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한 결의와 순응적 공감 김인호 시집 《지리산에서 섬진강을 보다》 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구붓하여 구순하다/ 강산이 스스로 그러하며/ 날 선 마음과 마을을 적신다”는 시집 첫머리에 실은 <지리산에서 섬진강을 보다>라는 시다. 시인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고 그 시인을 품어준 지리산과 섬진강이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어느 곳 하나 고집스럽지 않아 “구붓하여 구순”한 산자락을 아무렇지 않게 여미고 돌아가는 강과 천상의 마음이 합일이다. 그 산과 강이 그러하니 그 강과 산에 묻혀 사는 사람의 마음마저 어느 누구와 맞서려 하지 않는다. 가히 신선이 낙원으로 점한 곳을 시인이 애써 찾아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부차 할 행간이 필요 없는 화폭에다 현실을 초월한 시적 상상력은 욕망이라는 인간의 심연을 일거에 해소한다. 거대한 시적 대상이 내면적 수단화를 해체해 서정적 권위마저 와해한 문장의 유용성은 공감을 여백으로 극대화시킨다. 시인만이 갖는 시적 변별성을 문학적으로 잘 보여주는 시다. 시인은 보이지 않고 시적 대상인 풍경을 말하게 하는 화자가 날것(생것) 같지만, 산과 강이 잘 조화된 형상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카메라 렌즈로 바라본 대상과 대상화된 풍경의 내면을 동일한 세계로 현현하고 시와 그림이 마주 보며 시화첩을 이룬 시집은 친숙한 시편들을 한층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구붓”한 “강산”과 “마을”은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렌즈와 동일한 장소성에서 기인한다. 이어 “구순”과 “그러하며”와 “날 선 마음”은 시인 내면의 자연에 대한 공감 인지와 인식을 함께 한다. 시와 사진 속 풍경은 서로의 교차된 시선과 천착한 사유를 공감하여 이상적 실체를 구조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연으로 귀소를 꿈꾸지만, 막상 현실 앞에서는 실행을 주저한다. 애써 도시 생활을 접고 작심하고 들어왔어도 산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곳을 걷고 또 걷고 바라보며 모든 것을 버리고 들어와 산을 품어온 시간을 부단히 성찰하며 살아가는 김인호 시인이다. 시간이 지나 세월로 겹을 더한 뒤에도 자연에 동화된 시가 순정한 지리산의 능선과 사계절을 닮아 변주를 거듭한다. 뒷동산 같은 지리산과 개울가처럼 친근한 섬진강, 그 산의 능선과 강줄기를 따라 스스로 길이 되고 나무가 되어 살아온 김인호 시인의 삶을 그렇게 단정하자. 찾아든 곳도 도심의 번잡한 곳이 아닌 섬진강이 한눈에 드는 지리산인가 의아했다. 일관된 문학의 처소를 기꺼이 일궈낸 시인의 내밀한 정신적 토대까지 말이다. <지리산 운해 문장>에서 “사람의 마음에서 읽기 쉽지 않은 저 도저한 문장을 읽기 위해 새벽 산을 오른다”며 그 이유를 이내 밝혀버린다. 혹여 능선의 한 부분만 언급한다고 조급해할 것도 없다. 자연을 통해서만 찾아낼 수 있는 존재의 이유를 해독하기 위해 불편에 불만하지 않고 지리산에 귀의한 시인임은 분명하다. 남들이 폐기 처분하고 다 떠나버린 산, 이미 유효성을 상실해버린 자연이라는 터전에서 되레 삶의 비의를 탐색하려 한다. 그것은 지리산과 섬진강의 자연환경을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이 아닌 자연애적 친연성으로 공감하고 인지했기 때문이다. 자연은 언제나 사실에 근거한다. 유, 무한한 생명을 구분하면서도 감정으로 편견 하지 않고, 부조리하거나 불공정한 룰은 아예 만들지도 않아서 인간이 탐욕하는 세상과 판이하다. <어쩌랴, 봄인 것을>에서 실사(實寫)처럼 보여주는 시 한 편을 공감해보자.“하루, 하루를 건너는 일이 팍팍한 그대에게/ 꽃 피었다고 전하고는 후회하고/ 꽃 진다고 전하고는 후회했지마는// 어쩌랴,/ 때는 사월이고/ 오가는 강길이 온통 꽃길인 것”처럼 시인은 인간이 갖는 감정의 변화를 ‘꽃길’을 빌어 전언하고 있다. 애당초 꽃길이란 것은 사람처럼 순간순간을 재단하지 않고, 그저 자연의 순리를 충실히 수행할 뿐이다.“하루, 하루를 건너는 일이 팍팍한 그대”의‘사월’도 화신처럼 곧 흘러갈 것이라는 무상함과 더불어 위로를 전하고 있다. 태초의 <빗점골>은 지리산이 융기한 이후부터 지금껏 똑같은 골짜기로 존재해왔다. 아름다운 골짜기에 인간의 욕망이 깃들면서‘빗점골’로 이름 붙여 불렸을 것이다. 그 빗점골의 단풍이 유난하여 시인의 가슴을 들쑤셨겠지만, 편입된 대상을 단순한 미학적 고려로 접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존에 대한 절실함만큼이나 정당한 역사의 은폐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마저 충동하였기 때문이다. “지리산 단풍 참 은은하기도 하지/ 안개 같기도 하고 꿈길 같기도 한/ 저어기 은사시 나무숲 좀 봐봐/ 삼정마을 지나 빗점골 가는/ 벗들 뒷모습도 참 은은하기도 하지”라는 시인의 시선을 눈여겨보자. 가을 붉은 단풍에 도취되지 않고 “벗들 뒷모습”에서 잊힌 사람들을 환기해낸다. 그 모습마저 “은은하기도 하지”라며 박명 같은 슬픔을 감정으로 표출하고 만다. 굳이 이현상이 아니더라도 “삼정마을 지나 빗점골 가는”길을 거쳐 벽소령으로 이어지는 빨치산 루트를 떠올렸을 것이다. 김인호 시인은 단순하게 카메라 렌즈 속 풍경만을 위해 시로 엮지 않는다. 풍경 속에 은폐된 더 많은 사건들과 시간을 기억해내고 역사의 뒤란에 묻힌 사회 역사적 아픔들과 맥락을 같이 하려 한다. 또한 문학을 위한 자폐적 나르시시즘을 경계하는 것마저 작위적이지 않아 세월의 반복처럼 자연스럽다. 이미 그 예감은 시집 《지리산에서 섬진강을 보다》 (詩와에세이)에 수록된 시 전반에 흐르고 있는 정서에서 감지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도시 속성을 일거에 초월하여 자연의 본성으로 환원해간다. 시인의 존재에 대한 이성적 사유도 「깃든다는 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근히 산에 들어야만 산에 드는 것은 아니리/ 깃든다는 건,/ 산에 들지 않아도 늘 산에 드는 것이리// 깃든다는 건,/ 그렇게 몸이 아니라 마음이리// 깃든다, 깃든다, 되뇌면/ 어머니 품같이 술술 잠이 올 것 같은 말// 여기 산과 산이 서로에게 깃들어 참 아늑하다”라는 질문 없는 답을 모두 찾을 수 있다. 이미 시인은 산에 들어오기 전부터 산에 든 것처럼 살아왔고 그 장소성은 마음 안에서 잉태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김인호 시인의 시적 주체는 자아와 동일한 ‘지리산’을 기점으로 섬진강까지를 영역으로 한 다양한 생태적 상상력에서 현현한다, 그것은 자연과 자아의 세계가 물아일체를 이룬 의지로 교감하여 가능하다. 그 바탕은 자연을 서정적 주체의 볼모나 대상이 아닌 공생의 공간으로 바라보며 인간이 갖는 본성의 회복을 이루려는 기미를 그곳에서 찾으려 했다. <반야를 오르는 마음>에서는 삼감과 겸허의 눈높이의 위치를 잘 알고 있다. “산 깊을수록 작아져 돌멩이보다 작아지고 가벼워져/ 나뭇잎 스치는 바람 소리에도 쫑긋 귀를 세운다/ 돌탑바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돌 하나 얹고 손 모으고/ 목 타는 길 임걸령 샘물 앞에 무릎을 꿇고/ 마주치는 낯선 인사를 건”넨 다는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을 통해 보여주는 시적 세계는 정신의 고도보다는 온몸으로 밀착한 지리산의 능선 아래 발치까지 내려와 있다. 산에 들어 더 작고 낮아지며 그곳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경청하는 겸사의 마음으로 신앙한다. 흔히들 높은 산을 오르면 산을 ‘정복’했단 말과 그 산에 올랐다는 경망한 허세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은 수없이 오른 지리산의 모든 영역을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지닌 존엄에 대한 존중으로 몸소 예를 다해 실천한다. 언제 어디서든 순리에 반하는 부작위한 행동을 삼가는 의지를 엿보게 한다. 조상의 삶이 그러했듯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경외의 정신 속 순응하는 자세야말로, 시인이 지리산으로 귀소한 정신의 근본일 것이다. 반야를 오르는 시인의 마음은 어느 곳에서처럼 다르지 않다. 그 산에는 생명들이 공생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인호의 시에는 수사적 언표와는 먼 원초적인 산의 생명들로 이뤄진 충만한 환유만 존재한다. <고라니 우는 밤>은 인간의 삶이나 짐승의 생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고라니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 그날의 아찔한 사건을 촉발한 것도 인간이다. “홀로 고요한 엘레지 숲에 들어 꽃 사진을 담고 있는데 정적을 깨는 느닷없는 짐승 울음소리에 놀라 간이 콩알만 해졌다”는 시인을 본다. 근처의 고라니 새끼를 어미가 보호하려고 본능적으로 인간에게 맞서려 했음을 알았다. 이후 들려오는 고라니의 황급한 울음소리에도 안부가 궁금해진다는 마음이 살갑다. 지리산에 들어 살다 보면 복마전 같은 도시에선 하찮은 것들도 그들에게는 소중한 것으로 자리매김 된다. 울음은 심리적 반응을 나타내는 생리적 작용이다. <숲 울음소리>라니 숲이 울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객관적 상관물로 틈입한 숲은 김인호 시인의 자아와 동일한 대상으로 일치된 지 오래전이다. 그 공감의 사유 속으로 들어가 보자. “뽀드득 소릴 내는 숫눈길 가장자리를 골라 아껴 밟으며 산에 든다 큰 나무들은 눈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가지가 꺾였고 꺾이기 직전의 축 늘어진 가지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꺼억꺼억대며 울어 숲을 울린다/ 감당키 어려운 짐을 진 것들의 울음소린 참 닮았구나”라며 숲이 우는 이유를 시인의 마음으로 대신 전하고 있다. 산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저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적을 깨는 노루의 울음소리와 겨울 산 나무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꺾여지는 소리도 귀담아 소통하는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로 받아들인다. 그들의 언어를 알아들어야만 자연 속 내밀한 변화를 알게 된다. 그 변화 속에는 먹고사는 문제까지 연관되어 있다. <가슴사리>를 보면 그 경지를 이미 넘어섰다. “강 농사가 한창이어서 아침 출근길에 강가에 내려가 해찰을 했다 밭 것들이 꼬실라지는 이 징헌 염천에 강 것들은 보타지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달력을 보니 배꼽사리다 내일은 가슴사리겠다 사람이 강에 들어가 잡는 재첩잡이는 가슴사리인 다섯 물 때까지만 재첩을 잡을 수가 있다 가슴사리라는 말을 되뇌어보니 마음을 살핀다는 말 같아 참 좋다”는 곳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섬진강이 물굽이를 낮춰 느리게 흘러가며 재첩을 키워내는 하동의 강모래 속이다. 강에서 생계를 꾸려온 사람들은 강물의 흐름에 맞춰 일을 나갔을 것이다. 바다에서나 있을 법한 물때를 가리키는 가슴사리란 말이 강어부들에게는 생에 대한 물 높이란 것마저 애처롭다. 산과 강에 붙여 먹고사는 사람들의 생이란 것이 섬진강 물길처럼 매번 유장하지만은 않다. 잘 안 풀릴 때도 많아 그럴 때는 뭐든 차고 넘치는 <삼팔광땡 구례 장날>을 손꼽아 기다릴 수밖에. “세 장짼가 네 장짼가 모리겄는디 계속해서 비가 와불구만 애는 타지만 으쩔꺼여 비 맞응게 요리 들어와 홍합 오천 원어치만 사갔고 가 내가 들고 가도 못헐만치 줘불랑께/ 입심도 인심도 걸다 삼팔광땡 구례 장날”풍경을 실제 보는 듯하다. 많지 않은 손님과 입담으로 호객하는 장사치의 말과 인심이 어우러지는 장날 걸쭉한 삶이 있다. 저 사람들은 지리산의 낮과 밤의 비밀을 공유한 결사 공동체다. 격정적이지 않지만,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의 일상은 남도 특유의 구체적 사투리로 전달 효과를 배가시킨다. 일확천금의 큰 거래도 아닌 기껏해야 ‘오천 원’ 어치의 홍합만 팔아도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삼팔광땡’을 거머쥐었다고 생각하는, 순정해서 우리 시대 만나기 어려운 순금 같은 미륵의 얼굴들이다. 그 사람들의 생애가 불평하지 않고 산의 낮은 능선부터 다시 시작하는 시지프스를 닮았다. 바닥으로 꼬꾸라져도 지리산의 가장 낮은 섬진강변에서 목을 축이며 지리산의 산자락으로 찾아든다. 노고단에 올라서도 제단에 무릎 꿇고 자신을 질책하는 맑은 마음으로 새롭게 각오를 다지는 사람들이다. 그런 지리산은 지금껏 찾아든 사람들을 아우르고 품었지 누구 하나 바깥으로 내치지 않았다. 산에서의 절정은 굳이 가늠할 필요조차 없다. 자연은 잘되거나 못 되거나 때가 되면 <절절한 봄>을 해마다 보여준다. “언제 꽃이 터지것냐 한 것이 지난주였는데 밀물처럼 꽃이 밀려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탄핵꽃까지 터졌으니 여느 봄보다 절절하다// 어제는 산골짝 복수초 바람꽃 노루귀 피었고 오늘은 매화마을 매화 피고 내일은 산수유마을 산수유 피어”날 것까지 알고 있다. 도시의 일상은 초 단위 스피드와 수직으로 무한 상승을 추구하다 급속한 추락을 당하면 회복이 불가능한 경우가 허다하다. 지리산의 근경에선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느릿한 강물이 시간에 쫓기지 않고 흘러가듯 강변과 산 능선의 모든 생명체들은 정해진 순서에 불평하지 않고 봄을 기꺼이 맞게 된다. 안 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그만인 지리산이다. 거기에 좀처럼 볼 수 없는 “탄핵꽃”까지 피었으니 산에 묻혀 살아도 한양천리 소식에 무감할 리 없다. 시인의 가슴도 그래서 더 절절할 것이다. <지초봉>의 “천황봉에서 바라보는 반야도 좋았으나/ 노고단에서 손에 만져질 듯 펼쳐진 반야도 좋았으나/ 산동 지초봉에서 바라보는 여명의 반야가 그중 좋았다// ‘악아, 넘어질라’” 라며 다독여주는 지리산은 어머니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닿은 곳에 한없이 기대어 살고 싶은 지리산. 그곳에서 모성에 대한 신앙심은 더 깊어진다. <나는 저 강의 숭배자다>라며 “모진 세월 쉼 없이 흘러온 어머니 사진 속 젊은 날 가르마처럼 단정한 강의 길 산 굽이굽이마다 피워 올린 골안개 미소로 짐승들 거친 숨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바다에 닿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순정한 강을 바라보는 산정의 아침이면 갓 태어난 아가의 순한 마음 되는 나는 저 강의 영원한 숭배자”라며 고백한 여운이 길고 짙다. 이제 유려한 강물로 마감한 생의 결말과 또 다른 생의 발아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질서를 생각하게 한다. 그 모든 근원에는 모성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외면해도 다시 그 자리를 오롯하게 바라보며 한없는 사랑의 눈길을 주고 있다. <어머니별>도 태어나서 생애를 마치는 순환을 거듭한다. 어머니의 유고도 부음(訃音)처럼 왔다가 다시 아름다운 생으로 환생한다. 그 환생 터는 지리산의 밤하늘이다. 밤마다 새롭게 빛나는 별이 되어 천상을 수놓듯 그 별에게 아름다웠던 지상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별 가운데 아주 작고 이름 없는 별로 가는 길 하나 보인다 당신이 가는 길이다/ 당신은 그 작은 별로 가서 또 산밭을 일구실 게다 아침이면 이슬 밟으며 사립을 나섰다가 저물녘이면 돌아와 조용조용 저녁을 지을 게다 ---중략--- 당신의 맑은 생애 우리를 비춰보며 당신처럼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별빛을 우러르며 말하게 될게다”라는 시인의 조곤조곤한 말이 은은하게 발하는 별빛처럼 눈과 귀가 시리지 않는 밤을 오랫동안 감싸고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마음의 근원(자연)을 찾아들어 시의 세계를 탐색하려 한 김인호 시인의 시적 담론은 매우 긍정적이다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흔히 쫓는 일단의 시류에 편승하지 않았고, 첫 시집 《땅끝에서 온 편지》에 이어 《섬진강 편지》와 《꽃 앞에 무릎을 꿇다》 그리고 《지리산에서 섬진강을 보다》까지 집요한 문학적 좌표를 확실하게 갖고 왔다. 섬진강과 지리산에서 영원을 호흡하며 긍정한 결의로 반복한 문학적 결은 지리산처럼 포용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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