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로 아우크스부르크 필하모닉의 악장을 지낸 후 동양인 최초로, 또 여성 연주자 최초로 마리스 얀손스가
이끄는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BRSO)의 제2바이올린 악장에 임명된 이지혜.
솔리스트로, 실내악 주자로, 또 오케스트라의 악장으로 활동 반경을 과감하게 넓혀온 그녀를 무대 위에서 만난 건 총
세 번이었다. 첫 번째는 1위 없는 3위를 차지하며 한국 바이올리니스트 사상 최고 성적을 얻은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였다.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보수적인 독일 악단에 묵직한 존재감을 더한 그녀는 예원학교와 서울예고,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치는 동안 수많은 콩쿠르에 참가했고, 이 콩쿠르를 마지막으로 경쟁의 짐을 내려놓았다.
두 번째는 악장으로 고국을 찾은 BRSO의 내한 공연에서였다. 명랑하게 반묶음 머리를 한 그녀는 사랑스러운 미소
대신 날카로운 눈빛으로 얀손스의 비팅을 좇았다. 세 번째는 피아니스트 김태형·첼리스트자무엘 루츠커와 함께한
트리오 가온의 무대. 지겐 콰르텟으로 활동하며 프라하 봄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한 이지혜는 2013년에 결성한
트리오 가온으로 가스타이크 콩쿠르 우승, 하이든 콩쿠르 3위에 오르며 실내악에서도 강세를 보였다.
분명 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시의 적절하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기 것으로 만든 건 그녀의 탁월한
음악성과 진정한 지혜(知慧)였다. 지면 촬영을 위해 하이힐에 수트 차림을 한 그녀는 한 마디로 여러 방면에서
출중한 만능 음악가, 무대 위에서 비로소 빛나는 ‘원더우먼’이었다.
처음 바이올린을 접했을 때를 기억하나요?
사실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시던 어머니 덕에 피아노를 먼저 접했어요. 하지만 생각만큼 재미있지 않았고, 금세 흥미를 잃었죠. 그런 찰나에 바이올린을 전공하던 먼 친척을 만나 완전히 반한 거예요. 하지만 어머니는 또 도중에 그만둘까봐 장난감 바이올린을 먼저 사주셨고, 진짜 악기가 아님에도 자세를 잡고 활 긋는 시늉을 해보이는 제 모습에 그제서야
바이올린과 활을 선물해주셨어요. 지금은 예원학교 3학년 때 만난 1760년산 니콜로 베르곤지를 사용하고 있어요.
생각해보면 당시엔 부모님도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하셨던 것 같아요. 심지어 저조차도요.(웃음)
서울예고에 진학하면서부터 점점 음악가라는 단어에 책임감이 느껴지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뛰어나진 않았지만,
악기와 꾸준히 함께 해오는 동안 제 삶에 음악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던 것 같아요. 그제서야 비로소 ‘아, 내가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겠구나.’ 싶었죠.
미국에서 바이올린 계의 명교수인 미리암 프리드를 사사했죠.
아버지를 따라 생각지도 못한 유학길에 올랐고, 선생님을 찾는 일이 급선무였어요. 메뉴인 콩쿠르 참가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분이 미리암 프리드 선생님이셨는데 보스턴에 계신 걸 알고 무작정 연락드렸어요. 다행히도 절
기억해주셔서 함께 공부하게 됐죠. 처음엔 레슨 내내 쏟아지는 질문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음악을 왜
하는지, 뭘 느끼고 상상하는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물으셨죠. 질답의 반복을 통해 저만의
음악을 찾아나가야 한다고요. 차츰 스스로 생각하는 법에 익숙해지면서 비로소 제 음악세계가 풍부해지고 성숙하고
있음을 깨달았어요.
공부를 하던 중 큰 슬럼프를 겪기도 했다고요.
미국에서 공부한지 1년 정도 지났을 때 심한 슬럼프를 겪었어요.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져 극도의 불안감으로 한 음도 긋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거든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선생님은
콩쿠르를 통해 실력을 평가하고자 하셨어요. 결과는 엉망이었죠. 제가 너무 기죽어있으니 ‘사람은 자신의 강점을
당연히 알아야하고,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칭찬할 것이 없어 칭찬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네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며 ‘어느 상황에서든 장점을 잘 지키고, 더 강화시키는 건 제 평생의 숙제’라고 하시더라고요. 원췌 칭찬을