 5호와 6호분 그리고 무령왕릉이 동편에 있다. 그밖에도 봉분이 분명하지 않은 것이 지하에 많아 이 지역 전체가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송산은 금강 변에 있는 높이 130m의 나지막한 구릉으로 백제 왕가의 묘역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봉분은 무너져 점점 소나무 야산이 되었다. 그러자 여기에 민묘들이 들어섰다.
그러던 것이 일제시대 1호분부터 5호분까지 도굴되면서 송산리 고분군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 5기의 고분은 1927년 무렵에 파헤쳐졌다고 하는데, 모두 횡혈식 석실로 벽면에는 강회를 발랐다. 이것은 한성시대부터 내려오던 백제의 무덤 축조방식이었다. 고분을 파헤친 대표적 인물은 '가루베 지온'인데, 그는 1915년 공주고보 선생으로 왔다. 그는 고고학 훈련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백제의 수도 흔적을 찾으러 다녔다. 급기야 그는 1932년 총독부와 교섭해서 무령왕릉 옆에 있는 6호분을 발굴했다.
6호분은 당시 유일하게 나온 벽돌무덤인 데다가 사신도가 그려져 있었다. 벽화를 그릴만한 자리에 진흙을 칠하고 면회(面灰)한 위에 먹과 채색으로 사신도를 그렸다. 6호분은 부여 능산리 동하총 1호분(석실분)과 함께 백제의 사신도 벽화로 유명해졌다. 지금은 두 고분 다 사신도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한편, 고분을 여니 가스가 가득 차 있었다고 한 가루베는 출토유물을 고스란히 챙기고 무덤 바닥을 빗자루로 쓸어 말끔히 치운 다음 총독부에는 이미 도굴되었더라고 보고했다. 해방이 되자 가루베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유물들을 일본으로 가져갔고, 나중에 『백제 유적의 연구』라는 책도 펴냈다. 그는 1969년 죽기 1년 전에 송산리 고분 관계 사진 자료를 한국인 옛 제자에게 돌려주었으나, 여기에 유물관련 사진은 빠졌다고 한다. 이외에도 가루베는 무덤 1000여기를 조사하고, 100여기는 자신이 직접 뒤졌다고도 하고, 300여기를 도굴했다고도 한다. 그는 나중에 강경여중 교장으로 발령받았는데, 해방이 되자 공주사람들이 그를 찾아다녔으나 미군청정의 신병 거부로 더이상 추적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도굴과 반출이 얼마나 될런지? 계산하기 쉽지 않다.
예전에는 5호분과 6호분은 입구에서 들여다볼 수 있었으나, 현재는 무령왕릉 모형관 안에 무덤 내부를 구축해 놓아 들어가 볼 수 있다. 그러나 5호분은 들어갔다 나올 때 무덤 입구에 부딪치지 않도록 ‘머리를 주의’ 하라고 서로 권하면서 모두 머리를 찧고 나오곤 한다.
한편, 송산리 고분군은 외곽으로 산책길을 내놓았다. 맨 위쪽 솔밭으로 올라가 송산리 고분군 전체를 조망할 수도 있고, 산자락으로 쌓인 공주의 지세를 파악할 수도 있다. 다만, 여러 설명 자료들을 백제문화단지로 이전했는지 예전에 있던 자료실들이 없어졌다.
매장자가 확실한 처녀분, 무령왕릉의 충격
무령왕릉의 발굴 :
송산리의 대표였던 사신도 고분인 6호분을 보호하기 위해 작업을 하다가 무령왕릉을 발굴하게 되었다. 즉, 도굴 때 천장이 훼손된 6호분에 물이 스며들어서, 1971년 여름 장마를 앞두고 배수로를 만드느라 뒤쪽 언덕을 파내려가게 됐다. 무령왕릉은 5호분과 6호분의 뒤쪽에 있는데, 가루베는 이를 두 무덤을 위한 인공주산으로 생각하고 손대지 않았다.
1971년 7월 5일 배수로 공사를 하던 한 인부의 삽이 무령왕릉의 벽돌 모서리에 부딪쳤다. 공사 책임자인 공주박물관 김영배 관장은 이를 따라 파 들어가 아치형의 벽돌을 보게 되었다. 무령왕릉의 입구였다. 김영배 관장은 이를 문화재관리국에 보고 했고, 그리하여 김원룡 국립박물관 관장을 단장으로 하는 발굴단이 파견되었다.
7일 7일 발굴단은 계속 작업하여 벽돌로 막고 강회로 단단하게 바른 입구를 찾았다. 그러나 그날 저녁은 비가 많이 내려 무덤 앞에 도랑을 파서 빗물을 돌리며 밤을 새웠다. 다음날 8일, 작업을 계속하여 오후 늦게서야 문앞의 콘크리트처럼 단단히 굳은 강회와 입구를 막은 벽돌의 맨 윗줄을 뜯었다. 터널형의 인도에는 항아리가 구르고 진묘수가 지석 두장을 앞에 놓고 있었다.
이를 처음 본 김영배 관장과 김원룡 관장의 충격은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차례로 벽돌을 떼어 중간쯤 헐었을 때 안으로 들어가 지석 첫머리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란 글짜를 읽었다. 무령왕이었다. 주인공을 알 수 있는 무덤, 도굴되지 않은 고분을 만난 발굴단장은 이성을 잃을만큼 흥분했다.
‘매장자를 알 수 있는 처녀분’은 한국 고대 고분 발굴에서 처음 있는 ‘행운’이었다. 입구를 차근차근 다 들어내지도 못하고 중간에 남은 벽돌을 넘어 고분으로 들어간 이 성급한 발굴단은 ‘감격에 겨워’ 단숨에 이름을 공표해 버렸다. 김원룡 관장은 “이 엄청난 행운이 그만 멀쩡하던 나의 머리를 돌게 하였다. 이 중요한 마당에서 고고학도로서의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일어난 것이다. 고고학의 ABC조차 지키지 못했다”라고 나중에 후회했다.
그의 한탄대로 유물 수습은 어처구니없이 진행되었다. 무령왕의 이름이 전파를 타고 전국에 퍼지자 무덤의 주위는 구경꾼과 각지에서 달려온 전문 기자들로 꽉 찼다. 발굴 대원들은 사람들 때문에 수습이 더 곤란해지기 전에 철야 작업을 해서라도 발굴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카메라를 서너 개씩 둘러맨 기자들은 사진부터 찍게 해달라고 성화였다. 입구에서 안쪽으로 한 신문사마다 2분씩 찍기로 약속했는데 그것은 약속 뿐이고, 기자들은 카메라를 대자 발을 뗄 줄 몰랐고 안으로 마구 들어가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기까지 했다. 유물 수습과정이 엉망이어서 그렇지, 초기 모습은 그나마 사진으로 남게 되었다.
북새통 속에서 김원룡 관장은 무령왕 쪽을 맡고 김영배 관장은 왕비 쪽을 맡아 정리했다. 두 관장은 어두운 데서 메모를 하고 약도를 그리며 물건을 들어내 꼬박 아침까지 작업했다. 그렇게 유물을 들어내고 바닥은 청소되었다. 철조망을 둘러치고 충분한 장비를 갖추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혹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릴지도) 눌러앉아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김원룡 관장은 이 일에 대해 여러번 고백과 사죄를 글과 말로써 토로했다. 유홍준 교수는 그것은 당시 한국 문화의 수준인 것이라고 변론(?)했지만, 어쨌든 누구의 잘못을 떠나 이것은 엄청난 양의 역사의 기록을 날려버린 ‘발굴 대참사’였다. 이 경험은 그후 경주 고분을 발굴하는 이들에게 많은 교훈이 되었다고 한다.
무령왕릉의 발굴은 엄청난 ‘사건’이었던 만큼 얽힌 일화도 많다. 배수로 공사 중 무령왕릉을 발견한 김영배 관장은 7월 4일 산돼지에게 쫓겨 도망 다니다 결국은 집에까지 따라온 돼지를 보고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꿈을 꾸었다. 그는 그 이튿날 무령왕릉을 발견했고 사흘 뒤 무덤을 열었을 때 맨 앞에서 만난 돌짐승이 바로 꿈속에 산돼지와 같았다고 한다.
한편, 발굴대원들은 무령왕릉 개토에 앞서 돼지머리를 놓고 제사 지냈다. 그런데 발굴하면서 그곳이 바로 무령왕릉 위였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위치를 알 수 없는 이들의 ‘무례’였다. 그리고 발굴 책임자였던 김원룡 관장은 다음 해 뜻하지 않은 일로 파산이 되었고 남의 차를 빌려 타고 무령왕릉으로 가다가 길에서 아이를 치는 등 사고를 당했다.
무령왕릉의 구조와 유물 :
무덤은 진묘수(국보 제162호)가 지키고 있었다. 무령왕릉 진묘수는 뭉툭한 코에 툭 튀어나온 눈을 하고 입을 벌린 채로 지석 뒤쪽에서 버티고 서 있었다. (모습은 사진 참조) 진묘수는 입술에 붉은 칠이 있고 몸에도 칠을 했던 흔적이 있었다. 입구를 막은 돌을 처음 뜯었을 때 고분에 공기가 유입되면서 갑자기 흰 수증기같은 것이 품어져 나왔다고 한다. 어쨌든 외부 공기가 닿으면서 빨간색이 갑자기 사라졌다. 한편 중국의 신수(神獸)는 흙으로 빚었는데, 무령왕릉 진묘수는 돌이다.
왕릉의 구조는 횡혈식 벽돌무덤이다. 자연 암반을 파내어 공간을 만든 뒤에 벽돌을 쌓았는데 먼저 입구에서 방까지 사이에 긴 연도를 만들고 안쪽에 부부를 합장한 방을 꾸몄다. 입구에서부터 둥글게 모아지는 궁륭형 천정이고, 온 벽이 연꽃 벽돌로 조성되었는데, 이 벽돌은 두 장을 맞대야 연꽃 한 송이가 완성된다. 무덤 내부는 남북 길이가 4.2m, 동서 넓이가 2.72m이며 바닥에서 천정 중앙까지의 높이는 2.93m이다. 유물이 108종 2096점 출토되었는데, 그중 12점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무령왕릉의 출토 유물 중 압권은 연도 가운데에 놓여있던 묘지석과 매지권(국보 제163호) 인 두장의 돌판이다. 무령왕의 묘지석은 41x35cm 크기에 돌에 53자가 새겨져 있다. 꼭 1500년 전인 계묘년(523년) 3월 7일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무령왕 생전의 칭호)이 62세로 돌아가시니 을사년(525년) 8월 12일에 장사를 지내고 문서를 작성한다는 내용이다. 영동대장군은 양나라 정3품 벼슬이다. 사마왕은 붕어해서 27개월 후에 관이 옮겨졌다. 그리고 여기서 말한 문서란 아래의 글을 담은 매지권(땅 매매문서)을 말한다.
“돈 일만립(枚) 이상 한 건을 을사년 8월 12일에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은 상기의 금액으로 土王, 土伯, 土父母, 지하의 여러 관리 및 지하의 지방장관에게 보고하고 남동 방향의 토지를 매입하여 무덤을 쓴다. 이를 위하여 증서를 작성하여 증명하게 하며(이 묘역에 관한 한) 모든 유령에 구속되지 않는다.”(임창순 옮김)
위의 지석은 연도 뿐 아니라 장례 관습, 백제인의 사고 등을 드러낸다. 왕의 장례는 삼년상이었고, 토지신으로부터 땅을 사서 묘를 썼다. 지석 위에 땅값으로 중국 오수전을 올려 놓았다. 백제인이 땅의 질서를 존중하는 모습이다.
이후 3년 6개월 후에 부인이 돌아가자 3년상을 치르고 529년 2월 12일 왕비를 합장했다. 이때 이 매지권 뒷면에 왕비에 관한 글을 새겨 왕비의 지석으로도 삼았다. 그러니까 토지는 이미 사 둔 것이어서 따로 더 땅을 사지는 않고 왕비는 그냥 들어가게 된 것이다.
왕과 왕비가 입구 쪽인 남쪽에 머리를 두고 왕의 관이 동쪽, 왕비의 관이 서쪽에 놓여 있었다. 시신을 넣은 나무관은 삭아서 유물들이 많이 흩어진 채로 발견되었다. 시신이나 천은 이미 삭아 없어졌고 주로 금동제 유물이 남아있었다. 시신을 안치한 뒤 입구를 막았던 벽돌의 기록으로 이 무덤은 무령왕 통치기간인 512년부터 준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3년 동안 시신을 모셨던 빈장(殯葬)은 서쪽의 신지산, 정지산 유적으로 본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들은 모두 백제의 회화와 서예, 공예의 우수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특히, 겉면에 두 마리의 용이 서로 꼬리를 물듯이 연결되어 있는 은제 팔찌는 안쪽에
“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卅朱耳” 라는 명문으로 520년이라는 제작자와 제작연도 등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유물들도 제작자, 제작인 등의 기록이 있을 수 있다. 또 백제가 장인의 이름을 새길만큼 장인을 대우했다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왕비의 허리 부분에서 장도와 함께 3cm 크기에 유리 동자상도 나왔다. 유물 개개에 대한 설명은 약하겠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유물로 말미암아 박물관 하나를 다 채울 수 있을 정도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온전한 처녀분으로 발굴된 무령왕릉을 보면서 한 고분에 이 정도의 유물이 매장되어 있으니,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은 유물들을 도난당하고 빼앗겼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무령왕릉은 한국사에서 ‘기적’에 가까운 일을 해냈다. 삼국시대 수많은 고분 중 피장자를 알게 된 첫 번째 왕릉인 덕에 여러 가지 기준을 제공하게 되었다. 우선 무령왕 묘지석의 기록은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의 역사책인 『삼국사기』의 해당 내용과 일치함으로써 우리 고대사 기록에 대한 신빙성을 증명해 주었다. 또한 연대가 분명한 무령왕릉 출토품은 백제뿐만 아니라 신라, 고구려 나아가서 일본 유물의 편년을 잡는 기준이 되었다.
고대사 편년은 유물끼리 비교 종합해서 선후를 파악하곤 하는데, 기준 연도를 정확히 제시하는 물건들이 수천점 쏟아짐으로써 연도 작업의 뼈대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또하나 백제 왕실의 적극적인 대외 문화 교류를 보게 한다. 왕의 관은 일본 금송으로 만들어졌고, 무령왕릉의 구조와 출토유물에는 중국 양나라 양식이 충실히 모방되어 있다.
무령왕릉으로 다시 각광을 받은 무령왕은 어떤 사람인가? 25대 무령왕(재위 501~523년)은 생전에 사마 또는 융이라 불렸는데,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다. 일설에는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고 한다. 39세에 즉위했다. 그는 키가 8척이나 되어 훤칠하며 풍모가 준수하였을 뿐 아니라 성품도 인자 관호하여 민심이 스스로 와서 따랐다고 한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중국 남조의 양나라, 왜와 외교를 열었다. 백성구휼, 산성 축조, 권농책 등 여러 선정을 베풀었다. 중국 양서에서는 무령왕대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라고 했다. 이는 26대 성왕이 백제 중흥을 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이었다.
한편, 무령왕릉이 출토되고 김원룡 관장이 금제 장신구들을 들고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뵈었던 이야기가 전한다. 당시 대통령은 소년처럼 신기해하면서 왕비의 팔찌를 들고 순금인가 손으로 휘어보기도 했단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참모들에게 신라지역에서는 이런 유물이 왜 나오지 않느냐고 한마디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경주지역 고분 발굴 계획이 수립되었는데, 최고 대형분인 황남대총이 선정되었다. 하지만 그전에 연습 겸 작은 고분을 하나 발굴해 보기로 했다. 이것이 1973년에 발굴한 천마총이다. 그때는 영남대학이 한창 대구에서 경산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대통령은 천마총에서 천마도가 나오자 이를 영남대학교의 상징으로 삼았다. 영남대학교 소속원들은 기억해둘 만한 무령왕릉 후일 담화이다.
답사의 자유를 만끽한 공산성
공산성에는 오후 3시 30분에 도착했다. 9월 하순이 시작되는 날인데 무척 더웠다. 추위를 겁내는 나는 아침에 입은 옷 때문에 힘들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옷을 벗으러 단체를 이탈했는데, 그 덕분에 우리팀은 자연스레 자연 산책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프로그램이 upgrade 되었음을 보이는 또하나의 장면이다. 부부팀이 많은 가을 답사팀에게 그때까지 자유시간이 별로 없었다. 이곳에서 자유로이 돌고 쉬었다.
철저한 준비로 유명한 운영간사는 아침에 자유시간을 즐기라면서 찻값을 봉투에 넣어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꽃봉투에 들어있는 신권 5천원을 발견하고는 “은행에서 새돈으로 마련했나 봐”라며 좋아했다. 물었더니 운영간사는 아니라고 하면서 그냥 신권이 들어간 경우겠지라고 답했다. 헌돈도 봉투에 들어가서 새돈으로 나오면 더 멋진 일 아닌가? 참 나도 버스에서 사모님들의 미모를 영원히 간직하십사고 손거울을 하나씩 선사했다.
공산성(사적 제12호)은 금강교를 건너, 공주 시내에 들어가기 직전에 있다. 둘레 2.5km에 6만평 정도되는 포곡식 산성이다. 그런데 공산성을 제대로 보려면 강이 북쪽에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결국 이 산성은 강쪽인 북쪽이 낮고, 남쪽이 높은 구릉이다. 그리고 높은 구릉 쪽에서 공주 시내로 통한다. 금강을 방어선으로 이용한 요새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도시로 나가는 쪽이 오히려 더 성같이 보인다.
웅진성은 서문으로 들어가는데, 우리 팀은 가운데 산책길을 거쳐서 북쪽 오솔길을 돌아 금강가로 내려갔다. 그 암문터 옆에는 만화루와 연지가 있다. 날이 더워서이기도 하지만, 이곳은 금강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1754년(영조 30)에 만들었다는 연지는 금강물을 가둬 성안에 물을 확보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연못이 무너지지 않도록 돌계단을 쌓았고 연못에 접근하기 쉽게 계단을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9층탑을 거꾸로 세운 듯하다. 1980년 발굴해서 복원했다. 연지 위 제방 위에는 만하루 정자가 있다. 특히 강에는 배다리를 설치해 놓고, 또 배로 학익진의 진형을 설치해 놓았다. 답사팀은 이곳에서 찍은 사진이 꽤 많다. 그리고 계속 걸으면 강가를 따라 다시 서문으로 나오게 된다.
반대로 나는 쌍수정을 보고 남쪽으로 올라가 현재 발굴하고 있는 지역을 확인하고, 성벽을 타고 북쪽으로 갔다가 계속 성벽 외곽을 타고 돌아 남쪽 공북루까지 갔다. 예전에 연지 위쪽에는 민가들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부터 발굴이 시작됐다. 지금은 그 민가들이 다 없어졌다. 그러다가 2003년부터 쌍수정 일대를 발굴하기 시작했는데, 이후 진남루 앞에서 왕궁시설, 저수시설 등이 발견되었다. 2010년에는 가죽에 옻칠한 갑옷, 정관 19년(645년)명 갑옷 등이 나와 백제말기 나당 전쟁도 이곳에서 일부 감당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나는 보고 싶은 발굴현장을 보아서 기뻤고, 또 다른 코스를 돌은 팀도 있었다. 그야말로 자연 답사였다. 혹시 젊은 날 오셨던 부부들께서는 옛날의 추억을 새록새록 되살리겠지-.
공산성은 백제 때는 공진성이라고 불렸는데, 당시에는 흙성이었다. 지금의 석축은 조선 중기에 축조되었다. 현재 공산성 내부는 서문터를 지나 약 10분 올라가면 공산성의 가운데에 이른다. 가는 길 오른쪽에 인조가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머물다가 평정 소식을 듣고 나무 두 그루에 벼슬을 내렸던 자리라는 쌍수정이 있다. 조금 더 가 네 갈래 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진남루가 나오는데 이것이 공산성의 남문이다. 발굴현장이 있는 궁궐터 부근이다. 공주 시내로 연결해 주는 진남루는 1971년에 새로 지은 건축이다.
한편, 네 갈래 길에서 곧장 가면 광복루 못 가서 임류각터가 있다. 동성왕이 500년에 “왕궁의 동쪽에 높이가 오척이나 되는 임류각이란 누각을 세우고 또 연못을 파 기이한 새를 길렀다”는 곳이다. 최근에 이층 누각을 세웠다. 거기에서 10여분 능선을 따라가면 공산성 남서쪽 끝인 동문 터의 광복루에 다다르게 된다. 여기에서 성벽을 따라 쭉 걸으면 답사팀이 즐기던 연지가 나온다. 암문터 근처에는 세조 때 세워진 영은사가 있다. 한편, 서문터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가장 높은 곳에는 공북루가 있다. 공북루는 1603년에 옛 망북루터에 세운 2층 다락집이다. 강바람을 맞으며 노을지는 금강을 바라보는데 가장 좋은 장소라 한다. 이렇듯 공산성에는 조선시대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갑오농민전쟁 때 치열한 격전지였다. 예전에는 성문 등이 정비되지 않았고, 성안에 민가도 있고, 공주시민들이 아침 운동하는 장소였었다. 현재는 훨씬 더 ‘고적’스러워졌다.
1500년의 침묵, 시간 앞의 평등을 가르치고
공산성을 걷고 나서 저녁 먹으러 모였을 때는 각자 다르게 본 것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부부팀으로 온 답사의 권장할만한 형태가 아닐까?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참가한 사람들이 전부 인사하는 기회도 가졌다. 이 또한 업그레이드 된 내용인데, 다음번에는 이 스타일을 더 확대시켜보아도 좋지 싶다. 가령, 버스에서 유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현장에 내려서는 본인들이 직접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에 서로 느낌을 나누어도 좋으리라.
끝으로 칭찬받은 이야기를 덧붙여야겠다. 지난번 부여 답사에서 대구로 들어올 때였다. 그랜드 관광버스회사 사장님이 갑자기 마이크를 잡더니, 영남대학교 명예교수회에서 떠난다고 일부러 직접 나왔다고 하면서, 오랫동안 운전을 했는데 이렇게 학구적이고, 질서있고, 즐겁게 여행하는 팀은 드물었다고 하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물론, 이번 공주 답사 때도 역시 같은 팀이라고 칭찬했다. 그 사장님도 특이하지만 우리도 아주 괜찮은 팀인 것 같다.
1450년만에 침묵을 깨고 나온 무령왕은 공주에 있는 갖가지 역사적 사연과 환경들을 그 오랜 시간의 무게로 ‘격렬하게’ 설명한다. 백제가 역사 속에서 부당하게 취급되어온 것을 한순간에 되돌리게 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역사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변한다. 또한 참고 삼켜도 언젠가는 알게 된다는 믿음도 준다.
이로써 우리는 시간 앞에서 모든 것이 공평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다만 그 공평이 드러나는 시간이 어떤 것은 짧고 어떤 것은 매우 오래 걸린다는 차이는 있다. 어쩌면 지성인이란 그 공평이 드러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일지 모른다.
우리는 무령왕의 오랜 침묵의 언어를 새기면서 귀가길에 올랐다. 이렇게 우리는 역사적 시간을 함께 느끼면서 포스트 영대의 공감마당을 다진다. 내년엔 누구와 함께 어디서, 무엇을 만날까? 2)
백제 사람들은 역사를 살고, 영남대학교 명예교수회는 새로운 역사작품을 만든다. 그 완성은 강용호 교수님의 영상답사기이다. 이번에도 탐방을 다녀와서 단톡방에 김정숙, 김준호, 황평, 김종근, 김봉식, 남두현, 오창혁, 강용호, 박정윤 교수님들이 사진을 올렸다. 서로 보는 각도가 달라서 모든 사진을 합치면서 공주는 더욱 새로와진다. 이 사진들을 바탕으로, 박종갑 교수님으로부터 ‘천재’라는 칭찬을 들은 강용호 교수님이 음악으로 역사의 시간을 끌어당기며 ‘예술’로 만들어 놓았다 (https://cafe.daum.net/yuprofem/YpGh/4).
우리는 이 예술에 함께 우쭐해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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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우리는 공주에서 백제에 관련된 주요유적은 ‘얼추’ 훑었다. 그러나 공주는 부여와 달리 백제에만 매달리는 도시가 아니다. 여러 시대의 유적이 복합되어 있다. 구석기, 청동기 유적 뿐아니라 많은 불교유적과 갑사, 동학사, 신원사. 마곡사 등의 사찰이 있다. 또한 우금치 등 갑오농민전쟁의 격전지 등도 있다. 또 언제고 불쑥 또다른 이야기들이 발굴될지도 모른다.
3)본고의 사진도 이 단톡방 자료를 사용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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